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98화
임진혁은 케이크 상자를 들고 병실에 들어섰다. 호텔의 스위트 룸처럼 꾸며진 거실을 지나자 넓지만 비교적 평범한 병실이 보였다.
유난히 넓은 병실용 침대 위에 밥 앤더슨이 피곤에 지친 안색으로 누워 있었다.
「흥, 건방진 풋내기 같으니라고.」
양쪽 팔에 주렁주렁 연결된 링거 줄 역시 한두 개가 아니다.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눈에 띄게 상태가 안 좋아 보였다. 진혁이 한쪽 손에 든 케이크 상자를 살짝 보여주었다.
「보시면 알게 될 겁니다.」
「하하하하!」
침대에 누운 채로 미스터 밥이 고개만 돌려서 진혁을 노려보았다. 불길이 이글거리는 것처럼 생생하게 살아있는 눈빛이었다.
「시도는 좋았지만, 결과는 나빴어.」
「음?」
「불가능한 걸 가능하다고 거짓말을 해서 나를 한 번 더 만나고 싶어 하다니 말이야. 그냥 날 보고 싶다고 솔직하게 말하지그래? 내 팬이라고.」
‘설명할 필요가 없군.’
진혁은 말없이 케이크 상자를 열었다.
「직접 눈으로 보시죠.」
「…으허헛!!」
밥 앤더슨의 반응은 만화 속의 한 장면처럼 희극적이었다. 케이크를 본 순간 그는 엄청나게 놀랐다. 치켜 올라간 눈썹에 부릅뜬 눈, 벌름거리는 콧구멍과 활짝 벌린 입을 보고서 진혁이 피식 웃었다.
「이제 믿을 수 있습니까?」
「그 상자, 상자에 이상한 걸 설치한 게 아니야? 3D 홀로그램 머신이라거나.」
백인 남자는 엉뚱한 소리를 지껄이면서도 케이크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진혁은 피식 웃으며 케이크 상자를 눈앞으로 가까이 가져가서 보여주었다.
「이 종이 박스는 그냥 평범한 상자입니다.」
「어디, 어디 다시 보자고.」
그는 입에서 침이라도 줄줄 흘릴 것처럼 케이크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해낸 거지?! 자네는 기하학의 천재인가? 아니, 아니다. 수학을 하는 자가 왜 제과제빵을… 이런 걸 하루 만에 만들 수 있을 리가 없어. 원래부터 펜로즈 삼각형을 연구하고 있었나?!」
진혁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는 자신이 준비해온 플라스틱 포크를 꺼냈다.
「그것보다 한번 맛부터 보시겠습니까.」
「미쳤나?! 이걸 어떻게 먹어! 이 예술 작품을! 이 모나리자도 먹어버릴 놈 같으니라고!」
밥 앤더슨이 바락바락 악을 쓰기 시작했다.
「당신은 화가라고 들었습니다. 왜 그림을 그립니까? 무엇입니까? 보여주기 위해서 아닙니까?」
「그거야 그렇지만.」
「나는 당신이 먹어주길 바라면서 이 케이크를 만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이걸 먹어 주셨으면 좋겠군요.」
진혁은 각도를 바꾸어 케이크를 다른 모양에서 보여 주었다.
「이 각도에서 보면 여기가 끊어져 있군! 왼쪽 눈과 오른쪽 눈이 각각 다른 곳을 보기 때문에 발생하는 왜곡 현상인가……, 펜로즈 삼각형은 실제로 존재할 수 없어. 하지만 자네는 그게 실제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지.」
탄식처럼 흘러나온 목소리는 완전히 패배를 인정한 자의 것이었다.
「그렇습니다. 인간의 눈은 좌우 한 쌍이고, 양쪽 눈에서 전송한 정보를 바탕으로 사물의 원근을 파악합니다. 원경에 있는 물체를 볼 때는 양안의 각도가 좀 더 벌어지지요. 그 원리를 이용해서 만든 겁니다.」
진혁이 차분하게 말했다.
「자네가 만든 게 아닐 수도 있지 않나.」
「아, 찍어두길 잘했군요. 동영상이 있습니다.」
진혁은 스마트폰을 들어 짧게 영상을 보여 주었다. 빨리 감은 것처럼 보이는 영상에는 임진혁이 케이크를 만드는 과정이 전부 담겨 있었다.
‘찍어 두길 잘 했군.’
영상까지 확인한 미스터 밥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침대에 누워있던 그가 힘들게 몸을 일으켰다. 육중한 체중이 실려 무거운 병실 침대가 삐걱거렸다. 그는 링거가 연결된 손을 들어 병실 난간을 잡았다.
「그런 셈이죠.」
형형하게 빛나는 눈으로 밥 앤더슨이 말했다.
「내가 한 입으로 두말하진 않지! 그래서 소원은 뭔가? 당연히 그거겠지!」
「음?」
「내 그림으로 이것저것 이상한 걸 만들고 싶어 하겠지. 우산이니 머그컵이니, 접시나 포스터-엽서같이 쓸데없는 것들!」
「아닙니다.」
「그럼 그림인가? 받을 사람이 정해지지 않은 내 유산! 내가 죽고 나면 전부 뉴욕 현대 미술관에 기부하기로 한 그림들 말일세. 내가 팔지 않고 계속해서 갖고 있던 초기작과 최신작들……, 그 그림들을 탐내고 있는 건가. 하하하하!」
진혁이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 말은 앤더슨의 기분을 크게 상하게 한 모양이었다.
「내 그림에 관심이 없어?! 그럴 리가. 그럼 나한테 왜 접근했지?!」
진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제가 접근했습니까? 당신이 먼저 말을 걸었습니다.」
「그거야 그랬지. 그래서 소원은 이 케이크를 먹는 거라고?」
「예.」
밥 앤더슨은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저었다.
「하. 나는 케이크는 못 먹어. 의사가 먹지 말라고 했어.」
어제 도넛을 먹으려고 그 소동을 피웠단 남자가 하는 말에 신빙성은 없었다. 자판기에서 콜라 역시 뽑아서 마시는 모습 역시 어제 봐 버렸다.
진혁이 물끄러미 바라보자 밥 앤더슨이 황급히 변명했다.
「아니, 아니! 정말로 못 먹는단 말이야. 어제 콜라를 먹어서 한소리 들었다고.」
변명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진혁이 짧게 설명했다.
「이건 드실 수 있습니다.」
「간호사! 간호사!」
밥은 호출 벨을 눌러 담당 간호사를 불렀다.
「이봐, 시니어 너스 캐더린. 내가 이 케이크를 먹어도 되는지 봐 달라고.」
불려온 간호사가 진혁에게 물었다.
「이 환자분은 엄격한 염분과 단백질 제한 식이를 하고 있는 분이십니다. 이런 케이크는 반입이 불가능합니다만.」
진혁이 얇은 서류를 한 장 건네주었다.
「이건 저단백 쌀가루와 설탕, 전분으로 만든 종이로 만들었습니다. 여기에 있는 성분표를 참고하시면 됩니다.」
성분표를 본 간호사가 한 손으로 입을 가렸다.
「어머나. 단순당과 지방이 대부분이네요. 그렇지 않아도 미스터 밥은 열량 섭취량을 늘리셔야 하는데. 딱 적당한 음식을 만들어 가져오셨네요.」
간호사가 보인 뜻밖의 반응을 보고 밥 앤더슨은 크게 놀랐다.
「잠깐, 그럼 이걸 내가 먹어도 된다고?」
「물론입니다, 미스터 밥. 가능하다면 하루에 세 번, 네 번 정도 드시면 좋겠네요.」
조금 전까지 기세등등하게 을러대던 백인 남자는 풀이 죽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고, 키티. 이걸 내가 어떻게 먹어. 이건 위대한 미술 작품이야! 케이크가 아니야.」
‘아, 그런 이유였나?’
진혁이 피식 웃었다. 건강을 생각해서 먹고 싶지 않았던 게 아니라 예술 작품을 보존하기 위해서 거절했던 모양이다.
간호사는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키티가 아니라 캐더린입니다, 미스터. 그림과 같은 모양의 케이크를 특별히 부탁하신 건가요? 특이하게 생겼네요.」
「그렇다고 하면 그런 셈인데….」
백인 사내는 말꼬리를 흘리며 애처롭게 어깨를 늘어뜨렸다. 레슬링 선수처럼 체구가 큰 남자가 그렇게 행동한다고 해도 몸집이 줄어들지는 않았다. 진혁이 단호하게 말했다.
「뭐든지 소원을 하나 들어주는 내기였죠.」
「으윽.」
「내 소원은 당신이 이 케이크를 먹는 겁니다.」
「으으으으윽.」
밥 앤더슨은 눈물을 쏟을 것만 같았다. 그는 그렁그렁한 눈으로 애원했다.
「제발 그것 말고 다른 소원을 대라고! 차라리 내 그림을 달라고 해!」
그는 침대 옆의 서랍장을 뒤졌다. 전시회의 도록을 펼치더니 몇 가지 그림을 짚어 주었다.
「자, 이걸 봐. 이 그림을 주지. 아랍의 석유 부자가 돈을 싸 짊어 들고 들어와서 팔라고 애원해도 팔지 않았던 그림이야.」
그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그림은 펜로즈 계단을 그린 것이었다. 불가능한 도형 연작 중의 하나다. 그가 죽기 전에는 절대로 아무에게도 팔지 않겠다고 이야기했던 시리즈 중의 두 번째 작품이다.
밥 앤더슨은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말했지만, 진혁은 동요하지 않았다.
「유감스럽지만 그건 안 됩니다.」
「크흑.」
간호사 캐더린이 옆에서 물었다.
「이 케이크는 누가 만든 건가요? 또 주문해서 만들어 달라고 하면 되잖아요?」
「자네들은 예술을 몰라. 앤디 워홀이 자신의 작품을 실크스크린으로 찍어낸다고 해도 그 첫 번째 작품은 특별하단 말일세! 지금 내가 이 작품을 보았을 때의 그 감동은 사라지지 않아!」
진혁이 냉정하게 말했다.
「그럼 먹어도 사라지지 않겠네요.」
「자네 정말로 그따위 소원을 원하는 건가?! 내가 이걸 먹어서 자네에게 좋은 점이 뭐가 있다고! 차라리 내 작품의 2차 저작권을 달라고 해! 머그컵이건 티셔츠건 맘대로 찍어 팔라고!」
「필요 없습니다. 이 케이크를 드시죠.」
간호사가 옆에서 조심스럽게 말했다.
「미스터 밥, 혈압이 올라가고 있는데요.」
진혁이 시계를 보았다.
「당신이 자신이 한 약속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그냥 그뿐인 거겠죠. 유감스럽게도 저도 바쁜 사람이라서요. 그럼 저는 가보겠습니다.」
「아, 안 돼. 가지 마!」
앤더슨 밥은 간절하게 케이크 상자를 붙잡았다.
「내 말은 지킨다고.」
그는 눈물을 흘릴 것 같은 얼굴로 슬프게 웃었다.
「으흐흐흣.」
웃는 건지 우는 건지 알 수 없는 소리였다. 간호사는 버튼을 눌러 침대가 직각이 되도록 일으켜 주었다.
「누워서 드시면 기도로 들어가요. 앉아서 드세요.」
「흣흣흣.」
펼쳐진 종이 상자 위에 놓여 있는 케이크는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을 받아 예술 작품처럼 반짝반짝하게 빛났다. 밥 앤더슨은 이를 악물었다.
「먹으면 될 거 아니야, 먹으면.」
그는 떨리는 손으로 포크를 잡았다. 입체 펜로즈 삼각형 모양의 구조물에는 아예 접근조차 하지 못했다. 그는 배경으로 깔린 스퀘어 케이크 근처에서만 허공을 퍼내듯 포크 질을 했다.
「으으으.」
흔들리는 동공과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바라보며 진혁이 매정하게 재촉했다.
「안 드실 거면 그냥 갑니다.」
「먹는다고!」
밥 앤더슨은 끝내 포크로 케이크를 헤집고 말았다. 완벽한 검은색 배경이 뭉그러지며 흐늘흐늘하게 포크 위에 얹혀오자 그는 안타까운 앓는 소리를 흘렸다.
「어흐흐흐흐흑.」
진혁은 소파에 앉아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처음에는 어색하고 꺼린 동작으로 크림을 핥던 미스터 밥은 점차 신에 들린 것처럼 손을 움직였다. 몸이 아파서 단백질 제한 식이를 하던 중에 이렇게 포실포실하고 부드러운 크림은 처음이었다.
그는 우는 소리를 내는 것도 잊어버렸다.
밥은 자신이 병원에 있다는 사실을 잊었다.
우연히 만난 동양인 사내와 한 내기의 결과로 이것을 먹고 있었다는 사실도 잊었다.
단지 목구멍에 미끄러져 내려가는 이 달콤하고 따스한 맛만이 그의 전신을 전율케 하였다.
포크는 쉴 새 없이 스퀘어 케이크를 파고들었고, 새까맣던 케이크 시트는 곧 사라져 버렸다. 하얀 종이 박스 위에는 펜로즈 입체 삼각형만이 덩그러니 쓰러져 있다.
몽환적인 맛의 세계를 헤매고 있던 밥 앤더슨은 비로소 현실로 돌아왔다.
「내가 이걸 먹어 버렸다니.」
그가 대중적으로 성공하게 만들어 준 첫 번째 작품.
앤더슨은 임진혁이 자신의 앞에 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렸다.
오직 그와 펜로즈 삼각형만이 있었다. 그는 포크를 내려놓고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집어 들었다.
그림 속에서만 존재하던 것이 손끝에 고스란히 느껴지자 기분이 이상했다.
온몸의 혈관에서 피들이 기뻐 날뛰는 것만 같다.
밥은 그것을 코에 갖다 댔다. 달짝지근한 향이 코끝을 간지럽혔다.
그는 마침내 참지 못하고 혀를 날름거렸다. 혀끝에 닿자 농후하고 달콤한 맛이 뱀처럼 혀를 휘감아왔다.
「우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