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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님의 베이커리-387화 (386/656)

제 387화

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이 누군지 확인하자마자, 마귀할멈처럼 일그러진 표정이 순식간에 풀렸다.

민들레처럼 화사하게 미소지으며 할머니가 눈을 껌뻑거렸다.

“총각. 왔어?”

“할머니, 접니다.”

“금 씨는 고물상 갔다가 좀 늦게 나올 턴디.”

진혁이 피식 웃었다. 자신이 금천복을 눈여겨보는 것을 이 할머니도 알았다. 그는 품에 안고 있던 빵 봉지를 내밀었다.

“오늘은 두 분 어르신 뵈러 온 게 아닙니다. 이것 좀 나누어 드시죠.”

“어마, 이게 다 뭐람! 이렇게까지 챙기지 않아도 되는디, 허허.”

말로는 사양하지만, 몸은 솔직하다. 항상 금 씨 옆에 따라붙어 다니던 할머니는 반색하며 빵 봉지를 받았다.

“도깨비도 이 냄새를 맡으면 후딱 홀려버리겠어.”

할머니가 문을 활짝 열었다.

“들어와서 차 한 잔만 마시고 가.”

“마음만 받겠습니다.”

“그러믄 거기 잠깐 있어 봐. 내가 옥수수 수염 차 하나는 기가 막히게 탄당께.”

진혁은 잠시 서서 기다렸다. 안쪽에서 보글보글 물 끓이는 소리가 들렸다. 커피포트에서 따뜻한 물을 조르륵 따르고 우려내 걸러내기까지 몇 분이 더 걸렸다.

그동안 문가에 서 있던 진혁에게 다른 사람들이 옹기종기 몰려나와 인사를 했다.

“거 빵집 아들 아니야?”

“이번에 고향 내려온 겨?”

“사업이 아주 잘 되고 있다며. 망해서 내려온 건 아니지?”

“거, 연애는 안 하나? 내 손녀딸이 유치원 다니는데 그 원 교사가 아주 참하더라. 내가 다리 좀 놓아 주까잉?”

폭풍처럼 쏟아지는 질문에 대답을 얼버무리며 진혁이 웃었다. 키 작고 빼빼 마른 할머니 한 분 하나가 뒤쪽에서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결혼은 언제 하누?”

전에는 금천복의 옆에 항상 붙어 다니던 분이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 얼굴은 알아보기 쉬웠다.

“그보다 할머니는 신색이 좋으신데요.”

깨끗하지만 허름한 옷을 입고 다니던 할머니다. 화려한 무늬가 뚜렷한 새 옷을 입었고, 표정도 밝아졌으며 눈썹도 그렸다. 그녀가 방실방실 웃으며 주름진 손을 펴 보여주었다. 알 굵은 비취반지가 눈에 띄었다.

진혁이 반갑게 물었다.

“어디 유산이라도 상속받으셨어요?”

자랑스럽게 반지를 흔들어 보이던 할머니가 한일자로 입을 꾹 다물었다. 옆에서 막 옥수수 수염 차를 타오던 할머니가 키득키득 웃으며 끼어들었다.

“한 달 전에 홍 씨랑 혼인했어. 빵집에 결혼 케이크 맡겼지.”

“진혁 총각한테 직접 맡기고 싶었는데 바쁘다고 해서.”

“불러주셨으면 왔을 텐데요.”

“에이, 해외로 출장 갔다는데 우리가 어떻게 불러?”

“바쁜 사람 귀찮게 하면 안 되지.”

“하하.”

할머니와 할아버지들은 가득 담겨 있는 빵 봉지를 하나씩 받아들었다.

“이거 이렇게 그냥 갖다 주면 어떻게 해? 돈이라도 좀 받아야지.”

얼마나 오래 가지고 다녔는지, 구겨져 꼬깃꼬깃한 만 원짜리였다. 진혁은 할아버지가 내미는 돈을 거절했다.

“이거 어제 자 신문인데 읽어 볼래? 여기 기사가 아주 재미있어.”

“요거잉 내 아주 조~~오옿은 꿈꾸고서 사놓은 것인디 말이여, 이번 주 토요일에 확인해 보랑께.”

날짜 지난 신문부터 소중하게 접어놓은 복권까지, 어르신들은 끝없이 무언가를 찾아 내밀었다. 진혁은 일일이 하나씩 다 거절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차는 마시고 가야지, 총각!”

플라스틱 컵에 든 옥수수 수염 차는 뜨겁고 맛이 없었다. 어찌나 급하게 우렸는지 옥수수 수염도 한 가닥 들어있었다.

“그 컵은 가져가도 돼야. 바쁠 것잉게 부러 거기에 담았당께!”

진혁이 낯익은 컵을 받아들고 웃었다. ‘소망 베이커리’에서 주는 일회용 컵이다.

케이크를 담아서 판매하는 컵을 깨끗이 씻어서 재활용한 것이다.

“젊다구 너무 몸 혹사하지 말고.”

“유치원 교사 아가씨 진짜 안 만나볼 텐가? 정말 참한 아가씨여.”

“진혁이 정도 되는 애가 애인이 없겠어? 괜히 남의 연애에 훈수 놓으려고 하덜 말아! 기껏해야 술 석 잔이고 못하면 뺨도 맞아!”

그는 몇 번이나 인사를 하고 나서야 그곳을 떠날 수 있었다.

◈          ◈          ◈

일주일이 지났다. 임진희는 일정을 조정했지만, 가족 세 명이 중국 비자를 받는 데에 시간이 걸려 일정이 연기된 것이다.

어머니는 인천 공항에서부터 잔뜩 들떠 있었다.

“내가 진혁이 덕분에 거제도도 가고, 해외도 가보네.”

‘진작 어머니를 좀 모시고 와볼 것을 그랬네.’

아버지는 유럽에 다녀왔지만, 어머니는 가게를 지키느라 오지 못했다.

말로는 괜찮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부러웠던 모양이다. 혼자 일본 여행도 몇 번 갔다 왔던 임진희가 앞서갔다.

“엄마, 그쪽 말고 이쪽으로 오세요!”

넓디넓은 인천공항이다. 어머니는 즐거운 듯이 이곳저곳에서 사진을 찍었다.

“자, 여기서 둘이 좀 서 있어 봐. 아버지랑 아들 둘이서 사진 좀 찍자.”

공항 마스코트로 보이는 괴상한 인형과도 사진을 찍고, ‘인천공항 게이트’ 에서도 사진을 찍었다.

아버지가 불평했다.

“이런 데서 꼭 사진을 찍어야 해? 너무 촌사람 같잖아.”

“여보, 우리 촌사람 맞아요.”

편의점에 들르자 아버지가 말했다.

“이 목베개하고 안대, 귀마개를 사자. 내가 사 줄게.”

진혁이 지갑을 꺼냈다.

“제가 사드릴게요.”

임진희가 말렸다.

“아빠! 비행이 네 시간밖에 안 되는데 그걸 사는 건 낭비에요. 그리고 귀마개는 없어도 돼요. 내가 솜 뭉쳐서 만들어 줄게.”

그녀는 병원에서 일할 때 이야기를 했다.

다인실 입원 환자들이 밤에 잠들 때 시끄럽다고 못 자면, 직접 솜을 뭉쳐서 귀에 넣도록 소량의 솜을 제공한다며 웃었다.

“솜이 어디에 있어?”

“비행기 안에서 모터 소음이 시끄럽다길래 따로 챙겨왔지.”

‘출장 같아서 귀찮다더니.’

이러니저러니 해도 진희 역시 들떠 있다. 진혁이 피식 웃었다.

중국인 관광객 인파에 섞여 보안 검색대를 통과하고, 면세점에 도착했다.

임진희는 어머니의 손을 잡고 총알처럼 튀어나갔다.

“1시간 후에 저 앞 게이트에서 봐.”

“아니, 우리는….”

기내용 캐리어와 함께 남겨진 아버지가 망연자실하게 말했다. 진혁이 두 개의 캐리어를 양손으로 잡았다.

“제가 짐 지키고 있을 테니까 아버지도 구경하고 오실래요?”

“아니다. 어떻게 너 혼자 두고 가냐.”

말은 그렇게 하지만 아버지의 시선은 양주 코너에서 떠나지 않았다.

“아니면 같이 가죠.”

두 사람은 양주 코너를 같이 구경했다. 아버지는 잭 다니엘 한 병을 집어 들고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이걸 분명히 어디서 봤는데.”

“그 친구분 집에서요?”

“아니, 영화에서. 그런데 무슨 영화에서 봤는지 기억이 안 난다.”

“….”

옆에서 면세점 점원이 끼어들었다.

“지금 3병을 구매하시면 할인해드립니다. 투플러스원 행사 중이에요. 어느 나라 가세요? 가족분들이랑 같이 오셨죠? 한 사람당 한 병은 괜찮아요.”

숨도 쉬지 않고 빠르게 말하는 점원을 뒤로하고 아버지는 슬금슬금 발걸음을 옮겼다. 가게를 나서며 진혁이 말했다.

“아버지, 술 끊으셨잖아요. 구경만 하신다면서요?”

“선물용으로 딱 좋지. 잭 다니엘은 좀 그렇고, 시바스 리갈이나 사 가자. 그거 철우 녀석이 아주 좋아해.”

“아버지는 안 드시고요?”

“나는 녹색 병이 좋아.”

아버지는 커다랗게 간판을 내건 명품 샵에는 아예 들어가지도 않았다. 하지만 조금 거리를 두고 멀리서 진열장을 보기는 했다.

“아버지, 관심 있으시면 들어가서 보세요.”

“저런 거는 함부로 접근하는 게 아니야. 괜히 눈만 버린다.”

진혁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그쪽은 안 가죠.”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탑승 게이트 쪽으로 향했는데, 유감스럽게도 그쪽에는 앉을 자리가 전혀 없었다.

사람들이 앉아 있는 자리를 보며 아쉬워하는 아버지를 보고 진혁이 물었다.

“피곤하세요? 어디 잠깐 앉아 있을까요?”

“피곤하긴, 무슨. 잠도 잘 잤고 좀 서 있어도 돼.”

진혁은 매의 눈으로 주변을 스캔했다. 저쪽에서 이제 비행기를 타야겠다고 이야기를 나누는 모녀가 보였다.

“이쪽으로 오세요. 저기에 빈자리가 있어요.”

두 사람은 진혁이 찾아온 자리에 앉아 커피를 마셨다.

「…82번 비행기 탑승 안내를 드립니다. 이 비행기는 활주로에서 대기 중이며 이륙 허가를 기다리는 중입니다.」

진희와 어머니는 결국 마지막 안내 방송이 나오는 시점에야 도착했다. 진희는 양손에 쇼핑백을 세 개씩, 어머니는 하나씩 들고 있었다.

“우리 안 늦었지?!”

허겁지겁 숨을 몰아쉬며 달려온 진희가 외쳤다. 임진혁은 말없이 쇼핑백을 받아 들었다.

“언제는 여행 오는 거 번거로워서 싫다며.”

한 마디 해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진희가 말갛게 웃었다.

“이게 다 내 껀 줄 알아?”

“그럼 내 꺼냐.”

엄마가 말했다.

“내 꺼다.”

임진혁이 조용해졌다. 진희가 킥킥 웃었고, 아버지가 물었다.

“여보, 내 것도 있어?”

“나중에 보여 줄게요.”

진희가 이코노미 쪽으로 줄을 서려고 하는데 진혁이 제지했다.

“그쪽 아니고 이쪽이야.”

◈          ◈          ◈

처음 타 보는 퍼스트 클래스 좌석에 임 씨 가족들은 크게 놀랐다.

“우와!”

“자리가 진짜 넓네.”

“텔레비전이 엄청나게 커. 25인치는 되겠어.”

비행기를 처음 타 보는 어머니보다 오히려 해외여행을 한두 번 다녀와 본 진희와 아버지가 더 신기해했다.

‘전용기로 불렀으면 진짜 놀랐겠네.’

이제는 여러 번 타서 그다지 감흥이 없는 진혁은 무표정하게 자리에 앉았다.

진희는 신이 나서 핸드폰 카메라로 사진을 찍었다.

“이것 봐, 여기 다리를 쭉 뻗어도 엄마랑 나랑 발이 안 닿아. 진짜 넓다.”

그녀가 사 온 쇼핑백을 발밑에 전부 내려놓아도 자리가 남았다.

아버지가 물었다.

“그래서 내건 뭐냐?”

“아, 아빠.”

진희는 쇼핑백 중 하나를 뒤지더니 작은 상자를 꺼냈다.

“이거 엄마랑 나랑 고른 넥타이에요.”

“…!”

아까 아버지가 한참 동안 바라보던 브랜드의 넥타이였다. 아버지는 입이 귀까지 걸려 해죽해죽 웃었다.

“고맙다.”

문득 궁금해진 진혁은 쇼핑백 안에 들어있는 물건들을 투시해 보았다. 크림이나 스킨로션 따위의 화장품이 많았다. 대부분 같은 것이 여러 개였다.

“야, 왜 똑같은 걸 왜 이렇게 많이 샀어?”

진혁이 묻자 임진희가 대답했다.

“똑같은 게 어딨어? 하나도 없는데?”

“이거랑 이거 같은 거 아니야?”

“이건 유키코 씨 아기 선물할 키엘 베이비 크림이고, 이건 엄마가 쓸 화이트닝 크림인데. 이건 명동점 애들 줄 거. 요새 이 브랜드 립밤이 흥하대.”

진희가 히죽 웃었다.

“그리고 가영이가 부탁한 아이섀도에….”

“… 아니, 더 이상 설명 안 해줘도 돼.”

“에~이. 네 건 없어서 실망한 거지?”

진희가 킬킬거리며 웃었다. 옆에서 어머니가 고개를 내밀며 끼어들었다.

“진희야. 너무 놀리지 말고 어서 꺼내 줘.”

“…!”

진혁이 눈을 크게 떴다.

‘내 것이 있다고?’

진희는 면세점 쇼핑백을 뒤적거리다가 작은 상자를 찾아냈다.

“옜다.”

그녀가 장난스레 상자를 진혁에게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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