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76화
케이크가 전부 사라진 후에도 행복에 겨운 침묵이 회장 안에 자리해 있었다.
‘이런 분을 모실 수 있다니 큰 행복이다!’
사람들은 같은 생각을 하며 임진혁이 앉아 있는 테이블을 힐끗힐끗 바라보았다.
부정적인 감정 따위는 단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진혁이 입꼬리를 치켜올렸다.
행사장 전체가 긍정적이고 행복한 감정으로 충만하다. 아무도 말이 없는 가운데, 단 한 사람의 목소리만이 들렸다.
「이거는 저희에게 레시피 전수하실 건가요?」
임진혁의 케이크를 자주 먹어 익숙해진 황미미만이 띄엄띄엄 말을 건넸다.
「……음, 이건 못 만들걸요.」
진혁이 대답했다.
그는 ‘자신만이 만들 수 있는 케이크’와 ‘일반인은 만들 수 없는 케이크’를 면밀하게 구분했다.
분류 기준은 ‘무공을 사용할 것’이다.
하지만 비서는 그 기준을 다르게 받아들였다.
「맞아요! 이렇게 치명적으로 맛있는 케이크를 가게에서 판매하면 다른 케이크는 하나도 안 팔릴지도 몰라요. 오히려 너무 맛있어서 놓지 않는 게 나을 수도 있겠어요. 이건 독점하셔도 어쩔 수 없는 겁니다.」
비서가 흥분해서 말했다.
대개는 비서처럼 진혁이 케이크 레시피를 독점하고자 한다고 오해했다.
「왕 비서, 진혁 쉐프는 여태까지 모든 레시피를 전부 조건 없이 공개하셨는걸요. 엄한 소리 하지 말아요.」
「아, 그렇네요. 욕심이 없는 분이시잖아요. 전에 한국 방송분에서도.」
비서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미미가 단언했다.
「CEO님 실력이 너무 뛰어난 나머지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만들 수 없는 거예요. 아까 칼을 써서 빵을 자르시는 것만 해도 봐요. 우리 제과제빵사들 중 그만큼 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는 줄 알아요?」
진혁이 머쓱하게 웃었다. 탁자 곁으로 슬금슬금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임진혁 CEO님,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방금 전에 먹은 케이크에 대해서 말인데요.」
「그렇게 부드러운 크림을 고정시킨 비결이 대체 뭡니까?」
많은 이들이 다가와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진혁은 친절하게 하나씩 대답해 주었다.
황미미는 미소를 지으며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하지만 존경심 가득한 표정으로 하는 질문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개중에는 시답잖은 질문을 하는 이들도 있었다.
「한국에서 가져오셨다고 들었는데 굳이 그렇게 하신 이유가 있나요?」
이 문답이 길어지자 황미미가 미간을 좁혔다. 그 표정을 본 비서는 시간을 확인하고, 진행자에게 가서 시간을 언급해 주었다.
진행자는 문답을 중지하도록 조심스레 조언했다.
「그럼 여기서 문답을 중지하고 케이크 심사 결과를 발표하겠습니다.」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직 3위까지의 케이크만 가게에서 실제로 판매될 것이다.
‘아마 3위는 리코타 치즈 케이크인가.’
맛 자체가 뛰어나다기보다는, 쉽게 질리지 않는 맛이다.
거기에 건강에 좋다고 광고할 만한 요소도 있다.
「3위는 레몬과 아몬드를 넣은 리코타 치즈 케이크입니다! 중앙 지점의 왕씨, 앞으로 나와 주세요!」
사람들이 환성을 지르며 축하해 주었다. 하얀 조리모를 쓴 중년 남성이 앞으로 나와 감격한 표정으로 꽃다발과 상장을 수여받았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 케이크가 발표되었다.
「2위는 사과 젤리 치즈 케이크입니다.」
진혁은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사과 젤리 치즈 케이크일지 아닐지 고민했으나 크게 생각하지 않았다.
‘조금 달기는 하지만 나쁘지 않았지. 비주얼적으로 꽤 예뻤어.’
세상에는 단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다. 판매량을 보면 담백한 케이크 절반, 달콤한 케이크가 절반 이상 팔린다.
통계를 고려하면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두 번째 케이크를 만든 사람은 키가 큰 여성 제과제빵사였다. 그녀는 기뻐하며 격렬하게 진행자를 포옹하고, 꽃다발과 상장을 받고서 아래로 내려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1위를 발표할 시간이 되었다.
진혁은 무엇이 1위일지는 확신했다.
「1위는 베리 치즈 컵케이크입니다!」
‘역시 그렇지?’
한국으로도 역수입할 계획이다.
‘SNS에서 광고하기 딱 좋아 보이는 타입이지. 예쁘고, 들고 다니기 좋고. 다들 한 번씩은 먹어 보고 싶어 할 테니 한정판으로 잠깐 내놓으면 좋겠어.’
그가 심사한 점수 역시 결과에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마지막에 단상으로 올라온 사람을 보고 진혁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이건 의외인데.’
방금 전에 상을 받은 40대 남녀와 달리 이번에 무대 위로 올라온 이는 퍽 어려 보였다.
잘못 보면 10대 후반으로도 볼 수 있을 법한 얼굴이다.
아무리 높게 잡아도 20대 초반으로밖에 볼 수 없다.
진혁이 중얼거렸다.
「저렇게 동안인데 점장이라.」
「중학교 졸업하고부터 계속 제과제빵을 해 왔다고 합니다.」
그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진짜 천재가 여기에 있네.」
「예?」
다른 이들은 전부 진혁에게 천재라고 했다.
하지만 막상 임진혁 자신은 스스로가 천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단지 뛰어난 미각과 후각, 그리고 월등한 신체적 능력을 이용하고 있을 뿐이다.
이전에 내공이 없을 적 평범한 소년이었던 때에 제과제빵을 제대로 하지 못했던 시절을 떠올리면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진혁은 눈앞의 20대 청년을 보며 시선을 떼지 못했다.
서양식 제과제빵의 불모지나 마찬가지인 중국에서, 스스로 제과제빵을 공부해 온 자가 이 정도 음식을 만들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진혁은 마음속으로 결심을 굳혔다.
‘얘는 한국으로 데려가야겠다.’
중국으로 제과제빵을 배우는 학생을 몇 보내기로 했다. 그중에서 잘하는 애들은 이쪽에 남을 것이다.
그러니 중국에서 인재를 데려와도 상관없을 것이다.
진혁은 흐뭇하게 미소를 지었다.
행사가 마무리되는 데에는 30분 정도 더 걸렸다.
시상식을 마치고 나서도 진혁의 주변에 다가오려는 이들이 꽤 있었다.
하지만 진행자와 왕 비서가 막아 주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감사합니다.」
◈ ◈ ◈
한국에 도착한 다음 날, 진혁은 한국 지점의 점장들을 불러들였다.
중국 지점에서 개발한 케이크의 시제품 샘플을 맛보여 주고 싶어서였다.
“오, 이게 그 시제품들이야?”
진희가 눈을 크게 뜨고서 물었다.
“나한테 이상한 것만 골라서 보내더니 다들 제대로 잘 만들었잖아!”
“이상한 거라니. 여기 이걸 봐. 예쁘고 맛있어 보이잖아.”
진혁은 아예 대놓고 레몬 패션프루트 치즈 케이크를 들이밀었다.
그는 임진희가 이 케이크를 거절할 줄 알았다.
“으, 보는 게 싫은 거지 먹는 게 싫은 건 아니라고!”
그녀는 부들부들 떨면서 눈을 감은 채 숟가락으로 아무 데나 쑤셨다.
수저 위에 패션프루트와 망가진 케이크 시트가 가득 올라갔다.
진혁이 킥킥 웃었다.
“아니, 먹기 싫으면 먹지 말라니까.”
“무슨 소리야! 이것도 일이잖아. 프로는 프로답게 일을 제대로 해야지.”
그녀는 패션프루트 타르트를 꿀꺽 삼켰다.
“상쾌하고 과육이 잘 씹혀서 좋긴 해. 그런데 케이크라기보다는 그냥 과일 모둠 같아.”
“네가 시트 말고 과일 부분만 먹어서 그렇지.”
“으.”
남매가 투닥거리는 사이에, 김동진과 유키코는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 컵케이크는 진짜 괜찮은데요. 이런 식으로 밀크티랑 녹차 케이크를 만드는 게 어떻습니까? 아예 딸기 밀크쉐이크 같은 계열에서 착안하여 딸기 생크림 컵케이크를 만드는 것도 좋겠습니다.”
유키코가 고개를 끄덕였다. 부드럽고 몰캉몰캉한 베리 치즈 케이크에 그녀 역시 반해 버린 터였다.
“이거 정말 맛있어요. 동진 씨 의견도 좋습니다. 그런데 이왕 녹차 케이크를 만든다면, 녹차보다는 일본의 질 좋은 말차를 수입하는 것도 괜찮겠습니다. 제가 좋은 농장을 알고 있어요.”
유일봉이 신나서 말했다.
“그러니까 기본적으로 잘 나가는 음료수에 폭신폭신한 식감을 추가해서 다시 만들자는 거잖아요? 아예 노 오븐 케이크 스타일로요. 그렇다면 아이디어는 많죠. 이것저것 시험해서 만들어 보면 좋겠는데.”
“유리병의 가격은 어때요?”
“회수율이 낮을 것 같은데, 아예 조금 커다랗고 질 좋은 유리병으로 하는 게 어때요? 사서 먹으면 유리병도 준다고 하고요.”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컵케이크 말인데 중국에서는 언제 진행해요?”
“병 수급 때문에 3개월쯤 후에 할 예정이야.”
“우리도 그때 맞춰서 할 거예요? 그럼 굳이 서두를 필요가 없는데. 일단 병 시제품을 받은 다음에 그거 가지고 이것저것 만들어 봐야 메뉴 개발을 하죠. 지금 아무것도 없이 다른 병에다 만들어도, 용기가 바뀌면 다른 맛이 날 거고.”
동진은 벌써 이것저것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진혁이 웃었다.
“아니면 소량만 주문 제작할까 싶어. 아예 국산 유리 공장에 별도로 유리병을 주문할 수도 있더라고.”
백진영이 씩 웃었다. 다른 이들보다 먼저 컵케이크를 맛본 그는 벌써 다른 점장들을 소집하기 이전에, 몇 군데 공장에 견적을 요청한 후였다.
“맞아, 유리 공장 견적은 내가 알아보고 있어. 시제품부터 빨리 받아 오라는 거지? 내가 아예 그것부터 요청할게.”
“네, 그게 가격도 중요한데. 그것보다는 병이 얼마나 튼튼하고 안 깨지는지, 예쁜지, 케이크랑 잘 어울리는지가 더 중요한 것 같아요.”
유일봉이 의견을 냈다. 중국 시장에 관심이 많은 동진이 물었다.
“중국은 어때요? 지점별로 용기를 다르게 한대요?”
“아예 한정판 개념으로 나가려고 하더라. 어차피 고급스러운 가게를 지향하고 있으니까, 병 모양 자체는 같아도 거기에 새겨진 마크가 다른 거야.”
“헤에.”
진혁이 덧붙였다.
“공장이 아니라 수제작하는 유리장인들에게 맡길 모양이더라고.”
동진이 깜짝 놀랐다.
“헉, 그거 정말로 비싸지겠네요.”
“그렇지.”
임진희가 중얼거렸다.
“이거, 나는 그 컵떡볶이 같은 걸로 생각했단 말이야.”
“응?”
“초등학생들이 컵떡볶이를 하나씩 사 먹잖아. 접시에 담긴 건 비싸니까, 아예 조금씩 맛만 보고 그러는 거지.”
그녀가 눈을 빛냈다.
“대학생들이 하나씩 컵케이크를 들고 다니면 좋을 것 같은데. 우리는 유리 말고 플라스틱 케이스를 쓰면 어때?”
“그럼 좀 덜 예쁘지 않겠어요? 유리가 훨씬 고급스러워 보이는데.”
“장단점이 있지. 그, 왜 백진영 바리스타님이 쓰시는 일회용 컵 있잖아요. 그거 작은 사이즈도 있지 않아요?”
백진영이 씩 웃었다.
“오. 그걸로 만들려고?”
“조그만 미니 음료수 같은 모양으로 만들면 충분히 귀여울걸.”
그녀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그리고 유리는 무겁고 비싸잖아. 깨지면 위험하기도 하고, 컵을 준다고 해도 나중에 직접 설거지를 해야 한다고. 아예 한 번 쓰고 버리는 깔끔한 플라스틱 쪽이 더 나을 수도 있어.”
진혁이 정리했다.
“그러면 플라스틱 컵을 좀 받아서 보내 줄 테니까, 그걸로 몇 개 만들어 봐. 진영이 형이 알아본 유리병 공장에서 받은 시제품으로도 만들어서 비교해 보자.”
“일단 나오는 거 봐서 계절 한정으로 진행해 보든지 하자.”
◈ ◈ ◈
일주일 후.
황미미는 지난 행사의 사진을 보면서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녀가 임진혁이 나온 사진들을 따로 골라내는 모습을 보고 왕 비서가 물었다.
“회장님. 혹시…… 그분을 마음에 두고 계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