제 402화
아까 받을 때도 느꼈지만 손에 느껴지는 비단의 감촉이 보통 천과는 달랐다. 갓난아기의 뺨처럼 보드라워 끝없이 만지고만 싶다.
장은효는 안쪽에 둘러싸여 있던 적색 봉투는 열어보지도 않고 비단을 집어 들어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이런 천으로 옷을 지어 입으면 정말로 선녀 옷 같겠어.”
“그거 빨래는 또 어떻게 하고.”
“그거야 그렇지만.”
아내가 천 조각을 더듬으며 행복해하자 임운정은 자기 것도 넘겨 주었다.
“이거 당신 거랑 내 거랑 놓여있는 자수가 달라요. 옛날 중국 동물인가?”
황금으로 된 실로 각각 암룡과 수룡이 수 놓여 있었지만, 그녀는 구분하지 못했다. 임운정은 아내가 비단 보자기를 목에 감아 보기도 하고 머리에 써 보기도 하는 동안 봉투를 열어 보았다.
“…?!”
얇은 종이 위에 인쇄된 글자를 보고서 그는 순간적으로 자신의 눈을 믿지 못했다.
“선박 소유권 증명서?!”
서류는 한두 장이 아니었다. 선박의 소유권을 증명하는 법인 등기부 등본, 선박 국적 증서와 보관 및 관리 증명서, 선박의 안전설비증서와 안전무선증서, 보험증서를 비롯하여 서류가 끊임없이 쏟아져 나왔다.
이해하기 어려운 서류들 사이에서 사진 한 장이 팔랑팔랑 떨어져 나왔다.
장은효가 그것을 집어 들었다.
“여보, 이건 뭐에요? 운정호?”
22인승 낚시용 모터보트의 선체는 병아리처럼 밝은 노란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언뜻 보기에도 새것이 분명하다. 검은색으로 선명하게 쓰여 있는 ‘운정호’라는 글자에 시선이 확 갔다.
“어머, 어머, 어머.”
상황을 파악한 장은효의 눈동자가 커졌다. 그녀가 흔들리는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이 배 엄청나게 비싸겠는데요.”
“그렇지.”
이번에 거제도에 내려가서 배낚시를 경험해 본 임운정은 나름대로 배를 알아보았었다. 하지만 넌지시 물어보고 나니 3~4인용 2.2톤 선박의 중고가가 6천만 원 이상 드는 것을 알고 찔끔했다. 어디 그뿐인가, 그 선박을 관리하고 유지하는 비용이 월 백만 원 이상이 드는 것을 알고 깨끗하게 그 마음을 접었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그 배가 서류상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허미, 세상에.”
쓰지도 않던 옛 사투리까지 쓰면서 임운정이 눈을 껌뻑였다.
“이걸 며느님이 지금 혼수라고 해오신 건가?”
조금 전까지는 미미 씨, 예비며느리라고 부르던 호칭에 어느새 ‘님’이 붙었다. 장은효는 허겁지겁 흰 봉투를 집어 들었다.
“어디. 내 것도 봐요.”
은효장.
펜션처럼 아름다운 별장에 지어진 이름이었다. 별장이라고 해야 할지, 건물의 세부적인 설계도를 보고서 은효 역시 입을 다물지 못했다. 침실 여섯 개와 욕실 여섯 개, 거실과 두 개의 부엌, 발코니와 바비큐장, 야외 수영장이 딸려 있다. 방마다 호텔처럼 가구가 딸려있었다.
최고급 침구와 72인치 텔레비전, 거기에 게임기와 컴퓨터까지 설치되어 있다. 그녀는 이마를 짚고서 지금 상황을 돌아보았다.
아들이 결혼한다고 해서 들떠 있었다.
아리땁고 상냥한 데다가 부유하기까지 한 아가씨가 시집온다고 해서 기뻐하고 있었다.
사실은 벌써 두 사람을 닮은 손자 손녀까지 상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서류를 보니 방금 전까지 들떠 있던 마음이 싱숭생숭해졌다.
“여보. 이거는 너무 과하네요. 애들 명의로 돌리라고 하고, 우리는 가끔 놀러 가자고 합시다.”
제정신을 되찾은 장은효가 남편에게 말했다.
“그래.”
“아들 팔아서 부귀영화를 누리려는 것도 아니고 말이에요.”
“그래.”
임운정은 넋이 나간 것처럼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는 굵고 거친 손을 선박 소유 증서 위에 올려놓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여보?”
“이거 배 한 척만 내가 가지면 될까? 아들네 부부가 쓰고 싶다고 하면 빌려주면 되지.”
“여보.”
“봐, 이름도 운정호잖아. 이렇게 배에 페인트칠하는 건 방수칠 하는 거라서 작업도 비싸. 이름이 진혁호라면 모를까 운정호인데.”
“여봇!”
◈ ◈ ◈
한편 중국에 도착한 황미미는 예상외의 소식을 들었다.
「그분께서 밥 앤더슨의 그림을 보내셨다고?」
「예, 소유권만이 아니라 2차 저작권에 대한 권리까지 완전히 넘기셨습니다.」
왕 비서가 자세한 사항을 읊어 주었다. 스타일리스트 팀의 모두가 감격했다.
「회장님! 너무나 잘 됐어요.」
「맙소사. 이렇게 훌륭한 예물이라니, 세상의 어느 신부도 이렇게 멋진 예물을 받지는 못할 거예요.」
스타일리스트가 붉어진 양 뺨을 감싸고 신이 나서 말했다. 앤더슨이 자신의 소유로 남겨둔 채 끝내 팔지 않던 이 불가능한 시리즈의 연작 중 하나인 그림이다. 이전에 팔렸던 소품이 20억가량에 팔렸던 것을 고려한다면 지금 이 그림의 가치는 가히 천문학적이라고 할 수 있다.
「납채를 생략한 게 아니었어요. 미미 씨의 격에 맞는 귀물을 보내려고 한 거였군요.」
황미미 정도 되는 연예인이라면 결혼 예물로 받은 선물조차 화제가 되기 마련이다.
그런데 선물이 ‘없다’라는 것은 크나큰 흠이 된다.
그녀는 마치 선물 받은 것처럼 고가의 보석 액세서리를 착용해, 진혁이 하지 않은 선물을 받은 것처럼 꾸밀 계획이었다.
케이크나 먹을 것 이외의 다른 선물을 한 적이 없는 임진혁이었기에 이런 깜짝 선물을 하는 것은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다.
이 그림의 소유권만이 아니라, 처음으로 허용된 2차적인 저작권까지 고려한다면 이 선물의 그 가치는 더욱더 높아진다.
「미미 씨가 이 분의 그림 좋아한다는 이야기, 전에 했었지요?」
「결혼 준비를 해야 하는 중요한 시기에 미국으로 가는 이유가 무엇인가 했었는데, 사실은 이분을 만나서 교섭하기 위한 것이었다니. 이게 바로 진정한 사랑인가 봐요.」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임진혁의 심계를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 남자 매우 찬성합니다. 무뚝뚝한 것처럼 챙겨 주는 모습이 아주 좋군요.」
「아하하하.」
「언제는 반대했던 것처럼 그러네!」
「아휴, 우리 예쁜 회장님이 좋다고 하니까 응원했던 거잖아요. 그런데 미미 씨가 얼마나 귀한지 모르는 것 같아서 조금 속상했던 것뿐이라고요.」
왕 비서가 웃었다.
「이 권리로 무엇을 하실 생각이십니까, 회장님?」
사업적으로 벌어들일 수 있는 수익을 고려하며 미미가 눈을 깜빡였다.
「밥 앤더슨 씨의 뜻은 절대로 2차 저작물을 만들지 않는 것이었죠. 괜히 이것저것 해서 그분을 맘 상하게 할 필요는 없다고 봐요. 진혁 씨가 어디까지 허락받았는지 물어보고, 콜라보레이션 케이크 정도를 판매하는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싶기는 한데.」
「그렇다면 한 비서를 통해서 확인해 보고 진행하겠습니다.」
「밥 앤더슨 콜라보레이션 케이크는 돈 때문이 아니라 결혼 선물을 알리기 위해서 하는 거니까요, 그것도 고려해서 진행해 주세요.」
「호호호호.」
왕 비서가 서류를 집어 들고 나가자, 미미가 붉어진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
「그렇게 생각이 깊은 진혁 씨 앞에서 내가 이렇게 괜히 서둘렀으니…, 어쩌면 좋아.」
긴 속눈썹을 깜빡이며 창밖을 바라보는 그녀는 언제나처럼 어여뻤다.
헤어 스타일리스트가 말했다.
「하지만 회장님이 이렇게까지 진행을 하지 않았으면 결혼은 몇 년 후로 미뤄졌을지도 몰라요.」
「맞아요, 전부 어르신께서 지시하신 대로 진행되고 있어요. 그러니 틀릴 리가 없지요.」
측근들이 달래어 주었다.
「그래, 모든 건 할아버지의 뜻대로 다 되어가고 있으니까….」
그녀가 희미한 미소를 띠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한편 임진혁은 윌리엄과 민병철을 대동해 해링턴 클리닉의 이사장을 만났다.
면담은 윌리엄이 예상한 것과 전혀 다르게 진행되었다. 세 사람이 들어가자마자 이사장이 말했다.
「거기 자네, 자네가 내 아들을 구출한 자인가?」
임진혁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들이라고 하면….」
「공항의 화장실에서 쓰러진 내 아들에게 응급조치를 해서 살려주었단 사람 말이야.」
「그건 제가 맞습니다.」
「하하하하! 들었던 대로 공치사하는 성격은 아니네.」
윌리엄이 예상한 것과는 전혀 달리 임진혁을 칭찬하기 위한 자리였다.
옆에서 얼떨떨하게 서 있던 윌리엄과 민병철에게 이사장이 손짓했다.
「거기 두 사람은 나가게.」
「네?」
「내가 용건이 있는 것은 이 사람뿐일세.」
「네. 네!」
윌리엄은 어리벙벙해 하다가 화들짝 놀라서 그 자리를 떠났다. 민병철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문밖으로 나왔다.
「저기, 무슨 일인지 아십니까? 사람을 구했다니요.」
「공항에서 구급대원들이 급하게 달려가는 것만 봤는데 그게 저 일이었군요.」
병철이 윌리엄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설명해주는 동안, 임진혁은 이사장과 단둘이서 차를 마셨다.
「아들이 쓰러졌을 때 혼자였나?」
「제가 발견했을 때에는 혼자였습니다.」
‘참 보기 흉한 꼴이었지.’
영국산 잉글리시 브랙퍼스트 홍차는 금박 꽃무늬가 아로새겨진 도자기 찻잔에 담겨 있었다. 찻잔도 아름다웠고 홍차의 향도 좋았다. 하지만 70대로 보이는 노인인 이사장은 홍차를 즐기기보다 눈앞에 있는 임진혁을 취조하듯이 바라보았다.
「자네가 내 아들의 은인이야. 그때 거기서 그대로 쓰러진 채 발견되었다면 목숨을 잃거나 최소한 반신불수가 되었을 거라더군.」
진혁은 담담하게 말했다.
「저에게 감사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황미미가 구해달라고 해서 구해준 것이고, 혼자 있었다면 분명히 그냥 지나쳤을 것이다. 귀찮은 인연에 휘말리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사장은 진혁의 말을 전혀 다르게 받아들였다.
「내 아들의 생명을 구해주었는데 그냥 지나칠 수는 없어. 대가를 주어야겠으니 원하는 걸 이야기해 봐.」
진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는 오늘 처음 만난 노인네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이 없었다.
「필요한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하하. 자네는 대단한 사람이군!」
「…예?」
진혁이 미간을 좁혔다.
「이번에 새로 들어온 빵집의 본사 사장이라고 들었네. 이 기회에 빵집의 운영을 편하게 할만한 방안을 이것저것 요구하면 들어주려고 했네만, 그런 것도 필요 없다 이건가?」
「처음부터 그런 걸 부탁할 생각은 없었습니다만.」
「대단한 배포야! 과연 호걸이라고 할 만해.」
본의 아니게 인정을 받은 진혁은 눈앞의 노인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언뜻 보기에도 간이 안 좋은 것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아직 눈에 띌 정도까지 올라오지는 않았지만 조금 지나면 황달이 올라올 것이다.
지금은 진혁의 눈에만 보이지만 조금만 더 지나면 모든 사람들이 전부 알 수 있으리라.
제멋대로 구는 노인을 보며 진혁은 밥 앤더슨을 떠올렸다.
‘아, 그거면 되겠다.’
괜히 쓸데없는 것을 부탁하는 것보다, 적당히 아무거나 요청한 다음 이 자리를 빨리 떠나는 쪽이 좋겠다.
전혀 다른 이유에서 그는 같은 요청을 했다.
「제가 빵을 하나 드릴 테니 그걸 드셔보십시오.」
「…자네 가게의 빵인가?」
「그밖에 다른 형태로 감사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허! 고작 그거라고. 그거라면 지금 당장이라도 가능하지.」
홍차를 내려다보면서 진혁이 말했다.
「그 빵은 제가 만들겠습니다.」
‘아까 윌리엄 씨가 만든 빵들, 생각보다 맛이 없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