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75화
황미미의 사무실은 사생활을 위해 두꺼운 방음벽으로 보호되어 있다.
하지만 임진혁의 감각을 차단할 수는 없었다.
그 결과, 행사 중인 연회실에 있던 진혁은 가족 드라마를 경청하고 있었다.
‘흐으으음.’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림 세계에 가기 전, 그는 타인의 가족에 대해 별달리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정확히는 세상 모든 가족들이 자신의 가족과 비슷할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했다.
하지만 그곳은 달랐다.
자신의 아이를 흑점에 식용으로 내다 파는 부모가 있음은 물론이고, 아들의 재능을 시기해 죽이려 하는 부모 또한 있다.
가족애가 강하고 상냥하고 친절한 가족 역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진혁은 그런 것을 보지 못했다.
정파건 사파건 상관없이 강력하고 부유한 가문들은 가족 관계에 대한 책임감, 부모와 조부모에 대한 효를 강요했다.
효와 가족관계를 중시하는 시대적 배경과 달리 광안마는 특이한 녀석이었다.
그는 대단히 실용적인 성격이었고, 죽여야 할 사람은 죽여야 한다는 주의였다.
부친을 죽인 친족살인자-혈도객을 받아들이는 데에 제일 먼저 동의한 것도 광안마였다.
‘녀석, 사람이 됐네. 전에는 피붙이라도 확실하게 처리하고 갔을 텐데. 이런 식으로 알아서 하라고 딸에게 넘기고 가다니.’
그 냉정하고 차갑던 녀석이 아들놈을 죽이지 않고 살려두다니 대단하다. 예전에 비하면 정말로 많이 바뀌었다.
‘나름 기특하단 말이야.’
황려권이 시설에 끌려가며 바둥거리며 저항하는 소리가 여기까지 선명하게 들려왔다.
‘아예 수용할 수 있는 시설까지 따로 준비해 놓았나 본데.’
딸이 제대로 처리하지 못할 경우를 대비해서 전부 준비해 놓은 것처럼 보인다.
마침내 들려오던 비명이 완전히 멎었다.
의료진들이 이야기 나누는 소리로 미루어 보건대, 진정제를 맞은 것이 분명하다.
황미미가 황급히 준비하는 소리가 들리고, 가족 드라마가 막을 내렸다.
진혁은 관심을 돌려 눈앞에 있는 케이크를 내려다보았다.
레몬과 아몬드를 넣은 리코타 치즈 케이크다. 케이크라고 하기보다는 스콘에 가까운 모양이다.
그는 올록볼록하게 구워진 빵조각을 잘라 입안에 넣었다.
“흐으음.”
달달한 설탕 가루가 녹아내리며, 구운 아몬드가 바삭하게 씹혔다. 단단하고 부드러운 빵이 조각조각 부서지며 강한 아몬드 향이 남았다. 혀 위를 굴러가는 감촉은 바삭한 쿠키보다는 좀 더 물렁하고, 크림치즈보다는 훨씬 조밀하다.
무어라고 말하기 어려운 맛이었다.
‘설탕을 빼면 좀 더 낫겠는데.’
건강한 빵을 원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조금 재료를 바꾸는 것도 좋겠다. 몇 가지 아이디어를 떠올린 진혁이 말했다.
「이 메뉴는 조금 개량해서 한국에 팔아도 좋겠는데요. 이걸 만든 사람이 서울 쪽 판매에도 관심이 있을지 물어봐 주시겠습니까?」
「그야 물론이죠. 쉐프님, 아까 관심을 보이셨던 레몬 패션프루트 케이크도 가져왔습니다.」
마침 스마트폰이 울렸다.
임진희가 보낸 문자를 확인하고 진혁이 피식 웃었다.
「쿡.」
보낸 사람 : 임진희
-_-+
진혁이 킥킥대고 웃었다.
그는 방금 받은 레몬 패션프루트 치즈 케이크를 다시 들여다보았다.
빵칼로 깨끗하게 자른 다음에, 절단면을 포함해 다시 사진을 찍었다. 물론 절단면에도 동글동글한 패션프루트 과육이 포함되어 있다.
그는 사진 한 장을 더 전송했다.
즉시 답장이 왔다.
보낸 사람 : 임진희
죽을래? 그만 보내!
그다음에 보낸 사진은 아예 확인조차 하지 않았다. 진혁이 킥킥거리던 중에 황미미가 다시 돌아왔다. 얼굴이 상기된 채였다.
테이블 쪽으로 걸어오는 그녀를 보며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앉아서 드시죠.」
「네!」
그녀가 밝게 말했다.
「잠깐 일이 생겨서 다녀왔어요. 별일 아니었어요」
붉게 상기된 얼굴에 눈가는 촉촉하게 젖어 있다. 진혁이 푸딩처럼 생긴 컵케이크를 밀어주었다.
「이걸 드세요.」
「감사합니다.」
그녀는 스테인리스 수저를 컵 속에 넣어 케이크를 한 스푼 떴다.
푸딩처럼 몰캉한 크림치즈, 그리고 진한 붉은색 잼이 마블링처럼 뒤섞이며 알록달록하게 섞였다.
「아!」
진혁 역시 같은 케이크를 한술 떴다. 입안에서 펼쳐지는 진한 치즈 향이 반갑다. 차갑게 식힌 크림치즈가 입안에서 사르륵 녹아내리고, 새콤달콤한 베리가 곧이어 혀를 휘감았다. 마지막으로 바삭바삭한 쿠키 가루가 까끌까끌하게 미뢰를 살짝 쓰다듬는다.
꿀꺽하고 삼키자 부드러움이 그대로 식도를 타고 내려갔다.
비단에 온몸이 포옥 잠긴 것처럼 달콤하고 부드럽다.
「이건 혀에 닿을 때보다 삼킬 때가 진짜 맛있네요.」
「묽게 해서 음료수로 만들어도 괜찮을까요?」
「그렇기엔 좀 진해서 질릴까 싶기도 하고요. 이 정도가 딱 적당한 것 같은데. 만든 사람이 연구를 많이 했네요.」
다음 차례는 진혁이 사진 찍은 바로 그 케이크였다.
레몬 패션프루트 치즈 케이크를 보면서 미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건 좀 미묘하다. 나가면 결국 여름 한정판으로 나갈 수밖에 없는 건데, 좀 더 무난한 과일로 하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요?」
비서가 대답했다.
「아까 못 보셨지만 비슷한 컨셉으로 나온 케이크가 있어요. 얇게 썬 사과를 빙빙 돌려 감아서 장미꽃처럼 올려놓고, 사과 젤리로 굳힌 거예요.」
「그게 어딜 봐서 치즈케이크인데요?」
「절반은 사과가 들어간 사과 젤리고, 나머지 아래쪽 절반이 치즈 케이크에요.」
미미가 눈을 크게 떴다. 탁자 위에는 종류별로 모든 치즈케이크가 늘어서 있었다.
「이쪽에 있는 이건가요?」
그녀가 사과 젤리 치즈 케이크 접시를 끌어당기자 진혁이 말했다.
「그건 좀 나중에 드시는 편이 나으실 겁니다.」
「네?」
「젤리 자체를 달게 만든 거라 좀 달아요. 다른 것들을 다 먹고, 마지막으로 다크 초콜릿 케이크를 먹기 전에 드시길 바랍니다.」
미미가 환하게 웃었다.
「감사합니다!」
두 사람은 계속해서 케이크와 케이크, 그리고 또 다른 케이크를 맛보았다.
진혁은 정말로 ‘맛’만 보고서 고칠 점들을 휘갈겨 썼다.
「더 안 드십니까?」
황미미 역시 한 입만 먹고 더 이상 먹지 않는 것을 보고 진혁이 물었다.
그러자 미미가 웃었다.
「아직 안 먹은 케이크가 있잖아요.」
「아.」
진혁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진행자가 마이크를 들고 무대 아래로 내려와, 케이크 바 쪽으로 걸어갔다.
「한국에서 특별히 와주신 CEO 임진혁 님께서 케이크를 잘라주신다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점장들이 일제히 손뼉을 쳤다. 다 함께 모여서 연습하기라도 한 것처럼 일정한 박자였다.
‘정말 연습시켰을지도 모르겠는데.’
누군가는 선망하고 존경하는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지만, 누군가는 불신과 불만, 질투로 가득한 시선을 쏘아 보내고 있다.
진혁은 누가 어떤 시선을 보내는지 전부 기억했다.
‘아직도 저런 사람들이 있군.’
최연소로 소교주 후보가 되었을 때도 저런 이들이 있었다.
진혁이 짧게 말했다.
「여러분, 좋은 자리에 초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케이크를 자르겠습니다.」
임진희가 이때를 위해서 써준 긴 연설문이 있었지만, 진혁은 굳이 그것을 전부 이야기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환호하자, 그는 플라스틱 칼을 들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
사람들이 서로 바라보며 웅성거렸다.
「무슨 일이야, 지금 케이크를 자르신다면서.」
「방금 뭘 하긴 했나?」
진혁은 고개를 가볍게 숙여 보이고 자리로 돌아왔다.
「왜 아무것도 안 하고 들어오신 거예요?」
미미가 묻자 진혁이 대답했다.
「전부 다 잘랐습니다. 접시에 옮기기만 하면 되는데요.」
「네? 방금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서 계셨잖아요?」
미미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미 잘라놓은 케이크를 접시에 올려줘야 할 보조 요원들도 어리둥절하며 서 있었다.
진혁은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다시 케이크 옆으로 가서, 접시 위에 케이크를 직접 담기 시작했다.
그가 첫 번째 케이크를 접시에 옮겨 담는데 화려한 꽃 모양 크림이 하나도 망가지지 않은 그대로였다.
진혁이 두 번째 케이크를 접시에 옮겨 담으려 하자, 진행 요원이 황급히 손을 뻗었다.
「저희가 하겠습니다!」
「제가 할게요!」
진혁은 아무렇지도 않게 접시를 넘겨주고 뒤로 물러났다.
「우와아아아!」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자르셨어!」
‘?’
진혁이 멀뚱멀뚱하니 주변을 둘러보는 데 참석한 점장들이 열렬하게 손뼉을 쳤다. 우스운 상황에 미미가 입을 가리며 미소지었다.
「임진혁 쉐프님, 케이크를 빨리 자르는 묘기를 하셔도 되겠어요. 어쩌면 그렇게 정확하고 신속하게 하셨는지 모르겠네요.」
「매일 자르다 보면 빨라집니다.」
「호호호호!」
진행 요원이 임진혁과 황미미, 비서가 앉아 있는 탁자 위에 케이크를 가져다주었다.
플라워 크림치즈 케이크를 바라보며 미미가 침을 꿀꺽 삼켰다.
「제가 이걸 먹으려고 오늘 아침을 굶을까 말까 엄청 고민했다고요.」
그녀는 일생일대의 중대한 고민을 하는 것처럼 미간을 좁혔다.
「크림과 빵을 따로 맛볼까요, 아니면 한꺼번에 먹는 편이 좋을까요?」
「제가 뭐라고 말씀드려도 제일 먼저 크림부터 드실 것 아닙니까.」
「그거야 그렇지만요.」
미미는 제일 먼저 접시를 들어 올려 코끝에 가까이 가져갔다.
향긋한 장미와 시트러스 향이 진하게 풍겼다.
「진짜, 빵이라기보다 꽃향기가 나요. 살짝 크림 향기 섞인 것도 같고. 이 향은 향수로 써도 좋겠어요.」
그녀는 기대감에 가득 차 있었다. 임진혁의 케이크를 몇십 번이나 먹어보았지만 절대로 질리지 않았다.
「아아!」
폭신하고 부드러운 크림은 이제까지 먹었던 점장들의 것과 차원이 달랐다. 솜사탕처럼 보드랍게 녹아내려,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단지 상쾌한 무엇인가가 지나갔을 뿐이다.
그리고 그다음에는 케이크 시트였다.
가볍고 몽실몽실한 크림이 환상 속의 구름처럼 사라져 버리고 난 후에는 단단하고 빽빽한 빵이 남아 있었다.
착각할 수 없는 맛이었으나 아주 연했다.
그 빵 사이에 두툼하게 발려진 크림치즈 층의 치즈도 면포처럼 보드라웠다.
단단하고 보들보들하고 다시 단단했다가 보드라워진다.
피아노의 흑색과 백색 건반을 오가는 것처럼 달라지는 촉감을 즐겁게 감상하며 미미가 중얼거렸다.
「이건 당근 크림치즈 케이크네요?」
붉어졌던 눈시울에 분노하여 상기되었던 뺨은 이제 다른 이유로 새빨개져 있었다.
「진짜, 너무너무 맛있어요!」
그녀가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마스카라가 칠해진 눈 아래에 눈물이 방울방울 고여 있었다.
비서가 황급히 손수건을 내밀었다.
「여기 있습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손수건을 뾰족한 모양으로 말아, 화장이 번지지 않게 주의하며 눈가를 살살 찍어냈다.
진혁이 대답했다.
「꽃을 주제로 디자인했습니다. 많으니까 천천히 드십시오.」
케이크를 먹고 있는 사람들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조금 전까지 선망과 존경, 질투와 분노, 상대적 박탈감 등에 시달리던 이들의 표정은 한 가지로 통일되어 있었다.
맛있다거나 한 조각을 더 먹어도 되냐고 묻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전부 좀비처럼 넋을 잃은 표정으로 케이크를 먹어치울 뿐이다. 숫제 포크를 내려놓고, 접시째 들이키는 사람도 있다. 접시에 코를 박고 정신없이 혀로 핥는 자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