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99화
‘이 남자를 붙잡아야 하는데. 그래서 케이크를 좀 더 만들어 달라고 해야 해. 아니, 그건 안 돼. 펜로즈 삼각형을 또 케이크로 만들어서 그걸 다시 먹는다면 그건… 예술에 대한 모욕….’
미술 작품을 식용으로 제작해서 먹어버린다.
이것은 미술 작품에 대한 예찬인가?
아니면 모독인가?
자신이 갖고 있던 가치관 자체가 뒤집히고 부서지며 깨져서 망가져 버린다.
몸이 상하기 전의 밥 앤더슨은 미식가로 유명했다. 미술을 사랑하는 후원자들은 세계 곳곳으로 그를 초청해 다양하고 훌륭한 음식을 대접했다.
그렇지만 무언가를 맛보고 이런 감각을 느껴 본 적은 아프기 전에도 후에도 결단코 없었다.
황홀경에 사로잡힌 영혼이 우주를 유영하며 뇌리에 번개가 꽂혀왔다.
진리란 없으며 세상의 그 무슨 일도 불가능하지 않다.
단 하나뿐이라 믿었던 진리가 있더라도 이는 보는 사람의 눈에 따라 얼마든지 다르게 보일 수 있다.
‘진리는 하나가 아니야.’
밥은 이제까지 미술만이 오직 단 하나의 진리라 믿어왔으며, 예술을 사랑했다.
그렇기에 이 작품을 부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작품을 혀로 느끼고 씹어 부수고 삼켜 자신의 몸속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이런 감각은 전혀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이 자는 보통 페이스트리 쉐프가 아니다. 예술가다.’
그것도 흔히 굴러다니는 자칭 아티스트가 아니었다.
영혼을 깨울만한 맛을 자아내는 진정한 예술가.
자신과 대등한, 어쩌면 더 우월한 자다.
그는 간신히 황홀경 속에서 깨어나며, 왜 이 청년이 자신에게 케이크를 먹어 보라고 강요했는지 100% 이해했다.
‘난 완벽하게 져 버린 거야.’
밥 앤더슨은 저도 모르게 앓는 소리를 흘렸다.
「크으윽.」
방금 전에 얻은 예술에 대한 깨달음을 소화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고고하고 높았던 자존심이 산산이 조각났다. 파편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흩어졌다. 내기에서 졌기 때문이 아니다. 눈앞에 있는 이 젊은 동양인에게 완전히 승복해서다.
그는 눈앞의 남자를 다시 찬찬히 살폈다.
‘원래는 의료인이나 아니면 아팠다가 건강해진 자라고 생각했는데.’
아니면 누군가 가족 중의 한 명이 오래 아파서 링거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줄 알았다.
하지만 전혀 다른 직종에 종사하고 있다.
남자는 혼란에 빠져서 말을 하지 못하고 입만 벙긋거렸다.
진혁이 작별을 고했다.
「그럼 다 드셨으니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안돼!」
패배자는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가지 마.」
「왜요?」
「이야기 좀 더 하지.」
진혁이 피식 웃었다.
「5분만입니다.」
「일단 그 입체를 어떻게 생각해 냈는지부터 이야기해 보자고.」
「사업상의 일이 있어서 가야 합니다.」
「사업은 무슨 사업을 하는데? 빵 만드는 건가?」
「그 여기 병원에 새로 열린 카페가 바로 제 사업입니다.」
「아.」
밥이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간호사가 아는 척을 했다.
「아, 그 카페요. 빵이 아주 맛있어서 평판이 좋더라구요.」
「누가 만들었는데, 당연하죠.」
「밥 앤더슨 씨가 최근에는 식사 섭취량이 많이 줄었는데, 손님이 가져오신 건 잘 드시네요. 신장 질환 환자들을 위해서 개발하신 거예요?」
「그렇습니다.」
앤더슨은 장님이 눈을 뜬 것처럼 충격을 받았다.
눈앞의 이 예술 작품은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실용적이며, 건강에도 좋다.
「…!」
식욕이 없는 환자들을 위해서 그들이 먹을 수 있는 영양소를 넣어 맛있는 음식을 개발했다.
그러니 이 음식이 그 역할을 다하기 위해서는 먹혀야만 한다.
선량하고 온화하다.
「내일 시간을 좀 내게.」
「예?」
명령처럼 말했다.
「자네를 모델로 그림을 그려야겠어.」
막 문을 나서려던 진혁이 뒤를 돌아보았다. 앤더슨은 서랍을 열어 서류를 꺼냈다. 그는 낯익은 명함을 흘깃 보더니 볼펜으로 서류의 특정 부분에 무언가를 휘갈겼다.
「모델비는 충분히 주겠네.」
「모델을 할만한 시간이 없는데요.」
「없으면 내!」
「유감스럽지만 제 시간은 비쌉니다.」
「모든 걸 다 주지.」
「예?」
「난 원래 불알 두 쪽만 갖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어. 캔버스나 물감을 살 돈이 없으니까 신문지에 볼펜으로 낙서를 하면서 스스로 그림을 배웠지. 그리고 가난한 무명 시절을 거쳐 이 자리까지 올라왔다. 그렇지만 너 같은 사람은 처음 봐.」
진혁은 스마트폰을 내려다보았다.
민병철과 강운종이 아래쪽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미미가 보낸 리무진 또한 병원 주차장에서 대기하고 있는지 오래다.
이 화가는 고집도 세고 말도 많았다.
「맛있게 드셔주셨으니 그걸로 충분합니다.」
「아니! 난 그걸로 만족할 수 없어. 이걸 가져가.」
남자는 억지로 임진혁의 손에 서류 봉투를 쥐여 주었다. 진혁은 그것을 거절하지 않고 받아 챙겼다.
「내일, 내일 꼭 이곳으로 다시 오게나. 같은 시간에!」
닫힌 문 너머로 쩌렁쩌렁하게 목소리가 울렸다.
◈ ◈ ◈
세 사람은 리무진에 타서 다른 병원으로 향했다. 운전기사가 서너 시간 정도 걸린다고 설명해 주었다. 이제는 리무진 탑승이 완전히 익숙해진 강운종은 느긋하게 등을 기대고 반쯤 졸았다.
“아까 그 건, 어떻게 됐어?”
민병철이 궁금해하며 물었다.
“뭘 어떻게 됐겠어요. 케이크가 너무 맛있으니까 아주 좋아하셨겠지. 하나 더 만들어 달라고 하지 않았어요?”
강운종이 반쯤 졸면서도 대화에 끼어들었다.
진혁이 서류 봉투를 보여 주었다.
“케이크 출장 서비스 한 셈 치지 뭐. 좀 고집이 세고 융통성이 없기는 한데, 자기 능력을 과신해서 그런 것 같더라.”
“아니, 그 사람은 현대 미술의 거장이야! 그냥 걷기만 해도 사람들이 그 아래에 레드 카펫을 깔아 주면서 굽신굽신하는 사람이야. 그 분야에서 최고니까 고집이 세질 수밖에 없는 게 아닐까? 자기 능력을 과신해서 그런 건 아닐 거야.”
“모든 사람들이 다 굽신굽신하니까 자기가 옳은 줄만 아는 거 아니에요? 그럴 때일수록 바른말 하는 애가 하나는 있어 줘야 하죠. 저도 빵에 있을 때 옆방에 방장 한 놈이 눈치도 없고 세력 돌아가는 분위기를 전혀 모르는 애가 하나 있었는데, 그 방 쪽에 있었던 스파이가….”
강운종은 신나서 멸치와 너구리를 알게 된 계기를 풀어놓았다. 민병철은 전혀 엉뚱한 이야기를 신기해하면서 들었다.
“그 안도 완전히 작은 사회네.”
“24시간 같이 있으니까 안 맞는 애가 있으면 그거를 서로 견딜 수가 없는 거예요. 완전히 미쳐버려요.”
“나도 대학교 기숙사에 있을 때….”
진혁은 서류봉투를 열어 안에 있는 서류를 꺼냈다.
“호오.”
서류를 한 장 한 장 넘기며 그가 눈썹을 추켜올렸다.
“케이크 하나 값치고는 과한데.”
“뭔데? 뭐 스위스 은행 계좌라도 줬어?”
“그건 아니고, 그림에 대한 2차 저작권 사용권. 오늘 만든 케이크에 한정해서인 것 같은데…, 어라. 그림도 같이 넘겼네?”
민병철이 경악했다.
“저작권의 사용에 대해서 허락을 받았어?! 그 자기 그림에 대해서 엄청 까다롭게 구는 그 사람이 말이야? 천지가 개벽할 노릇이네.”
“그것만은 아니야.”
그림의 경우 저작권과 소유권은 별도로 나뉜다. 화가가 그림을 그려서 팔았다고 할 때, 그 그림을 사 간 사람은 전시를 할 수 있지만, 그 그림을 달력이나 티셔츠 따위에 찍어 팔 수는 없다. 소유권은 팔았어도 저작권은 여전히 화가에게 있기 때문이다.
밥 앤더슨은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펜로즈의 삼각형’ 그림의 권리를 양도한 것뿐이 아니라, 자신이 관리하는 지적 재산권 역시 임진혁이 대리 행사할 수 있도록 하였다.
정확히는 이미 작성된 서류의 빈칸에 임진혁의 이름을 써넣었다.
서류를 미리 준비해 두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몸 상태가 안 좋긴 하더라. 애초부터 자기가 믿을만한 누군가를 찾고 있었나 봐.”
진혁이 짧게 말했다. 강운종이 궁금해했다.
“물려줄 사람이 없나? 가족이나 아니면 계속 옆에서 돌보던 사람이나 그런 사람이 없대요?”
“고아일 거야. 결혼은 했지. 전에 사고로 가족을 다 잃고 본인도 다치면서 그림 화풍이 한 번 많이 바뀌었어. 예술적으로는 한 단계 성숙했다고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본인한테는 그냥 비극일 뿐이니까.”
“흠.”
‘사고로 가족을 잃었다라.’
자신에게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었던 일이다.
진혁은 그 예술가에게 아주 약간, 미안한 감정을 느꼈다.
먹기 싫다고 울부짖는 모습을 보는 것이 재미있었다. 그렇게까지 싫어할 줄은 몰랐기에 조금 놀렸을 뿐이다.
미술의 대가라고 해도 임진혁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다. 그는 자신의 분야에서 충분히 성공했고 이 남자에게 특별히 굽신거리거나 아부할 필요가 없었다.
함께 콜라보레이션을 해도 재미있겠지만 굳이 꼭 할 필요는 없다. 아이디어는 많고 할 일도 많고, 이번에 하나 만드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재미있었다.
스마트폰이 울렸다.
“뭐야, 이 아저씨는 왜 또 전화해?”
진혁은 전화를 받았다. 밥 앤더슨이 숨차 하며 전화 너머로 외쳤다.
「사과했네.」
「예?」
「그 자네가 경영한다던 카페 직원 말이야! 내가 개인 정보 따위로 따지고 들지 말라고 했던 라틴계 애들!」
「아아」
그런 사소한 일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수화기 너머의 밥 앤더슨은 다급했다.
「모든 사람에게 적합한 빵을 만들려면 그 사람에 대해서 잘 알아야 하지. 내가 괜히 비뚤게 생각해서 소란을 피웠어. 거기 카페에 그림도 하나 그려 줬다고.」
옆에서 전화기 소리를 엿듣던 민병철이 비명처럼 소리를 질렀다.
“우왁?! 뭘 해줬다고? 그림을 그려 줬다고?!”
「그러실 필요는 없는데요.」
「내 그림을 달라고 조르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닌데 왜 그렇게 콧대 높게 굴어?! 내가 그림 그려주면 좋잖아. 좋지, 아주 좋지?! 안 좋아?」
앤더슨이 어린아이에게 대답을 강요하는 것처럼 을러댔다. 그러면서도 슬금슬금 눈치를 보는 꼴이 웃겼다.
「그, 내일 모델 하러 올 때 내가 특별히 배를 비우고 기다려 주지.」
「내일 간다고 말한 적은 없는데요.」
「모델료를 오늘 이미 받았잖아! 그러니까 내일 당연히 와야지!」
「돌려 드리면 되죠.」
「아까 변호사 시켜서 공증 마쳤으니까 이제 도로 못 줘!. 받았으니까 내일은 꼭 다시 와 달라고.」
목소리는 점점 더 애걸 조로 변해갔다.
「….」
진혁은 잠시 전화기에서 얼굴을 떼고 스마트폰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목숨보다 더 소중하게 여겨서 어디에도 팔지 않았다던 권리를 이런 식으로 대충대충 넘기고 와달라고 조르는 건가?’
이 백인 남자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난해하고도 어려웠다.
「일단 알겠습니다.」
끝까지 간다 안 간다. 확답을 하지 않은 채 임진혁은 통화를 마쳤다. 그는 자신보다 좀 더 상식이 풍부할 민병철에게 물어보았다.
“있잖아, 형.”
“응?”
“처음 보는 동네 개가 갑자기 형한테 친한 척하면서 갓 잡은 쥐 같은 걸 물어오면 어떻게 할 거야?”
“어, 쥐를 먹는 척하면서 버린다?”
“왜 먹는 척하면서 버려?”
“그 개는 너를 아주 좋아해서 호감 표현을 하는 거잖아. 왜, 병원에 개라도 있었어? VIP 병동에는 반려동물 반입이 되나? 하긴 요즘은 반려동물 테라피 같은 것도 하던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