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00화
“으음.”
“눈앞에서 그냥 버리면 아무리 개라도 상처를 받아. 내가 옛날에 마당에서 키우던 개가 그랬어. 자꾸 참새 같은 걸 물어오는데 내가 거들떠보지도 않으면 시무룩해져서 낑낑거렸다고.”
“그래도 어떻게 쥐를 먹는 척해요.”
“실제로 먹는 것도 아니고 먹는 척해줄 수도 있지. 호의에는 호의로 보답하는 거야.”
진혁은 서류를 민병철에게 보여 주었다. 병철이 휘둥그렇게 눈을 떴다.
“맙소사! 장난이 아니네.”
“그렇죠?”
그는 서류에 몰두했다. 방금 임진혁이 개와 쥐 따위의 예를 들었다는 것 따위는 잊어버린 채였다.
“이 그림을 원하는 지정 처로 배송해 줄 것 같은데. 너 이거 어디에 두게?”
배송과 관리 등 생각해야 할 문제는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이동 시나 관리할 시에도 도난 방지를 위한 보험이 필요하다. 또한, 물감이 변색되거나 그림이 파손되지 않게 적절한 습도와 온도를 가진 환경에 두어야 한다.
진혁이 현재 진희와 함께 살고 있는 서울의 오피스텔도 나쁜 집은 아니다. 20대 청년이 남매와 함께 살기에는 충분하리만큼 넓다.
하지만 경매에서 몇십억을 호가하는 고가의 그림을 보관하기에 적당한 장소는 아니다.
진혁이 간단하게 대답했다.
“미미 씨한테 선물하면 되겠네요.”
“아!”
“그렇지 않아도 밥 씨 이야기를 하니까 그림 이야기를 하던데. 이미 갖고 있는 그림도 있는 것 같더라고요.”
“아니, 이 골치 아픈 문제를 한 방에 해결하네. 너 진짜 미미 씨한테 잘해야 한다.”
“잘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내일 가긴 갈 거야?”
“음…, 글쎄요. 생각해 보고요.”
운전기사가 말을 걸었다.
「도착했습니다.」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두 번째 병원에 도착했다. 이 병원은 앞서 보았던 병원과 달랐다. 현대적인 빌딩 늘어서 병원 단지가 만들어져 있던 전의 병원과 달리 고풍스러운 붉은 벽돌 건물이 여럿 보였다. 우아한 대리석 석상들이 늘어서 있고 분수대가 있는 정원 역시 눈에 띄었다.
“병원이라기보다 오래된 집 같아요.”
“백여 년 전에는 평범한 부자의 저택이었대. 아들이 의사가 되면서 저택을 개조해서 병원으로 만들었고, 같은 양식으로 계속 증축해서 이렇게 되었다고 하더라.”
병철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여기 영업은 아주 잘 되고 있어. 그래서 문제가 생길지도 몰라.”
“그게 왜?”
“전에 있었던 병원 카페는 완전히 유명무실한 곳이었던 것 같아. 원내 테이크아웃 카페가 입점했지만, 병원 자체 식당이 워낙 훌륭해서 사람들이 다 거기서 사 먹고, 금방금방 망해서 나갔나 보더라고.”
“호.”
“지금 우리 카페가 들어간 곳은 전부 병원 체인인데, 여기만 윌리엄 쉐프가 자기는 자신 있다면서 따로 입찰해서 들어왔잖아.”
“아, 그 윌리엄 씨?”
“응.”
미국의 카페를 담당하는 페이스트리 쉐프들은 한둘이 아니었다. 하지만 진혁도, 병철도 개중에서도 윌리엄의 경력이 워낙 특이해서 기억하고 있었다.
“원양어선 선원 출신인데 어린이집 교사를 하다가 제빵 실습을 하면서 제과제빵사로 전직한 그분 말이지.”
강운종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뱃사람들은 보통 거칠지 않아요? 근데 왜 갑자기 어린이집 교사를 했지?”
“그거야 모르지. 일은 잘 하는 사람이야.”
“음, 그런데 왜요? 그 윌리엄이라는 사람이 뭔가 사고라도 쳤어요?”
“다른 지점은 입찰제로 3년 계약해서 입점해서 누가 뭐라고 할 수 없거든. 여기 병원은 다른 곳과는 달리 해링턴 가문이 완전히 소유한 곳이란 말이야. 이사장이 한마디 하면 바로 홀랑 나가야 해.”
“계약서를 썼잖아?”
“저쪽에서 위약금을 물어주면 끝이니까.”
“뭐, 저기서 바로 나가라고 했대?”
“윌리엄 씨가 참치잡이를 오래 해서 그런지 눈치는 빠르거든. 지금 감이 안 좋대.”
“그래도 위약금까지 물면서 나가라고 할까요?”
“그 위약금보다 볼 수 있는 이득이 크다고 하면 그렇겠지. 우리나라도 비슷해. 음식점 잘 되면 빌딩 주인이 내쫓고 그냥 하잖아.”
진혁이 턱을 만지작거렸다.
“뭐가 문제야?”
“뭐냐니. 쫓겨나면 갈 데가 없잖아.”
“갈 데가 없긴 왜 없어. 여기 시스템 설치하고 싶다고 하는 사람이 한둘이 아닌데. 당장 한국 병원에서도 러브콜 들어오는 중이야.”
“… 그럼 미스터 윌리엄한테 한국 들어오라고 하려고?”
“뭐, 본인이 원한다면 갈 데는 많아. 중국도 그렇고, 미국 내의 다른 병원에서도 컨택이 오고 있으니까.”
민병철이 후우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네 말을 듣고 있으니까 진짜 아무것도 아닌 것 같다.”
진혁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은 원래 별 것 아니야. 사람을 잃어버리면 그게 큰일이지.”
“쩝.”
두 사람이 나누는 이야기에 흥미를 잃고 장미 덩굴을 구경하던 강운종이 어느샌가 다시 이쪽으로 돌아왔다. 그는 두리번거리다가 말했다.
“카페는 어느 쪽에 있어요?”
“오른쪽 윙에 있어.”
“이번에도 응급실 쪽에 있어요?”
“아니, 여기는 응급실이 없어. 만성 환자 전문 클리닉이거든. 장기 요양을 하는 사람들이 주로 오는 곳이지.”
“하긴.”
햇살이 내리쬐는 아래 솟구치는 분수에는 우아한 무지개가 걸렸다. 잘 꾸며진 정원에는 흐드러지게 핀 꽃들이 저마다 제 색깔을 자랑했다. 영화에서나 본 것 같은 광경에 강운종이 신기해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병원보다 공원 같아요.”
드문드문 환자복을 입은 이들이 산책하는 것만 봐도 이곳이 병원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렇지? 가격은 만만치 않아. 부자들이 많이 입원하는 곳이야.”
“저 개 좀 봐요.”
송아지만 한 검은 개와 함께 산책하는 환자도 보였다. 목줄에 매여 있었지만, 개를 산책시킨다기보다 개를 끌고 가는 것처럼 보였다. 50대 정도로 보이는 백인 남자였다. 그가 점점 더 이쪽으로 가까이 다가오자 민병철이 물었다.
“저 사람이 너한테 오는데? 아는 사람이야?”
아까부터 그자를 알아본 진혁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안다면 알고 모른다면 모르고.”
공항에서 그가 발로 가슴을 밟아 주었던 남자다. 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백인들은 동양인 얼굴은 잘 구분하지 못한다며.”
병철이 핀잔을 주었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네 얼굴을 어떻게 까먹어.”
옆에서 강운종 역시 열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엄청나게 인상에 남는 얼굴이죠.”
“그, 그래.”
백인 남자는 넘어질 것처럼 다급하게 이쪽으로 달려왔다. 검은 개 역시 컹컹거리며 함께 뛰었다.
「이, 이봐요!」
「예.」
남자는 가쁘게 숨을 몰아쉬면서 진혁에게 물었다.
「당신, 이번에 공항에서 날 구해준 사람 아닙니까?!」
「…저는 아무것도 한 게 없습니다. 그냥 구조대를 불러달라고 요청한 것뿐이죠.」
「아니, 이럴 게 아니고 이쪽으로 좀 오십시오. 식사라도 대접하고 싶습니다.」
진혁이 눈을 가늘게 떴다.
「저희도 사업상의 미팅 때문에 여기에 온 거라서요.」
「그러면 미팅이 끝나더라도 꼭 연락을 좀 주십시오.」
환자복을 입고 서 있던 남자는 자신의 환의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가 뺐다.
항상 갖고 다니던 명함집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그는 곤란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민병철이 잽싸게 자기 명함을 내밀었다.
「이쪽으로 연락해주시면 됩니다.」
「아, 당신은…?」
「여기 이분은 저희 회사의 CEO님이시고 저는 미국 지부의 대표이사입니다.」
병철은 자랑스럽게 자신의 직함을 말하며 등을 꼿꼿이 세웠다.
「꼭 연락을 주십시오. 생명의 은인에게 꼭 보답하고 싶습니다.」
사내는 못내 몇 번이고 인사를 하였다. 진혁은 병철의 어깨를 툭 쳤다.
“가자. 늦겠다.”
“그래.”
오른쪽 윙이라고 하는 것은 오른쪽에 세워져 있는 저택을 말했다. 그쪽으로 향하자 놀랍게도 건물에 마구간이 딸려 있었다. 강운종이 입을 딱 벌렸다.
“말이 있네요!”
“원한다면 마차를 탈 수도 있을걸. 100달러던가? 저쪽 한구석에 해링턴 가의 역사를 볼 수 있게 꾸며 놓은 조그만 박물관도 있어.”
“진짜 신기하다. 미국 종갓집 같은 덴 가봐요.”
“비슷하지.”
진혁은 오랜만에 보는 말을 힐긋 보았다. 옛날 말보다 확실히 덩치도 크고 뼈대가 좋았다. 건강해 보이는 말들은 느긋하게 구유에 담긴 곡물을 먹고 있었다.
마구간을 지나 안쪽으로 들어가자 로비가 보였다. 골동품 태피스트리와 고풍스러운 문양 쿠션이 놓인 소파를 지나자 바로 카페가 있었다.
“우와!”
어제 갔던 병원의 카페와는 완전히 다르다. 딱 보기에도 이 건물의 양식에 맞추어 꾸며져 있었다. 간판이 없고 대신 빵이 양각된 자그마한 팻말이 내걸려 있을 뿐이었다. 현대식 테이블과 의자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대신 중후한 붉은색 마호가니 나무 탁자와 하얀 린넨 테이블보가 있었다. 곳곳이 놓여있는 폭신폭신해 보이는 안락의자는 아무리 덩치가 큰 사람이라고 해도 충분히 몸을 뉠 수 있을 것이다.
중세 영국의 신사들이 드나드는 클럽이 이런 느낌일까 싶을 정도로 고풍스럽게 화려했다. 창문이 넓고 커서 채광이 좋아, 진녹색 벨벳 커튼이 쳐져 있는데도 실내가 환하다.
이곳 역시 손님으로 북적거렸다. 환자와 의사, 물리치료사와 간호사 등 신분을 명확히 드러내는 옷을 입은 자들이 의자를 하나씩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테이크 아웃 커피를 들고 환한 미소를 지으며 나가는 사람도 보였다.
하지만 어제보다 줄은 오히려 더 짧았다. 민병철과 진혁 일행의 차례가 되자 카운터를 보고 있던 캐셔가 인사부터 했다.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세요.」
「미스터 윌리엄을 찾아왔습니다.」
「아! 안쪽에 계십니다.」
머리에 쉐프 모자를 쓴 흑인 남자가 헐레벌떡 뛰어나왔다.
「미스터 민 오셨습니까?」
언뜻 봐도 키가 2미터에 가깝다. 150kg은 넘을 것처럼 체구가 거대한 남자였다. 그는 세 사람을 별실로 안내했다.
「이쪽에서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금방 다시 오겠습니다.」
「아 참. 커피 세 잔하고 여기 있는 빵을 종류별로 다 부탁합니다.」
윌리엄이 자신만만하게 나온 배를 두드리며 호언장담을 했다.
「아, 시식을 하려고 하시는 거군요? 물론이죠! 제가 만든 빵은 다른 어디보다도 더 맛있을 겁니다. 넉넉하게 갖다 드리죠.」
별실은 바깥쪽처럼 화려하게 꾸며져 있지 않았다. 일반적인 회사의 사무실 같은 공간이었다. 한쪽 벽에는 빼곡히 사진들이 붙어 있었다. 강운종이 흥미롭게 두리번거렸다.
“저 벽에 있는 사진 좀 봐요. 아까 그 아저씨인가?”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민병철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방금 전에 만난 백인 남자와 닮기도 했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백인들 얼굴은 다 비슷비슷한 것 같단 말이야.”
“미국에 그렇게 많이 왔다 갔다 했는데 아직도 헷갈려요?”
“영화배우들처럼 진짜 개성이 뚜렷하게 생긴 사람들 아니면 구분하기 힘들어. 아마 저 사람들도 그럴걸?”
세 사람이 잡담을 나누는 사이에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다시 들렸다.
「자, 주문하신 커피와 빵이 도착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