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82화
‘거미 다리….’
고운 아미가 살짝 좁아지며 동공이 흔들린다. 아주 미세하게 미미의 표정이 변했다. 눈썹이 위로 올라가며 앵두 같은 입술이 살짝 벌어지고, 백옥같은 흰 이가 드러났다.
“고마워요, 잘 먹을게요.”
‘처음으로 직접 손으로 떼어준 음식이야. 절대로 사양할 수는 없지.’
질끈 눈을 감거나 하지는 않았다. 먹지 않을 거라면 모를까, 이왕 먹을 거라면 확실하게 하는 편이 좋다.
그녀는 눈을 감지도 않고, 주먹을 꽉 쥐지도 않았다.
그저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거미의 다리를 입안에 넣고 살짝 깨물었다.
보송한 털이 그대로 미뢰에 촤르륵 느껴졌다.
오슬오슬하고 소름 끼치는 느낌이 척추에 스치는 것을 무시하고 어금니로 콱 물었다.
거미의 식감은 게의 다리와 비슷했다.
견고한 껍질이 갈라지면서 연하고 보들보들한 속살이 비어져 나와, 아삭하면서 보드랍다.
“양념하지 않은 닭발하고 비슷한 것 같기도 한데, 게하고 제일 비슷하네요.”
진혁이 싱긋 웃었다.
“그렇죠? 이런 식감을 좋아하시잖아요.”
이런 식으로 만나 식사를 하기 시작한 것도 오십 번이 훌쩍 넘었다.
사업을 계속 하는 한 만나서 회의를 하고 있지만, 분위기는 점점 더 부드러워졌다.
미미의 뺨이 살짝 붉어졌다.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임진혁 쉐프님은 가리는 것 없이 전부 잘 드시네요.”
“미미 씨야말로 편식은 하지 않으시잖습니까. 한 번도 먹어보지 않은 음식이더라도 처음 한 번은 드시잖아요.”
황미미가 살짝 고개를 숙이며 웃었다.
“예, 의외로 맛있을 수도 있으니까요.”
‘그래도 바퀴벌레나 지네 튀김에는 관심이 없는데.’
다행히 그가 특별히 다른 기이한 음식들을 더 권하지는 않았다.
‘정말로 내가 이 맛을 좋아한다고 생각해서 추천해 줬나 봐.’
진혁이 다른 가판대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아, 저기에 메뚜기볶음하고 애벌레 튀김도 있네요. 저건 한국에서도 많이 먹는데. 태국에서도 먹나 봐요.”
“메뚜기라면 중국에서도 먹어요. 할아버지가 직접 잡아서 볶아주신 적도 있어요. 그런데 여기 메뚜기는 그 종류는 아니네.”
“이것도 드시죠.”
“아, 저는 괜찮습니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볶은 메뚜기 튀김을 거절했다.
“놀이기구와 3D 열차도 체험할 테니까, 저렇게 봉지에 담긴 건 좀 그래요.”
“제가 들고 있으면 됩니다.”
“그럼 진혁 쉐프님이 불편하시잖아요.”
“하하. 그런 건 아무것도 아닙니다.”
진혁이 태연하게 앞으로 걸어갔다. 미미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냥 거절해도 되는구나.’
아까 그 거미 다리를 먹는 것 역시 거절했어도 아무렇지 않게 수긍했을 것이다.
하지만 진혁이 다시 물어본다면 미미는 그 어떤 간식거리도 거절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미미의 입맛을 너무 잘 알았다.
‘의외로 맛있었지.’
전혀 도전할 만한 음식이 아니었지만, 생각보다 먹을 만했다.
재래시장을 완전히 벗어나자 눈앞에 넓은 광장이 보였다. 광장 한가운데에는 거대한 유리 온실이 서 있었다.
온실이라고 해도, 비닐하우스 온실과는 차원이 다르다.
동화 속에서 튀어나온 성처럼 화려하고 웅장하게 서 있는 온실은 겨울 여왕의 궁전처럼 장엄했다. 양쪽에 서 있는 탑만이 아니다. 가운데에는 뾰족지붕이 하늘 끝까지 드높이 솟아 햇빛을 반사하며 휘황찬란하게 빛났다.
좀 더 가까이 다가가니 스테인드글라스 형식으로 우아하게 갖가지 꽃이 새겨진 유리창이 보였다.
“온실입니까?”
“예. 들어가 보실 거지요?”
“네.”
온갖 덩굴 문양이 양각되어 있는 거대한 유리문은 높이만 해도 5m가 넘어 보였다.
그 유리문이 천천히 양쪽으로 열리고, 두 사람은 온실 안으로 들어섰다.
바깥과는 다른 공기가 확 하고 밀려왔다.
“조금 덥지요?”
황미미는 자연스럽게 목에 두르고 있던 모피 숄을 풀었다. 하얗고 보송보송한 모피 숄만이 아니라, 걸치고 있던 갈색 코트도 벗었다.
반면에 한서불침인 임진혁은 땀도 흘리지 않고서 겨울옷을 그대로 입고 있었다.
“아, 예.”
미미가 옷을 벗은 걸 보고, 진혁 역시 맞추어 겉옷을 벗었다.
검은색 코트를 벗자, 안쪽에 입고 있던 붉은색 니트 스웨터가 드러났다.
“진혁 쉐프는 붉은색을 진짜 좋아하시나 봐요.”
“아, 이건 진희가 선물해 준 겁니다.”
선물 받은 지도 한참 됐다.
빨간 티셔츠를 갖다 버리고 난 다음에 입을 옷이 없다고 하니까, 어디선가 붉은색 옷을 사 와서 건네주었다.
황미미가 고개를 살짝 들어 올렸다.
‘바로 지금이야.’
환기 장치를 관리하는 엔지니어와 미리 말을 맞춘 대로다.
선명하고 또렷한 눈동자가 두려움 없이 임진혁을 바로 직시했다.
선선하고 시원한 날씨에 꽃 내음이 멀리서 흘러왔다. 꽃가지가 살랑거리며 바스락거린다.
버찌처럼 빨갛고 조그마한 입술이 살짝 열렸다.
“저도 옷을 선물해도 될까요?”
“…!”
그리고 그 순간, 온실 안에 거센 바람이 불어왔다. 멀리 서 있던 벚나무가 가지를 흔들었다. 소복이 피어 있던 꽃들이 잎을 떨구며 꽃잎이 사방에 흩날렸다.
CF의 한 장면처럼 완벽하게 연출된 순간이었다.
긴 생머리 위에 꽃잎이 한 장 내려앉고, 풍성한 속눈썹을 들어 올리며 미미가 화사하게 웃었다.
임진혁이 그런 미미를 말없이 바라보다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여기가 봄이에요.”
진달래와 개나리, 그리고 목련과 철쭉.
공기 차단벽을 사이에 두고, 동시에 피어있을 수 없는 꽃들이 활짝 피어있었다.
“여기 있는 꽃들 모두 식용 꽃이에요. 먹을 수 있는 꽃이 아니더라도, 식용으로 장식할 수 있는 꽃까지 포함했어요.”
미미가 신나서 설명했다.
“여기 옆에 티 바(Tea bar)를 만들기로 했어요. 꽃 모양의 마차에서 유채꽃 차나 국화차 같은 걸 팔 거랍니다.”
“진달래도 있군요. 저건 함부로 먹으면 안 될 텐데.”
“네, 수술을 떼어내고 꽃잎을 씻으면 먹을 수도 있고 장식용으로도 쓸 수 있으니까요.”
“이 빨간 꽃은….”
작은 도롱이 같은 빨간 꽃이 송이송이 달려있다.
“한국에서는 깨꽃이라고 한다지요? 안쪽에 있는 꿀을 따서 먹을 수 있다고 들었어요.”
“저희는 사루비아라고 불렀습니다. 그건 일본식 명칭이고 원래 이름은 샐비어라고 하더군요. 초등학교 가는 길에 있던 화단에 그 꽃이 피어 있어서, 진희하고 같이 따먹고 도망가던 생각이 나네요.”
“아.”
“여기 오는 애들도 분명히 이 꽃을 따서 꿀을 먹어보고 싶어 할 겁니다.”
“손님들에게 공개하면 순식간에 꽃이 다 없어지고 말겠는데요?“
“아예 관상용으로 조금 단을 높게 만들어, 사람들은 손을 뻗지 못하게 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먹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서는 따로 처리한 간식거리를 팔고요.”
“그것도 좋겠어요!”
미미가 활짝 웃어 보였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팔을 내밀었다.
임진혁은 그 팔에 팔짱을 끼거나 손을 잡지 않았다.
오히려 미미가 손에 들고 있던 코트와 숄을 건네받았다.
“엣?!”
“이건 제가 들어드리죠.”
“무거우실 텐데요.”
“무겁지 않습니다.”
◈ ◈ ◈
CCTV를 통해서 황미미의 동선을 지켜보고 있던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말했다.
“이렇게 우리 미미 씨가 시집가시는 걸까요? 감동적이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고, 섭섭하기도 하고.”
“아직 성공한 건 아무것도 없는데 괜히 설레발부터 치지 말아. 그보다 지금 코트 벗고 안쪽에 입은 원피스 보이는데 반응이 전혀 없는 거 봐요.”
이 ‘승부 원피스’를 고르기 위해서 스타일리스트와 미미, 스타일 팀은 오랜 시간을 함께 의논했다.
결국, 밀라노의 패션쇼에 등장할 옷을 미리 선입해 구입하는데 성공했다.
황미미를 청순한 소녀처럼 보이게 하는 하얀 원피스다.
평소 기업가적인 이미지 연출을 위해 입고 다니는 검은색 정장과는 동떨어져 있는 의상이다.
“이미지 변신에 완전히 성공할 줄 알았는데.”
“우리 회장님한테 진짜로 관심이 없는 건가, 아니면 없는 척하는 건가?”
“그래도 꽃잎이 흔들리는 연출은 먹힌 것 같아요. 두 분이 뭐라고 얘기하시는 것 같은데요?”
스타일리스트가 턱을 괴고서 말했다.
“지금 버드나무를 한 번 더 흔드는 게 좋지 않겠어?”
“아니요, 지금 시점에 나무 소리는 좋지 않은 것 같아요.”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심각하게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지금 미미 씨 뺨이 붉어진 것 좀 봐. 베네피트 블러셔 같은 색깔이 됐어. 지금 너무 더운 거 아니야?”
“이 다음은 봄이 아니라 여름 온실이에요. 더 더우실 텐데.”
“회장님은 체향이 향기로우시니까 적당히 땀을 흘리는 것도 괜찮으실걸?”
“온도 차 너무 심해서 우리 회장님 감기 걸리면 어떡해?”
스타일리스트도, 메이크업 아티스트도 모두 미미를 아끼는 마음은 한결같다.
원래 자기 자리지만 회장님의 측근들에게 자리를 뺏겨, 구석의 나무상자 위에 쪼그리고 앉아 있던 엔지니어가 말했다.
“그럼 여름 온실 온도를 좀 내릴까요?”
“지금 갑자기 내리면 식물들이 상하는 거 아니에요?”
“잠깐 지나가실 정도는 괜찮아요.”
“그럼 그쪽 에어컨 좀 틀고, 새소리라도 틀어주는 게 어때요?”
“여름 새들은 잘 시간인데요.”
“그럼 녹음된 새소리라도 있을 거 아니에요? 분위기가 얼마나 중요한데요.”
엔지니어는 녹음된 새소리를 틀었다.
스피커에서 짹짹거리는 새소리가 울려 퍼지며, 카메라 속의 두 사람이 미소지으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임진혁이 사운드 스피커를 가리키며 무어라 말했고, 미미가 고개를 끄덕였다.
수줍은 듯 뺨을 붉게 물들이는 그 모습을 보며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자신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아흑, 세상에서 제일 예쁜 우리 미미 아가씨가 드디어 사랑을 하다니. 난 죽어도 여한이 없어.”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웃었다.
“진혁 CEO님이 아무리 눈치가 없어도 이제는 확실하게 눈치채셨겠죠? 얼굴 빨개진 게, 더워서 그런 게 아니네. 그냥 좋아서 그런 거네.”
괜히 자기 얼굴까지 빨개진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신나서 발을 굴렀다.
“싫은 건 아닌 거 같은데.”
스타일리스트가 엔지니어에게 물었다.
“두 분이 무슨 이야기하는지 우리가 들을 수는 없지요?”
왕 비서가 미간을 좁혔다.
“어허, 어디 회장님 사생활을 침범하려고 해요. 그렇지 않아도 사생활이 없으신 분인데, 우리들이라도 지켜 드려야죠.”
“어차피 오늘 미팅이 끝나고 나면 다 얘기해주실 테니까 그냥 기다려 봐.”
엔지니어가 중얼거렸다.
“그런데 저 남자, 진짜로 괜찮은 사람 맞아요?”
스타일리스트와 메이크업 아티스트, 그리고 왕 비서가 엔지니어를 돌아보며 물었다.
“예?”
“아까 거미를 머리부터 씹어먹었다면서요. 보통 사람은 그거 먹지도 않고, 먹더라도 다리부터 먹어요.”
“….”
왕 비서가 말했다.
“돌아가신 어르신께서 손수 선택하신 손녀 사윗감이에요.”
“아, 그럼 이유가 있겠네요.”
엔지니어는 바로 수긍해 고개를 끄덕였다.
◈ ◈ ◈
임진혁은 저 멀리서 들려오는 작은 소리들을 듣고 쓴웃음을 지었다.
왕 비서의 목소리를 포함해 미미의 측근들이 말하는 소리가 전부 들렸다.
악의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미미 씨를 아끼는 사람들이 많군요.”
미미가 한여름의 흰장미처럼 환하게 웃었다.
“진혁 씨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