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94화
“아니, 결혼식…?”
‘설마 그게 청혼이었나?’
진혁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하마터면 죽일 뻔했다는 생각을 하느라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했다.
‘조금 이른 거 아닌가. 요즘 어린애들은 이렇게 진도가 빠른가? 아니면 내가 너무 늙어서 현대에 맞추지 못하고 있는 건가?’
이제 막 적응했다 싶으면 또 다른 문제가 터져 나온다. 진혁이 눈썹을 꿈틀거리는 동안 진희가 다시 한 번 상기시켜 주었다.
“왼손 약지잖아. 누가 그냥 반지를 거기다 끼냐고.”
“약지….”
진혁이 알던 의미와는 다르다.
분명히 현대에서는 그런 의미를 지니지만, 무림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약지는 진정한 우정을 상징하잖아. 그래서 헷갈렸는데.”
“뭐? 어디서 그래?”
무림에서는 그랬다.
엄지손가락에 반지를 끼고 있는 자는 오직 가문의 가주 뿐이다. 반면에 제일 자주 사용하는 검지에 반지를 낀다면 이는 열렬한 사랑을 하고 있다는 뜻이다.
중지는 결혼을 한다는 의미이고, 약지 손가락은 영원한 우정을 의미한다. 새끼손가락에 반지를 끼고 있다면 자신은 연애할 생각이 없다는 뜻이다.
진혁이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천마> 드라마에서 그랬어.”
“아.”
어머니가 피식피식 웃었다.
“그 드라마에 출연한 배우니까 그렇게 오해할 수도 있겠다.”
진혁은 손가락에 끼고 있는 반지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얼떨결에 받아 버렸는데.’
어머니나 아버지, 진희는 평소에 지나치게 가까이 접근하지 않았다. 가끔 진희나 모친이 등짝을 후려치려고 접근할 때가 있지만 그 전의 예비 동작이 크기 때문에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이번에 미미가 가까이 접근할 때에는 그 동작의 목적을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순간적으로 과잉 방어 정확히는 과잉 공격을 할 뻔했다.
진혁은 과거에 있었던 비슷한 일을 돌이켜보았다.
한때 천하제일마로 불리며 초마의 경지에 들어 일월신교의 교주로 수십 년을 지냈다.
당연히 광안마를 비롯한 측근들이 온갖 여자들을 소개해 주었다.
처음에는 차 마시는 약속 정도였다.
하지만 그가 계속해서 거절하자 나중에는 점점 더 정도가 심해졌다.
업무 보고를 한다고 해서 집무실로 갔더니 느닷없이 칠현금을 켜는 미녀가 기다리곤 했다. 복도를 걷기만 해도 우연처럼 수많은 여인들이 튀어나왔고, 식사할 때는 물론이며 침실로 돌아가도 여기저기에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는 그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찾아오는 여인들과 모두 대련을 해주었다.
나중에는 무술 실력을 늘리고자 하는 목적으로 자꾸 오는 여고수까지 있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콜라를 몰랐다.
아무도 진혁에게 이렇게 가까이 접근하지 못했다.
‘거대한 섭리는 나에게 회귀라는 기회를 주었지….’
선도를 걷는 이들은 깨달음을 얻으면 육체를 버리게 된다. 그들의 목표는 도를 닦아 우화등선(羽化登仙)하는 것이며 선계(仙界)에 도착한 이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다.
초마의 경지에 이른 것도 그가 처음이었기 때문에 일월신교의 교도들은 최초로 마선(魔禪)이란 단어를 만들어냈다.
하지만 진혁은 지금 여기, 현재에 있다.
마선이 되어 등선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원래 있어야 할 세상, 가족 곁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여기서는 오히려 더 외로웠다.
이곳에서는 아무도 일월을 섬기지 않았다. 그가 수련하고 싸워서 이겨왔던 그 모든 기억들은 전부 서랍 속에 묻어야 할 옛 추억으로 전락해 버렸다.
다시 내공을 쌓고 무공을 익혀와 이전의 수준을 되찾고 심지어 초월하기까지 했지만,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심지어 가장 가까운 가족에게도 밝히지 못했다.
‘그렇지만 그녀는 도산검림이 좋다고 했지.’
알 수 있을 리가 없는 그의 이야기를 누구보다도 더 사랑하는 사람이다.
도저히 거절할 수가 없다.
진혁은 반지 위의 보석을 가만히 손으로 쓰다듬었다. 차갑고 딱딱한 감촉이 날카롭지만 따스하게 마음 한구석을 적셔왔다.
“내가 삶을 누군가와 함께 하고 싶다고 생각하게 되다니. 이것이 전부 섭리의 뜻인가?”
진혁이 세상의 모든 이치를 이해하고 통달하였으며 초월한 현자처럼 먼 곳을 보며 중얼거렸다.
“무슨 섭리 같은 소리야. 그럼 평생 모태 솔로로 살 셈이었어?”
진희가 핀잔을 주었다. 어머니가 부드럽게 웃었다.
“진혁아, 엄마는 그 아가씨 좋더라. 우리나라 사람이 아니라서 조금 걱정했는데, 한국말도 열심히 연습해 왔고. 무엇보다 널 바라보는 시선이 아주 따뜻하더라.”
“뜨거워서 죽는 줄 알았지.”
“진희야.”
“네에, 네에.”
“일찍 결혼하는 것도 좋아. 한 번밖에 없는 인생이잖니.”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마음을 정했다.
“둘이서 의논하고 알려 드리겠습니다.”
“그래, 그래.”
◈ ◈ ◈
보름이 지났다.
열 몇 시간의 비행을 거쳐 드디어 로스앤젤레스 공항에 도착했다. 민병철이 시계를 보았다.
“지금쯤 저 앞에 데리러 왔을 거야.”
강운종이 눈을 껌뻑거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미국 공항이 우리나라 공항보다 더 좋을 줄 알았는데. 인천공항이 더 깨끗한 거 같아요.”
수화물 센터에서 조르르 달려간 운종은 낯익은 캐리어를 바로 잡아 꺼내려고 했다. 진혁이 제지했다.
“잠깐만. 그건 우리 거 아니다.”
“어, 하지만 똑같이 생겼는데요.”
민병철이 웃었다.
“태그를 보면 돼. 이름이 다르잖아.”
“아.”
진혁은 한 번씩 언뜻 바라보더니, 일행들의 캐리어를 바로 찾아냈다.
“자, 여기에 있다.”
“다 비슷비슷하게 생겼는데 어떻게 그렇게 금방 찾아요?!”
“뭐가 비슷해. 이건 여기 오른쪽 아래에 흠집이 있잖아. 저건 바퀴 위에 스크래치가 세 개 나 있고.”
“…보이지도 않는데요.”
민병철이 손을 휘휘 내저었다.
“이쪽으로 가자.”
비행기를 타는 것도 처음이고, 외국에 나온 것도 처음이다. 잔뜩 긴장한 강운종은 엄마 오리 뒤를 따라가는 새끼 오리처럼 임진혁의 뒤를 졸졸 따라갔다.
진혁이 뒤를 돌아보았다.
“너도 화장실 가게?”
“아, 아니요. 저는 짐 지키고 있을게요.”
“그래.”
졸졸 따라오던 아기 오리를 떼어놓은 후 진혁은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스마트폰을 꺼내 메시지부터 확인했다.
「♡」
짧고 달콤한 문자를 보자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 그는 바로 답장을 했다.
「♥」
‘이 정도는 쉽지.’
이번 답장은 임진희가 알려준 ‘메시지 하는 방법’의 원칙 세 가지를 전부 따랐다.
첫째로 메시지를 확인한 즉시 답장을 해야 한다.
둘째로 이 내용은 보낸 사람의 메시지와 유사한 내용에 비슷한 길이여야 하지만 같은 내용이어서는 아니 된다.
셋째로 문자의 내용은 긍정적인 내용인 편이 좋다. 부정적인 이야기를 할 때는 만나서 얼굴을 보고 하여 오해가 생기지 않도록 해야 한다.
답장을 보내자 바로 전화가 왔다.
「오라버니, 로스앤젤레스에 도착하셨어요?」
「방금 공항에 내렸습니다.」
「C7번 출구 근처에 리무진을 보냈어요.」
「…아니, 원래 카페 측에서 보낸 사람이 있을 텐데요?」
「오지 않아도 된다고 말씀드렸어요.」
「허허.」
진혁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는 아직 정식으로 비서를 고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황미미의 직속 비서관이자 부비서실장인 한 비서가 진혁의 스케줄을 맡아서 함께 관리하기 시작했다.
‘이거 편하네.’
마치 새끼 광안마를 다시 키우고 있는 것처럼 편했다.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요.」
「뭘요. 미국까지 개점 축하 행사를 하러 간 우리 예비 신랑님이 덜 피곤했으면 하는 마음인걸요. 같이 못 가서 미안해요.」
「하하.」
진혁이 웃었다.
「아 참! 아버님께 어떤 예물을 드릴지 결정했어요.」
전화기 너머에서 밝고 경쾌한 목소리가 통통 울렸다.
「전에 낚시를 좋아하신다고 했잖아요.」
전화기 너머로 보일 리가 없지만, 진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저번에 거제도에서 함께 낚시하러 갔는데 퍽 좋아하시더라고요. 취미 용품에는 웬만하면 돈을 아끼시는 편이니까, 이번 기회에 괜찮은 낚싯대를 사 드리는 것도….」
하지만 미미가 생각하는 스케일은 그렇게 작지 않았다. 전화기 너머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한국의 남해에 저렴한 섬이 있어서 이번에 하나 샀어요. 별장은 이제 막 올리기 시작했는데, 완성하는 데 두 달쯤 걸린대요. 낚싯배는 아무리 작은 거라도 2년 정도 걸린다길래, 이미 만들어진 완성품을 중고로 사서 운정호라고 이름 짓고 색칠을….」
임진혁은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
「그리고 어머님은 온천을 좋아하신다고 했으니, 온천지에 별장을 새로 지으려고 해요. 아무래도 말이 통하는 한국이 좋으실 것 같아서, 천안 쪽에 알아봤어요.」
「….」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진혁이 침묵하자, 옆 칸에서 누군가의 호흡 소리가 거칠게 들려왔다. 새액 새액 하는 소리가 스마트폰 너머 미미에게도 들렸는지 미미가 갑자기 다급하게 외쳤다.
「진혁 오라버니? 무슨 일 있어요?」
「괜찮습니다. 이건 옆에 있는 사람 소리에요.」
「휴, 다행이에요.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았어요. 요새 제트 랙이니 뭐니, 장시간 비행을 한 다음에 건강에 문제가 생기는 사람들도 있다고 하잖아요.」
「그럴 일 없습니다.」
「없기는요!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고 하잖아요.」
옆 칸에서 들려오던 새액 새액 소리는 점차 거칠어졌다. 그리고 커다란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쿵!
누군가 머리라도 부딪힌 것 같았다. 진혁이 무신경하게 전화를 끊으려고 하는데 미미가 전화기 너머에서 기겁했다.
「거기 괜찮아요?!」
「…별일 없을 겁니다. 내가 확인해 볼게요.」
‘기껏해야 자살 시도나 심장 마비일 텐데.’
진혁은 태평하게 스마트폰을 주머니에 집어넣고 화장실 칸에서 나왔다. 옆 칸의 문은 잠겨 있었다.
화장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손으로 살짝 당겨 문을 그대로 뜯어냈다. 본래 단단했을 경첩은 마치 강도에게 당한 것처럼 부서져 나갔다.
바닥에 가슴께를 움켜쥔 백인 남자가 쓰러져 있었다.
고통스러운 듯 눈알을 굴리고 있는데, 비명조차 내지 못하고 있었다.
‘아, 심장 마비인가?’
진혁은 태평하게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어떻게 할까.’
백인은 더 이상 눈알을 굴리지 못하게 되었다. 그대로 회까닥하고 흰자만 보였다. 거칠게 내쉬던 호흡 역시 멈추었다.
그대로 두면 몇 분 내로 사망할 것이 분명했다.
‘미미 씨가 나중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볼 텐데.’
적당히 둘러댈 수도 있지만, 아무래도 거짓말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때 평범한 사람처럼 대답하려면, 아무래도 이 사람을 이대로 죽게 내버려 둬서는 안 될 성싶었다.
그렇지만 바지를 내리고 허여멀건 한 엉덩이를 드러낸 채 앞으로 쓰러져 있는 이 남자와 불필요한 접촉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
진혁은 신발을 벗었다.
그리고 양말을 신은 채인 오른발로 사내를 뒤집었다.
“엿차.”
달걀부침을 뒤집는 것처럼 가벼운 동작이었다. 남자가 뒤집히자 은밀한 부분이 노출되었다.
진혁은 그 부분을 외면하고서 오른발로 남자의 심장 부근을 밟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