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66화
진혁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진희야, 도와줘.’
도움을 청하는 눈빛을 보내자 진희가 바로 방어해 주었다.
“사업 때문에 그런 거예요, 엄마.”
“그런 거냐?”
“그냥 투자자도 아니고 한창 인기 있는 여배우님인데 연애하고 싶겠어요? 당장 연애하면 자기 커리어가 박살 날 텐데. 그리고 투자자님 입장에서는 진혁이가 남자로 보이지도 않을 거예요. 나이 차이가 몇 살인데.”
아버지가 턱을 매만지며 말했다.
“네 어머니랑 내 나이 차이가 네 살인데. 몇 살이길래 그래?”
“투자자님이 성숙해 보이고 화장을 짙게 해서 그렇지 이제 열아홉 살인데요. 대학 갈 준비 한 대요.”
어머니가 아쉬운 듯이 말했다.
“진짜 어리긴 어리네.”
“그래도 우리 아들도 어디 내놓아도 빠지지 않아.”
“스물다섯 살에 남자 보는 거랑 열아홉 살에 남자 보는 거랑 완전 달라요. 아빠, 내가 열아홉 살인데 누가 20대 후반 남자를 소개시켜준다고 생각해 봐요. 어디 그 사람이 남자로 보이나. 삼촌으로 보이지. 그분 입장에서 보면 진혁이는 완전 아저씨일걸요?””
“그래?”
도와주는 것 같긴 한데 기분이 좋지는 않다.
진혁이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아저씨라….”
그는 항상 ‘위대하신 교주님’이었다. ‘아저씨’ 같은 호칭으로 불린 적은 없다. 기분이 미묘했다.
“원래 군대 갔다 오면 다 아저씨야.”
어머니는 스마트폰을 꺼냈다.
“그것보다 이것 좀 봐. 엄청 귀엽지 않니?”
스마트폰 앨범을 열자 새끼고양이 사진이 보였다. 새하얗지만 이마에는 얼룩이 있는 고양이도 있고, 등에만 얼룩이 있고 온몸이 새하얀 고양이도 있다. 사람 주먹보다 작은 고양이들이 동그란 눈을 하고 놀라 카메라를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보고 진희가 탄성을 질렀다.
“우와! 진짜 귀엽다. 인터넷에서 받은 거예요?”
아직 덜 자란 고양이들이다. 코만 한 크기의 파랗고 까만 눈동자들이 똘망똘망하게 카메라 렌즈를 바라보고 있다. 뾰족하게 솟은 귀에는 솜털이 뒤덮여 있다.
사람 주먹보다 훨씬 작은 새끼 사진들을 보고 진혁이 말했다.
“약해 보이는데요.”
아버지가 흠흠 헛기침을 했다.
“태어난 지 며칠밖에 안 됐으니 당연히 약하지.”
어머니가 웃으며 말했다.
“3주 정도 됐어.”
“길고양이를 들였어요?”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해.”
“그게 뭐예요?”
어머니가 사정을 설명했다.
“진호가 동네 고양이랑 같이 다니다가 임신을 시켰나 봐. 암고양이를 데리고 들어왔더라고.”
“….”
진희와 진혁이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어머니가 말했다.
“그 청소해 주는 애한테도 얘기해 줘. 집에 고양이가 있으니까 하기 싫다고 해도 어쩔 수 없지.”
“아이, 요새 반려동물 있는 집이 얼마나 많은데요. 다 알아서 잘 해 줄 거에요.”
“우리 집 막내는 알아서 장가가고 며느리도 데리고 들어와서 벌써 손주를 보여주는데, 우리 진혁이는 연애도 한 번 못 해보고 말이야.”
진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사람이랑 고양이랑 비교하면 어떡해요. 걔는 인간 나이로는 벌써 서른이 넘었고 우린 아직 서른 되려면 멀었잖아요. 한창 일할 때지.”
“그거야 그렇지.”
어머니가 가볍게 수긍했다. 진혁은 마음속으로 열렬하게 진희를 응원했다.
‘진희네 가게에 전부터 놓고 싶었다던 화분 좀 챙겨줘야겠다.’
“그런데 얘들 진짜 귀엽다. 눈이 다 파란색이네요? 엄마 눈을 닮은 건가? 엄마 고양이 사진도 있어요?”
“여기 있어.”
“엄마 고양이는 주황색 줄무늬네요.”
“이런 고양이를 치즈태비라고 한다고 그러네. 내가 고양이 카페에도 가입하니까 사람들이 알려줘서, 요즘 사진도 많이 올리고 있어.”
어머니는 카페 게시글을 보여주었다.
“치즈태비 고양이는 암컷보다 수컷이 훨씬 많대.”
“그래요?”
“삼색 고양이는 수컷이 거의 없고. 그래서 우리 집 고양이들은 기적과 기적이 만나서 이루어진 커플이라고 하더라. 사람들이 막 견우직녀라고 그래.”
게시글 댓글을 보여주며 신나 있는 어머니를 보며 진희가 맞장구쳐주었다.
“정말 드물긴 드문가 봐요. 사람들이 다들 엄청 좋아하네. 그런데 엄마 눈 색깔은 갈색이고 아빠 눈 색깔은 고동색인데 애들 눈은 파랗네요.”
“새끼고양이는 원래 태어나면 눈이 청회색이고, 한두 달 지나면 눈 색깔이 나온대. 그래서 3개월이 지나야 앞으로 얘가 어떤 눈빛이 되려나 알 수 있다고 하더라고.”
“그런데 새끼고양이가 일곱 마리면 너무 많지 않아요? 엄마가 다 키우시기엔 너무 힘들잖아요.”
“우리 아파트 부녀회장도 그렇고, 일봉이도 그렇고. 키우고 싶어 하는 사람들 많아.”
“그래요?”
“다들 벌써 한 마리씩 점찍어 놨다.”
“그러고 보니 엄마. 진호 아직 중성화 수술 안 했어요?”
어머니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그놈이 눈치가 엄청 빨라. 수술하러 가려고 할 때마다 기가 막히게 피해 다니네.”
아버지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사람 말을 알아듣는 것도 아니고, 원 참. 새끼들 병원 데려갈 때는 애옹거리면서 잘 따라오더니, 자기 병원 가려고 할 때마다 쏙 사라졌다가 우리 바빠지면 다시 나타나.”
진혁이 말했다.
“제가 이번에 데리고 갈게요.”
“그럴래? 네 말은 잘 듣잖니.”
반색하는 어머니를 보며 아버지가 말했다.
“사업하느라 바쁜 애한테 별걸 다 시키려고 해. 우리가 알아서 합시다.”
“그렇지, 해외 출장을 일주일에 한 번씩 갔다 오는데. 너 바빠서 어디 하겠니.”
진희가 웃었다.
“그러면 아예 다음에 서울 올라올 때 진호를 데리고 오세요. 서울에는 동물병원도 많이 있으니까, 저랑 진혁이랑 같이 가면 되죠.”
“알았어, 우리가 알아서 할게.”
임진혁이 물었다.
“아버지, 사업에 대해서는 묻지 않으세요?”
거대한 규모의 돈이 움직이는 사업이다. 젊은 아들이 주도적으로 하는 만큼 수저를 얹고 싶을 만하다. 호기심을 보이며 자세하게 물어볼 법도 한데, 아버지는 애써 관련된 화제를 피하는 기색이었다.
“네가 어련히 알아서 잘 하겠냐.”
“그래. 괜히 우리가 물어봐 봤자야. 우리야 그쪽 형편도 잘 모르는데 이것저것 질문해봤자 결국 참견하는 꼴만 되지 않겠니?”
어머니가 웃었다.
“우리 아들이 어련히 알아서 잘 하겠니.”
“진혁이가 이번에 새로 만든 치즈 케이크 진짜 맛있어요. 아예 그쪽 시장 겨냥해서 새로 만든 메뉴들도 완전 잘나가고 있다고 하고요. 입안에서 살살 녹는 게 아빠가 딱 좋아할 맛인데. 엄마랑 아빠도 한 번 만들어 달라고 해요.”
진희가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치즈 케이크 전문으로 한다고 했지?”
아버지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예.”
“가게 하나 여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닌데, 대도시에 그렇게 많은 가게를 열면서 문제가 생기지 않았을 리가 없지. 거기에 주마다 중국에 왔다 갔다 하면 또 한국에서 일은 언제 해. 밤에 잠은 잘 자고? 밥은 잘 먹고 다녀?”
“제가 하나요, 중국에 있는 지부 사람들이 하는 거지.”
“그래도 총괄은 네가 하고 있잖아? 업무량이 훨씬 늘었을 텐데.”
“진혁이가 일을 진짜 많이 해요.”
진희가 고자질하듯 말하자 아버지가 피식 웃었다.
“자기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거잖아. 저 나이에 지금 우리나라만도 아니고 해외까지 사업체 넓히는 거, 나는 꿈도 못 꿔봤다. 지금 보통 사람들이 평생 동안 하고 싶어라 해도 하지 못하는 경험을 얘는 지금 하고 있는 거야. 잠도 줄이고 밥 먹는 시간도 아껴가면서 일하고 있겠지. 그래야 수습할 수 있는 사업 아니냐.”
‘잠도 잘 자고 식사도 잘 하고 있는데요.’
어머니가 아버지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았다. 미리 준비해온 말을 꺼내듯, 아버지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여기 빵 공장도 잘 되고 있어. 유통 판로도 다 뚫었고 공장도 다 돌아가고 있다. 이쪽 일은 아비가 알아서 하고 있으니까 너는 신경 안 써도 돼.”
“예?”
“지금 그쪽 할 일만 해도 많잖니. 샌드위치 개발도 일봉이가 같이 돕고 있어.”
“…아버지.”
“아무리 젊다고는 해도 무리해서 몸 상하게 하면서까지 일할 필요는 없다.”
“그래, 좀 쉬엄쉬엄 쉬어가면서 해.”
어머니가 거들었다. 아버지가 진중하게 말했다.
“너는 아직 어려. 충분히 부모 도움을 받아도 되는 애야. 사실 네 나이에 혼자 독립해서 자기 사업체 갖고 있는 애가 얼마나 되겠어. 설령 실패하더라도 그게 다 자산이야. 뛰어가다가 넘어져도 얼마든지 다시 재기할 수 있는 나이 아니냐.”
“그렇죠.”
“후회 없을 만큼 도전하고, 어려우면 부모에게 도와달라고 해.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으니까.”
“…감사합니다.”
진혁이 고개를 숙였다. 짧은 식사 자리를 마치고 부모님을 배웅하고 나서, 남매는 집으로 향했다.
가로등의 빛이 어슴푸레하게 길게 늘어져 두 남매를 비추었다. 발밑으로 쭉 뻗은 그림자를 내려다보며 진희가 중얼거렸다.
“아버지가 널 많이 생각하시네.”
진혁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아버지가 중국 사업을 좋아하고 계신 줄 알았는데, 실은 걱정이 많으셨구나 싶더라.”
“원래 오늘은 우리가 부모님 기 살려드리고, 집에 가정부 쓰게 하는 거 설득하려고 만난 거잖아.”
“모처럼 효도 좀 하자고 만났는데, 오히려 챙겨주신 느낌이야. 고맙기도 하고 죄송스럽기도 하고.”
“하나만 물어보자.”
“응?”
“그 미미 씨랑 진짜 아무 사이 아니야?”
진혁이 짧게 대답했다.
“그분은 따로 좋아하는 사람이 있대.”
“그래? 아깝다. 좋은 인연이 될 수도 있겠다 싶었는데.”
진혁이 피식 웃었다.
“너야말로?”
“지금 명동점 때문에 정신없어 죽겠는데 내가 연애할 시간이 어디 있어.”
“그건 좀 신경을 써야겠네.”
“이상한데 신경 쓰지 말고 자기 문제나 신경 쓰시지.”
두 남매는 티격태격하면서 걸었다.
집까지 도착하는 데에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 ◈ ◈
다음 날 저녁 식사 시간.
민병철이 찾아왔다.
“그 사람들, 진짜 관리를 잘해.”
“그래?”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짧은 시간 동안에 여러 개의 가게를 오픈했으니 문제가 생길 것은 당연하다. 다만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는지를 파악하면 된다.
“이번에도 사고 하나 있었는데 빠르게 잘 처리했더라.”
“어떤 사고였는데?”
“매일 한정으로 20개씩 판매하는 엔젤 치즈케이크 있잖아. 그걸 직원이 직원 할인가로 사서 인터넷에 올려서 팔았나 봐.”
진혁이 눈썹을 추켜올렸다.
“치즈케이크를 인터넷에 올려서 중고 판매를 했다고? 그날 바로 먹어야 맛있는 케이크잖아.”
“냉동실에 얼리면 맛은 좀 떨어져도 두고두고 먹을 수 있잖아. 그걸 어필하면서 팔았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어떻게 했는데?”
“바로 해고했지. 전 직원들에게 상기 사실을 공고하고, 직원용 할인판매 자체를 금지했어.”
“직원할인 금지라.”
진혁이 턱을 괴었다. <해와 달>에서는 직원들에게 25% 할인으로 신제품을 1회씩 제공했다. 그는 자신이 먹어보지 않은 음식은 팔기 어렵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 원칙을 고수했다.
그리고 중국 매장에도 같은 원칙을 적용하도록 지시했는데, 전혀 엉뚱한 사건이 터진 것이다.
‘무슨 보석이나 시계 같은 것도 아니고 케이크를 중고로 팔아.’
과연 대륙은 넓고 희한한 사람은 많다.
진혁이 제안했다.
“그럼 직원들이 케이크를 먹기 어렵지 않을까? 직원들 모두 케이크를 직접 먹어보고 난 다음에 판매하는 구조였으면 좋겠는데. 그래서 직원할인을 건 거잖아. 하나씩은 사서 먹었으면 좋겠다고.”
“사람 일이 생각대로 만은 되지 않으니까 말이야.”
민병철이 말했다.
“신메뉴가 나오면, 가게 예산으로 다 같이 한 번은 맛볼 수 있도록 조치할게.”
“그게 낫겠다.”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병철이 알아서 처리할 것이다.
“그나저나 좋은 소식은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