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84화
사탕 베이스는 보기보다 묵직했다. 찰흙보다 훨씬 단단한 반죽은 초보자가 다루기는 꽤나 어렵다.
나름 미리 연습해 왔던 황미미는 쩔쩔매며 반죽 덩어리를 내려놓았다.
열선 위에 간접적으로 닿은 반죽은 따끈따끈해지면서 조금씩 부드러워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마시멜로처럼 말랑말랑하지는 않았다. 액체 형태의 사탕을 자주 다루었던 진혁은 곧 요령을 깨달았다. 그는 어렵지 않게 반죽을 조형해 냈다.
‘이거, 온도가 뜨거우면 훨씬 다루기 쉬워지는구나.’
낮은 온도에서도 힘으로 강제로 구부릴 수 있지만 그럼 반죽에 금이 간다.
그는 오랜만에 염화기공을 떠올렸다.
손바닥 안쪽이 뜨거워지며 돌처럼 딱딱하던 반죽이 부드럽게 말캉말캉해졌다.
충분히 녹아내린 반죽을 만족스럽게 주무르며 진혁은 무엇을 만들지 결정했다.
‘콜라 맛이면 역시 그 모양으로 해야지.’
한편 미미는 검지 모양으로 떼어낸 반죽을 조물조물하면서 어떻게든 원하는 형태로 사탕을 조형해 보려고 애썼다.
진혁이 이것저것 잔뜩 만들어서 늘어놓은 후에야, 황미미는 간신히 하나를 다 만들 수 있었다.
“다 만들었어요! 뭐 같아요?”
그녀가 완성품을 자랑스럽게 보여주었다. 길고 허리가 가느다란 사탕 막대처럼 생긴 물건이었다.
‘이게 뭐지?’
아무리 들여다봐도 뭔지 알 수 없었다.
분필이라고 하기에는 비율이 맞지 않았다. 그리고 허리를 빙 둘러싸고 폭 들어가 있는 부분은, 분필에 난 흠집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컸다.
‘대나무 조각인가?’
또 그렇게 보기에는 나무 중간마다 관절처럼 튀어나온 부분이 없다. 오히려 그 반대로, 들어가 있다.
진혁은 한참 고심했다.
“이거, 옆구리가 패인 수수깡이군요. 잘 만들었네요.”
“…콜라병이에요.”
“하하.”
황미미는 고개를 들어 진혁이 만들어 놓은 완성품을 구경했다.
“이건 진짜 콜라병 같네요. 조금 작아서 그렇지.”
임진혁은 엄지손가락처럼 작은 콜라병 사탕을 여러 개 만들었다.
실제 유리병을 축소시켜 놓은 것처럼 완벽한 디테일이다.
그것만이 아니다.
뚱뚱한 콜라 캔처럼 생긴 사탕에, 1.25L 플라스틱 페트병 모양 사탕까지 이것저것 만들었다.
“아니, 도대체 언제 이걸 다 만든 거예요?”
미미가 웃으며 말했다.
“조금 전에요.”
“이건 이대로 팔아도 좋을 것 같은데, 라이센스 문제가 생길 것 같아요.”
“하하. 그럼 팔지 않고 이 자리에서 다 먹어버리면 되죠.”
진혁이 병과 캔, 페트병 모양의 사탕들을 집어서 미미에게 건넸다.
그녀는 콜라 맛 사탕들을 전부 비닐봉지에 넣었다.
“이거는 진혁 씨가 가져가요.”
“….”
못난이 콜라병 모양, 아니 찌그러진 수수깡 모양의 사탕을 잔뜩 받은 진혁이 피식 웃었다.
“감사합니다.”
사탕 공장을 나와서 거리를 걸어 다니며 두 사람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 수제 캔디는 체험형 센터로 한국에 도입하고 싶습니다.”
“아, 캔디를 수입하는 게 아니고요?”
“직접 눈앞에서 사탕을 어떻게 만드는지 보여주고 싶으니까요. 오픈 키친하고 마찬가지죠.”
“눈에 보이면 뭐가 달라지나요?”
“지금 여기서 만드는 이 먹을거리들이 몸에 좋은 간식이라고는 할 수 없잖습니까. 그래도 비정제 설탕을 쓰고, 화학첨가물을 넣지 않고 인공 향료도 빼서 최대한 건강을 덜 해치게 만들었다는 점을 어필할 수 있지요.”
“그건 그렇겠어요.”
“그리고 보여주는 것과 설명하는 건 다릅니다. 설명은 그런가 싶게 되는데, 눈앞에서 보여주고 체험해 보면 직접 믿을 수밖에 없으니까요.”
두 사람이 주고받는 이야기는 대부분 사업에 대한 것이었다.
“사실 제가 어렸을 때 아토피가 심했어요. 그래서 인공감미료가 함유된 음식을 먹으면 얼굴에 뾰루지가 돋곤 했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제가 아예 사탕을 먹지 못하게 하셨어요.”
“그렇군요.”
“그런데 할아버지가 그 사실을 알게 되니까 어떻게 하셨는지 알아요?”
“사탕 공장이라도 샀습니까?”
“짐작하신 게 맞아요.”
그녀는 하늘을 한 차례 올려다보더니 말했다.
“그때는 그런 걸 몰랐어요. 그냥 어느 날 갑자기, 할아버지가 사탕 봉지를 이것저것 가져와서 어느 게 맛있니-하고 물어보시더라고요. 아버지는 화를 내면서 먹으면 덧난다고 하고, 할아버지는 그냥 먹으라고 하고. 결국, 할아버지가 이겼죠. 저는 신이 나서 사탕을 먹었고, 두드러기가 나지 않아서 깜짝 놀랐어요.”
진혁이 피식피식 웃었다.
“그랬겠군요.”
“얼마 전에야 알았어요. 9년쯤 전, 갑자기 정부에서 인공감미료를 함유하지 않은 사탕 개발에 대한 연구에 지원금을 주기로 했어요. 나라의 정책 방향이 바뀐 거죠. 그래서 갑자기 서너 군데의 식품 회사에서 인공감미료와 향료를 포함하지 않은 사탕을 내놓았던 거예요.”
“할아버지…께서 미미 씨를 많이 아끼셨군요.”
“아버지에게 좋은 부친이 아니었을지도 모르지만, 저에게는 최고의 할아버지였어요.”
임진혁은 동네 할아버지 이야기를 했다.
“저는 태어나기 전에 조부모께서 돌아가셔서, 할아버지가 있었던 적이 없습니다. 그래도 동네에 할아버지와 비슷한 역할을 하는 어르신이 계셨는데….”
감 어르신은 금천복 할매에게 늦은 나이에 사랑을 고백해 결혼식까지 올렸다. 짧은 이야기를 듣고 미미가 웃음을 터트렸다.
“잘됐네요. 요즘은 어떻게 지내고 계신대요?”
“부부 마라톤에 출전한다고 두 분이 같이 달리기 연습을 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우와.”
“할머니는 원래 저 늙은이가 늦은 나이에 남사스럽게 뛰어다닌다고 불평하셨어요. 사실은 몸이 안 좋은 분이 무리할까 봐 걱정하고 계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것만은 아니었던 거죠.”
“자기도 뛰고 싶으셨던 거예요?”
“예. 아무래도 그분이 어렸던 시절에는 여자가 몸에 달라붙는 짧은 운동복을 입고 뛰어다닌다는 게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나 봐요. 내심 저렇게 뛰어다니는 건 조신한 여자가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그 마음을 억누르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부러움 반, 걱정 반 섞어서 뛰지 말라고 계속 그랬나 봅니다.”
“지금은 세대가 바뀌고 풍습도 변했잖아요! 뭘 입고 거리를 달리셔도 상관없는데. 그래도 지금은 마음이 바뀌어서 둘이 같이 달리기 연습을 한다니 참 좋네요. 그런 의미에서 저희도 같이 달리는 게 어때요?”
“예?”
갑자기 훅 들어온 발언에 진혁이 눈썹을 추켜올렸다.
“지금 한국 지부하고 중국 지부가 사실 서로를 잘 모르잖아요. 여기 테마파크에 와서 연수를 받고 가는 것만으로 끝내면, 그냥 아 여기에 이런 게 있구나 하고 생각하는 게 다겠죠.”
“여름에 피서 와서 놀다 가는 것처럼, 네.”
“예. 이왕 오는 거, 아예 경합을 하는 게 어때요?”
“…사람 수부터 너무 차이 나는데요. 흠, 어떠려나.”
“이쪽에서는 예선전을 하면 되지요. 재미있을 거예요!”
“그건 조금 생각해 봅시다.”
그리 많지는 않지만, 놀이기구 역시 설치되어 있었다. 반짝반짝 빛나는 마카롱 모양 의자, 예쁜 찻잔 모양의 탈것, 그리고 찻주전자 모양의 마차가 빙글빙글 돌아가는 모양을 보며 진혁이 미간을 좁혔다.
“…저걸 뭐라고 하더라. 알고 있었는데 기억이 안 나네요.”
황미미가 그 놀이기구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게 회전목마에요.”
“아! 맞습니다. 그런 느낌이라고 생각했는데.”
“디저트라는 테마에 맞게 바꾸느라 고생 좀 했어요.”
“마카롱과 찻잔, 그리고 찻주전자와 아이스크림이군요.”
“예, 저기 한국식 팥빙수도 있어요.”
“하하.”
“저기 보이세요? 월병 모양의 탈것도 있어요. 골고루 넣느라 애썼거든요.”
미미는 자연스럽게 손을 뻗었다. 진혁은 조심스럽게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쪽이 아니라 이쪽이에요.”
허공에 헛손질을 한 미미는 우아하고 태연하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발걸음을 옮겼다.
“관람차를 타러 가요. 바로 이 앞이거든요. 위에서 모든 걸 다 내려다볼 수 있으니까 전망이 아주 좋아요.”
◈ ◈ ◈
상황실에서 지켜보고 있던 팀원들은 마음을 졸였다.
“방금 회장님이 헛스윙하신 거 보셨어요? 아흑! 하다못해 하이파이브라도 해주지! 뻘쭘해서 어떡해!”
“괜찮아. 미미 씨는 배우 출신이니까 연기력으로 커버할 수 있어. 여기서 어색해하는 사람이 지는 거야.”
왕 비서가 메이크업 아티스트를 다독였다.
“이기고 지는 문제가 아니잖아요. 지금 할 수 있는 건 다 했는데. 분위기 잡으면서 꽃잎도 뿌렸지, 겉옷도 벗었지, 향기도 풍겼지, 사탕 만들기도 같이 했지. 거기에 심지어 간식도 같이 먹기까지 했어. 그런데 왜 아직도 진도가 나가지 않을까?!”
스타일리스트는 자기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뇌했다.
“내 생각엔 임진혁 CEO님이 지금 황 회장님한테 관심이 없는 이유는 딱 하나밖에 없어.”
“뭐?”
“이미 고향에 마음을 둔 여자가 있는 거야. 그래서 안 넘어오는 거지.”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엉뚱한 소리를 하자 스타일리스트가 윽박질렀다.
“그럴 리가 없어. 설령 애인이 있다고 해도 우리 회장님을 본 순간에 바로 자신의 마음을 깨달았어야지. 미안합니다. 진정한 사랑을 만나버렸네요. 하고 이별을 선언하고 왔을 거야.”
“자, 자. 두 사람은 헛소리하지 말고 진정해.”
“…네, 왕 비서님.”
“비서님, 미안해요. 비서님이 제일 속상할 텐데.”
흥분해서 평소와 다르게 언성을 높였던 두 사람이 고개를 숙였다. 왕 비서가 웃으며 말했다.
“진혁 CEO님은 여태까지 태어나서 연애를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남자야. 고백을 받은 적도 없고, 해본 적도 없어. 돌아가신 어르신께서 전부 조사하셨어.”
“역시 어르신이십니다.”
“미미 씨한테 임자 있는 남자를 붙여주려고 하셨을 리가 없지.”
나름대로 평화로워진 분위기에서 엔지니어가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저기요.”
“방 씨, 눈치 없이 왜 그래요? 지금 우리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구요.”
“그게 아니고요. 지금 문제가 생긴 거 같은데, 저기 좀 보세요.”
“꺄악!”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톤 높은 비명을 질렀다. 왕 비서는 황급히 지시를 내렸다.
“당장 구급 팀에 전화해서 헬리콥터부터 불러! 지방 소방서에는 연락했어?”
엔지니어가 말했다.
“지금 연락 중입니다.”
스타일리스트가 다급하게 외쳤다.
“어떡해요, 저거 저대로 멈춰 버린 거예요?!”
◈ ◈ ◈
진혁과 미미는 스트로베리 컵케이크 모양의 관람차 안에 앉아 있었다.
총 36개의 관람차는 저마다 다른 모양의 컵케이크 형태를 띠고 있었다. 그중에서 제일 먼저 두 사람의 앞에 도착한 것이 스트로베리 모양이었을 뿐이다.
“이거, 괜찮을까요?”
두근거리는 가슴을 손으로 누르며 미미가 말했다. 그녀는 비명을 지르거나 기절하지 않았다. 낯빛이 약간 창백해졌을 뿐이다.
“경호팀에서 눈치챘으니 금방 데리러 올 겁니다.”
스트로베리 컵케이크는 제일 높은 곳에 서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천천히 움직이면서 아래로 내려가야 할 터인데, 어째서인지 움직이지 않는다.
“경호팀이요? 그걸 어떻게….”
미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진혁이 웃었다.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아니야, 그래도 먹을 건 주셨잖아요.”
“분위기 좋은데, 뭘.”
◈ ◈ ◈
“이거 맛있다. 더 없어?”
“없어.”
“더 갖고 있잖아?”
“이건 내 꺼야.”
“웬일로 진혁이 네가 먹을 거에 집착해? 보통 그냥 먹으라고 주잖아.”
“하나 줬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