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92화
◈ ◈ ◈
다음 날 아침 일찍, 부모님이 아직 잠들어 있을 시각.
진희는 임진혁의 방문을 노크했다.
“자냐?”
“일어났어. 왜?”
“내 연근 식빵 피드백 좀 해 줘.”
“빵이 없는데.”
“여기 주방에서 빵을 구울 시간도 여유도 없었어! 아이디어 수준에서 평가해 달라고.”
“알았어.”
진혁은 의자에 앉아 노트를 넘겨 보았다. 어젯밤 급하게 만들었는지 두서없이 이것저것 적혀 있었다.
“그런데 그 연근, 일일이 만들기에는 손이 너무 많이 갈 텐데?”
“꿀은 따로 넣지 않고 그냥 찌려고 했는데.”
“그럼 맛없을걸.”
“으, 그럼 설탕물에 삶을까.”
“그것도 방법이지.”
연근 식빵만이 아니라 고사리나물을 넣은 달걀 샌드위치 등 다양한 아이디어가 있었다.
충분히 조언을 얻은 진희가 기지개를 켜며 물었다.
“야, 아무리 미미 씨가 고기를 좋아한다고 해도 내 앞에 순 채소만 밀어놓는 건 너무한 거 아니냐?”
진혁이 미간을 좁혔다.
“아닌데.”
“뭐?”
“웰빙 트렌드를 따를 수 있는 새로운 디저트를 개발한다며. 도움 될 만한 것들을 준 거야.”
“잠깐, 잠깐. 그럼 미미 씨한테 고기를 주려고 한 게 아니고….”
“채소. 우리나라에서 보기 힘든 방식으로 요리한 걸 먹어보라고 밀어준 거지.”
“….”
진희는 양손으로 자기 머리를 감쌌다. 생각을 정리해야 했다.
‘잠깐만. 새로 생긴 여자친구를 챙겨 주려고 맛있는 걸 눈앞에 갖다 주는 게 아니었단 말이지. 오히려 그 앞에 있던 걸 나한테 갖다 줬다고….’
“너희 사귀기로 한 것 아니었어?”
“음.”
“아버지가 어머니한테 먹을 것 챙겨 주는 모습 못 봤어?”
“봤어.”
“그거 보면서 아무 생각도 안 들었어? 맛있는 걸 챙겨 주지는 못할망정 눈앞에서 뺏어가는 사람이 어디에 있어!”
“음.”
“너 나한테 특강 좀 받자.”
그녀는 미미와의 사이에서 있었던 일을 하나하나 캐물었다. 그는 결국 어제 있었던 ‘매일 먹을 수 있게 케이크를 만들어서 갖다 준다’ 까지 털어놓았다. 임진희가 다시 한 번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 안으며 절규했다.
“으아아아. 으아아아아아!”
“….”
“사고를 친 건 넌데 왜 부끄러움은 내 몫이냐고!”
“아니, 그게 뭐가 문젠데?”
진희는 성심껏 눈높이에 맞춘 1:1 교육을 진행했다. 한참 동안 이야기를 하고 나자 진혁이 물었다.
“그래서 결론이 뭐야?”
“… 미미 씨가 널 많이 좋아하는 것 같아.”
진혁이 피식 웃었다.
“그건 나도 알아.”
“알면 너도 뭔가 행동을 해! 표현을 하란 말이야.”
“일주일 치 케이크를 매주 보내면 되잖아.”
진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야, 그 방법 말고 다른 걸 써봐.”
◈ ◈ ◈
「제과 주방을 사용해도 되냐고 요청했다고요?」
황미미가 물었다.
「예. 현재 호텔 제과주방은 비어 있습니다만…, 어떻게 할까요?」
손님이 갑자기 호텔의 주방을 쓰겠다고 하는 일이 흔한 것은 아니다.
임진혁의 일행 전체를 관장하고 있는 차석 비서인 한 비서가 곤란해하며 물었다. 미미가 싱긋 웃었다.
「뭔가 아이디어라도 떠오른 모양이네요. 당연히 마음대로 써도 된다고 말씀해 주세요.」
「그럼 오늘 함께 하시려고 했던 점심 식사는 취소할까요?」
「다른 미팅 스케줄을 잡으려고요?」
왕 비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전에 말씀하셨던 TV 프로듀서와의 일정을 당길까 합니다.」
「음… 임진혁 CEO님께 먼저 물어봐 주세요.」
「예?」
「작업이 얼마나 걸릴지, 식사는 함께 할 수 있을지 여쭤봐요.」
「알겠습니다.」
◈ ◈ ◈
호텔의 제과주방에 들어서면서 진혁은 주변을 눈여겨보았다.
‘구조 자체가 다르긴 하군.”
뜨거운 요리를 만드는 주방(핫 키친)과 차가운 요리를 만드는 주방(콜드 키친)은 구조부터 분리되어 있다.
점심 식사를 준비하는 이들은 부산스럽게 큰 소리로 떠들며 일하고 있었다.
사람이 아무도 없는 제과제빵 주방으로 들어선 진혁이 물었다.
「여기에 있는 식재료들을 사용해도 됩니까?」
「예.」
「감사합니다. 아 참, 그리고 이걸 추가로 부탁드리고 싶은데요.」
진혁이 부탁한 것을 듣고서 한 비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시려고 하시는 건가요? 한 병이면 되겠습니까?」
「아니요, 스무 병 정도는 필요합니다.」
진혁이 필요한 양을 손으로 그려 보여 주었다. 그는 주방 내부에 무엇이 있는지 살펴보았다. 제일 먼저 오븐을 확인하고 예열을 시작했다.
‘오븐을 사용하는 편이 좋겠지.’
아무도 없는 공간이라면 마음껏 날뛸 수 있겠지만 아쉽게도 바로 곁의 콜드 키친과 연결되어 있다.
그는 예열을 시작하고 바로 설탕과 밀가루를 섞기 시작했다.
등을 돌리고 있어 누군가 지나가다가 보면 손으로 젓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실상은 아무것도 쥐고 있지 않은 맨손으로 허공에 손가락을 까닥거리고 있을 뿐이다.
‘밀가루는 다 섞었고.’
동글동글하고 하얀 마시멜로를 섞은 다음에 완벽하게 섞인 밀가루와 설탕을 소스 팬에 올렸다.
이곳에 놓여 있는 버터의 종류를 확인한 후, 하나씩 코를 킁킁거려 냄새를 맡아 보았다.
그는 제일 지방 함유량이 높은 버터를 골라내어 팬 위에 올려놓았다. 버터는 순식간에 조르륵 녹아내려 아직 걸쭉한 반죽에 스며들었다.
코코아 가루까지 섞고 난 다음에 방금 전에 받아온 음료수를 부었다.
탄산이 공기 중에 날아가지 않도록 강기의 실이 음료를 꼭꼭 감쌌다.
이때 누군가 임진혁을 지켜보고 있었다면 음료가 중력을 거스르는 방향으로 치솟았다가 다시 내리꽂혀 소스 팬에 섞여가는 것을 발견했을 것이다.
보글보글 끓고 있는 반죽은 사실 소스 팬과 닿아 있지 않다.
진혁은 반죽이 바닥에서 받는 열 때문에 바닥이 타버리지 않도록 자주 젓는 대신에 그냥 바닥과 반죽 사이에 공기층이 생기도록 반죽을 허공에 띄웠다.
팬으로부터 직접적인 열을 받지 않고, 간접적으로 공기를 통해 온도가 올라가도록 했다.
‘흠. 이것도 재밌네.’
완전히 혼자 자신만의 공간에 있다면 허공에 반죽을 띄워놓고 염화기공을 사용해 익혔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쓰며 현대 기술과 무공을 병용하는 것도 즐거웠다.
“그리고 버터밀크.”
반죽 온도가 점차 올라가면서 진혁은 그 위에 다른 재료들을 추가했다.
버터밀크가 조르륵 튀어 올라 반죽에 합류했고, 베이킹소다 역시 즐겁게 퐁당 뛰어들었다. 바닐라 익스트랙트까지 들어가고 나자 소스 팬 위로 연한 바닐라 향기가 지글지글 끓어 올라왔다.
‘불길이 조금 약한가.’
그는 아예 가스 레인지의 가스를 껐다. 대신 뜨거워진 공기층이 반죽의 아래 절반을 감쌌다.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면서 반죽이 순식간에 금방 뜨거워졌다.
“좋아.”
그가 만든 반죽은 한두 개 분량이 아니었다. 진혁은 9인치 케이크 팬을 내려다보고서 잠시 고민에 잠겼다.
‘이 케이크는 너무 부드러운데.’
파운드 케이크처럼 위쪽에 무거운 것이 올라왔을 때 그 무게를 지탱할 수 있는 종류의 빵이 아니다.
그는 가스 레인지의 화구 여섯 개를 전부 켰다. 총 여섯 개의 소스 팬이 둥실 허공에 떠올라 화구 위에 내려앉았다.
프로스팅을 만들 차례였다.
초콜릿 글레이즈처럼 진한 색깔을 내야 하지만, 원래의 맛을 잃으면 안 된다.
버터와 코코아, 그리고 비밀 재료가 흑갈색으로 달아올랐다.
프로스팅을 만드는 동안 케이크는 오븐 안에서 조용히 익어갔다.
발효가 필요한 종류의 케이크가 아니기 때문에 시간이 훨씬 덜 걸렸다.
그는 스마트폰을 꺼내 연락했다.
「25분 내로 끝납니다. 점심을 같이 먹을까요?」
빵이 마저 구워지기를 기다리는 동안 주방을 깨끗하게 정리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애초에 도구를 사용할 때 세밀한 공기층을 비닐처럼 감아서 사용했기 때문이다.
청소는 1분 내로 금방 끝나버렸다.
그는 흐뭇한 마음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역시 무공은 쓸모가 많아. 이 정도면 빌려 쓴 정도 값은 충분히 했겠지.’
그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한쪽 구석에서 살아 있는 생명체의 기운을 느꼈다.
호텔 주방에 있어서는 안 되는 존재들이었다.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죽여도 되나?’
자신의 힘을 여기서 휘둘러도 되는 것일까?
그가 없었더라면 저 미물들은 이곳에서 행복하고 편안한 일생을 이어갔을 것이다.
‘원래대로라면 여행 와서 여기서 이걸 만들 일도 없긴 했을 거야.’
그녀를 위해서 특별한 케이크를 만들었다.
이것은 진혁이 스스로 내놓은 아이디어 중에서 임진희가 유일하게 통과시킨 안이었다.
‘보통 유려한 글솜씨로 시를 써서 바치거나 금을 켜면서 노래를 부르니까.’
그렇게 할 때, 여자와 남자 사이에는 엄청나게 두꺼운 병풍이 놓여 있기 마련이다.
그가 오랜 시간을 보낸 무림에서의 맞선 절차는 그랬다.
솔직히 그 정도의 맞선을 보는 것도 명문 세가의 여자 고수에게나 가능한 일이고, 보통은 부모들끼리 서로 사주를 쓴 편지를 주고받고 혼인을 한다.
진혁은 그때 생각을 하고서 평범하게 러브 레터를 써서 전달해주면 어떨지 제안을 해 보았다. 그래서 그가 쓴 편지 초안을 본 임진희는 쓰레기라며 박박 찢어버렸다.
‘쓰읍.’
연애를 해본 적도 없고, 화술이 좋아 누군가를 쉽게 유혹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평소대로 대하고 있을 뿐인데 임진희는 또 그게 아니라고 한다.
진혁은 바닥에 기어 다니던 벌레들에게 살기를 쏘아 보냈다.
‘자, 공포를 느끼고 멀리 도망가라.’
그는 겁에 질린 벌레들이 도망쳐서 다시 돌아오지 않기를 원했다.
하지만 그가 쏘아 보낸 미미한 살기를 받은 벌레들은 다들 그 자리에서 발라당 누워 죽어버렸다.
‘뭐야, 죽은 척하는 거야?’
유감스럽게도 죽은 척이 아니라 그대로 죽은 것처럼 보였다.
그는 나중에 위생 감사를 나왔을 때 벌레들이 발견될만한 위치에 있는지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사람이 눈으로 볼 수는 없는 위치였다.
‘태워버려야겠다.’
아주 조그만 불꽃이 곳곳이 일었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극히 미미한 재만이 남았다.
“씁.”
벌레를 죽이고 나니 예전에 저질렀던 살인들이 떠올랐다.
‘진희나 부모님, 미미 씨가 그 일을 알게 되면 어떻게 반응하려나.’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이들을 처리할 때 ‘살인’이라는 수단을 쓰는 현대인은 없다.
하지만 그에게 있어 ‘살인’은 너무나 쉬운 방법 중 하나였다.
그는 내심 자신이 현대의 기준에 맞지 않는 살인마가 되어버릴까 봐 경계하고 있었다.
‘저 벌레들을 죽이는 것도 거기에 들어가나?’
무림고수의 기감이 아니었다면 애초에 감지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주방에 있는 벌레를 죽였다고 말했을 때 진희가 어떻게 반응할지 상상해 보았다.
‘칭찬할 것 같은데….’
하지만 어머니는 다르다. 아파트 내에 날아 들어온 무당벌레를 살려 보내줄 정도로 선량하고 따뜻한 사람이다.
비가 멈춘 날, 거리의 도로 위에 굴러다니는 지렁이를 굳이 집게로 집어 흙 위에 놓아주는 분이다.
진혁은 간단하게 정리했다.
‘이건 죽을 때까지 숨겨야겠군.’
핑! 하고 오븐이 울렸다. 케이크가 완성된 것이다.
“이제 모양을 내 볼까?”
갓 오븐에서 나온 따끈따끈한 케이크는 칠흑처럼 검었다. 그는 냉각기도 사용하지 않고 순식간에 케이크를 식혔다. 미리 만들어 둔 초콜릿 글레이즈 프로스팅을 얹고, 그 위에 무지갯빛 점을 별처럼 송송 뿌렸다.
카트 위에 올라간 케이크를 끌고서 그는 가족들과 미미가 기다리고 있는 식당으로 향했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