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83화
진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눈앞에 보이는 퍼레이드에 시선을 빼앗겼다.
“맨 앞에 저건 설마…?”
“생각하시는 게 맞아요.”
“3단 웨딩 케이크군요.”
보석 박힌 금관과 꽃으로 장식된 3단 웨딩 케이크는 높이가 12m는 되어 보였다.
하늘색 바탕에 흰색과 노란색, 분홍색으로 장식되어 알록달록한 케이크다.
거인처럼 높이 서 있는 케이크를 보고서 진혁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헨젤과 그레텔에 나오는 과자 집 같은데요.”
“네, 그래도 먹을 수 있는 재질은 아니에요. 먹을 수 있는 과자 집은 따로 어트랙션 안쪽에 있어요.”
“호오.”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웨딩 케이크가 지나가고, 그 뒤에는 무용수들이 춤추며 따라왔다.
그들이 입은 의상 역시 디저트가 테마였다. 진혁은 피식피식 웃기 시작했다.
“이 사람은 크로캉부슈를 입고 있군요.”
디테일을 살려서 리얼하게 만든 디저트 의상을 보니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미미가 환하게 웃었다.
“저쪽에 치즈 케이크는 보셨어요? 판매 중인 치즈 케이크를 모델로 해서 만든 의상들이에요, 하나도 빼놓지 않고 전부 있답니다!”
진혁은 의상 하나하나를 꼼꼼하게 살폈다. 빠져나온 실밥 하나도 놓치지 못하는 예리한 눈으로 보는데 옷 퀄리티가 꽤 좋았다. 그중에서 강렬하고 짙은 주홍빛이 노랗게 물들어가는 의상이 눈에 들어왔다. 크림슨 치즈 케이크를 테마로 만든 케이크 옷이다.
그 뒤에 있는 케이크들 역시 낯이 익었다. 진혁이 스마트폰을 꺼냈다.
“이건 찍어서 보여 줘도 괜찮습니까? 한국에 있는 애들이, 자기들 케이크가 의상화되어 입고 있는 걸 보면 신이 날 것 같은데.”
미미가 웃었다.
“진혁 쉐프님, 이 의상들은 사진만 봐서는 박력이 부족해요. 저희가 한국 팀을 초대할게요.”
“오.”
“오픈 전에 직원 연수를 겸해서, 가족분들도 함께 초청하면 어떨까 하는데요. 아예 그 인턴십 학생들도 오라고 하면 어때요?”
통이 큰 제안에 진혁이 웃었다.
“그럼 그렇게 하겠습니다. 아, 바닐라와 초콜릿 아이스크림이라. 저거 우리 가게에는 없는 메뉴죠?”
콘 아이스크림 모양의 인형 옷은 언뜻 보기에도 더워 보였다. 하지만 댄서들은 더위를 느끼지 않는 것처럼 흥겨워 보이는 동작으로 폴짝폴짝 뛰어올랐다.
진혁은 그들이 수트 안에서 폭포수처럼 땀을 흘리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프로답군.’
그는 그런 모습에 높은 점수를 주었다.
“아이스크림은 서부 지점에서 새로 추가한 메뉴에요.”
즐겁고 신나는 음악이 경쾌하게 흐른다.
평소 입는 퍼레이드용 의상은 보통 활동성을 중시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들이 입은 옷은 디저트의 모양을 살리다 보니 기묘한 각도에 무게가 실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경우의 수를 고려해 연출한 안무는 매우 훌륭했다.
땀 흘리는 무용수들을 힐긋 보며 진혁이 말했다.
“흐름도 좋아요. 연습을 진짜 많이 했나 봅니다.”
“호호호.”
미미가 살짝 웃었다.
단 두 사람만을 위한 화려한 퍼레이드다.
일부러 진혁이 만든 케이크들이 앞부분에서 춤을 추도록 조정했다.
그녀가 이 한순간을 위해 얼마나 준비했는지, 그는 전혀 짐작하지 못할 것이다.
보석처럼 빛나는 에메랄드와 사파이어로 장식된 드레스를 입은 공주가 화려하게 춤추며 허공에 보석을 뿌렸다.
그중 하나가 미미를 향해 날아오자, 진혁이 빠르게 잡아챘다.
“아, 이건 사탕이군요?”
“예. 이런 식으로 보석 모양으로 세공된 사탕을 뿌리면서 퍼레이드를 진행할 거예요.”
단 두 사람밖에 없어, 바닥에는 보석 캔디들이 사방에 흩뿌려져 있다.
진혁이 웃었다.
“이건 좋지 않은 생각 같은데요.”
“그래요?”
“너무 위험해요. 아기들이 맞으면 다칠 수도 있으니까, 차라리 부드러운 캐러멜이나 마시멜로 같은 거로 바꾸는 게 좋겠습니다.”
“그럴 수도 있겠네요.”
미미가 수긍했다.
“반짝반짝 빛나는 투명한 포장지로 감싼다면 부드럽고 말랑말랑한 과자들도 충분히 보석처럼 빛나 보일 겁니다.”
“꼭 그렇게 하도록 할게요.”
퍼레이드가 지나가는 동안 두 사람은 그대로 서서 행렬을 구경했다.
거대한 웨딩 케이크에 이어 춤추는 케이크 댄서들, 그리고 보석을 뿌리는 캔디 프린세스가 지나가자 다시 5단 꽃 모양 케이크가 나타났다.
꽃 케이크의 위쪽을 파고 옥좌를 올려놓았는데, 그 위에는 꽃관을 쓴 공주가 선 채 손을 흔들며 꽃잎을 뿌렸다.
“전에 만드신 케이크랍니다. 기억하세요?”
진혁이 놀리듯이 말했다.
“모양이 조금 다른데요? 가운데에 사람이 있습니다만.”
“그 꽃잎 모양을 전부 살리면서 무게중심을 잡는 게 어려웠대요.”
“하하. 사람보다 훨씬 크잖아요? 저렇게 크게 보니까 같은 디자인으로 보이지는 않아요.”
“진혁 쉐프님이 워낙 균형 잡힌 모양으로 잘 만드셔서 그래요. 보통 케이크들은 거대하게 만들면 어딘가 이상하기 마련인데, 확대해서 키워도 보기 좋은 모양이 되었다고 하더라구요.”
플라워 케이크 위에 서 있던 여자는 이쪽을 내려다보더니, 웃으며 꽃잎을 더 뿌려주었다.
진혁도 미미도 둘 다 꽃잎에 수북이 뒤덮였다.
미미가 꽃잎을 하나 집더니 향기를 맡았다.
“봐요, 괜찮죠?”
진혁 역시 따라 했다.
“오. 이건 정말로 좋은데요?”
“헤헤.”
그것은 꽃잎 모양으로 얇게 잘라놓은 식용 종이였다. 녹말과 당분을 얇게 펼치고 압착해 종이처럼 만든 후 식용 색소로 염색한 것이다.
미미는 그 종이에 갖가지 식용 색소와 향을 첨가해, 진짜 장미꽃잎처럼 만들었다.
“보통 케이크에 식용 잉크를 인쇄해서 포토 케이크를 만들거나 하는 용도로 쓰던데, 이런 식으로 꽃잎처럼 만드는 건 처음 봅니다.”
“제 팀원 중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낸 의견이에요. 걔가 예쁜 것도 좋아하고 먹는 것도 좋아하거든요.”
진혁은 머리와 어깨에 남아있던 식용 종이 꽃잎들을 떼어냈다. 미미도 머리를 흔들어 붙어 있는 색종이 조각들을 털어냈다. 하지만 긴 생머리를 아무리 털어도, 뒤통수 쪽에 붙어 있는 꽃잎 조각은 떨어지지 않았다.
진혁이 보다 못해 손을 뻗어 꽃잎 조각을 떼어내 주었다.
“이쪽에 붙어 있었습니다.”
“가, 감사합니다.”
미미는 귀까지 새빨개져서 고개를 숙였다. 기분 탓인지 조금 가까워진 것 같기도 하다.
두 사람은 말없이 나란히 걸었다. 솜사탕 가게와 마카롱 가게를 지나치자 이발소처럼 알록달록한 기둥이 여러 개 서 있는 ‘핸드메이드 캔디 팩토리’가 보였다.
언뜻 앞뒤가 맞지 않아 보이는 설명에 진혁이 피식 웃었다.
“저 사탕 공장에서는 뭘 할 수 있습니까?”
“실제로 사탕을 만들어볼 수 있는 공장이에요. 일부러 인공 색소나 향료, 첨가물을 따로 넣지 않고 직접 고른 재료로 눈앞에서 만들 수 있도록 신경을 썼죠.”
“이야, 그건 진희가 좋아하겠는데요.”
진혁이 먼저 성큼 발을 내딛자 미미가 따랐다.
입구에는 거대한 빨갛고 파란 롤리팝 사탕들이 나무처럼 빽빽이 서 있었다. 사탕 숲을 지나자 현란한 조명이
사탕의 역사나 종류, 천연 색소 소개 등등 다양한 판넬들이 보였다.
은은한 분홍색의 복숭아 맛 사탕 베이스와 보랏빛 포도 맛, 샛노란 망고 맛 베이스가 눈에 선히 들어왔다.
선명한 붉은색의 딸기 맛과 순백색 요구르트 맛, 연노랑 빛 레몬 맛에 새하얀 바나나 맛도 보였다.
“바나나 맛은 노란색이 아니라 하얀색으로 하셨네요?”
“네. 바나나는 껍질만 노란색이잖아요. 대신 요구르트 맛하고 모양이 달라요.”
“하하. 그거야 그렇죠.”
진혁은 비슷한 컨셉의 바나나 음료를 떠올렸다. 그는 적갈색 사탕 베이스를 가리키며 물었다.
“그런데 저건 천연 재료라고 하기 어려울 것 같은데요?”
“아하하. 저 같은 사람도 있으니까요.”
“콜라 맛을 좋아하세요?”
미미가 머쓱해 하며 웃었다.
“예. 저래 봬도 천연 콜라… 는 아니지만 직접 공장에서 공급받아서 만드는 콜라 맛 사탕이에요. 천연 재료를 먹고 싶은 사람들은 다른 맛을 고르면 된다구요.”
진혁이 그녀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 콜라 맛이 좋으면 그냥 콜라를 마시면 되잖아요?”
“그건 그런데, 콜라 맛 사탕도 맛있어요. 한 번 드셔 보실래요?”
“제품이 있습니까?”
“당연하죠. 당장 내일부터 개장할 건데, 이-따만큼 쌓아 놨다구요.”
그녀가 어딘가에 연락하자, 양복 입은 남자가 안쪽에서 황급히 튀어나왔다.
그는 리본으로 묶인 고급 상자를 두 개 내밀었다.
“안녕하십니까, 회장님. CEO님.”
“반갑습니다.”
“모든 맛이 포함되어 있는 선물용 세트입니다. 말씀하신 콜라 맛 역시 들어 있습니다.”
“어머, 이런 것까지 챙기지 않아도 되는데. 호호호. 고마워요.”
그는 몇 번이고 허리를 숙이더니, 다시 가게 안쪽으로 사라졌다.
진혁은 상자를 받아 리본을 풀어 보았다. 선물 상자 안에는 주먹만 한 유리병이 쪼르륵 늘어서 있었다. 자그마한 하트 모양 색색의 사탕은 하나하나가 손톱만 한 크기였다. 올망졸망하게 사탕이 담긴 유리병 중 하나를 꺼내, 개중 흑갈색으로 된 사탕을 하나 골라냈다.
“하나에 1g에서 1.5g 정도의 중량이군요.”
“아, 맞아요! 어떻게 아셨어요?”
“….”
진혁은 사탕을 입에 넣고 아작, 깨물어 보았다. 놀랍게도 안쪽에 탄산이 들어 있어 톡 쏘는 맛이 났다. 그는 신기해하며 물었다.
“이거, 어떻게 이 맛을 살렸죠? 대단한데요.”
“헤헤. 진혁 쉐프님도 모르시는 게 있군요.”
미미가 방긋 웃었다.
“고온에서 녹인 설탕을 특정 기압에서 이산화탄소를 주입하며 압축하면 된답니다. 그다음에도 몇 단계가 더 있지만, 제일 기본적인 원리는 그거예요.”
“역시 콜라는 마시지 않고 씹어도 맛있네요.”
진혁은 입안에서 콜라 사탕을 굴려 보았다.
입천장과 혀에 톡 톡 튀기는 감각은 콜라를 마실 때와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그는 이렇게 생소하면서도 익숙한 감각을 이전에도 느낀 바 있었다.
그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광안마 녀석, 분명히 옛날 그놈하고 다른 녀석이었지.’
광안마와 황태명은 분명히 다른 사람이다.
하지만 임진혁은 황태명의 장례식을 치르고 일 년이 넘게 지난 지금 시점에 와서도, 그를 광안마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뿌리치지 못했다.
‘이놈은 분명히 그놈하고 다른 놈이야. 그놈이 정말로 뼛속까지 광안마였다면 그런 쓰레기 같은 아들놈은 예전에 처리했을 거야. 하지만 살려뒀지. 손녀딸이 처리해주기를 바랐든 어쨌든,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을 남겨 두었어.’
그리고 진혁은 황태명의 유산을 거절하지 못했다.
자신이 평범하게 살기를 원했다면 애초에 황태명이 찾아왔을 때 아무것도 모른 척하면서 외면했어야 했다. 하지만 이미 재산을 받았고, 유언장에 걸려있는 조건을 수락했으며, 그 손녀의 곁에 너무 가까이 있었다.
‘2D가 제일 좋다더니, 씁.’
유언을 듣는 시점부터 아예 인사를 고하고 떠났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는 미미를 힐끔 바라보았다.
‘나도 콜라 좋아하는데.’
황태명과 닮아있는 그 얼굴은 광안마와는 전혀 닮지 않았다.
인성은 물론이고, 성격도 다르다.
‘그래도 그놈의 손녀인데….’
선량하고 나름대로 강단이 있으며, 배려심이 깊고 아름답기까지 하다.
‘그런데 그 자식 손녀야….’
콜라 맛 사탕은 맛있었다.
‘왜 하필 그 새끼 손녀지?!’
◈ ◈ ◈
황미미는 웃으며 넓고 평평한 하얀 탁자를 가리켰다.
“여기 이거 봐요. 초등학생들도 만들 수 있대요.”
사탕 반죽을 직접 다루고 체험할 수 있게 설치해 둔 열선 작업대였다.
그녀는 아까 제대로 된 대답을 얻지 못해 약간 초조해져 있었다.
인이어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회장님, 잘 되어가고 있어요?’
‘다음은 어떻게 할까요?’
그녀는 인이어를 그대로 꺼버렸다.
“콜라 맛 사탕이 마음에 들었다면 직접 만들어 보실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