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81화
“들어올 때 계약서에 사인했잖아. 기억 안 나?”
“안 읽어봤는데요.”
진혁이 미간을 좁혔다. 마리오가 말했다.
“다음부턴 그런 건 꼼꼼히 읽어보고 사인해야지. 이상한 사람한테 속아서 엉뚱한 계약서에 서명하기라도 하면 네 손해야.”
“밥도 주고 빵도 주고 다 주니까, 하하하.”
“사탕 주면 따라갈 거야? 네가 애냐?”
명동지점에 도착한 두 소년은 잔뜩 긴장해 있었다.
“임진혁 쉐프님과 쌍둥이시라면서요.”
“많이 닮았어요?”
진혁이 말했다.
“하나도 안 닮았지.”
동시에 마리오가 말했다.
“둘이 완전 똑같아. 지기 싫어하는 성격도 그렇고, 이목구비도 닮았어.”
오후 2시.
네 사람이 명동점에 도착한 시각은, 진희가 오후의 빵을 구워낼 무렵이었다.
그녀가 정신없이 구워진 빵을 하나씩 내놓고 아르바이트생이 포장하는 동안, 김동진이 나와서 손님들을 맞이했다.
“지금이 딱 빵 나올 시간이라, 잠깐 이쪽으로 와서 기다려 주세요.”
“나도 가서 돕지.”
진혁은 아무렇지도 않게 겉옷을 벗었다. 명동점의 직원용 사무실 벽에 걸려있는 진희의 여벌용 앞치마를 걸쳐 입더니 손을 씻고 바로 나갔다.
강마리오 역시 당연하다는 듯이 앞치마를 걸치고 나갔다.
강운종은 눈을 껌뻑거렸다. 그는 잠시 눈치를 보다가 옆에 있는 앞치마를 걸치고 따라 나왔다.
이미 두 사람은 일을 시작한 후였다. 임진혁이 갓 구워진 빵을 비닐에 넣어 포장하자 마리오가 바로 그 빵들을 진열대에 올려놓는다.
마치 여기 직원인 것처럼 자연스러운 태도였다. 강운종은 뭘 해야 할지 몰라서 멍청히 서 있다가 다른 사람에게 부딪혔다.
“아얏!”
여기 직원으로 보이는 여자아이는 들고 있던 빵 트레이를 떨어뜨릴 뻔했다. 강운종은 잽싸게 그 트레이를 받아서 다시 돌려주었다.
‘여자다! 여자야!’
또래 여자와 이렇게 가까이 서 있어본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그가 있었던 소년원에는 여자라고는 매점 할머니밖에 없었다.
‘조혜정? 이름도 예쁘네.’
가슴께 명찰에 자수가 놓인 것을 보니 이름도 바로 알 수 있었다.
“저, 저기.”
강운종이 입술을 열어 뭐라고 말하려던 참이었다. 강마리오가 어이없다는 듯이 강운종을 보며 말했다.
“너 뭐하냐?”
“예?”
“트레이만 잡아주면 뭘 해. 빵을 받아야지!”
“아!”
바닥에 빵이 3개나 떨어져 있었다.
여자애를 보느라 넋이 나가 있어, 빵이 바닥에 떨어지는 건 전혀 느끼지 못했다.
강운종은 황급히 무릎을 꿇고 빵을 집으려 했다. 뒤늦게 앞치마를 걸치고 따라 나온 너구리가 눈을 껌뻑거리며 말했다.
“이거 치울까요?”
“어디로 치우는지는 알고? 너희들은 그냥 안에 들어가 있어.”
낯선 여자가 다가와 두 사람의 어깨를 잡아 방으로 돌려보냈다.
“좁은데 덩치 둘이 서 있으니까 그렇긴 하네.”
“하하하!”
그 여자는 놀라울 정도로 키가 컸다. 분위기 역시 특이했다. 하지만 얼굴을 보자마자 누군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이분이 여기 사장님이구나.’
임진희라고 놓여있는 이름 자수를 보지 않아도 바로 알 수 있다.
“실습은 내일부터잖아? 오늘부터 일하지 않아도 돼.”
언뜻 보기에는 친절한 사람처럼 보였다.
“그리고 빵이건 트레이건 만지기 전에 손부터 깨끗이 씻어야지. 특히 너, 손톱 아래에 때 끼어 있잖아.”
“예?!”
“너. 손 씻을 줄 몰라?”
면도칼처럼 날카로운 시선에 강운종이 쩔쩔매며 말했다.
“저, 저기. 급하게 나오느라….”
너구리 역시 굳어서 옆에 서 있었다. 그때 문이 끼익 열렸다.
“어어, 벌써부터 신고식이야?”
진혁이 들어오며 웃었다. 뒤에는 마리오가 따라 들어왔다. 빵 진열하는 작업을 전부 마친 모양이었다. 강운종과 너구리가 주눅 들어있는 걸 본 마리오가 물었다.
“자기소개는 했어?”
“아 참, 나는 임진희야. 여기 사장.”
“얘가 강운곰, 얘가 너구리야.”
진희가 임진혁의 발등을 밟았다.
“사람을 이름으로 소개해야지!”
“본명보다 훨씬 외우기 쉽잖아.”
“본명은 뭔데.”
“강운종하고 김인수.”
“그래서 둘 중 누가 우리 지점에 오는데?”
임진혁이 너구리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얘.”
“인수 너? 잘 부탁해.”
진희가 먼저 손을 내밀어 힘있게 맞잡고 흔들었다.
강한 손힘에 너구리가 눈을 크게 떴다.
“자, 잘 부탁드립니다.”
“그럼 얘는 놓고 가. 내가 오리엔테이션 주면 되니까.”
강운종은 부러운 마음으로 너구리를 바라보았다.
‘젠장.’
여기는 여직원이 더 많았다. 그중에서도 혜정이는 꽤 예뻤다.
임진희 역시 미인이었지만 뭔가 예쁘다기보다는 무서웠다.
‘잠깐, 그럼 내가 본점 담당?’
본점도 좋다. 가게 위치도 좋고 매출도 최고다. 더군다나 진혁이 제일 자주 들르는 곳이니 더 많이 배울 수 있을 것이다.
강운종은 희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명동점을 떠나 본점으로 향하며, 마리오는 선물 받은 음료를 쪽쪽 빨았다.
“여기 청포도 에이드 맛이 바뀌었네?”
“색깔도 너무 예뻐요.”
에메랄드처럼 녹색으로 반짝반짝 빛나다가, 위쪽으로 올라가며 은은하게 투명해진다. 진혁이 웃었다.
“거기서 제일 잘 나가는 음료래.”
“이런 건 처음 먹어봐요. 맛있다.”
“그래, 종류별로 다 먹어봐야지.”
진혁이 강운종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어주었다. 오리엔테이션 받으러 간다고 신경 써 다듬은 머리가 헝클어졌지만,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강운종은 지하철역 앞에서 멈추어 섰다.
“선생님!”
“응?”
“손 제대로 못 씻어서 죄송합니다.”
길 가다가 갑자기 90도로 허리를 굽어 인사하는 강운종을 보며 마리오가 웃었다.
“얘도 성격이 별나네.”
“됐으니까 빨리 내려와.”
“네!”
‘그 예쁜 여자애하고 같은 가게에서 일하지 못하는 건 아쉬워. 그래도 임진혁 선생님하고 같이 일하는 게 제일 좋아.’
운종은 계단을 두 개씩 뛰어내려가 두 사람을 따라잡았다.
◈ ◈ ◈
“그렇게 세 명이 실습하면서 제과제빵 수업을 받은 지 반년쯤 됐네요.”
“반년이나! 그래도 이론 과정이 끝나지 않아요?”
황미미가 감탄하며 물었다. 차 뒷좌석에 나란히 앉아 있어 평소보다 거리가 더 가까웠다.
‘리무진 뒷좌석은 너무 넓단 말이지.’
“어디, 이쪽 애들 교육은 잘 되나요?”
“16~18세 애들을 데려와서 제과제빵 교육을 시키고 있어요. 진혁 쉐프님이 짜주신 커리큘럼대로 하고 있는데, 학생들보다 강사들이 더 힘들어하네요.”
“고작 달리기 몇 번 하는데 힘들어한다고요?”
“고작은 아니죠. 제빵하다가 또 내려가야 하니까. 그래서 저희는 제과제빵을 가르치는 강사 따로, 체력운동을 가르치는 강사를 따로 고용하고 있어요.”
“그런 방법도 있군요.”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중국에서 계속해서 신규 인력을 뽑고 있는지는 알고 있었지만, 진혁의 커리큘럼을 그대로 따라 하고 있는지는 확인하지 않았다.
“현지에서 맞는 커리큘럼을 개발해서 진행하셔도 되는데 말입니다.”
“임진혁 쉐프님이 하시는 데에는 분명히 이유가 있을 테니까요. 할아버지께서도 진혁 쉐프님의 의견을 존중하라고 말씀하셨구요.”
“혹시 이 테마파크 개발도 언질을 주셨습니까?”
미미가 수줍게 웃었다.
“이건 제 아이디어에요.”
두 사람은 리무진에 타고서 내일 새로 개업할 테마파크로 향하는 중이이었다.
디즈니랜드나 식스 플래그스, 유니버설 스튜디오처럼 라이센스를 따온 테마파크가 아니었다. ‘디저트 월드’라는 이름의 새로운 공원이다. 설계부터 기획, 건설까지 거의 8개월밖에 걸리지 않았다.
“예전에 잠실 롯데월드 건설이 5, 6년 걸렸다고 들었는데 정말로 빨리 완공돼서 놀라울 뿐입니다.”
“호호. 뛰어난 분들이 많이 도와주셔서 현실화가 되었어요. 부족한 제 계획이 이렇게 실제로 이루어지다니 놀라울 따름이에요.”
진혁이 웃었다.
“부족하다니요. 우두머리의 일은 방향을 잡아주고 일을 분배하는 거니까, 아주 잘 하고 계십니다.”
그는 진심으로 말했다. 임진혁은 창문 밖을 바라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가는 길의 풍광도 좋아요. 이런 곳에 테마파크를 지을 생각을 하다니!”
“여기는 할아버지가 미리 매입해 두셨던 사유지에요. 나무만 죽 심어두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셨어요.”
“그래요?”
“원래 이런저런 동물들을 자유롭게 풀어 놓고, 사파리 파크 같은 걸 세우려고 계획하셨던 것 같아요. 그래서 광활한 부지를 준비하셨는데 미처 계획을 실행에 옮기시기 전에 몸이 좋지 않아지셔서요.”
세월은 유수와 같이 흘러, 그녀는 더 이상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하면서 눈물을 짓지 않았다.
“그래서 그 부지를 바탕으로 디저트 테마파크를 생각하셨군요.”
“예, 제가 처음에 사업을 물려받고 나서 당장 눈앞에 있는 일만 하느라 정신이 없었어요. 그래서 제대로 시작한 게 많지 않아요. 그렇다고 이런 좋은 부지를 그냥 놓아두고 싶지는 않았거든요. 그래서 현재 하고 있는 사업과 연결해서 생각하다 보니.”
황미미는 자신이 왜 이 사업을 하기로 했는지 다시 생각했다.
본래 그녀는 둘이서 데이트할만한 장소를 찾기 위해 적당히 놀이공원을 1일 대여하려고 했다.
하지만 최근 들어 관광수요가 증가하며, 그 어떤 테마공원도 1일 대여가 불가능하다고 하였다.
그래서 그녀는 이 부지를 떠올렸다.
‘놀이기구는 최소한으로 줄이고, 다양한 디저트들을 체험할 수 있게 했으니까 8개월에 끝났지.’
디저트만이 아니다. 한쪽 구석에는 시장처럼 꾸며놓아 각 나라의 전통 간식을 체험할 수 있게 해놓은 곳도 있었다.
“저는 그냥 빵집하고 카페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미미 씨는 시야가 넓군요.”
“아니요, 병원에서 환자식도 하고 계시잖아요?”
“그거야 그렇죠.”
“카페만 생각하고 계신다고 할 수는 없지요.”
“병원에 딸린 카페니까요. 음식 종류가 좀 다르지만. 원래는 병원보다 교도소나 학교같이 단체 급식을 하는 장소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말입니다.”
“병원도 좋죠. 좋은 일 하시는 거예요.”
“하하.”
공사장 시찰은 몇 번 했지만, 완전히 완성되어 실제로 사람들이 돌아다니는 공원 내에 들어오는 것은 처음이다.
곁에 있는 사람이 임진혁이라는 점 역시 한몫할 것이다.
설레는 마음으로 미미가 진혁의 곁에 섰다. 거리를 조금 두고 경호원들이 뒤에 따라왔다.
동화 속의 성처럼 화려한 입구를 지나고 푸르른 공원을 걷자, 양쪽에 쭉 늘어서 있는 포장마차들이 보였다.
치즈 케이크부터 마카롱, 아이스크림까지 다양한 것들을 팔고 있었다.
직원들은 1~2개의 상품을 올려놓고서 싱글싱글 웃으며 두 사람에게 인사를 했다.
미미와 진혁은 아무것도 사지 않고 그 거리를 지나쳤다. 조금 더 걷고 난 후에는 갈림길이 나타났다. 놀이기구들이 있는 넓은 길과 좁고 구석진 골목길 중 진혁은 좁은 골목길을 택했다.
“이쪽이 더 재미있어 보이는데요?”
“이쪽으로 가면 태국의 전통 시장을 모방한 거리가 나와요.”
“오.”
그 거리에서 팔고 있는 간식거리는 아까와는 달랐다. 미미가 가판대를 보며 말했다.
“이쪽 이 바퀴벌레 튀김하고 지네, 거미 튀김은 잘 팔릴지 어떨지 모르겠어요. 도마뱀과 악어고기 구이도 그렇고.”
“분명히 이쪽만 먹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따로 있을걸요.”
진혁은 아무렇지도 않게 거미 다리 구이를 집어 들었다.
“이건 몸통은 좀 비리니까 다리부터 먹으면 좋아요.”
그는 몸통과 머리를 떼어내어 입에 넣더니 아무렇지도 않게 씹었다. 그러고 나서 그는 미미가 예상하지 못한 행동을 했다.
“미미 씨가 좋아하는 맛일걸요.”
진혁은 거미 다리를 떼어 내밀었다.
검은색 거미 다리에는 보송보송한 털이 빼곡히 돋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