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73화
다음날.
진혁은 예정한 시간에 맞추어 중국으로 출발했다.
도착하는 데에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거의 2~3주에 한 번씩 교대로 오가다 보니 익숙하다. 그는 지점 시찰을 겸해서 잠시 가게에 들러 현지인 점장의 인사를 받았다.
‘나쁘지 않군.’
가게 분위기도 좋고 직원들 역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검은색으로 꾸미고 붉은색 비단 커튼을 둘러 고대 황궁의 응접실처럼 장식하였다. 진혁은 이곳이 마음에 들었다.
생일잔치는 바로 이곳을 빌려 이루어질 예정이다.
「일찍 오셨네요.」
「안녕하세요.」
진혁은 가볍게 고개를 숙여 황미미에게 인사했다. 오늘의 생일 파티를 위해 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결혼식장에 들어서는 신부처럼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미미가 환한 표정으로 웃었다.
「케이크가 너무 예뻐요! 향기가 나는지 맡아볼 뻔했다니까요.」
「벌써 보셨습니까?」
「네! 진짜 꽃 같아요. 미리 말씀해주신 것보다 훨씬 더, 정말로 상상할 수 없을 만큼요.」
진혁은 자리에 앉았다.
이 자리는 엄연히 말하면 연예인의 생일잔치라기보다는 사원 연수에 가까웠다.
<해와 달> 중국 각 지점의 점장들과 황미미 그리고 진혁이 함께하는 생일 파티다. 점장마다 새롭게 만든 케이크를 갖고 오게 되어 있다.
오늘 파티의 주인공인 황미미가 능숙하게 진행을 이어나갔다.
「안녕하세요, 점장님들!」
「안녕하십니까!」
어린이집의 꼬마 원생들처럼 씩씩한 환성이 울려 퍼졌다. 진혁은 눈을 껌뻑이며 점장들을 바라보았다.
‘음, 손에 굳은살이 박힌 걸 보면 이 사람은 열심히 하는 것 같고.’
그가 한 명 한 명 점장들을 평가하는 사이에도 미미는 계속해서 행사를 진행했다.
제일 먼저 영업실적이 가장 우수한 점장이 포상을 받았다. 상장과 금일봉을 받은 점장은 행복한 표정으로 미미와 함께 사진을 찍었다.
영업 실적만이 아니라, 고객들이 가장 높게 평가한 지점 역시 포상을 받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최근에 결혼한 점장, 그리고 득남한 점장 역시 금일봉을 받았다.
진혁은 그 모습을 보며 나름 깨달은 바가 있었다.
‘우리 애들도 저런 걸 좀 해야겠네.’
150여 개에서 200여 개로 늘어났지만 모든 지점의 지점장이 전부 오지는 못했다.
각 지역에서 예선을 통과한 자들과 포상예정자들, 그리고 경사가 있는 자들만 오늘 이 자리에 초대되었다.
진혁은 대강 수를 세어 보았다.
‘케이크를 제출할 사람은 스무 명, 그리고 상 받은 사람은 여섯 명 정도인가? 최근에 자식을 낳은 사람이 둘, 그리고 결혼한 사람이 여섯.’
유난히 결혼한 사람이 많은 것 같다. 여섯 번째로 결혼한 사람이 금일봉을 받고 있자 진혁이 눈썹을 추켜올렸다. 그 모습을 본 황미미의 비서가 대답해주었다.
「저희 회사가 대우가 좋다고, 요즘 인기가 많대요.」
「허허.」
「직원들 대상으로 선을 주선하겠다는 업체까지 있습니다.」
「그건 좋은 일이네요.」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직원들 포상이 끝나고, 드디어 진혁이 기다리던 행사가 시작되었다.
「오늘 각자 케이크는 만들어 오셨나요?」
「네!」
「이 중에서 임진혁 쉐프님과 저에게 합격 평가를 받은 케이크는 <해와 달> 중국 전 지점에서 판매를 시작할 거예요!」
「와아아아!」
진혁은 턱을 괴고서 지켜보았다.
‘분명히 오늘이 생일이라고 들었는데.’
생일 케이크 주문을 받았고, 만들어서 가져왔다.
하지만 여기서는 생일 케이크에 대한 언급이 단 한 마디도 없다. 여기 있는 모든 사람이 그 사실을 모르는 것처럼 말이다.
미미가 뒤로 물러서고 진행자가 앞으로 나섰다.
「자, 여러분, 여기에 미리 준비된 케이크들이 있습니다. 한 조각씩 드셔 보시고, 점수를 매겨 주세요.」
‘아, 이런 식으로 심사하기로 했구나.’
어디선가 웅장한 음악이 울려 퍼지며, 우측 구석에 쳐 있던 붉은 벨벳 커튼이 양쪽으로 갈라졌다.
제일 먼저 눈에 뜨이는 것은 뭐니 뭐니 해도 진혁이 직접 만든 플라워 케이크였다.
거의 사람 키에 가까운 거대한 케이크다.
하지만 흰색을 바탕으로 연한 분홍빛과 노란색 꽃으로 한껏 장식된 케이크는 위압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자연스럽게 장소와 어울려, 커다란 꽃 화분이 놓여있는 것처럼 보였다.
「우와! 조각인가?」
「아니, 저건 한국식 플라워 케이크 같은데….」
「뭣땀시 저렇게 크당가. 다른 것들은 다 쬐만헌디.」
사람들이 수군거리는데 진행자가 웃으며 말했다.
「당근 크림치즈 케이크는 이번 행사를 위해 임진혁 CEO 님께서 특별히 만들어 주셨습니다.」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장식은 그냥 여기 와서 했으면 됐는데 말이지.’
모처럼 큰 작업을 하는 김에 애들에게 보여주려고 한국에서 작업을 했다.
그랬더니 비행기로 이송할 경우에는 크림이 망가지기 쉽다고 해서, 특별히 트럭째 배에 실어서 보냈다.
다행히 크림이 무너지는 일 없이 무사히 도착했다. 다만 이송료가 케이크 재룟값보다 더 들었다.
진혁이 자신의 실수를 곱씹는 사이에, 진행자는 케이크를 하나씩 소개하였다.
「각자 테이블 앞에 종이가 하나씩 있지요? 마음에 드는 케이크를 드시고 점수를 매겨 주시면 됩니다.」
진혁은 자신의 앞에 놓여 있는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호오.」
다른 사람들이 받은 종이가 간체자로 적혀 있는 것에 비해, 진혁의 것은 영어와 한국어로 되어 있었다.
거기에 황미미가 자필로 적어 놓은 글이 보였다.
- 감사합니다! -
진혁이 가볍게 미소지었다.
‘흠.’
황미미는 진혁의 일이라면 사소한 일도 빠뜨리지 않고 반드시 직접 챙겼다.
그게 할아버지의 당부였다며 오해하지 말라는 이야기 역시 꼭 덧붙였다.
진혁은 턱을 괴고서 진행자의 소개를 들었다.
「공정한 심사를 위해 누가 어떤 케이크를 제출했는지는 알려드리지 않겠습니다. 케이크 뷔페 형식으로 원하시는 케이크를 하나씩 드시면 됩니다.」
「모든 케이크를 종류별로 다 하나씩 먹어야 하나요?」
「그건 아닙니다. 그러기엔 양이 너무 많지요?」
「아니요! 백 개라도 먹을 수 있어요! 디저트 배는 따로 있습니다!」
점장석에 앉아 있던 여자 한 명이 씩씩하게 외쳤다. 사람들이 와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진행자 역시 함께 웃으며 설명을 계속했다.
「그러니 여러분 모두가 한 명의 손님이 되어 케이크 가게에 갔다고 생각하세요. 그리고 보시고 끌리는 케이크를 가져가서 드시면 됩니다!」
「그리고 먹은 케이크의 경우에는 종이에 점수를 적어 주세요. 채점하실 때에는 실명과 지역을 기입해 주십시오.」
사람들이 케이크 심사의 규칙을 이해하자, 진행자는 케이크 진열대에 나와 있는 케이크들을 하나씩 소개하기 시작했다.
제일 처음에는 물론 임진혁의 케이크부터 시작했다.
「CEO 님께서 이번에 새로 개발하신 당근 크림치즈 케이크입니다. 당근 시트에 크림치즈 프로스팅을 레이어드하고 버터크림으로 꽃장식을 하였습니다.」
점장석에서 질문이 하나 들어왔다.
「이 케이크도 같이 심사하나요?」
「아닙니다, 이건 CEO님께서 오늘 행사를 위해서 특별히 제작해 주신 케이크입니다.」
점장석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진행자는 두 번째 케이크에 대해서 설명했다.
「레몬과 아몬드를 넣은 리코타 치즈 케이크입니다! 치즈 케이크라고 하면 보통 크림치즈를 많이들 생각하십니다. 하지만 이탈리아에서는 리코타 치즈를 케이크에 넣기도 하는데요. 그 레시피를 개량하면서 아예 박력분이 아닌 아몬드 가루로 만든 건강식 치즈 케이크입니다.」
스크린 위에 확대된 케이크 사진이 떠올랐다.
스콘처럼 울퉁불퉁하게 생긴 아몬드 케이크 위에는 바삭바삭하게 얇게 썰어둔 아몬드가 촘촘하게 뒤덮고 있다. 그 위에는 곱디고운 설탕 가루가 하얗게 점점이 뿌려졌다.
밀가루가 아닌 아몬드 가루를 사용해서 케이크를 구워냈기 때문에 글루텐을 함유하지 않고 있다. 당지수 역시 그리 높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진혁은 흥미를 가지고 그 케이크를 바라보았다.
‘신기한 걸 만들었네. 일부러 건강해 보이려고 저 재료를 쓴 것도 아닌 것 같고. 그럼 슈가 파우더를 뿌리지 않았을 텐데 말이지.’
건강 음식을 컨셉으로 하는 진희네 가게에 추천해도 좋을 음식이다. 진혁은 제일 먼저 저것부터 맛보기로 결심했다.
「그다음 케이크는 스웨덴식 코코아 치즈 케이크입니다! 기존에 가게에서 판매하던 케이크를 업그레이드했습니다. 보통 박력분에 코코아 가루를 넣어 구워내는 이 케이크에 크림치즈를 섞고, 다크초콜릿에 레몬을 넣어 시트러스 향을 추가했습니다.」
까맣게 구워낸 평범한 홀케이크 위에 설탕에 절인 레몬 조각이 사랑스럽게 올라가 있다.
커다란 스크린에서 레몬 향이 풍겨나는 것처럼 먹음직스러운 광경이다.
진혁은 그 모습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왜 저런 짓을 했지?’
다크초콜릿만 섞거나, 레몬만 섞거나 둘 중 하나만 하는 것이 더 나았을 것이다.
그는 저 케이크는 아예 맛보지 않기로 했다.
「여름에 어울리는 레몬 패션프루트 치즈 케이크입니다! 크림치즈와 레몬즙, 레몬 껍질을 사용해서 타르트처럼 구워냈죠. 크림치즈 위에 필링으로 패션프루트 과육과 옥수수 전분, 설탕을 올려 제대로 채웠습니다.」
타르트처럼 둥글게 필링을 감싸고 있는, 바삭바삭해 보이는 크러스트가 눈에 띄었다.
하지만 가운데에 듬뿍 쌓여 있는 샛노란 패션프루트와 그 위에 촘촘하게 올라간 검은 씨앗을 보며 진혁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거 진희는 엄청 싫어하겠는데.’
동그랗고 조그만 것들, 예를 들자면 개구리 알 따위가 바글바글 모여 있는 것을 보면 그녀는 질색하며 싫어했다.
진혁이 씨익 입가를 끌어올렸다.
-찰칵.
그는 스마트폰을 꺼내어 스크린에 떠올라 있는 패션프루트 치즈 케이크의 사진을 찍었다.
황미미의 비서가 눈썹을 치켜올리며 물었다.
「이 케이크에서 가능성이 보이십니까? 관심이 있으시다면 그 케이크를 구운 페이스트리 쉐프를 당장 데려오겠습니다.」
진혁이 피식 웃었다.
「아닙니다.」
그 다음에 나온 케이크 역시 다른 치즈 케이크와 다른 형태를 띄고 있었다.
다만 맛보다는 용기가 달랐다.
「호오, 이건 완전히 새로운 생각인데.」
진부하지만 새로운 발상을 보고 진혁이 입을 살짝 벌렸다.
「베리 치즈 케이크의 미니 컵 버전입니다! 컵케이크와 달리, 푸딩처럼 유리 컵에 담아서 구워냈습니다. 젤라틴과 크림치즈, 사워크림과 바닐라 설탕을 사용했습니다」
새로운 신작 케이크를 위해 많은 페이스트리 쉐프들이 나름 고민한 흔적들이 보였다.
재료를 바꾸어 보기도 하고, 컨셉 자체를 바꾸기도 한다.
흔한 치즈가 아닌 다른 치즈를 써 보기도 했다.
그리고 이 사람은 시트 위에 아이싱을 해서 평범한 케이크를 굽는 것이 아니라, 유리컵 안에 크림치즈를 가득 넣고 그 위에 베리 필링을 한 층 넣었다.
그 위에는 잘 구워낸 아몬드 쿠키를 가루로 부수어서 뿌렸다.
언뜻 보면 베리 잼과 쿠키 가루로 장식한 우유 푸딩처럼 보인다.
「생각 잘했네.」
진혁이 중얼거렸다. 이 컵케이크는 한국에 도입해서 팔기에 좋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