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70화
강운종은 눈앞에 있는 남자를 다시 보았다.
‘역시 일반인 세계에서 활약하기에 좋은 마스크야.’
보통 자금 세탁은 술집이나 펍, 나이트클럽에서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빵집에서 자금 세탁을 하고, 애들 교육까지 같이 한다니 대단하다.
하얗기만 하던 반죽은 버터와 쇼트닝이 들어가서 약간 상아색이 되었다. 손끝에 닿는 감촉도 조금 달라졌다.
‘아까랑 느낌이 다르긴 달라.’
왜 넣는지는 모르지만 무언가 느낌이 변했다.
“왜 버터만 넣는 게 아니고 쇼트닝도 같이 넣어요?”
사실 강운종은 쇼트닝이 뭔지도 몰랐다. 그냥 넣으라고 하니까 넣는 거다.
너구리의 나름 예리한 질문에 진혁이 피식 웃었다.
“쇼트닝을 넣으면 빵 겉 부분이 바삭바삭해지거든. 버터를 넣으면 식감이 묵직해지고 버터 향이 들어가게 돼.”
너구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소년원 안에도 제과제빵반이 있는데, 거기서는 쇼트닝만 넣거든요. 버터는 비싸대요.”
“그래.”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제과제빵반을 할걸.’
괜히 시간 낭비라고 생각해서 소년원 안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강운종은 조금 시무룩해졌다.
“이제 반죽을 반으로 접어서 마구 찢는 거야.”
어렸을 때 했던 놀이 같다.
장난감이 없어서 신문지를 찢어발기며 놀았던 그 시절 말이다.
멸치가 눈치를 보면서 큰 덩어리로 조심조심 찢자, 진혁이 시범을 보여주었다.
“반죽이 잘게 될 때까지 더 찢어야 해.”
그는 철천지원수를 만난 것처럼 갈가리 찢어서 잘게 만들었다. 강운종은 눈을 크게 떴다.
‘엄청나다. 저 손힘으로 사람 가죽도 그대로 찢을 수 있겠어.’
보통 사람인 척하고 있지만 아무리 봐도 보통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행동거지 자체가 다르다.
‘나랑 너구리, 멸치 셋을 나란히 보면 어른 남자도 좀 눈치를 보기 마련인데 그런 게 전혀 없어.’
키 180이 넘는 세 명의 소년을 마주하면 누구나 멈칫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첫 반응부터가 남달랐다.
거기에 지금 반죽을 갈기갈기 찢는 저 솜씨를 보니 더 그렇다.
멸치가 신이 나서 말했다.
“이거 왜 넣는지 알았다. 이제 반죽이 달라붙지를 않아.”
“조금 붙을 수도 있어. 그러면 치대서 내리치면 돼.”
손바닥에 짝짝 달라붙는 감촉이 나쁘지 않았다.
한참이나 반죽을 조물락조물락한 다음에야 진혁이 보울을 내주었다.
“이제 표면을 다듬어서 동그랗게 만들어. 이렇게 하면 돼.”
“이거 보기엔 쉬웠는데 쉽지가 않네요.”
임진혁이 제시한 동글동글한 반죽은 완전한 구형이었다.
플라스틱 모형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완벽하고 깔끔한 모양이다.
하지만 그대로 만들려고 하니 쉽지 않았다. 강운종은 고뇌에 빠져들었다.
‘찌그러져서 동글지가 않아.’
강운종은 흘깃 옆을 보았다. 멸치 역시 못생긴 반죽을 껴안고 낑낑대고 있었다. 반면에 비교적 멀쩡한 모양의 반죽을 만지작거리던 너구리가 물었다.
“선생님, 저 이거 좀 도와주세요.”
진혁이 물었다.
“왜?”
“예? 아니….”
“네 빵은 처음부터 끝까지 네가 책임지고 만드는 거야.”
“제과제빵반에서는 선생님이 만져 줬거든요.”
“그래?”
진혁이 빙긋 웃었다.
“계속해 봐.”
너구리는 자기 반죽처럼 그대로 찌그러들었다.
“제가 해보겠습니다.”
“좋은 자세야.”
영원처럼 느껴지는 시간이 지나서, 못난이 자갈돌처럼 보이던 반죽들이 그나마 동그란 바닷가 자갈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진혁이 오케이 사인을 내렸다.
“자, 그러면 온도계로 온도를 재 보자.”
각자의 앞에 스테인리스 보울이 하나씩 놓였다. 강운종은 두근두근한 마음으로 동그란 반죽에 소독한 온도계를 찔러 넣었다.
꼭 과학자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26도에요.”
“좋은 온도야. 그럼 이제 발효기에 넣자.”
발효기라는 것은 전자레인지처럼 생겼지만, 훨씬 더 커다란 기계였다.
세 명 모두가 빵 반죽을 발효기에 넣고 나자 진혁이 말했다.
“이제 기다려야 해. 60분 정도?”
“예!”
세 명의 아이들이 씩씩하고 우렁차게 대답했다.
아직 손에는 허옇게 반죽을 묻힌 채다.
“하지만 시간이 아깝잖나?”
“네!”
“그러니까 손부터 씻고, 조금만 달리고 오자.”
“네?”
멸치와 너구리가 서로 얼굴을 마주 보는 동안 강운종은 눈치 빠르게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세 명 중에 리더 격인 그가 순순히 따라서 계단을 내려가자, 다른 두 명도 별말 없이 따랐다.
계단을 걸어 내려가며 너구리가 소곤소곤 말했다.
“빵을 굽는데 왜 달리기를 해야 하지?”
“야, 그냥 하라는 대로 하면 다 알아서 잘 될 거야. 내가 나중에 설명해 줄게.”
“그래?”
멸치 역시 눈을 말똥말똥 뜨면서 반문했다.
“그냥 기 잡으려는 거 아니야?”
걱정이 섞인 목소리로 너구리가 말했다.
“신고식 하려는 걸로밖에 안 보이는데.”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하는데도 앞에서 진혁이 대답했다.
“그냥 달리기야.”
실습실에서 나오니 평범한 주택가가 펼쳐졌다. 달리기하기에 좋은 공간은 아니다. 오밀조밀하게 다닥다닥 붙어있는 단독주택들을 지나, 길게 자라있는 벚나무 옆으로 나가서 한쪽 골목을 돌자 한강 변이 보였다.
“우와!”
서울에서 오래 살았지만 이런 한강 공원 같은 곳은 가볼 일이 없었는지, 서울 촌놈인 멸치가 감탄했다.
“여기 진짜 좋다.”
너구리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저기 다리 밑에 그늘지고 인적없는 거 봐. 여름에 따뜻하면 노숙하기에도 좋고, 영업에도 좋고.”
강운종 역시 너구리의 판단에 동의했다. 말은 영업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평범한 이들을 협박해 돈을 갈취하는 일이다.
“경찰서도 멀고, 딱이네.”
진혁이 웃었다.
“너희 체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아야 하니까, 일단 가능한 만큼 달려 보자.”
‘역시! 평범한 곳이 아니라니까.’
제과제빵을 하는데 체력단련이 필요한 이유는 하나뿐일 것이다.
‘어떤 황당한 일을 시켜도 믿고 따르는 좋은 부하가 필요한 거야.’
그가 여태까지 봐온 형님들도 이상한 일을 시키고는 했다. 콩을 놓고 팥이라고 해도 ‘네, 알겠습니다!’ 하고 외쳐야 한다.
강운종은 굳게 결심했다.
‘제대로 달리는 모습을 보여줘야지.’
“너무 어렵게 생각할 필요는 없고, 내가 달리는 속도만 따라와 봐.”
그리고 한순간 로켓이 쏘아져 나갔다.
“엑?”
세 소년은 눈을 크게 뜬 채로 앞으로 달렸다.
분명히 방금 전에 무언가 있었던 것 같은데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국가대표 단거리 육상 선수가 뛰어가는 것도 이보다 더 빠르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 그 선생이 앞에 있지 않았어?”
“없어졌어.”
“뭐야, 순간 이동한 거야?”
개중에 그나마 동체 시력이 나은 편인 너구리가 중얼거렸다.
“저 앞에 달리고 있잖아.”
“아니, 저 사람은 아까부터 달리고 있던 사람 아니야?”
“양복에 하얀 앞치마 두르고 달리는 사람이 두 명일 리가 없잖아.”
“그거야 그렇지만….”
축지법이라도 쓰는 것처럼 순식간에 사라졌던 인영은 또 금방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갑자기 귀 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젊은데 생각보다 느린데. 체력이 안 좋은가?”
“헉!”
강운종은 깜짝 놀라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눈앞에 임진혁이 있었다.
분명히 방금 전까지 저 앞에서 뛰고 있었는데, 언제 돌아왔는지 순식간에 여기 와 있다.
“몸이 안 좋은지는 몰랐는데.”
“네, 네!”
“아직 말을 할 수 있는 걸 보니 최선을 다해서 뛰고 있는 게 아닌데.”
너구리가 헉헉대면서 달리기 시작했다.
이런 식으로 뻥 뚫려 있는 강가를 달리는 것은 처음이다.
경찰이나 다른 누군가에게 쫓길 때도 이런 식으로 필사적으로 달려본 적은 없다.
옆구리 한구석이 콕콕 쑤시면서 아파져 왔다.
‘이제 그만 멈추고 싶은데.’
숨이 차고 귀가 멍하다.
뺨을 스치는 강바람은 더 이상 상쾌하지 않다. 오히려 살쾡이가 뺨을 할퀴는 것처럼 날카롭다.
다 해진 운동화 발바닥에 와 닿는 충격 역시 거칠고 무겁다.
옆에서 목소리가 계속해서 속삭였다.
“조금만 더 열심히 뛰어보라고. 더 뛸 수 있잖아.
나지막하고 친절한 목소리지만 악마의 그것처럼 느껴진다.
얼마나 달렸을까, 하늘이 더 이상 파랗지 않다. 오히려 노랗게 보인다.
다리가 무거워서 찢어 던져버리고 싶을 정도다.
“이제 그만!”
“허억, 허억.”
세 소년이 헉헉거리며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서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한참 뒤에 뒤처져 있는 멸치는 양쪽 무릎을 감싸 안은 채 고꾸라지기 직전이다.
너구리는 허리도 무릎도 굽힌 요상한 자세로 바닥을 보고서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있다.
강운종 역시 멀쩡하지는 않았다.
바닥에 엎드릴 것처럼 앞으로 기울어져서, 양 손바닥으로 바닥을 짚었다.
‘그래도 내가 맨 앞에 있다.’
다른 두 사람을 이겼다.
솔직히 말해서 멸치는 별 것 아니지만 너구리 녀석을 이기는 건 쉽지 않았다.
발이라도 걸고 싶었지만 바로 옆에서 왔다 갔다 하는 임진혁의 눈치가 보여서 그냥 뛰었다.
다행히 너구리 놈은 바닥에 있는 돌멩이에 걸려 넘어질 뻔해서, 알아서 뒤로 뒤처져 주었다.
‘흐흐.’
작은 승리가 기뻐서 강운종은 히히 웃었다. 손바닥에 배기는 모래알은 따갑지도 않았다. 그냥 숨이 너무 차서 머리가 아플 뿐이다.
임진혁이 손목시계를 보지도 않고 웃으며 말했다.
“30분 지났네.”
분명히 양복을 입고 전심전력으로 뛰는 자기들과 함께 뛰었는데도,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은 모양새다.
심지어 양복도 구겨져 있지 않다.
목소리 역시 피곤한 기색이 전혀 없이 멀쩡하다.
“이제 돌아가서 발효기를 확인해 보자.”
맨 뒤에 있던 멸치가 발딱 일어났다.
“넵!”
“네!”
너구리 역시 바로 일어서서 뒤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강운종은 순간 아찔해서 비틀거렸다.
‘이 얍삽한 자식들.’
이건 토너먼트가 아니라 달리기다. 어차피 빵을 확인하러 30분 후에는 돌아간다고 했고, 제과제빵 실습실은 저기 저 멀리에 있다.
‘일부러 체력을 아낀 거야?’
눈앞의 승리에 목메어 전심전력을 다 해 달린 강운종과 달리, 다른 두 녀석은 적당히 체력을 아껴가면서 설렁설렁 달린 것이 분명하다.
운종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돌아가는 길은 오는 길보다 훨씬 멀게 느껴졌다.
피로한 팔과 다리를 어떻게든 끌어서 앞으로 움직이고 있는데 임진혁이 말했다.
“너희 둘, 너무 요령 피우면서 달리지 말고 얘처럼 최선을 다해 달려.”
“네에.”
멸치와 너구리가 눈치를 보며 대답했다. 강운종은 저절로 입이 헤 벌어져 웃었다.
“헤헤헤.”
초등학교 내에서 왕따가 벌어져도 누가 잘못했는지 모르는 담임 교사와는 다르다.
‘역시 조직 사람은 뭐가 달라도 달라.’
다리는 철근처럼 무겁고 발바닥은 물집이 잡혀 쓰라리지만 그래도 기분이 좋았다.
최선을 다했다는 사실을 누군가 알아주었다는 사실이 신기하고 기뻤다.
‘달리기도 엄청 잘하고, 보통 분이 아니셔.’
존경심의 씨앗에 싹이 터, 새싹이 무럭무럭 자라기 시작했다.
“허억, 헉.”
내려올 때는 신나게 뛰어 내려왔던 실습실 계단이지만, 다시 올라가려니 죽을 것만 같았다.
강운종은 멸치와 너구리 뒤에 한참 뒤떨어져 계단 난간을 잡으며 간신히 올라왔다.
“자, 그럼 다시 손부터 씻어야지. 옷도 갈아입고.”
“허억, 헉.”
아까는 보지 못했지만 놀랍게도 실습실의 우측에 샤워실이 딸려 있었다.
진혁이 손짓했다.
“그냥 그거 달리는데 그만큼 땀을 흘릴 줄 몰랐다. 마저 만들어야 하니까 어서 씻고 나와. 갈아입을 옷은 여기에 있고.”
진혁이 꺼내준 옷은 새하얀 조리복이었다.
십여 년 만에 받아보는 새 옷이다.
소년원에서 받았던 죄수복 같은 옷과는 결부터 다르다.
“고맙습니다, 형님!”
강운종이 우렁차게 외쳤다. 너구리가 옆구리를 쿡 찔렀다.
“선생님이라고 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