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90화
미미가 생긋 웃었다.
「호호호, 모르셨어요?」
「예」
「지난주부터 사귀고 있었잖아요. 가족분께서도 그렇게 알고 계시던데요.」
그녀가 태연한 척 쥘부채를 쥐었다가 촤르륵 펴서 얼굴을 가렸다.
여태까지는 못 보던 물건이었다. 진혁은 쥘부채 끝에 달랑거리는 장식을 눈여겨보았다.
메이드 인 코리아라고 적혀 있었다.
‘진희가 선물한 게 저거구나.’
인천공항 면세점에서 판매하는 접이식 쥘부채였다.
평소 미미가 사용하던 물건과는 완성도부터 다르다.
그녀는 고급스러운 마감이 된 최상급 물품들만 사용했다.
지금처럼 캐주얼하게 입었어도 부채는 그녀에게 그다지 어울리지 않았다.
「가족이라면, 진희요?」
‘이 녀석이 도대체 뭐라고 한 거야.’
진혁이 뭐라 입을 열기도 전에 미미가 해맑게 웃었다.
「네. 앞으로 진혁 씨를 잘 부탁드린다며 카드에 적으셨던데요?」
드라마에서 본 그대로 그녀는 쥘부채를 폈다가 다시 접었다.
단순한 동작이지만 우아하며 교태로웠다.
가느다랗고 흰 손목에서 이어지는 쥘부채가 차르륵 펼쳐졌다가 접혀지며 그려내는 유려한 선에 그는 저도 모르게 시선을 빼앗겼다.
「저」
미미가 화사하게 웃으며 진혁이 하려는 말을 잘랐다.
「제 생명을 구해주셨잖아요? 앞으로 남은 삶을 함께 했으면 좋겠어요.」
진혁이 진지하게 말했다.
「드라마 속 캐릭터가 더 좋다면서요?」
「무뚝뚝하고 신중하면서도 능력있는 모습이 진혁 씨하고 꼭 닮았어요」
◈ ◈ ◈
테마 파크에서 각자 독립적으로 네 시간 정도 시간을 보내자 곧 해가 질 시간이 되었다.
임씨 가족들은 저녁 식사를 위해 호텔에 모였다.
호텔 로비에서 오른쪽으로 바로 꺾으면 바로 식당으로 연결되는 문이 있다.
식당을 바라보며 진희가 키득 웃었다.
“진혁이가 좋아하겠다.”
“온통 빨간색이네.”
붉은색 등이 천장에 드문드문 장식되었으며 테이블보 역시 붉은색이다. 화려한 문양으로 장식된 창문 역시 짙은 적갈색이었다.
붉은 기를 희미하게 띤 갈색 벽돌과 바닥까지 모든 것이 빨간색이었는데 신기하게도 촌스럽지 않았다.
아버지가 말했다.
“중국 사람들이 붉은색을 길하게 여긴다고 하더니 정말이네.”
앞에서 안내하던 웨이터가 테이블이 아닌, 작은 방으로 들어가도록 안내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어, 우리도 이리로 가야 하는데.”
“여기는 식당이 아니고 탈의실입니다. 여성분들은 이쪽으로 오세요.”
진혁과 아버지, 임진희와 어머니는 각각 다른 방으로 들어갔다.
탈의실에는 갖가지 황제 의상들이 준비되어 있었다.
진혁이 피식 웃었다.
“황제가 된 느낌으로 식사를 하라는 뜻입니까?”
그는 오늘 저녁의 테마가 무엇일지 짐작할 수 있었다.
“만한전석(滿漢全席)이란 청나라의 건륭제가 베풀었던 큰 잔치에 내놓았던 음식들을 이른다. 붉은 제비와 백조, 들꿩과 메추라기를 비롯한 여덟 가지의 날짐승, 제비집과 상어 지느러미, 전복과 검은 해삼을 비롯한 여덟 가지의 해산물, 낙타의 혹과 곰의 발바닥, 원숭이의 골과 성성이의 입술 등 여덟 종류의 귀한 들짐승, 흰참나무버섯과 죽순, 그물주름버섯과 원숭이머리버섯 등 여덟 종류의 귀한 야채를 내놓았다고 한다.
당시에는 하루에 두 번, 사흘에 걸쳐 총 백여 가지 이상의 요리를 내놓았다.
하지만 오늘 호텔에서 기획한 만한전석은 조금 더 단순한 버전이었다.
“오늘 저녁 한 끼에 서른여섯 가지의 귀한 요리를 맛보시게 될 겁니다. 불편하시다면 옷은 꼭 입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우와, 맛있겠구만.”
아버지가 입맛을 다셨다.
신이 나서 두리번거리던 아버지는 마음에 드는 의상을 찾았다.
“이왕 여기까지 왔는데 입어 보지 뭐.”
탑 같은 것이 높이 솟아있는 붉은색 비단 모자와 금룡이 수놓인 황금색 장포였다.
“만주족의 황제 의복입니다. 만한전석의 역사에도 적합한 옷을 고르셨습니다.”
“흐흐.”
종업원이 걸치는 것을 도와주었다. 아버지는 흥겨운 듯이 비단 가운을 한 벌 걸쳐 보았다.
“이거 별로 불편하진 않네. 야, 너도 입어라.”
진혁이 보기에는 만주족 황제의 옷이라고 보기에는 간소한 차림이었다.
정말로 황제의 의상이라면 이것보다 훨씬 더 복잡해야 한다.
하지만 그는 불만 없이 아버지를 칭찬해 드렸다.
“잘 어울리네요.”
아버지는 황제의 의복을 입고서 거울을 보고 근엄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수염도 붙여야 하는 거 아니야?”
거울 옆에는 가짜 수염과 가발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임운정은 흥미로운 듯이 가짜 수염을 살펴보았다.
“아버지, 밥 먹는데 방해될 거예요.”
“그래.”
부친은 아쉬운 듯이 수염을 단념했다. 종업원이 권했다.
“진혁 CEO 님께는…… 이 의상이 어떻습니까? 이건 당시 한족이 입던 의복입니다.”
“……네.”
검은색에 은색으로 해와 달이 수놓인 의상을 보고 진혁은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천마>에 나왔던 옷이잖아.’
드라마 속의 도산검림이 입던 옷이다. 진혁은 의상실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황제의 의장뿐이 아니라, 드라마 ‘천마’에 등장했던 남성복들이 주루룩 걸려 있었다. 그는 거울을 바라보았다.
‘달라.’
그가 실제로 일월신교의 교주로서 업무를 할 때 입었던 옷은 이런 것이 아니었다.
조금 더 좋은 천을 썼고 무늬도 달랐다.
드라마의 전체적인 얼개는 황태명이 짰을지 몰라도, 옷이나 소품 등 사소한 부분에는 일일이 관여하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옷을 걸치니 진혁 역시 기분이 조금 들떴다.
‘정말로 놀러온 것 같아.’
종업원이 박수를 쳤다.
“CEO님은 이 옷이 정말로 잘 어울리시는데요? 이쪽으로 오세요. 두 분 사진을 찍어드릴게요.”
“……아니,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만.”
“왜 그러냐. 한 장만 같이 찍자.”
아버지가 흔쾌히 수락했다.
탈의실 한 구석에, 매란국죽이 그려진 병풍이 있었다. 종업원은 부자를 그 앞으로 안내했다.
“여기 두 분이 나란히 서시면 됩니다.”
“오.”
- 찰칵
종업원은 폴라로이드 사진기로 촬영을 하고, 바로 인쇄된 사진을 내밀었다.
아직 새까만 사진을 받은 아버지가 즐겁게 말했다.
“고맙소!”
심지어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위안 지폐를 꺼내서 종업원에게 쥐어주기까지 했다.
“감사합니다.”
종업원은 몇 번이고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더니 정말로 황제를 모시는 것처럼 뒷걸음질로 물러났다.
“황제 폐하를 식당으로 모시겠나이다.”
말투도 바뀌었다. 진혁이 아버지의 등을 쿡 찔렀다.
“아버지, 얼마나 주셨어요?”
“왜. 너도 주랴?”
“……아니요.”
식당 앞에서는 마찬가지로 황후의 의장을 걸친 어머니가 기다리고 있었다.
머리에 가짜 머리를 붙인 임진희 역시 경쾌하게 치맛자락을 펄럭였다.
“이거 옷감이 엄청나게 부드러워. 진짜 비단 같은데?”
“여보, 그 옷도 잘 어울리네.”
어머니는 두 손을 모아 소맷자락을 겹치며 어설프게 인사를 해 보였다.
“호호호! 내가 어디 가서 또 이런 옷을 입어 보겠어. 진짜 왕비님 같고 신나네. 이거 입고 음식을 먹으러 가는 게 아까울 정도야.”
“맞아, 엄마 진짜 이뻐요.”
어머니가 붉고 화려한 황후의 혼인 의장을 입고 있는 것에 비해, 임진희는 수수한 옷을 입고 있었다.
일부러 모친에게 예쁘고 화려한 옷을 양보한 게 분명하다.
“아버지도 잘 어울리세요.”
진희가 셀카봉을 꺼냈다.
막 사진을 찍으려는 그녀에게 종업원이 다가왔다.
“괜찮으시다면 저희가 사진을 찍어드리겠습니다.”
이번에는 폴라로이드 카메라가 아니었다. 종업원은 아예 DSLR 카메라를 가지고 왔다. 임진희가 셀카봉을 소맷자락 속에 다시 집어넣었다.
“감사합니다!”
“여기 나란히 서시면 됩니다.”
“하나, 둘, 셋!”
벽을 배경으로 한 장을 찍고, 다시 독사진도 한 장씩 찍었다.
진혁은 독사진을 사양하려고 하였으나 어머니와 진희가 우겼다.
“우리 아들 멋진 모습 자랑해야지.”
사진을 전부 찍고 식탁으로 안내받자, 직원이 식탁에 앉은 모습까지 찍어주었다.
진희가 속닥거렸다.
“진혁이 너 중국 옷도 엄청 잘 어울린다. 거기 있는 가발도 쓰지 그랬어?”
“가발?”
“대머리에 꽁지머리 붙어 있는 가발.”
“무슨 쓸데없는 소리야. 그런 걸 쓰고 싶으면 너나 쓰세요.”
“난 가발 썼잖아. 윽, 그런데 이거 보기보다 무겁다.”
“무거우면 벗어.”
“안 돼, 이쁘단 말이야.”
식탁 가운데에는 흑갈색 원판이 놓여 있었다. 접시가 하나둘씩 날라져 오기 시작했다. 역시 옛 청대 복식을 입은 미미가 나와서 자리에 앉았다.
“중국 음식이 입에 맞지 않으실까봐 골고루 준비했어요.”
“……종류가 엄청나게 많네요.”
“이걸 다 먹을 수는 있겠어?”
“한 번에 한 입씩 맛만 보세요.”
한국어를 할 수 있는 종업원이 다가와 하나하나 메뉴를 설명해 주었다.
“꿀을 발라 삶아 쪄낸 곰발바닥입니다. 털을 뽑고 나서 야채 육수로 한 번 삶아 냄새를 빼고, 한약재와 함께 다시 쪘습니다.”
“곰발…….”
처음 보는 음식을 보고 호기심이 생긴 진희가 젓가락을 제일 먼저 내밀었다.
그녀가 고기를 한 입 베어물고 눈을 감았다.
“족발이랑 확실히 다르네요.”
“이건 뭐에요?”
“죽순과 표고버섯을 넣어 녹용을 끓인 수프입니다.”
낯익은 탕을 보고 어머니가 국자를 들어 직접 한 그릇씩 덜어 주었다.
“이건 도가니탕인가 봐. 미미 씨도 한 접시 떠줄까요?”
“감사합니다.”
종업원이 설명해 주었다.
“사슴의 힘줄과 꼬리를 넣어 끓인 수프입니다.”
“오.”
진희는 녹용탕을 의심스러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흐으으으음.”
그리고는 흔한 돼지고기 야채 볶음처럼 익숙한 중국 요리에 먼저 손을 뻗었다.
“야채 볶음도 맛있다.”
느끼한 볶음을 먹고 난 후에는 이름 모를 맑은 국을 한 수저 떴다.
기름기가 없어 야채 수프인 줄만 알았는데, 맛이 조금 달랐다.
“비룡탕입니다. 꿩과 비슷하게 생긴 날짐승으로, 동북 지방의 산속에서만 나는 고기입니다.”
“닭이랑 비슷한데 씹히는 맛이 달라요.”
“담백하면서 깔끔한 맛은 닭과 비교할 수가 없지요.”
“특이하네요.”
어머니는 누가 무엇을 먹고 있는지 하나씩 살피더니, 입맛에 맞는 음식들을 하나씩 챙겨 주기 시작했다.
“진희 너는 피망을 좋아했지? 여기 이 야채 볶음 좀 먹어라.”
“엄마, 고마워요!”
“진혁이는 오리 고기 잘 먹잖아? 여기 이거 북경 오리 구이 좀 봐. 껍질이 얼마나 바삭바삭한지!”
“어머니도 좀 드세요.”
“너희들 먹는 것만 봐도 배가 불러.”
아버지가 마요네즈 새우 튀긴 접시가 놓인 방향이 어머니 쪽으로 가도록 원판을 빙글 돌렸다.
“당신 새우 좋아하잖아. 이것도 좀 더 먹을래?”
레몬 향이 살짝 나는 크림 마요네즈 새우 튀김은 한국에서도 흔히 보던 음식이었다. 어머니가 웃었다.
“여보, 고마워요. 역시 당신밖에 없네요.”
그녀는 젓가락으로 새우 하나를 집어 입안에 가져갔다. 통통하고 실한 새우 살이 입안에서 탱글탱글하게 씹혔다.
“이거 너무 맛있다! 아주 살살 녹네, 녹아.”
그 모습을 본 진희도 마요네즈 새우에 젓가락을 가져갔다.
“이거 느끼하지 않게 일부러 양념에 레몬 향을 했네? 진짜 맛있다.”
진혁이 말했다.
“그런 식으로 먹으면 금방 배 찬다. 이것저것 골고루 먹어 봐.”
“알아서 먹고 있다고.”
조용히 비룡탕을 맛보고 있던 미미가 웃으며 끼어들었다.
“남매 두 분이 사이가 참 좋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