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89화
‘대체 뭘 산 거지.’
미미는 그 자리에서 상자를 열어 보지 않았다. 옆에 서 있던 다른 사람이 상자를 받아 두었다.
“고맙습니다.”
◈ ◈ ◈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몇 마디 나누고, 가족들은 숙소로 올라갔다.
숙소는 방 네 개에 거실이 딸려 있는 스위트 패밀리 룸이었다.
진희는 폴짝폴짝 셀카봉을 들고 뛰어다니며 스위트룸 이곳저곳을 카메라에 담았다.
“얘! 방은 이따가 저녁에 와서 찍고 옷부터 갈아입어. 빨리 내려가자.”
바로 놀이공원으로 갈 예정이니 옷을 갈아입어야 한다.
진희는 자기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난 다 입었어!”
“엄마, 벌써 다 갈아입었어요?”
트레이닝복에서 상의만 티셔츠로 갈아입은 진희가 빼꼼하니 얼굴을 내밀었다.
자신만만하게 썬캡을 착용하고 등산복 상의를 걸친 어머니가 모델처럼 워킹을 선보였다.
“어때, 예뻐?”
애초부터 면바지에 셔츠를 입고 있던 진혁이 짧게 대답했다.
“좋아요.”
진희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엄마. 산에 가는 것도 아닌데 왜 등산복을 입었어?”
“형광색이니까 놀이공원에서 찾기도 쉽고. 고어텍스라서 땀 흡수도 잘 된대. 이거 이번에 홈쇼핑에서 아주 싸게 산 거야. 진희 네 것도 샀으니까 다음에 집에 올 때 가져가라.”
“……엄마, 내 생각에는 진혁이가 엄마 패션 감각을 물려받은 것 같아.”
“어머, 그러니? 호호호.”
아버지가 끼어들었다.
“여보. 칭찬이 아닌 것 같은데…….”
진희가 카메라로 사진을 한 장 더 찍었다.
“등산복은 카메라에 엄청나게 촌스럽게 나온단 말이야. 이것 봐.”
“어머, 어머. 어머머.”
중후한 갈색 톤으로 세련되게 꾸며진 스위트룸의 거실에서 형광 핑크색 등산복은 도드라지게 눈에 띄었다.
어머니가 시무룩해져서 말했다.
“놀이공원은 다 비슷비슷한 색깔 아닐까? 여기 온다고 새로 산 옷인데.”
모친은 새 옷을 포기하고 싶지 않은 눈치였다. 진혁이 거들었다.
“어머니. 입고 싶은 옷 입으시면 되죠. 진희 넌 왜 사람을 옷 가지고 평가하고 그래?”
“엄마. 거울 봐요. 그 빨간 티랑 똑같아 보여.”
“그래?”
어머니가 바로 등산용 재킷을 벗었다. 아버지가 어머니 어깨 뒤에서 진희에게 엄지손가락을 내밀어 보였다.
진혁이 투덜거렸다.
“아니, 그 빨간 티가 어디가 어때서 그러냐고.”
아버지가 임진혁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괜찮다. 입고 싶은 걸 입으면 되지. 좀 촌스러우면 어때.”
“…….”
진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어머니는 공항에서 입었던 카디건을 다시 걸쳤다. 진희가 흐뭇하게 웃었다.
숙소에서 테마파크까지는 바로 걸어갈 수 있었다.
손님은 아무도 없었다.
사탕 가게와 솜사탕 가게, 아이스크림 가게의 종업원밖에.
“손님이 하나도 없는데 괜찮을까?”
아버지가 걱정스럽게 말하자 어머니가 핀잔을 주었다.
“벌써 까먹었어요? 여보, 우리가 여기 오픈 일정에 맞춰서 왔잖아요.”
“맞아, 그랬지.”
진희가 임진혁을 돌아보며 말했다.
“설마, 우리 때문에 괜히 일정 미뤘다거나 그런 건 아니지?”
“아닐 거야. 관람차에서 문제가 생겨서 전체적으로 점검을 다시 하느라 시간이 걸렸다고 들었어.”
“그럼 다행이고. 어! 엄마. 이쪽으로 와요. 자, 여기에 엄마랑 아빠랑 나란히 서 봐요.”
보송보송한 솜사탕 모양의 조형물을 배경으로 두 사람이 어색하게 포즈를 취했다.
“찍습니다, 하나, 둘, 셋!”
사진을 찍고 나서 아버지는 왼쪽 안내소로 가서 팸플릿을 하나 받아왔다.
“이것 봐, 한국어 지도도 있네.”
테마파크는 ‘전통의 낙원’과 ‘달콤한 구름 공원’, 그리고 ‘소금 평원’ 그리고 마지막 ‘일곱 번째 천국’까지 총 네 구역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아버지는 팸플릿을 한 장 한 장 넘겨보았다.
“우리가 방금 온 지역이 ‘일곱 번째 천국’인가 본데? 이쪽 소금 평원부터 가 보자. 빵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변해왔는지 체험할 수 있는 박물관이 있네.”
“그냥 박물관이 아니고 체험을 한다구요? 빵을 굽는 건가?”
“아니면 프리타타 같이 옛날 빵을 먹어 보는 걸 수도 있겠지. 어떻게 다 일일이 만들겠어.”
“그러면 여보, 박물관 가기 전에 우리 청룡열차부터 하나 타고 가요.”
어머니가 해맑게 말했다.
“청룡열차?”
“여기 이거요.”
그녀는 손가락으로 지도 위의 한 점을 가리켰다. 360도 커브를 거쳐 빙글 돌고 나서 테마파크 전체를 감싸고 있는 거대한 롤러코스터의 매표소였다.
“그, 그래. 당신이 꼭 타고 싶다면…….”
아버지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어머니에게 끌려갔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손목을 잡아끌며 활기차게 외쳤다.
“자, 너희 둘은 재밌게 놀고 있어 봐. 우리는 우리끼리 가서 놀 테니까.”
임진희는 팔짱을 끼고 진혁을 바라보았다.
“…….”
“…….”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보았다. 진혁이 이전에 갔던 골목길을 가리켰다.
“이쪽으로 가면 다른 나라 간식거리들을 파는 시장이 나와.”
“오, 뭐 파는데?”
“아빠 좋아하는 번데기나 메뚜기 튀김? 종류별로 많아. 거미고기나 바퀴벌레 튀긴 것도 있더라.”
“윽.”
진희가 대놓고 눈살을 찌푸렸다.
“미친 거 아니냐? 바퀴벌레는 집에서 틈틈이 보는 걸로 충분해! 그걸 왜 먹어.”
“빵 굽는 사람이 음식을 가리면 되겠어?”
진희가 눈을 가늘게 떴다.
“너 설마, 그 미미 씨한테 바퀴벌레 튀김 먹자고 한 건 아니지?”
“미미 씨가 너야? 바퀴벌레 튀김을 왜 줘.”
그녀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그래도 네가 상식이 좀 있구나.”
“거미 다리 튀김만 줬는데.”
“뭐?”
“잘 먹던데? 너처럼 입맛 까다롭게 굴지 않아.”
진희는 하늘을 한 번 바라보고 땅을 다시 한 번 보았다. 그녀는 한숨을 푸욱 쉬었다.
“미미 씨가 진짜 너를 마음에 들어하나 보다.”
◈ ◈ ◈
거미 다리 튀김 사건 이후로 진희는 임진혁을 대등하게 취급하지 않았다.
아예 머리만 큰 초등학생 취급을 하며 여기저기 끌고 다녔다.
그런데도 그게 싫지 않았다.
웃고 떠들며 놀리고, 그러면서도 틈틈이 먹을 것을 챙겨 준다.
사진도 엄청나게 많이 찍혔다.
‘이런 성격이었구나.’
임진희에 대해서는 충분히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자기 직업에 프라이드가 있으며 책임감이 강하고, 가족을 위해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다. 명동점을 개업하면서 후배들을 아낀다는 사실도 알았다.
그런데도 여기서 또 새로운 모습을 보았다.
아이스크림 모양의 기둥 앞에서 몇 백 장째인지 모를 사진을 찍히며 진혁이 말했다.
“해도 해도 너무한 거 아니냐? 사진 찍는 걸 이렇게 좋아하는지 몰랐어.”
“야, 내가 지금 사진을 찍고 싶어서 찍는 게 아니야. 이걸 다 찍어서 명동점 홍보에 쓸 거야.”
“……? 명동점이랑 디저트 테마파크랑 아무 상관 없잖아.”
“내 블로그 보고 오는 손님들도 꽤 많이 있단 말이야.”
“그래서?”
“맨날 우리 빵집 글만 올리기보다 내가 어떤 걸 먹었는지, 어디에 갔는지 올리면서 좀 인간적인 모습을 보이는 게 더 좋아. 사람들이 친근하게 느끼거든.”
진혁이 진지하게 대답했다.
“사진 찍기 싫은데 억지로 홍보 때문에 찍는 거면 그럴 필요 없어. 홍보팀을 따로 고용할 테니까.”
“아, 왜! 블로그 하는 거 재밌단 말이야!”
진희의 대답에 임진혁이 피식 웃었다.
“그냥 솔직하게 얘기해. 사고 싶어서 샀고, 사진 찍고 싶어서 찍었다고.”
“호호호호!”
진희는 모른 척 웃으며 손을 휘휘 내저었다. 진혁이 물었다.
“엄마랑 아빠 사진은 홍보 때문에 찍은 거 아니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당연히 부모님 얼굴은 공개 안 하지. 어디서 누가 뭘 퍼갈 줄 알고.”
진희가 팔짱을 끼고 서서 설명해 주었다.
“우리 엄마랑 아빠는 사진 진짜 없는 편이야. 당장 엄마 친구 카카오스토리만 봐도 사진이 얼마나 많은데. 그, 이번에 곱창집 하는 아줌마 아저씨 알지? 병철 씨 부모님들. 그 두 분이 리마인드 웨딩을 아주 제대로 하셨어. 제주도 유채꽃밭에서 셀프웨딩처럼 찍고 그랬거든.”
“그래서 부모님을 제주도로 모시고 가자고?”
“아니! 그게 아니고!”
진희가 발을 쾅쾅 굴렀다.
“우리 부모님은 맨날 일만 하다 보니까 카카오 스토리에 주방 사진이니 샌드위치 사진밖에 없단 말이야. 보니까 저번에 부모님 모시고 거제도 갔을 때도 사진 달랑 한 장밖에 안 찍어왔더라.”
임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진이라면 기억에 있었다.
아버지는 큰 물고기를 잡았다며 신나서 물고기를 치켜들었고, 배의 선장이 기념 삼아 그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주었다.
“이렇게 놀러 가는 것도 놀러 가는 건데, 사진이 쫘르륵 올라와야 동창회 가서도 보여주면서 자랑할 게 있고 그래.”
“……그런 걸 다 어떻게 알았어?”
“병원 6인실에 앉아 있는 보호자들이 맨날 자랑하는 게 그거거든…….”
“그래.”
두 사람은 다시 걷기 시작했다.
“부모님 좋은 시간을 보내시라고 일부러 모시고 온 건데, 이렇게 우리들끼리만 다녀도 되나 모르겠네.”
“엄마랑 아빠는 어린애가 아니야. 우리들 없이 둘만 있는 게 더 즐거우실걸.”
“내가 있는 게 더 좋다고 하시던데?”
“그야 당연히 네 앞에선 그렇게 말씀하시겠지.”
임진혁이 미간을 좁혔다.
진희가 키들키들 웃었다.
“저기 봐! 저기가 네가 말했던 사탕 만들기 체험관이지? 사탕 만들러 가자.”
“벌써 이만큼 샀는데 뭘 또 만들어?”
진혁이 한 손에 들고 있던 쇼핑백을 들어 보였다.
“아, 왜. 여기 지금 손님이 우리밖에 없으니까 많이 팔아 줘야지.”
진혁은 멀리서 느껴지는 낯익은 인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허둥지둥 뛰어오는 것 같던 발소리는, 시야에 들어오자마자 우아한 걸음걸이로 바뀌었다.
황미미의 모습을 본 임진희가 눈에 띄게 반색하며 반겼다.
“어머나, 어서 오세요!”
“안녕하세요.”
미미 역시 웃으며 인사했다. 진희가 서둘러 말했다.
“아니요, 그렇지 않아도 진혁이가 사탕 만들고 싶다고 하더라구요. 두 분이 같이하시면 좋을 것 같아요.”
임진혁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뭐? 네가 만들고 싶다고…….”
콱.
진희는 눈치 없는 임진혁의 발등을 꾸욱 꾸욱 밟았다.
“그럼 두 분 좋은 시간 보내세요!”
그리고서 손을 흔들더니 쌩하고 사라져 버렸다. 진희가 구입한 과자 쇼핑백을 양손에 들고 있던 진혁이 혀를 찼다.
“허, 참.”
미미가 웃었다.
「두 분이 정말로 닮으셨어요.」
진혁이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설마요. 미안합니다. 진희가 오늘 좀 들떠 있나 봐요. 원래 이렇게 사람을 두고 그대로 가버리는 애가 아닌데.」
미미가 배시시 웃었다.
「괜찮아요.」
두 사람은 잠시 말없이 나란히 걸었다.
미미가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그보다 두 분이 정말로 똑같이 생겼어요! 눈코입하고 눈썹도 그렇고, 이목구비도 꼭 빵틀에 찍어낸 것처럼 비슷해요. 저는 형제나 자매가 없어서 보고 있으면 부러워요.」
진혁이 웃었다.
「있으면 싸우지만 없으면 또 허전하긴 하죠.」
황미미가 진지하게 말했다.
「그보다 진혁 씨, 부모님께 언제 말씀드리면 좋을까요?」
진혁이 눈을 크게 떴다.
「예?」
「저희가 결혼을 전제로 교제하고 있다는 걸요.」
「우리가 사귀고 있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