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01화
“정말로 세계에서 제일 맛있는 빵인지 궁금한데.”
민병철이 농담처럼 얘기하자 운종이 당당하게 말했다.
“그럴 리가 없어요. 제 빵 인생은 임진혁 쉐프님이 만드신 빵을 먹어보고 난 후와 그 전으로 나뉘어요. 그 전에 먹었던 건 빵이 아니라 빵인 척하는 밀가루 떡 같은 물건이었다고요. 진혁 쉐프님 빵을 먹고 완전히 입맛이 고급화되어버려서 다른 빵은 아예 먹지도 못하고 있는데요. 여기 빵이 그 빵보다 맛있을 리가 없어요.”
격렬한 발언에 병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래.”
“하하.”
진혁이 피식 웃으며 팔짱을 끼었다.
트레이 위에 놓인 빵은 언뜻 보기에는 전부 비슷비슷해 보였다. 먹기 좋게 구워진 갓 구운 베이글처럼 보인다. 하지만 빵이 담긴 용기를 흘깃 본다면 당뇨병, 신장 질환, 혈관 질환, 비만, 심장 질환 등 접시마다 태그가 하나씩 붙어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세상에 먹을 걸 조심해야 하는 병이 이렇게 많은지 몰랐어요.”
치아가 없이 잇몸만 남은 사람들을 위해 씹기 쉽게 만든 부드러운 베이글도 있었다. 병철은 그것부터 집었다.
“이거 부드럽다, 제대로 잘 만들었네. 어제 거기 것과 비슷하고.”
그러나 저단백질 베이글을 한 입 베어 문 강운종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제 먹었던 것보다 조금 더 폭신폭신했다.
“이거 맛이 좀 다른데요. 이래도 괜찮은 건가?”
그는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임진혁과 대단히 비슷한 표정이었다.
그는 임진희가 교육했던 사항을 생각하고 있었다.
<해와 달> 명동점과 본점, 강남점은 전부 다른 메뉴를 내놓는다. 하지만 특정한 한정 메뉴를 내놓을 때는 세 지점 모두 같은 맛을 낼 수 있도록 끊임없이 훈련을 시킨다.
운종 자신이 교육받는 동안에도 수차례 보았던 광경이다.
‘비가 오는 날이랑 맑은 날에도 습도 때문에 반죽이 달라지니까 만드는 사람이 신경을 써야 한다고 했지.’
처음에는 그냥 레시피대로 하라고 했던 임진혁은 사람들이 어려움을 겪는 것을 보고서 아예 나중에는 날씨와 지점에 따른 레시피를 따로 만들어서 나누어 주기까지 했다.
“만든 사람이 다르고 만든 장소가 다르니까 맛이 똑같으면 더 이상한 거 아니야?”
병철이 가볍게 말했다. 강운종이 중얼거렸다.
“그럴수록 더 같은 맛을 유지해야 한다고 했는데요. 명동점에서 맛본 케이크가 본점이랑 다른 맛이면 안 된다고.”
“음.”
민병철이 눈을 둥글게 떴다. 진혁이 턱을 괴고 말했다.
“애초에 프랜차이즈라고는 해도, 지점마다 병원 방침에 따라 레시피를 자체적으로 변형할 수 있도록 가이드라인을 줬거든. 그러니까 여기는 똑같은 빵이라고 해도 같은 레시피를 따르는 게 아니야. 다른 밀가루를 쓰기도 하고 비율이 다르기도 하고.”
“어, 왜요?”
“손님이 다르니까.”
“손님요?”
“응. 명동이나 강남, 홍대는 가깝잖아. 이쪽 지점에 왔던 손님이 저쪽 지점에도 얼마든지 올 수 있는 거리야. 하지만 여기는 병원이 메인이지. 만성 환자나 노인분들이 자주 오는 병원이나, 급성기 외과 환자가 많은 병원에서 팔리는 메뉴 자체를 다르게 할 수밖에 없어.”
강운종이 빵을 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 갖다 놓는 메뉴도 다르고 같은 메뉴라고 해도 당연히 달라질 수밖에 없잖아. 빵집을 찾아오는 것과는 완전히 개념이 달라. 저쪽 병원에 오는 환자가 이쪽 병원에도 오는 일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많지는 않지.”
“다르네요. 미국이라 그런가.”
“그래서는 아니야. 여기는 독립적으로 영업하는 매장이 아니라 병원의 부대 시설이라 그런 거지.”
각 메뉴 개발은 페이스트리 쉐프들의 재량에 맡겼다. 윌리엄이 만든 빵은 그중에서도 상위에 속하는 편이었다.
“보들보들하고 맛있네.”
“음, 괜찮네요.”
“그래도 세계 제일의 빵이라고 자신만만할 정도는 아닌걸?”
「CEO님! 미스터 임! 아니, 임 쉐프님!」
아까 빵을 갖다 둔 후 음료를 가지러 갔던 남자, 미스터 윌리엄이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여기 이사장님이 저희 가게를 집어서 점장을 보고 싶다고 해서 제가 지금 그리로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교장의 호출을 받은 고3 양아치 학생처럼 파랗게 질린 모양새였다. 그 모습을 본 민병철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설마 지금 당장 나가라고 하겠습니까? 법률적인 문제라면 제가 빠삭하니 저하고 같이 가시지요.」
「아, 그래 주시겠습니까?」
반색하는데 진혁이 함께 일어났다.
「아예 나도 같이 가지.」
「임 쉐프님까지 같이 가주신다면 더 좋죠!」
강운종은 오가는 영어 대화를 멀뚱멀뚱하게 듣고 있었다. 세 사람이 갑자기 그 자리를 나가고 나서 그는 눈을 껌뻑였다.
“이건 나보고 혼자 다 먹으라는 건가?”
커피 세 잔과 수십 개의 베이글을 보고 운종은 심각하게 고민에 잠겼다.
“잘 됐다. 없는 사이에 맛있는 것만 골라서 먹어야지. 저번에 보니까 신장 질환 환자들 용 빵이 달고 맛있던데.”
◈ ◈ ◈
한편, 이 시각 한국의 소망시.
임운정과 장은효는 멀리서 온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다.
“이렇게 멀리까지 올 필요는 없는데.”
“우리가 서울까지라도 나갈 걸 그랬어.”
중국 혼례에서 따르는 육례(六禮)의 절차는 본래 신랑 측에서 먼저 진행해야 한다.
하지만 황미미는 신랑 측에서 진행해야 할 납채(納采)와 문명(問名) 등의 절차를 생략했다.
납채란 신랑 측에서 중매하는 이를 통하여 청혼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후에 선물을 보내는 것이며, 문명이란 신부의 이름자와 출생 연월 시진 등의 사주를 알아보는 것을 말한다.
삼례(三禮)인 납길(納吉)은 신랑 측에서 진행하는 것이다. 신부가 보낸 사주단자와 성명을 천지신명과 조상에게 고하고 신랑과 어울리는지를 살핀다.
사례(四禮)인 납징(納徵)은 신랑이 귀한 예물을 신부에게 보내고, 신부는 답례로 정성껏 준비한 혼수를 보내는 절차다.
오례(五禮)는 신랑이 길일을 택하여 혼례 일자를 정하여 신부 측에 통고하는 것이며, 마지막인 여섯 번째가 친영(親迎)이라 하여 신랑이 예물과 함께 신부의 친정을 방문하고 붉은 가마에 탄 신부를 데리고 자신의 집으로 돌아오는 것을 말한다.
미미는 이 절차를 단순하게 해결했다.
먼저 미리 알아둔 임진혁의 출생 연월일시와 이름을 통해 중국에서 제일 뛰어난 점술가에게 점을 쳤다. 그리고 그 점친 결과와 임진혁의 부모가 좋아할 만한 선물을 가지고 부모를 직접 찾아왔다.
“아니에요, 여기 근처에도 공항이 있어서 직접 올 수 있었어요.”
왕 비서와 통역을 대동해 찾아온 황미미는 수줍게 웃었다. 비서가 예약해둔 근처 호텔의 레스토랑에서 만난 두 예비 시부모는 매우 소탈한 사람들이었다.
“눈치 없는 우리 아들을 데려가려고 한다니 우리가 고맙지.”
어머니가 활짝 웃었다. 인이어 속에서 통역가가 빠르게 동시통역을 해주었다. 미미는 미리 연습했던 대사를 한 마디씩 꺼냈다.
“보잘것없지만 이건 제가 준비한 선물이에요.”
임진혁의 조언을 받아 준비한 선물들이다.
임운정을 위한 봉투 안에는 낚싯배의 권리증과 보험증서, 그리고 낚싯배가 보관될 창고의 권리증이 들어있다. 반면에 장은효에게 건넨 봉투에는 남해 섬의 권리증서와 별장의 소유권 증서가 담겨 있었다.
봉투만 해도 붉은 비단으로 만들어 사람이 직접 황금용의 자수를 수놓은 귀한 물건이다.
하지만 장은효는 그 봉투 안에 무엇이 담겨있는지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
‘백화점 상품권 같은 건가? 뭐 이렇게 비싼 걸 챙겨왔지. 내가 미안하네. 저 정도 두께면 신세계백화점 십만 원짜리 두세 장은 되겠는걸.’
그녀는 못내 미안해하며 봉투를 받지 않으려 했다.
“이런 걸 준비해오지 않아도 되는데.”
“그래, 멀리서 오는데 우리가 선물을 준비해와야지. 미미 씨가 준비해올 건 아니에요.”
“딸처럼 여기시고 미미라고 불러주세요. 집안의 어르신이 와서 함께 진행하셔야 하는데,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아버지께서 병환을 앓으시면서 제가 직접 일을 맡아서 하고 있어서…, 박복하다 여기실 수도 있겠어요.”
“아니야, 아니야. 아가씨가 어린 나이에 고생이 많네. 그래도 참하고 예뻐서 오히려 우리한테 과분한 며느릿감이야.”
“우리 딸도 언젠가 이렇게 시집을 갈 텐데 남 일 같지 않아.”
“진희 고것이 과연 시집을 가기는 갈까? 요즘 가게 일 하는 게 너무 재밌다고 소개팅도 다 거절하더만.”
“여자 만날 생각은 없다고 들어오는 선 자리 다 싫다 하던 진혁이도 이렇게 자기 인연 만들어 오는 걸 보면, 우리가 참견할 일은 아니야. 젊은 애들이 알아서 다들 잘 하는 거지.”
황미미와 미미의 스타일 팀은 이번에 한국에 오면서 한국 드라마를 꽤 많이 보았다. 그래서 예비 시부모들이 어떻게 행동할지 나름대로 시뮬레이션을 짰다. 이렇게 따뜻하게 환영하는 것은 조금 예상 밖일 정도였다.
“한국에서 한 번, 중국에서 한 번. 총 두 번 식을 하려고 해요.”
“아주 좋은 생각이네.”
“중국에서 할 때는 미미 씨가 좋은 데서 해요. 우리가 도와줄 수 있는 게 없어서 어떡하지.”
“그건 제가 알아서 할게요. 한국에서 하는 건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날짜나, 장소나 원하시는 부분이 있으세요?”
장은효가 웃음을 터트렸다.
“우리가 원하는 게 무어 중요하담. 이런 거는 아무 데서나 해도 좋아요. 두 사람이 의논해서 우리한테 알려 줘.”
“한국식으로 결혼할 때에는 부모님께서 소망시에 오래 사셨으니까 소망시에서 한다고들 하던데요, 여기서 하는 걸 원하시는 게 아닌가요?”
“진혁이가 서울에서 크게 성공해서 직장 동료나 친구들이 다 오고 싶어 할 거야. 그러니까 진혁이 원하는 데서 하라고 해요. 서울에서 한다고 하면 우리는 여기서 버스 대절해서 데리고 올라가면 돼.”
“햇살 경로당 분들이나 산목 아파트 부녀회원들이나 내 친구들, 친척들 정도나 될까? 다들 진혁이 결혼식 보는 김에 서울 나들이한다고 좋아하실지도 몰라. 두 사람 의견이 제일 중요하지, 우리 의견이 무어 중요하겠어.”
“소망시에서 하고 싶다고 하면 서울에 있는 사람들을 데리고 버스로 내려오면 되니까 말이야.”
황미미는 두 가지 경우에 대한 대안을 이미 전부 준비해놓았다. 소망시에는 결혼식을 할만한 장소가 없으니 부지를 알아보고 아예 건물을 세울 생각이었다. 서울에서 한다면 호텔을 통째로 빌려서 식을 할 예정이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두 가지 중에서 아무거나 결정하라는 답변이 나올 줄은 몰랐다.
‘이건 진혁 씨에게 물어보고….’
황미미는 머릿속의 체크리스트에 하나씩 선을 그어가며 질문했다.
“우리 진혁이가 눈치가 없어서 고생이 많지? 둘이서 같이 와서 얘기해야 할 텐데 말이야. 걔가 바빠서 혼자 온 거야?”
임진혁이 딴소리하기 전에 빠르게 진행하기 위해서 혼자 왔다.
“호호호.”
미미는 점술가에게 점지받은 길일들까지 내밀었다.
“이 날짜와 이 날짜가 좋대요.”
“우리는 아무 때나 괜찮으니까 두 사람이 결정해서 우리한테 알려 주면 돼.”
“두 분 다 일을 하고 계시니까요.”
“자영업이야 아무 때나 문 닫고 가면 되지. 우리 단골손님들도 다 그 결혼식에 올 거라서 괜찮아.”
“아….”
“나도 자녀 결혼식 사유로 휴가는 3일 낼 수 있으니까 젊은 사람들 날짜에 맞추자고.”
두 시간 정도 의논을 마친 끝에 미미는 인사를 하고 그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두 분 건강하세요! 다음에는 진혁 씨도 같이 뵈어요!”
“물론이지.”
정해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날짜도 장소도, 결국 어디라도 좋다는 답밖에 듣지 못했다. 그래도 이 정도까지 왔다면 이미 결혼은 기정사실화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미미는 즐거운 마음으로 중국으로 돌아갔다. 그녀가 돌아가고 난 후, 장은효는 붉은 봉투를 내려다보며 한숨을 쉬었다.
“우리가 준 건 너무 별것 아닌 것 같아.”
임운정이 아내를 위로했다.
“왜, 비행기 타고 가면서 먹으면 되지. 당신이 만든 샌드위치는 맛있으니까 좋아할 거야. 그런데 이게 뭘까?”
“백화점 상품권이겠지. 그게 제일 무난하잖아. 결혼식 때 입을 한복 사는 데 보태면 되려나?”
그녀는 황금색 술을 당겨 붉은 봉투를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