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86화
“…?”
진혁은 그녀가 무슨 이야기를 할지 추측해 보았다.
‘내가 어머니 생신을 또 까먹었나? 아니면 결혼기념일?’
머릿속으로 날짜를 짚어보며 진희의 방에 따라갔다.
방문 앞까지 와본 적이야 많지만 실제로 초대받아 들어가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마지막으로 들어왔던 게 고등학생 때였던가?’
방 안은 단순하고 깔끔했다. 벽에는 고등학교 때 친구들과 교복을 입고 함께 찍은 사진이 그대로 붙어 있었다.
그리고 새로운 액자가 보였다. 대학교 졸업증서와 면허증, 친절한 간호사 상장 따위다.
진혁 역시 기억하고 있는 사진과 서류 역시 눈에 띄었다.
그가 장난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큭큭큭. 국가기술 자격증이 저렇게 컸어?”
제빵기능사와 제과기능사 자격증을 확대 복사해서 A4 용지 크기로 만들어 액자를 해 놓았다.
찌그러진 케이크 ? 아마 진희가 처음 구워냈던 케이크로 보인다 ? 나 식빵 사진, 샌드위치 가게를 여는 첫날 고사용으로 만들었던 돼지머리 케이크, 그리고 명동점 개업하는 날의 사진도 있다.
‘잘 됐어.’
사진 속의 진희도, 자신도 즐거워 보여서 진혁은 오히려 기분이 조금 좋아졌다.
회귀하면서 바뀐 삶의 방향이 그녀에게 어떻게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 단면을 잠시 엿본 느낌이었다.
“진혁아. 너 사실대로 말해봐.”
그녀는 진혁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오히려 질문을 하였다.
“뭘?”
“언제부터 사귀었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질문에 진혁이 미간을 좁혔다.
“어?”
“그럼 사귀는 사이도 아닌데 부모님을 초대해서 결혼기념일 식사까지 챙겨?”
“??”
임진혁은 황미미가 부모님의 결혼기념일을 알고 있는지도 몰랐다.
“아까 그 못난이 사탕, 하나도 안 주고 빼앗아 먹었잖아.”
진희가 추궁하는 듯한 눈빛으로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너무 어려서 여자로도 안 보인다더니, 이 도둑놈 같으니라고!”
그는 복잡하고 싱숭생숭한 마음으로 진희를 바라보았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잠깐만, 지금 갑자기 아이디어가 하나 떠올랐어.”
“뭐? 무슨 아이디어?”
진혁은 문을 벌컥 열었다.
부모님이 계신 거실을 지나며 그가 외쳤다.
“아버지, 저 가게 주방 좀 쓸게요. 생각난 게 좀 있어서요.”
어머니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 시간에? 잠은 자고?”
“그래, 쓰고 정리만 해 놔라.”
아버지는 흔쾌히 허락했다. 그리고 바로 진혁이 문을 박차고 사라졌다.
“아니, 얘가 어딜 간 거야?!”
◈ ◈ ◈
무언가를 깊이 생각해야 할 때 사람마다 행동하는 방식이 다르다.
혈도객은 검을 휘두르고 광안마는 난초를 쳤다. 흰 종이 위에 검은 먹이 달려나갔다가 꺾어지면 수려한 난초 그림이 그려졌다.
검림은 이럴 때마다 검을 휘둘렀다.
천마강림보를 밟으며 신공을 끌어올려 검강을 뿌린다.
정원이 조금 망가져도 곧 광안마가 다시 복구해 주었다.
잔소리를 몇 마디 들을 때도 있지만, 금방 지나가니까 괜찮다.
지금은 애병도 없고, 부숴도 되는 정원도 없다.
대련을 핑계 삼아 두들겨 팰만한 부하 녀석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의 가족들은 이 현대에서 어떻게 하는가?
가족들이 스트레스를 해소할 때 어떻게 하는지 떠올려 보았다.
임진희는 맛있는 것을 먹었다. 장은효는 집 안을 청소하고, 임운정은 빵을 굽는다.
임진혁은 마치 축지법을 쓴 것처럼 한두 걸음 만에 바로 소망 베이커리에 도착했다. 천마강림보의 효능이다.
잠겨 있던 자물쇠가 열리고, 닫혀 있던 셔터가 차르륵 올라갔다. 이 구역에는 CCTV가 없으므로 굳이 신경 쓸 필요가 없다.
그는 익숙한 주방으로 돌아왔다.
아버지가 깨끗하게 청소해둔 주방은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
조미료나 설탕, 밀가루의 위치 따위가 조금 바뀐 것이 눈에 들어왔다.
꽉 다물려 있던 입구가 조금 벌어졌다.
그는 손을 씻지도 않고, 그저 시선을 줄 뿐이었다.
예민해진 기감에 밀가루가 하나하나 선명하게 잡혀 왔다. 새하얀 가루는 중력을 거슬러 흐르는 강처럼 우아하게 펄럭거리며 움직였다.
그가 따로 쓰려고 빼둔 초강력분이다.
이 밀가루 10파운드(5kg)가 허공에서 뭉쳐지는 동안 물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수도꼭지가 저절로 돌아가고, 물줄기가 하늘로 솟았다. 분수처럼 솟구쳐 나오던 물은 밀가루와 섞여 들여가며 덩어리졌다.
완벽하게 뭉쳐지기 전에 소금과 생 이스트, 곱게 갈린 참깻가루가 섞여 들어갔다.
가게에서 직접 판매하는 베이글은 스파이럴 믹서라는 기계를 이용해 만든다.
하지만 진혁은 직접 섞는 편을 즐겼다. 아쉬운 점은 다른 사람들이 보고 있으면 할 수 없다는 것뿐이다.
딴딴한 빵 반죽이 공중에 떠오른 채로 빙글빙글 돌아갔다. 일부러 물을 조금 덜 섞어 더 단단하게 만든 반죽이다.
정교한 허공섭물은 소금 단 한 톨도 놓치지 않았다. 그가 원하는 이상적인 반죽 온도는 24도였고, 지금 이 반죽은 살짝 덜 따뜻했다.
이제 발효를 할 시간이다.
온도를 조금 높여 발효를 촉진시킨 후, 그는 가만히 앉아 있지 않았다.
좀 더 가벼운 밀가루와 물이 다른 쪽에 날아올랐다.
반으로 쪼개진 달걀 속 내용물이 새처럼 비상하여 반죽 속에 뛰어들었다.
냉장고 문이 열리고, 스스로 껍질을 벗은 버터가 산산조각이 나며 반죽에 스며든다.
버터는 그 반죽에만 들어가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프라이팬도 올라가 있지 않은 허공에 얄팍하게 버터가 그려지고, 선반 위 통에서 뛰어 내려온 헤이즐넛은 순식간에 겉껍질과 속껍질을 벗었다. 허물처럼 벗어낸 껍질을 훌훌 쓰레기통으로 보내고 버터 위에서 춤추듯 구른다. 공중에서 구수한 냄새를 풍기는 헤이즐넛을 보며 진혁이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눈앞에 떠 있는 반죽은 한두 개가 아니었다.
제일 먼저 시작했던 베이글 반죽이 발효되는 동안, 그가 새로 시작한 반죽은 부드러운 버터 롤이었다.
지금 왼쪽에 떠 있는 반죽은 꽈배기 모양의 브리오슈가 될 것이며 오른쪽에서 막 믹싱을 시작한 반죽은 프레첼이 될 것이다.
숲속에 서서 나뭇잎을 잎맥 하나하나 가르는 것처럼 즐겁다.
버터와 밀가루는 쉴 새 없이 튀어나와 새로운 반죽을 만들었다. 물줄기는 이쪽으로 솟았다가 저쪽으로 방향을 돌렸으며 다시 꺾여나가 충분한 수분을 공급했다.
동글동글하게 말려서 가운데에 구멍이 뽕하고 뚫린 베이글 반죽들이 핑글핑글 돌았다.
버터 롤이 될 작은 반죽들은 탄산가스를 뱉어내고 뭉쳐지며 둥근 구형으로 단단하게 뭉쳤다.
발효가 끝난 반죽이 꼬이고 비틀리며 서로 엉켜 들었다.
“하하하하하하!”
가슴 속에서 저절로 통쾌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모든 것이 변했지만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진혁은 무림 세계에서 간신히 적응했다. 그는 자신은 잘못되지 않았으며, 그곳의 상식이 잘못됐다고 믿었다.
쓸데없는 명예 따위를 지껄이며 사람을 죽이는 미친 세상에서 벗어나 현대로 돌아가면 모든 것이 제대로 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현대 대한민국에서 자신은 너무나 이질적인 존재였다.
날아다닐 수 있는 갓난아기를 상상해 보자.
눈치 빠른 그 아기는 다른 아기들과 부모의 눈치를 보면서 바닥에 딱 붙어 기어 다닌다.
그러다가 한순간, 아무도 보지 않는 순간 날아오른다.
일단 날아오르기 시작한 아기는 더 이상 기고 싶지 않다.
‘… 욕구 불만이었나?’
단순히 누군가에게 끌린다거나 그렇지 않다거나 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관계보다 자신이 우선이다.
오븐에 달려 들어간 베이글이 보기 좋게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타오르는 불꽃은 위와 아래, 곁에서 우아하게 일렁이며 빵을 감쌌다.
하지만 버터 롤은 오븐에 들어갈 자리가 없었다. 진혁은 가볍게 오른손을 살짝 들어 올렸다.
오븐의 위쪽, 빈 공간에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이 불꽃은 버터 롤 하나하나를 감싸는 조그마한 불의 공이 되어 은은하게 열기를 뿜어냈다.
오븐 온도가 200도가 넘더라도 수분과 공기를 함유하고 있는 빵 속의 온도는 100도를 넘지 않아야 한다.
그는 불꽃의 크기를 조절해, 버터 롤이 적절한 온도에서 익혀질 수 있도록 손을 썼다.
브리오슈와 타르트 생지, 그리고 프레첼 역시 향긋한 냄새를 풍기기 시작했다.
새하얗던 표면이 점차 먹음직스러운 금빛으로 물들었다가 다시 갈색으로 그을려간다.
토끼풀 모양의 롤 위에 다시 버터가 곱게 덧발라졌다. 바른다기보다 입는다는 느낌으로, 얇은 비닐을 덧바르듯 꼼꼼히 감쌌다.
농후한 버터 향이 흐르는 것과 동시에, 다른 쪽 구석에서는 빵이 뭉개지면서 부서졌다.
반구형 빵 반죽에 기쁜 듯이 뛰어든 빵가루가 곰보처럼 얽히고설켰다.
아버지와 함께 만들었던 소보루 빵이다.
옛 추억과 최근에 있었던 일, 매일같이 반복되는 일상들이 빵 구워지는 냄새와 함께 새삼스레 떠올랐다.
‘….’
그중에서도 최근에 있었던, 가장 인상 깊은 일이 생각났다.
황미미는 진혁이 의연하고 침착하게 위기에 대처하는 태도를 칭찬했다. 자신은 위기에 처한 것처럼 부들부들 떨면서도 애써 태연하게 행동했다.
하지만 진혁은 정말로 그 상황을 위험하게 느끼지 않았다. 헬리콥터 따위가 줄을 던져줄 때까지 기다릴 필요도 없다. 그 시점에서 바로 그냥 미미를 안고 바닥으로 뛰어내려도 괜찮았다. 허공답보를 하며 내려가면 충격을 받을 일도 없다.
‘뭐, 정 안 되면 CCTV 박살 내고 적당히 뛰어내려도 됐을 테지만.’
초능력자가 염력을 써서 물건을 움직이는 것처럼 날뛰던 빵들은 슬슬 가라앉기 시작했다.
맨 처음에 만들기 시작했던 베이글은 이미 전부 다 구워졌고, 가장 마지막에 시작한 소보루 빵은 이제 막 바삭바삭하게 익어가는 중이다.
복잡하고 싱숭생숭했던 마음은 빵을 만들면서 점차 차분해졌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바깥에는 해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눈 부신 햇살이 창문을 통해 화살처럼 쏘아지며 빵들을 쿡쿡 찔렀다.
햇빛을 반사해 금빛으로 빛나는 갖가지 빵들을 보며 진혁이 입꼬리를 올렸다.
‘다르지 않아.’
이 태양은 그와 똑같았다. 강산이 변하고 들판에 공장이 세워지더라도 해는 그대로 그 자리에 있다.
아침에 떠올라 낮을 밝히고 밤이 되기 전에 다시 사라진다.
무공이 하늘까지 닿았고, 탈마의 경지를 이루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진정으로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순간적으로 잊었다.
자칫하면 심마에 빠질 뻔했다.
진혁은 창문 바깥을 내다보았다. 붉게 타오르는 선명한 해를 보니 기분이 상쾌해졌다. 그는 기분 좋게 비닐을 꺼냈다.
“… 오랜만에 거길 좀 들러야겠는데.”
조리대 위는 깨끗했다.
단지 버터와 밀가루, 달걀과 헤이즐넛 따위 재료가 조금 양이 줄었을 뿐이다.
만들어 놓은 빵은 한두 개가 아니었다.
언뜻 봐도 삼백 개는 넘는다.
포대 속의 밀가루 양이 눈에 띄게 팍 줄어들어 있는 걸 보고 진혁은 이마를 긁적였다.
‘이건 좀… 재료를 다시 보내드려야겠네.’
빵을 가득 안고 천천히 걷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그는 햇살 노인정의 문을 두드렸다.
“계십니까.”
분명히 안쪽에 인기척이 있는데 대답이 없다.
진혁은 품에 안고 있는 빵 봉지를 한 번 보았다. 이만큼의 빵을 가지고 집에 돌아간다면 부모님이나 진희가 무어라 한마디 할지도 모른다.
그는 다시 문을 두드렸다.
똑, 똑.
안쪽에서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새벽부터 누구야?”
문이 벌컥 열리며 낯익은 할머니가 외쳤다.
“안 사요, 안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