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님의 베이커리-397화 (396/656)

제 397화

진혁이 물었다.

「캐릭터 유지… 요?」

「아하하. 공인으로 살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이미지를 챙겨야 하잖아요. 진혁 씨는 레시피를 독점하지 않고 모두에게 널리 알리는, 선량한 분이고. 저는 홍보팀에서 만들어준 ‘연약 가련하고 청순한 여대생’ 이미지가 있지요. 실제 내가 어떤 사람인지와 공인으로 어떤 모습을 보여주는지는 다를 수밖에 없으니까, 아니 아니, 그렇다고 진혁 씨가 그런 분이 아니라는 건 아니고요!」

미미가 횡설수설했다.

「….」

「진혁 씨가 원하지 않으신다면 레시피나 만드는 광경은 따로 공개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원하는 걸 말씀해주세요, 그대로 할 테니까요.」

진혁이 영상 통화를 하던 핸드폰을 들어 올려 호텔 테이블 위쪽을 보여주었다.

「그게 사실은, 벌써 만들었거든요.」

「예에에?!」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알법한 그림이다.

평면적인 검은색 배경 위에 펜로즈 삼각형이 그려져 있다.

펜로즈 삼각형이란 단면이 사각형인 입체가 직각으로 꺾여 삼각형을 이루는 것처럼 보이는 도형이다. 각 변인 막대가 모두 직각이다. 그러나 삼각형의 각 변을 이루는 평행한 면은 꼭짓점에서 다른 직각의 모서리가 되어 버린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평면에 그리는 것은 가능하나 현실에는 존재할 수 없는 그림이다.

이 펜로즈 삼각형을 소재로 하여 그린 그림은 밥 앤더슨의 작품 중에서도 대표작으로, 미국의 뉴욕 현대 예술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기하학적 착시를 이용하여 평면 도형이 입체적으로 어긋나 보이는 사실을 이용해 현대 미술을 간접적으로 비평한 작품이다.

미미 역시 이 그림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아니, 이걸 어떻게 입체로 만들었어요?!」

그녀가 카메라를 통해 케이크를 보고 저절로 비명을 흘렸다.

「미스터 밥 앤더슨의 그림이 한두 장도 아니고. 그중에서도 제일 유명하고 복잡한 걸…. 저 이거 케이크 다른 각도로 보여 주세요!」

진혁은 미미가 부탁한 대로 카메라를 회전시켜 주었다. 가운데에 입체적으로 솟아있는 펜로즈 삼각형이 눈에 확 띈다.

그 아래, 정사각형 모양의 새까만 케이크는 배경처럼 완전히 녹아들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단지 입체적인 삼각도형이 돋보이게 만들어주는 역할을 하고 있을 뿐이다.

「아니, 이건 현실적으로 입체가 불가능한 도형… 아.」

진혁이 카메라 렌즈의 각도를 바꾸며 케이크를 비추어 보여주자, 끊어진 부분이 보였다.

「양안으로 볼 때 왜곡되는 착시를 이용한 거군요.」

「맞습니다. 이 정면에서 봐야 입체 펜로즈 삼각형으로 보이죠.」

「이런 생각은 또 어떻게 해내셨어요?」

「예? 아니, 특별히 생각하지 않았는데요. 그냥 보이는 대로 만들었을 뿐입니다」

진혁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

「그래서 만드는 광경을 보여준다거나, 이벤트처럼 한다거나 하는 건 별로 의미가 없을 것 같은데요. 이게 뭐 만들기 어려운 것도 아니고.」

그녀가 감탄사를 흘렸다.

「진혁 씨…. 레시피를 독점하지 않고 널리 알리는 선량한 캐릭터라고 말씀드렸던 거 말인데요, 바꿀게요.」

「네?」

「진짜 그 검림 씨하고 똑같은 거 아세요? 미친 재능을 타고난 천재지만 끊임없이 노력하잖아요. 그러면서도 자신이 천재라고 생각하지 않아서 주변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들잖아요. 당연히 지금 구상하고 계신 줄 알았는데! 어디에 주방을 빌려 드리면 좋을지 생각 중이었는데 말이에요! 벌써 만들어 버리다니!」

미미가 발을 동동 굴렀다.

「재료는 뭐로 만드신 거예요? 설탕 공예나 초콜릿 공예를 하신 건가요?」

「아니요, 웨이퍼 페이퍼라고 하는, 전분과 설탕으로 만든 식용 종이를 잘라서 여러 겹으로 쌓은 겁니다.」

「어머나.」

「식용 종이도 여러 가지 맛이 있어요. 일부러 다양한 맛을 내고 싶어서, 웨하스처럼 겹쳐 쌓았죠.」

「으아아아아.」

「왜 갑자기 비명을 지르십니까?」

「안 되겠어요, 저도 오늘 밤 비행기로 미국에 가야겠어요. 너무 먹고 싶어요.」

「나중에 따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작가님이 보면 정말로 놀라시겠는데요. 이건 케이크가 아니더라도 굿즈로 만들어도 되고, 콜라보 상품으로 저희 회사에서도 꼭 판매하고 싶어요. 미술 작품과 케이크의 콜라보레이션 한정 기획으로 하면 좋겠는데! 이 그림들 말고 다른 그림들도 만드실 건가요?」

「서울 지점에서 먼저 콜라보레이션을 하면 좋겠군요.」

「아니, 진혁 씨! 저희 사천 중앙 지점에도 뛰어난 페이스트리 쉐프들이 있답니다.」

「하하.」

「… 물론 진혁 쉐프님이 만드신 것과는 맛이 다르겠지만요.」

진혁은 시계를 보았다.

「내일도 일정이 있을 테니 그럼 이만 끊겠습니다.」

「네!」

◈          ◈          ◈

화가의 명함에 있는 연락처로 전화를 걸자, 본인이 아닌 비서가 전화를 받았다.

「미스터 밥은 현재 개인 사정으로 연락을 받으실 수가 없어….」

「어제 내기를 한 페이스트리 쉐프라고 하면 아실 겁니다. 오늘 오전 중에 바로 방문하고 싶은데요.」

진혁은 미국에 놀러 온 것이 아니었다. 이 도시만이 아니라 다른 도시의 체인점 역시 시찰하는 일정이 꼼꼼히 짜여 있었다. 그렇기에 진혁은 금일중으로 화가를 방문해 내기의 결과를 보여줄 생각이었다.

「오전입니까…, 확인 후 연락드리겠습니다」

“뭐래? 오늘 가도 된대?”

“비서야. 자기가 결정할 수가 없다고 오늘 알려준대.”

병철이 종이로 된 지도를 펼치고서 말했다.

“그럼 일단 병원 쪽으로 출발이나 할까?”

“형이 운전할 필요 없어, 미미 씨가 운전기사와 차를 보내준다고 했어.”

“이 복도 많은 녀석. 넌 진짜 전생에 나라를 구한 게 아닐까?”

“나라는 아니지만, 뭐 비슷하지.”

두 번째로 리무진에 탑승한 강운종은 전보다 제대로 적응한 모습이었다. 그는 기운차게 여기저기 찰칵찰칵 사진을 찍어댔다.

“요즘 애들은 다 이렇게 사진 찍는 데에 목숨을 걸더라.”

“진혁이 너도 요즘 애야….”

“저번에 같이 여행을 갔는데 임진희가 이런 식으로 사진을 엄청나게 찍어대더라고요.”

“아니, 저는 진희 점장님하고는 달라요. 멸치랑 너구리한테 말하니까 믿질 않아서 증거를 제시하려고.”

강운종이 눈치를 보며 스마트폰을 닫았다. 병철이 웃었다.

“야, 그냥 찍고 싶은 만큼 찍어. 괜히 눈치 볼 필요 없어. 진혁이 쟤가 말은 저렇게 해도 아무 생각이 없다니까.”

“예에에.”

운종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많이 배우고 많이 보라고 하셨는데 여기까지 와서 그냥 먹고 노는 것밖에 없는 것 같아요.”

병철이 그런 운종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오늘 오후에 제과제빵 도구와 재료 백화점에 가면 눈이 휘둥그레질걸? 우리나라하고는 들여놓는 재료의 종류부터 달라. 1층부터 25층까지 전부 제과제빵 제품으로 꽉 차 있어.”

“25층이요?!”

“원래 해외 출장이라는 것 자체가 그래. 10분 20분 이런 시간 전부를 알차게 보낼 수는 없어. 사람이다 보니까 중간에 쉬어주기도 해야 하고 체력관리도 해야지. 말도 다르고 문화도 다른 낯선 곳에 와 있다는 것만으로 사람은 지치기 마련이니까.”

강운종이 시무룩하게 말했다.

“제가 그래도 체력 하나는 좋은 편인데. 진혁 쉐프 사장 형님은 전혀 지치지 않았잖아요.”

“그 호칭은 대체 뭐야? 그나저나 보통 사람하고 저 체력 괴물을 비교하면 안 되지. 저놈은 어제 병원 시찰 다녀오고 나서도 외출했잖아. 외부 주방 빌려서 뭘 또 한 것 같던데?”

“어. 그거 저도 따라갔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됐어, 됐어. 시간 외 수당 안 주는 추가 근무는 하는 거 아니야.”

“진혁 쉐프님이 빵 만드시는 건 옆에서 보면 좋단 말이에요. 무슨 마술 쇼 같고.”

“하하하하.”

“너무 수준이 높아서 아직 제가 따라 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닌데. 그래도 보는 것만으로도 공부가 되거든요.”

진혁이 짧게 말했다.

“그럼 다음에 만들 때는 불러 줄게.”

민병철이 코를 벌름거리며 진짜로 묻고 싶었던 질문을 했다.

“어제 뭘 만든 건데? 우리가 시식할 샘플은 없어?”

“없어.”

“우리 사이에 너무하네. 내가 그런 거 맛보는 거 하나는 잘하는 거 알잖아.”

“우리 사이?”

“동네 형 겸 동업자!”

진혁이 피식 웃었다.

“이건 병철이 형이 먹을 건 아니야. 어제 만났던 그 화가에게 맞춘 음식이라.”

“그걸 벌써 만드셨어요?”

어제 화가의 이름을 알게 된 후 그림 몇 장을 검색해서 보았던 강운종이 아는 척을 했다.

“뭐로 만드셨어요? 그림이 되게 많던데.”

“어떤 거로 만들었을 것 같은데?”

“음… 저라면, 그 초기 시리즈 중에 하나요. 레드벨벳 케이크를 네모나게 만들기만 하면 되니까.”

병철이 스마트폰을 검색해 운종이 말한 그림을 찾았다. 직사각형의 캔버스에 균일한 적갈색이 칠해져 있고, 가운데에는 하얀 점이 찍혀 있을 뿐이다.

민병철이 피식 웃었다.

“아냐, 미스터 밥이 어떤 그림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아예 정해 줬어. 이거랑 이거랑. 이거 중에 고르라고.”

펜로즈 삼각형을 비롯해 펜로즈의 계단, 뫼비우스의 띠 등 불가능한 물체들이 그려져 있는 그림을 보고 강운종이 정색을 했다.

“아. 뭐 이런 개떡 같은 게 다 있어? 이걸 어떻게 만들어요. 그냥 스퀘어 케이크 위에 그림으로 그려야지.”

병철이 설명해주었다.

“그건 너무 쉬운 답변이잖아. 화가가 어제 그건 안된다고 했을걸.”

“그래서 진혁 쉐프님, 어제 이걸 만들었다고요?”

진혁은 스마트폰에 알림이 울리기 직전 폰을 꺼냈다. 비서가 연락을 했는지, 화가 본인이 진혁에게 연락을 해온 것이다.

그는 진혁이 전화를 받자마자 따발총처럼 쏘아붙였다.

「이봐, 귀찮게 하지 말라고. 나는 자네처럼 한가한 이십 대 청년이 아니야. 당장 1분 1초가 아까운 예술가란 말일세. 케이크를 다 완성한 게 아니면 전화하지 말라고 했잖아.」

날카롭고 짜증 섞인 목소리에

「예.」

「예가 뭐야, 예는. 자네가 무슨 소리를 해도 더 이상 조건을 완화해 줄 수는 없어! 내가 인정할 수 있을 만큼 내 그림과 똑같은 케이크를 만들어 오라고.」

「지금 만들어서 가고 있습니다.」

「뭣?!」

「병실 출입 가능 목록에 제 이름을 올려주시거나 라운지로 내려오시죠.」

「… 21층 1035호로 올라와.」

◈          ◈          ◈

21층은 VIP 병실이었다.

출입이 허가되지 않은 민병철과 강운종은 아예 21층으로 올라갈 수조차 없었다.

“그럼 아래층에서 기다리고 있어. 금방 내려갈 테니까.”

끝내 케이크의 실물을 보지 못한 병철과 운종이 아쉬워했다.

“으, 포장하기 전에 보여 달라고 하는 건데.”

“지금 보여줘서 잘 되면, 나중에 이거 우리 가게에서도 파는 거예요? 저도 같이 만들어요?”

진혁이 가볍게 말했다.

“예술가들이란 워낙 변덕스러운 사람이니까 어떻게 될지 모르지. 일단 보여 주고 나서 어떻게 되는지 알려 줄게.”

진혁은 한 손에 케이크 상자를 들고 성큼성큼 계단을 걸어 들어갔다.

강운종이 중얼거렸다.

“무슨 소원을 말할지 궁금한데요.”

병철이 어깨를 으쓱했다.

“뭐… 이 케이크를 우리 가게에서 팔게 해달라, 그런 거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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