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님의 베이커리-391화 (390/656)

제 391화

진희가 손뼉을 쳤다.

“아. 어디서 본 옷이다 했어요, 지금 미미 씨가 입은 그 옷 말이에요. 참 잘 어울린다 싶었는데, 그 드라마에서 입었던 옷이지요?”

환희당 은소화의 의상은 전통 복식을 개조해서 만든 옷이었다.

목의 살결조차 드러내지 않을 목적으로 옷깃이 조금 높은 곳에 있었고, 손끝까지 감싸도록 소맷자락이 길었다.

하지만 가슴 바로 아래에서 비단 허리띠로 리본처럼 묶어 늘어뜨린 장식은 버드나무 가지처럼 가느다란 허리를 강조하였고, 언뜻 살결이 비칠 듯한 시스루 소재의 천을 겹겹이 사용하여 어깨와 팔의 실루엣이 살짝 비추었다.

애초에 미술팀의 의상 디자이너가 미미를 보고 영감을 받아 제작한 옷이라 어울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맞아요. 라이센스 받아서 복제했어요.”

“그러고 보니 진혁이가 입은 옷도….”

식탁 위에 미묘한 공기가 감돌았다. 임진희는 비로소 무언가를 눈치챘다,

‘그러고 보니 진혁이가 입은 옷도 드라마에 나오는 옷이네.’

드라마 속에서 대놓고 밀어주던 커플의 의복이다. <천마>를 보지 않은 아버지는 눈치채지 못한 것 같지만 어머니는 벌써 알고 있는지 실실거리며 웃고 있다.

진희 역시도 피식 웃음을 흘렸다.

‘저렇게 커플 티를 내고 싶은가.’

그녀는 젓가락을 들어 눈앞에 있던 연근 요리를 집으려고 했다.

그렇지만 방금 전까지 눈앞에 있었던 연근 접시는 어디로 갔는지 사라지고 없었다.

‘바로 내 앞에 있었는데.’

불도장과 같은 메인 요리는 회전하는 원판 위에 올라가 있지만, 다른 소소한 요리들은 각자 개인의 앞에 놓여 있다.

이 연근 요리는 연근의 속에 꿀을 넣고 밀가루 반죽으로 그 구멍을 막은 후 증기솥을 이용해 쪄서 만든 것이다. 쪄낸 후에는 꿀을 쏟아버리고 밀가루 반죽 또한 벗겨서 달콤해진 연근 자체만 내놓는다.

보통 한국의 연근 조림은 식초와 간장, 올리고당과 식용유 등을 사용해서 짭조름하게 볶는다.

하지만 이 쪄서 만든 연근은 달달하면서 아삭한 것이 그 맛의 계열이 아예 달랐다.

조금 더 먹어보고 싶었는데 어디로 갔는지 쏙 없어져 버렸다.

두리번거리며 파란 접시를 찾던 진희는 그 연근 요리가 황미미의 앞에 있는 것을 발견했다.

‘맛있어서 가져갔나?’

진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미미가 앉아 있는 자리는 임진혁의 바로 맞은편으로, 진희에게서 한참 떨어진 곳이었다.

그녀는 관장적(灌腸炙)에 젓가락을 가져갔다.

이 요리는 양의 창자에 양념한 양고기와 양의 피를 넣어 익힌 순대다. 양고기 꼬치구이나 돼지고기 순대는 먹어본 적이 있지만, 양고기 순대를 본 것은 처음이라 조금 기대하고 있었다.

“!?”

양고기 순대 역시 없어졌다.

대신 눈앞에는 유병(油餠)이 있었다. 꿀물을 섞은 밀가루 반죽을 튀겨내 만든 빵과자다.

그리고 고순저(苦筍菹, 죽순 절임)나 탕저(湯菹, 채소를 절여 국물을 낸 요리), 배추 볶음과 이저(梨菹, 배 절임) 같은 채소 요리들이 가득 놓여 있었다.

소와 닭, 양과 말, 돼지와 오리 등 고기 요리는 사라지고 없었다.

‘뭐야, 조금 전까지 여기에 있던 음식들이 다 어디로 갔어?’

진희는 고개를 들어 주변을 다시 살폈다.

조금 전까지 자신의 앞에 놓여 있던 맛있는 음식 접시들이 전부 황미미의 앞에 가 있는 것이 보였다. 미미가 간간이 젓가락을 움직여 그 음식들을 집었다.

‘미미 씨가 여기까지 손을 뻗어 직접 가져갔을 리가 없어.’

당장 옷소매부터가 너무 길어서, 옷소매를 말아 올리거나 감아올렸어야 한다.

그러니 범인은 단 한 명밖에 없다.

임진희는 싱글싱글 미소를 띠며 미미와 함께 소리 죽여 대화를 나누고 있는 진혁을 노려보았다.

이대로 등짝을 후려치고 싶었다.

하지만 임진혁의 애인 겸 사업 파트너를 만나는 자리니까 함부로 행동할 수는 없다.

‘혁이 이놈시키가….’

그녀는 식탁 밑에서 발을 힘차게 뻗어, 맞은편에 있는 진혁의 발등을 밟으려고 했다.

하지만 분명히 요 앞에 있을 터인 발은 어디로 도망갔는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한물간 오락실 발판 게임을 하는 것처럼 앞 뒤 옆 옆 아무리 스텝을 밟아도 진혁이의 발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양반다리를 하고 식사를 하는 것도 아닐 텐데 도대체 발이 어디에 있는 거야.’

한참 동안 발장난에 열중하던 진희는 결국 포기하고 고개를 들었다.

아버지는 어머니와 함께 온화하게 이야기를 나누며 어머니가 좋아하는 음식을 하나씩 하나씩 챙겨 주고 계셨다. 보기 좋은 광경이었다.

하지만 임진혁이 미미 씨 앞에 이것저것 맛있는 음식을 나르고 있는 것은 어쩐지 눈꼴이 시었다.

임진희는 눈을 가늘게 뜨고 접시가 바뀌는 것을 지켜보았다.

‘아니, 잠깐. 저거 좋아하는 음식을 날라주는 것 맞나?’

관장적과 같은 순대 요리는 호오가 분명하다.

내장요리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지만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미미는 자신의 앞에 있는 고기 요리를 즐겨 먹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딱 한 번씩 아주 소량을 맛보고 다시 손대지 않는다.

“….”

진희는 다시 한 번 바닥을 착착 밟았지만, 여전히 임진혁의 발을 찾을 수 없었다.

가족들끼리 먹는 식사였다면 당장 큰 소리를 내고 내 앞으로 고기를 갖다 놓으라고 외쳤을 것이다.

하지만 종업원이 새 메뉴가 나올 때마다 사진을 찍어주고 ? 심지어 이건 진희 자신이 부탁한 것이었다 ? 어머니와 아버지가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가운데 괜히 먹을 것 때문에 소란을 피우고 싶지 않았다.

예비 시누이 앞에서는 더욱더 그렇다.

결국, 그녀는 삶은 참외 요리나 배 절임 따위의 특이한 채소 요리들을 맛보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채소볶음과 절임, 찜 모두 아주 맛있었지만, 그녀는 슬펐다.

‘아, 내 고기….’

◈          ◈          ◈

임진희는 내내 벼르고 있었다.

그녀는 식사가 끝나고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방으로 돌아가자마자 당장 행동을 개시했다.

그녀의 방, 진혁의 방이나 부모님의 방 모두 거실을 통해 이어져 있다.

진혁의 숙소로 배정된 방문을 쾅쾅 두드리자, 안에서 느긋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잠깐 나와 봐.”

“손님 있는데.”

“…!”

모든 방에는 침대가 있는 내실과 별도로 손님을 대접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

황미미와 임진혁은 그곳에서 차를 마시는 중이었다. 미미가 제안했다.

“진희 씨도 같이 마실래요?”

“…아니요, 괜찮습니다. 두 분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진희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미소지으며 자리를 떴다.

자기 방으로 돌아온 그녀는 작은 거실에 연결된 문을 열어 침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바로 침대 위에 올려져 있는 꽃바구니를 발견했다.

“우와!”

화사하게 핀 백합꽃을 보자 기분이 저절로 좋아졌다.

꽃바구니에는 호텔 지배인이 손으로 직접 쓴 카드 역시 함께 들어있었다.

“…작은 선물이라.”

금빛으로 포장된 상자 안에 들어 있던 것은 비단 슬리퍼와 잠옷이었다.

그녀는 준비되어 있던 잠옷을 펼쳐 놓고 사진을 찍었다. 붉은 바탕에 금빛 용이 수 놓인 잠옷은 오늘 어머니가 입었던 황후 의상을 단순화한 것처럼 보였다.

“이거 진짜 한 톤만 색깔이 달랐어도 엄청 촌스럽게 느껴졌을 텐데.”

전통 중국 건물처럼 꾸며놓은 실내 인테리어와 너무나 잘 어울렸다.

살결에 부드럽게 닿아오는 감촉도 너무나 마음에 들었다. 손바닥에서 주르륵 흘러내리는 보들보들한 옷감에 뺨을 비벼보고 그대로 입었다.

그녀는 오늘 진혁이 한 행동 따위는 용서해주기로 했다.

“다음에 만들 빵 아이디어나 스케치해야지.”

꿀을 넣어 요리한 연근.

참외의 씨앗을 빼고 난 다음에 삶은 수프.

유채꽃의 꽃잎을 넣어 만든 된장국.

진한 간장 소스에 죽순을 졸여 만든 요리.

배 절임.

그 요리들은 확실히 도움이 되었다. 여태까지 익숙하게 보던 재료들을 다른 방식으로 접근했다는 것 자체만으로 발상을 새로 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그녀는 한국에서부터 챙겨온 연습장에 선을 긋기 시작했다.

“만두처럼 얇은 밀가루 반죽 안에 연근처럼 아삭아삭한 속을 넣어서 쪄내면 어떨까? 너무 낯설어서 오히려 인기가 없을 것 같기도 하고…, 연근이라는 재료 자체를 활용한다면? 연근을 건조시켜서 간식처럼 먹게 한다면 어떨까. 망고나 바나나처럼 달콤한 과일을 말려서 설탕에 절이는 것보다 훨씬 나을 수도 있어. 아예 채소 스틱 계열의 간식을….”

진희는 완전히 새로운 빵 개발에 몰두하느라 임진혁에 대한 소소한 복수는 밀어두었다.

한편 그 시간에 진혁 역시 미미와 같은 화제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소채(蔬菜)에 그렇게 많은 종류가 있는지 몰랐습니다.」

「이번에 저희 요리사가 특별히 솜씨를 발휘했답니다. 해산물과 육류, 가금류와 채소 중에 채소를 다루는 데에 특별한 재주가 있는 숙수예요.」

「역시 그렇죠? 이전에 본 적이 없는 참신한 조리법이 많았습니다. 한국에서는 단호박을 쪄서 속을 내놓기도 하는데 참외 같은 건 그렇게 요리하지 않아요. 생각해본 적 없는 방법이라 좋았습니다. 다음에는 참외로 타르트를 만들어 볼까 합니다.」

「사실 참신한 건 아니에요. 할아버지가 알려주신 고대의 요리법을 재현한 거랍니다. ‘제민요술(齊民要術)’에 기록된 소채라고 들었어요.」

「고대요?」

「송 말기의 요리법이래요.」

「하하.」

진혁이 쓴웃음을 지었다.

‘강산이 많이 변했지.’

익숙한 요리방법이었지만 재료가 다르다. 당시에 있었던 채소들도 지금은 개량되고 알이 커지며 맛이 변했다. 당장 똑같은 죽순이나 호박만 해도 옛날에는 훨씬 알이 작고 쓴맛이 강했다. 그러니 광안마가 아무리 옛 요리를 재현하려고 애써도 그 맛이 나지 않았을 것이다.

반면 임진혁이 과거 무림에서 현대 요리의 맛을 재현하려고 해도 같은 이유로 그 맛이 나지 않았다.

미미는 부드럽게 웃었다.

「가족분들이 사이좋아서 보기가 좋더라구요.」

「하하.」

미미는 내심 신경 쓰이던 것을 물었다.

「진희 씨가 채소 요리를 많이 좋아하세요?」

「저번에도 한 번 말씀드렸지만, 전에 간호사로 일했잖아요? 그래서 그런지 명동점 자체 테마를 웰빙과 건강으로 잡고 있습니다. 최근 트렌드도 그렇다 보니 명동점 매출도 좋습니다. 요즘 신메뉴 개발에 애를 먹고 있는 걸 보니까 도움을 주고 싶어서요.」

황미미가 활짝 웃었다.

「정말 좋은 가족애예요, 부러울 정도예요.」

「그냥 평범한 가족입니다.」

「그렇지만 저도 채소 요리를 좋아한다는 걸 기억해 주셨으면 좋겠네요.」

진혁이 눈을 크게 떴다.

「알겠습니다.」

그가 진지하게 말했다.

「어르신이 고기를 좋아했기 때문에 미미 씨도 고기를 좋아하실 줄 알았습니다.」

「둘 다 좋아해요. 달콤한 케이크나 간식 같은 것도 좋아하고요.」

진혁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치즈 케이크를 제일 좋아하시는 줄 알았는데요?」

「원래 치즈 같은 발효 음식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는데, 진혁 씨가 만들어온 치즈 케이크는 너무 맛있어서요. 그때부터 치즈 케이크를 좋아하게 됐어요.」

「….」

「앞으로도 평생, 잘 부탁드려요.」

미미가 의미심장하게 말하자 진혁이 진지하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제가 책임지지요.」

「!」

「평생 매일 치즈 케이크를 하나씩 드실 수 있도록 주마다 7개를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냉동해도 맛이 변하지 않는 방법이 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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