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님의 베이커리-396화 (395/656)

제 396화

백인 남자는 임진혁과 다른 일행들을 끌고 그 카페를 나왔다.

자판기와 벤치가 놓인 라운지가 보였다.

그는 힘차게 임진혁의 손을 잡아 흔들었다가 눈을 둥그렇게 떴다.

「이봐, 보기보다 힘이 좋은데!」

별달리 힘을 주지도 않았던 진혁이 미간을 좁히며 웃었다.

「하하.」

‘여기서 그냥 죽어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것 같은데.’

그는 남자의 체내를 살짝 훑어보았다. 전반적으로 문제는 없었으나 콩팥이 엉망진창이었다. 임진혁은 예전에 진희의 조언을 받아 개발해 냈던 신장 치료용 식이를 떠올렸다.

‘염분과 인이 적은 음식을 먹어야 하니까…, 당연히 도넛처럼 튀긴 음식은 안 되지.’

그는 진혁에게 취향을 묻지도 않았다. 환자복 겉에 걸친 조끼 주머니를 뒤져 동전을 꺼내더니 그대로 자판기에 집어넣었다.

「진료를 받으러 온 것 같지는 않고…, 병문안 온 거지?」

따르륵, 경쾌하게 동전이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콜라 캔을 뽑았다.

「자.」

진혁은 콜라를 받아 캔을 땄다. 치익 하는 소리가 나며 하얀 거품이 뿜어져 올라왔다. 강운종과 민병철은 무시당한 채 그대로 뒤에 서 있었다.

남자는 제멋대로 자기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가 얼마나 바쁘고 중요한 사람인지 아느냐고. 지금 이런 데서 쓸데없이 시간 낭비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란 말이지. 당장 그림을 그리러 가야 한단 말이야. 그리고 그림을 그리려면 커피도 마시고 도넛도 먹어야 한다고….」

그는 스마트폰을 들어 자신이 그린 그림들을 보여주었다.

거칠어 보이는 생김새나 커다란 덩치와는 달리 섬세해 보이는 추상화가 대부분이었다.

현대 미술에 조예가 없는 진혁은 별말 없이 그 그림들을 구경했다.

“뭔 선을 좍좍 그어 놨네요.”

강운종이 조그맣게 속삭였다.

“잠깐만, 너희 둘 다 조용해 봐.”

함께 그 그림을 본 민병철이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그는 입을 벙긋거리며 진혁과 운종의 옆구리를 찔렀다.

“이 사람 엄청나게 유명한 미술가야.”

미술에 대해 문외한인 진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청산가리를 먹고 죽어 나자빠지더라도 그건 내 선택이지. 먹고 싶은 걸 먹는 건 내 마음 아니야? 그런데 왜 도넛을 안 팔아?! 하다못해 의사가 와서 먹지 말라고 하면 몰라. 내가 왜 시급 8달러짜리 멍청한 라틴계 카페 직원한테 음식을 안 팔겠다는 소리까지 들어야 해! 그 새끼들은 그냥 자기들이 책임지기가 싫은 것뿐이야.」

마음속에서부터 울려 나오는 깊은 분노가 절절하게 느껴졌다.

‘한강에서 뺨 맞고 종로에서 화풀이하는 셈인가.’

젊은 나이에 성공하여 평생 자신이 우월하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던 인간이 처음 좌절을 겪었을 때 보통 이런 반응을 보인다.

‘강호에 출두한 후 세상에 자기 말고도 고수가 있다는 걸 처음 깨달은 풋내기 정파 놈들이 이런 식으로 화를 내지.’

끓는 용암처럼 치솟는 울분을 토해내고 있지만 사실 그 대상은 카페 직원이 아니다. 자신의 질병, 나아가서 그런 질병 따위에 걸려 버린 자신이 싫은 거다.

백인 사내가 콜라 한 캔을 앞에 놓고 한탄하는 동안 세 한국인은 멀뚱멀뚱하니 앉아 있었다.

“이 사람 말이 진짜라면, 이 분 그림 한 장에 20억이 넘어. 현대미술의 대가라고 불린단 말이야.”

민병철이 속삭였다.

남자는 진혁에게 그림 몇 장을 더 보여주었다.

「이것 봐. 내가 병을 앓고 난 다음부터 화풍 자체가 완전히 바뀌었다고.」

크고 작은 둥근 원색 원이 겹쳐 보이던 그림은, 어느 순간부터 검붉은 어둠을 배경으로 하였다.

그 모양을 들여다보던 진혁이 말했다.

「이 그림말인데요」

「엉?」

「레드벨벳 케이크 색깔하고 딱 똑같습니다만.」

「하아?」

「여기 이건 데빌스 푸드 케이크하고 똑같고요.」

원색에서 짙은 적갈색과 검붉은 색깔로 넘어오면서, 초콜릿 케이크와 비슷한 빛깔이 되어 버렸다. 백인 화가가 양쪽 어깨를 들썩이며 말했다.

「아니, 내가 좋다 멋지다는 평가는 엄청나게 많이 들었는데. 케이크하고 똑같은 색깔이라는 말은 처음 들어보네!」

「이거 케이크로 만들면 재밌겠는데요.」

「말도 안 되는 소리!」

백인 사내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 기하학적인 모양을 봐. 이걸 어떻게 케이크로 만들어? 나도 소싯적에 베이킹은 좀 해봤다고. 이게 6인치나 9인치 팬에 반죽을 부어서 만들 수 있는 종류의 음식이 아니야.」

「100% 장담하십니까?」

「당연하지! 절대로 만들 수가 없어. 초콜릿 공예나 설탕 공예라면 이런 걸 만들 수 있을지도 몰라. 하지만 케이크는 정말로 무리라고!」

화가가 주먹을 꽉 쥐고 허공에 휘두르면서 말했다.

「그럼 제가 만들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허! 재미있는 소리를 하네. 만들 수 있으면 어디 만들어 보게나.」

백인 사내는 감정 기복이 심했다. 그는 순식간에 표정을 바꾸며 빙글빙글 웃었다.

「내기하죠.」

「내기?」

진혁이 명함을 내밀었다.

「저는 이런 사람입니다. 제가 케이크를 그림과 똑같이 만들어내서 어르신이 인정하신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뭐, 내 그림이라고 한 장 달라고 하려고! 허, 참! 마음대로 하게나. 원하는 걸 뭐든지 하나 들어주지. 대신! 자네가 져도 내가 원하는 걸 하나 들어 줘야 해.」

그는 자신이 이길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물론입니다.」

「이 연작 다섯 개 중에 하나 고르게나. 그 정도는 해 주지, 훗훗훗…. 심심한데 재미있는 일이 생겼어.」

아까 진혁이 레드벨벳 케이크와 비슷하다고 했던 그림이었다. 그가 고개를 마주 끄덕였다.

「좋습니다.」

연락처를 교환하고 백인 사내는 흥겨운 콧노래를 부르며 사라졌다. 강운종이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며 물었다.

“저 사람이랑 뭘 하기로 한 거예요?!”

민병철이 벤치에 등을 기대며 말했다.

“진혁아. 일부러 노린 거야?”

“뭘?”

“미스터 밥은 자기 그림이 재생산되지 않도록 판권을 절대 팔지 않는 거로 유명해. 그런 그의 그림을 케이크로 만든다면 전 세계적으로 화제가 될 거야! 내기에 이기든 지든 간에 넌 이미 이긴 거야.”

병철이 히죽히죽 웃으며 양 손뼉을 맞부딪혔다. 강운종이 말했다.

“케이크라 그런가?”

“응?”

“명화가 프린트된 머그잔이나 포스터 같은 건 남지만, 케이크는 먹어 버리면 없어지잖아요. 그래서 허락한 거 아닌가 하고.”

진혁이 말했다.

“그냥 심심해서 그런 거 같은데.”

말하면서도 계속 텍스트 메시지를 보내는 모습에 민병철이 물었다.

“미국에 있는 제과주방 알아보는 거야?”

“아니, 미미 씨한테 문자 보내고 있어.”

“…부뚜막에 늦게 올라간 고양이가 발 데는 줄 모른다더니…, 네가 나한테 이럴 줄은 몰랐다.”

병철이 뜨악해하며 말했다. 진혁은 상관하지 않고 말했다.

“미미 씨도 아는 화가인가 본데?”

“당연히 알겠지! 현대 상식이라고. 미미 씨 같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면 더 잘 알걸? 그림 대부분이 고가에 팔려서 중국에 가 있을 거야.”

강운종이 물었다.

“그런데 우리 여기 카페 빵이랑 커피는 안 먹어 봐도 돼요? 원래 그거 하러 온 건데.”

“운곰이가 말 잘했네, 어서 가자.”

“헤헤.”

그들은 카페로 향했다. 다시 줄을 섰을 때 이번에는 아무도 소란을 피우는 이가 없었다. 강운종은 큰맘 먹고 물었다.

“여기 있는 빵 종류별로 다 시켜봐도 돼요?”

“너, 다 먹을 수는 있어?”

“당연하죠.”

“저 도넛 크기를 봐도?”

“어….”

한국의 머핀이나 도넛보다 크기가 조금 더 컸다. 주먹보다 한참 더 큰 도넛을 보고 운종이 말했다.

“저 빵 세 개만 먹어도 돼요?”

“그래, 먹을 수 있을 만큼만 시켜.”

반면에 임진혁은 시킬 수 있는 모든 종류의 빵을 전부 다 주문했다. 민병철이 물었다.

“넌 다 먹을 수 있어?”

“당연히 먹을 수 있을 만큼만 시켰지.”

“대단하네.”

빵의 종류는 지극히 기본적인 것밖에 없었다. 베이글과 초콜릿 도넛, 그리고 일반 도넛과 머핀 정도다.

하지만 당뇨병 환자를 위한 특별한 도넛이라거나 신장병 환자를 위한 저염 머핀 따위가 있어 보기보다 종류가 많았다.

실제로 메뉴에 올라와 있는 것보다 주문할 수 있는 빵은 훨씬 많은 것이다.

저염 머핀을 한 입 먹어본 강운종이 평했다.

“이거 특별히 환자용으로 내지 않아도 일반 사람들도 잘 먹을 거 같은데요? 적당히 싱거운 게 씹는 질감이 조금 달라서 나름 맛있는데.”

“그래? 일부러 환자 느낌 나지 않게 하려고 메뉴에서 뺀 건데.”

“진혁이 말이 맞아. 아까 그 사람도 봤잖아? 그냥 개인정보 공개하게 사인해달라는 거에 엄청나게 까탈스럽게 반응하면서 화내는 거. 아프다는 것만으로도 사람이 예민해진다고. 당신은 이 병이 있는 환자니까 이걸 드세요. 하고 메뉴에 티 나게 올려놓는 건 좀 그래.”

“미국은 우리나라하고 좀 다를 줄 알았는데.”

“사람 사는 데는 다 비슷하지. 그러니까 우리가 진출해서 빵도 팔고 그러는 거야.”

강운종이 짧게 평가했다.

“그런데 이 빵은 조금 잘 모르겠어요. 뭐가 다른지를 모르겠는데.”

“그건 단백질을 먹으면 안 되는 희소병 환자들을 위해서 만든 빵이야.”

“밀가루에 단백질이 들어가요?”

“많이 들어 있어. 쌀에도 있고. 그래서 저단백 밀가루로 특별히 만들어서 파는 거지.”

민병철이 말했다.

“이 저단백 밀가루는 팔면 팔수록 손해야. 원가가 너무 비싸서.”

“아니, 그러면 팔면 안 되는 거 아니에요?”

진혁이 정정해주었다.

“그런데 이 빵을 팔지 않으면 어떤 사람들은 아예 빵이란 것 자체를 먹을 수가 없거든. 선천적으로 단백질 분해 효소가 없는 사람들이야. 어렸을 때 죽는 경우가 많아서 어린애들이 많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홀짝홀짝 마시며 민병철이 말했다.

“이 커피도 병원 카페치고는 정말로 괜찮은 편이야.”

“직원들이 고생을 많이 했네. 보너스라도 좀 챙겨줘.”

“이제 막 오픈했는데 보너스는 너무 일러!”

“그러면 3개월? 그때 봐서 이 맛이 유지되면?”

“그 정도면 나쁘지 않지.”

◈          ◈          ◈

그날 밤 숙소로 돌아온 진혁은 여느 때처럼 영상 통화를 걸었다.

「…그래서 그런 내기를 하기로 했습니다.」

미미가 단호하게 말했다.

「주방이 필요하시겠군요!」

「아.」

「제가 섭외할게요. 미국 쪽이라면 할아버지께서 아시는 분이 있으실 거예요.」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전에 알던 친구가 있거든요.」

「아! 안토니오 씨가 거기에 계시지요?」

「…제가 안토니오 이야기를 했던 적이 있습니까?」

「어머나, 호호호」

영상 통화 너머의 미미가 꽃처럼 화사하게 웃었다.

「환자들을 위한 레시피를 개발해서 그냥 넘겨주신 인터뷰 말이에요. 유명하잖아요.」

「아.」

「진혁 씨처럼 능력도 좋고 마음도 따뜻하신 분은 또 따로 없을 거예요. 이번에 화가님의 케이크 레시피도 공개하실 예정이신가요?」

전혀 생각지 않았던 질문에 진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딱히 상관없습니다만.」

「그래요, 그러면 공개하는 편이 좋겠어요! 캐릭터 유지도 되고요. 그리고 발표는 어디서 하실 거예요? 제가 최고의 무대로 만들어 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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