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95화
꾹꾹 밟아주면서 전신의 진기를 순환시켜 주자 핏기없던 창백한 안색에 점차 핏기가 돌아왔다.
점차 분홍색이 된 얼굴이 일그러지며, 고통스러워 보이던 표정이 더 찌그러졌다.
눈을 꼭 감고 있던 남자가 눈을 번쩍 떠서 임진혁을 올려다보았다.
이미 진혁은 발을 뗀 후였다.
「크으윽, 으윽….」
남자는 진혁을 올려다보며 무어라 입을 벙긋거렸다. 의식이 돌아온 것을 확인한 진혁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됐다.”
이 남자는 죽지 않을 것이다.
그는 화장실 벽에 설치되어 있는 비상용 붉은 벨을 눌렀다.
「B3 번 화장실입니다. 50대 백인 남성, 일시적으로 심장이 멈춘 것처럼 보입니다만 다시 회복하고 있습니다. 가슴 마사지 후 의식을 되찾았습니다.」
「심폐소생술을 시행하셨습니까?」
진혁은 아주 잠깐 망설였다.
「…예.」
「저희가 도착할 때까지 곁에서 지켜봐 주십시오! 혹시 모르니 의식을 되찾았다면 계속해서 말을 걸면서 그 자리에-.」
구급 요원의 조언을 들으며 진혁은 그 자리에서 슬금슬금 뒤로 물러났다.
귀찮은 일은 딱 질색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는 화장실에서 나오면서 이쪽으로 달려오는 구급대원들과 마주쳤다.
「이 안에 쓰러진 사람이 있다는 신고를 받았습니다! 혹시 신고자입니까?!」
「아니요.」
그는 잽싸게 그 자리를 피했다. 그저 보법을 살짝 밟았을 뿐이지만 평범한 사람들을 피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슬금슬금 걸어 나오자 어리벙벙하게 서 있는 강운종이 보였다.
“저기 무슨 일이 있나 봐요. 테러라도 생긴 건 아니겠지.”
“강운곰, 테러는 무슨 테러야. 그냥 누가 한 명 쓰러진 거지.”
“아니, 왜 임진혁 쉐프님까지 절 그렇게 부르세요?!”
“강운곰 맞잖아.”
“으으.”
민병철이 말했다.
“네가 간 화장실 쪽으로 가길래 혹시나 했다.”
“뭐야, 난 줄 알았어?”
“오는 도중에도 비행기에서 한숨도 안 자고 일했잖아? 오기 전에도 며칠 동안 계속 작업했고. 혹시 과로로 쓰러졌나 했어.”
진혁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사나흘 정도야 잠을 안 자도 쌩쌩해. 미미 씨가 차 보내줬으니까 저쪽으로 가자.”
“오! 리무진!”
병철이 반색했다.
◈ ◈ ◈
병원은 그렇게 멀지 않았다.
난생처음으로 리무진을 타보는 강운종은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즐거워 보이기보다는 괴로워 보였다.
“편하게 앉지그래?”
“이거 쿠션 망가지면 물어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임진희 같은 반응이 일반적인 게 아니구나.’
진혁은 새삼스럽게 생각했다. 막연히 이 녀석도 사진을 찍거나 하면서 즐거워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두려워하고 불편해한다.
병철이 조언했다.
“그냥 즐겨.”
“으으.”
굳어있는 운종과 다르게 병철은 푹신푹신한 쿠션에 몸을 내맡기고 태평하게 누워있었다. 미니바에서 음료를 꺼내서 운종에게 마시라고 내밀기도 했다.
크림 소다를 홀짝홀짝 마시며 운종이 말했다.
“이거 맛있네요. 좀 밀키스 같은데 크림 맛이 진해서 맛도 다르고.”
뚱뚱한 캔을 만지작거리는 소년은 아까보다는 조금 편해 보였다.
“내가 비행기도 타 보고. 미국에도 와 보고. 심지어 리무진도 타고 있다니 믿을 수가 없어요.”
“뭘 믿을 수가 없어?”
“그냥 내가 여기 와 있다는 거요.”
“하하.”
공항에서 두어 시간 정도를 달리고 나자 금방 도착했다. 새까만 쿠션을 만지작거리던 운종이 아쉬워했다.
“빨리 내리니까 아까워요.”
“하하, 사진이라도 찍지그래?”
“아. 촌스럽게 그런 짓을 어떻게 해요.”
진혁이 피식 웃었다.
“그런 사람도 있어.”
민병철이 덧붙였다.
“언제 또 이런 걸 타 보겠냐. 이럴 때 찍어서 SNS에 올려서 자랑하는 거지.”
병원은 크고 깨끗한 현대식 건물이었다. 여섯 개의 커다란 빌딩이 나눠져 있어 마치 학교처럼 보이기도 했다.
“의과대학이 함께 있는 교육병원이기 때문에 규모가 커요.”
이전에 여러 번 출장 왔던 민병철이 앞서서 안내했다.
“그래서 여기에만 지점이 3개나 있지요. 응급실 앞에 있는 카페가 제일 규모가 큽니다.”
“그러면 거기부터 가죠.”
카페는 보기보다 컸다. 목재 바닥에 바 형태로 늘어서 있고, 별도로 테이블과 의자 역시 마련되어 있었다.
“총 80석이죠.”
매장 안쪽에서 부지런하게 커피를 내리고 있던 남자가 민병철을 알아보았는지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짙은 피부와 눈썹, 오뚝한 코를 보면 라틴계로 보였다.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세요.」
「멀리서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뭔가 도와드릴 건 없습니까?」
「아니요, 아니요.」
말은 그렇게 하지만 바빠 보였다. 빈 좌석도 하나도 없고, 손님들이 가득하다. 하얀 가운을 입은 이들이 한 손에 커피를 들고 나갔다. 색색의 간호사복을 입은 사람들도 도넛과 커피를 주문했다.
화환이나 플랜카드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눈치를 보고 있던 강운종이 중얼거렸다.
“별로 개업식 같지는 않네요.”
병철이 속삭였다.
“사실 여기는 워낙 위치가 좋아서 뭔가 행사를 할 필요가 없어. 맛있는 걸 팔 필요도 없고. 한강 둔치 같은 곳이지. 입지로는 완전히 최적이야.”
“그래요?”
“응급실은 원래 식사를 제공하지 않거든. 2~3시간 내로 퇴원하거나, 아니면 입원실로 올라가거나 해야 해. 하지만 여기 응급실에는 정말 심각한 사람들 아니면 약물 중독자들이 와. 그리고 여기는 병원 카페이니만큼 이번에 특별한 시스템을 채용했어.”
진혁이 흐뭇해하며 말했다.
“진희가 개발하는 데 도움을 많이 줬지.”
“뭔데요, 그게?”
민병철이 설명해 주었다.
“환자가 음식을 주문할 경우에는 체크를 하게 되어 있어.”
“아니, 왜요? 아픈 것도 서러운데 뭘 확인까지 해요.”
“당장 만성 신부전 환자가 있다면 그 사람은 치즈나 햄, 소시지나 핫도그 같은 걸 먹으면 안 된단 말이야. 염분이 많이 함유되어 있어서 잘못 먹으면 쓰러질 수 있거든.”
“아.”
“미리 개인 정보를 공유하기로 한 환자만 카페에서 음식이나 음료를 주문할 수 있어. 이 카페가 잘 되면, 당장 이 카페만이 아니라 미국 전체에 입점하는 병원 식음료 가게의 패러다임 자체가 바뀔걸.”
“우와. 뭔지 잘 모르겠지만 대단하네요.”
“이렇게 계속 설명하고 있는데 뭔지 모르면 안 되지!”
“붕어빵을 파는 게 아니라 붕어빵 기계를 만들어 판다는 거잖아요.”
“어, 비슷해. 기계가 아니라 그 기계를 만드는 시스템이지만.”
병철이와 운종이가 티격태격하는 것을 보며 임진혁이 말했다.
“두 사람, 죽이 잘 맞네.”
“무슨 소리야.”
“병철 아저씨는 너무 똑똑해서요.”
“잠깐, 왜 진혁이는 쉐프님이고 나는 아저씨지.”
강운종이 도움을 요청하는 듯한 표정으로 임진혁을 빤히 바라보았다. 진혁이 정정해 주었다.
“병철 이사님.”
“아.”
“놀러 온 게 아니라 일하러 온 거잖아? 일 관계로 만난 사람에게는 적절한 호칭을 써야지. 강운곰.”
“…강운곰은 적절한 호칭이 아닌 것 같은데요.”
“괜찮지 않나? 잘 어울리고.”
멸치나 너구리, 다른 애들이 전부 강운곰이라고 불러 대니 그 이름이 익어 버렸다.
진혁이 적당히 넘겨 버리자 민병철이 눈을 가늘게 떴다.
“대표님부터 모범을 보여야 꼬마 제과제빵사들이 본을 받지.”
임진혁이 키득 웃었다.
“원래 한국 남자는 군대 갔다 오면 다 아저씨야. 받아들여.”
“하아.”
“그것보다 우리도 주문을 하자.”
원래 일정은 주방 내의 시설을 점검하고, 안쪽을 둘러보는 것이었다. 간단한 한국식 개업식도 할 예정이었다. 병철이 반문했다.
“고사는 안 지내고?”
강운종 역시 조심스럽게 물었다.
“지금 바빠 보이는데 저도 가서 도와야 하는 게 아니고요?”
하지만 진혁이 고개를 저었다.
“이제 막 개업해서 손님이 밀려 들어오고 있는 와중에 그런 형식적인 인사치레를 할 필요는 없어. 차라리 개업하기 전날에 왔으면 모를까. 우리가 일정을 아예 잘못 잡은 거지.”
“아.”
“그리고 좁은 주방에서 뭘 해. 오히려 방해지. 운곰이 너 영어 못하잖아.”
“윽.”
비행기 안에서 초급 영어 회화 교재를 뒤적이는 것을 보았다.
안녕하세요와 감사합니다를 간신히 외우는 수준이니 여기서 일을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본점에서 꽤나 고무적인 성과를 보였기 때문에 견문을 넓히기 위한 목적으로 겸사겸사 데려왔을 뿐이다.
“지금 여기는 일을 하러 온 게 아니라 배우러 온 거야.”
“넵!”
“여기 사람들이 제대로 일하는 걸 봤으니까, 맛만 보고 다른 지점으로 가자.”
“알았어.”
그들은 특별 대우를 요구하지 않고 일반 손님처럼 줄을 섰다.
“생각보다 줄이 길어요.”
“저쪽에 익스프레스 라인은 뭐예요? VIP 라인?”
“아니야, 저건 수술실이나 응급실에서 온 의료진이 바로 음료만 받아가는 데야.”
“진짜 병원 친화적으로 만들어 놨네요.”
진혁 일행의 바로 앞에는 환자복을 입고 링거를 단 남자가 서 있었다. 100kg은 되어 보이는 거구에 환자복 단추가 제대로 잠기지 않아 복부 역시 일부 드러난 상태였다. 사람들이 빠져나가고 바로 앞에 있던 환자가 주문을 했다.
「아메리카노하고 도넛.」
라틴계 직원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죄송합니다만 환자분의 경우에는 병원 정책상 음료나 음식을 구입하시기 전에 상기 동의서에 서명하셔야 하는데요. 괜찮으시겠습니까?」
레슬링선수처럼 덩치가 큰 환자는 어울리지 않는 가느다란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아니, 도넛을 사는데 왜 개인정보를 확인해? 여기 도넛이 맛있다고 해서 와봤더니만!」
「정말로 죄송하지만, 저희는 병원의 방침상….」
「병원이 알고 있는 개인 정보는 전부 내 사생활이잖아. 달랑 커피 하나하고 도넛 하나 사는데 내 혈액형이나 수혈 내용 따위가 왜 필요해? 이 변태적인 가게 같으니라고!」
강운종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저 사람이 뭐래요?”
“이런 식으로 화를 낼 수도 있군.”
임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민병철이 어이없어하며 말했다.
“아니, 동의하기 싫으면 그냥 안 사면 되잖아. 도대체 뭐가 문제야.”
「손님, 죄송합니다. 저희는….」
「이런 개잡놈의 새끼들이, 사람을 차별해 가면서!」
환자는 오른손을 높게 치켜들었다. 금방이라도 눈앞에 있는 직원을 후려치려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는 막 팔을 휘두르려다가 깜짝 놀랐다.
「뭐, 뭐야.」
그 팔이 어디에 끼기라도 한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뒤를 돌아보았다.
「어떤 놈이야?!」
「미스터.」
임진혁이 빙긋 웃었다. 그는 환자가 눈치채지 못한 사실을 지적해 주었다.
「팔에서 피가 나는데요.」
흥분해서 팔을 추켜올린 탓에 링거에 연결되어 있던 수액 줄 역시 딸려 올라가서 혈액이 역류하였다. 완연히 핏빛으로 붉어진 수액 줄을 보고 방금 전까지 화내던 사내는 당황해서 두 눈을 껌뻑거렸다.
「이런 젠장할!」
「그냥 팔을 내리시면 됩니다.」
「어어?」
예전에 병원에 누워 있던 기억을 토대 삼아 진혁이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심장보다 수액 줄이 낮은 데에 있으면 중력의 힘으로 수액이 다시 나오니까요.」
그는 굳이 자신이 이 카페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 피가 멈추고 다시 수액 관이 투명해지자 사내는 호탕하게 임진혁에게 말했다.
「이거 참, 고맙네! 내가 내 커피는 못 사더라도 자네 커피는 사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