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64화
“거기 우리 중국 진출 담당자님이 있어서 보고서만 받아 왔어.”
사실 임진혁의 계획 역시 본래 동진이 생각하던 것과 비슷했다. 저렴한 식사용 빵을 제공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하지만 그는 황태명이 숨이 넘어가는 직전, 마지막 순간까지 분석하여 정리한 보고서를 받고 생각을 바꾸었다.
‘한국 드라마가 유행하면서 ‘한류’ 붐이 생겼지. 그걸 따라 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겨냥해서 우아하고 고급스러운, 지금의 <해와 달>과 또 다른 이미지의 가게를 열어야 해.’
“딸기 초콜릿 크림 케이크라.”
동진은 포크로 케이크를 한 조각 찍었다. 겉면이 포슬포슬하니 부서져 가며 안쪽의 레이어가 드러났다. 젖소의 얼룩무늬처럼 검은색 다크 초콜릿으로 얼룩져 있는, 선명한 노란 색깔이 드러났다.
농후하고 짙은 치즈 향이 입안에 가득 퍼지고, 꾸덕꾸덕하고 달콤한 초콜릿이 혀에 달콤하게 녹아내렸다.
바닐라 아이스크림처럼 결이 고운 치즈 케이크를 한입 두입 집어먹으며 동진이 따지고 들었다.
“형, 이거 초콜릿 생크림 아니잖아요?”
“딸기 초콜릿 크림치즈 케이크지.”
“생크림인 줄만 알았는데!”
“초콜릿 생크림이야.”
“으, 겉보기와 완전히 다른 맛이라는 게 충격이에요. 내가 치즈 케이크하고 생크림 케이크를 구분하지 못하다니.”
진혁이 빙긋 웃었다.
지음(知音)이라고 해서 매번 무엇을 만들었는지 바로바로 들키기만 하는 것은 재미없다.
일부러 향이 강렬한 종류의 다크 초콜릿과 지방이 풍부한 순수한 우유 생크림을 섞어서 치즈 냄새를 가렸다.
두 번에 한 번은 동진이가 제대로 맞춰냈는데, 이번에는 진혁이 이겼다.
“그래서 맛없어?”
“아니, 완전 맛있죠!”
동진이는 입술에 초콜릿과 치즈 조각을 묻힌 채 허겁지겁 케이크를 먹었다.
다른 사람들 역시 손을 떼지 않고 정신없이 케이크를 먹고 있었다.
유키코가 중얼거렸다.
“초콜릿 치즈 케이크라. 저도 생각은 하고 있었는데…, 이거 안쪽에 넣은 초콜릿은 그냥 다크 초콜릿을 쓰신 게 아니지요?”
“다이제스티브 가루를 넣고 갈았습니다.”
“치즈는 크림치즈로 하셨고요.”
“딸기도 생딸기가 아니라 설탕에 졸인 딸기라서 잘 어울려. 깊고 진한 초콜릿과 농후한 치즈, 그리고 살짝 말랑하고 달콤한 딸기 맛이라.”
뒤늦게 말없이 케이크를 먹고 난 임진희가 궁금해했다.
“왜 초콜릿 치즈케이크라고 말을 안 했어?”
백진영이 아쉬워했다.
“아, 뭔지 미리 말해주지. 그럼 이거랑 어울리는 음료를 만들어 줬을 텐데.”
“너무 맛있어서 순식간에 먹어버리고 나니까 허전하다.”
빈 접시를 앞에 놓고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데 진혁이 말했다.
“하하. 선입견 없이 맛보고 어떻게 느끼는지 듣고 싶었거든. 그리고 일부러 조그맣게 만들었어. 지금 맛볼 게 더 있거든.”
진혁이 다른 케이크를 꺼내 놓았다. 입맛을 다시던 동진이 반색하며 말했다.
“이건 크림 브륄레에요?”
부드러운 커스터드 크림 위에 달곰쌉쌀하게 캐러멜화되어 바삭바삭한 설탕을 올린 프랑스식 디저트다.
보통 손바닥만 한 크기나, 조그마한 마카롱 정도의 크기로 만든다.
하지만 이 크림 브륄레는 달랐다.
“이렇게 커다란 크림 브륄레는 처음 봐요.”
진혁이 여태까지 만들어 주었던 크림 브륄레는 갈색 설탕 조각을 촘촘하게 얹어 완전히 갈색 뚜껑을 씌운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 크림 브륄레는 병아리 털처럼 보송보송한 연노랑 빛 가운데에 거무스름한 갈색 설탕 조각이 포실하니 놓여 있었다.
“새까맣게 탄 것보다 더 먹음직스러워 보이네요.”
“진혁이 너, 이거 엄마 말 듣고 디자인 바꾸고 크기만 키운 거지?”
진희가 키득키득 웃었다. 유키코가 물었다.
“그런 일이 있었어요?”
“전에 진혁이가 하나 갖다 줬더니, 그때 어머니께서 맛있으니까 조금 더 커도 좋겠다고 하셨거든요. 캐러멜화된 설탕은 너무 달아서 조금만 더 적어도 좋겠다고.”
“효자시네요.”
“그거랑 다른 거야, 한 번 먹어 봐.”
다른 사람들이 저마다 접시를 끌어가는 동안 동진은 숟가락이 아니라 코를 케이크에 갖다 댔다.
‘이번에는 맛을 보지 않고 향만 느끼고서 뭔지 알아낼 수 있을 거야.’
옆에서 임진희가 거대한 크림 브륄레를 스푼으로 한술 떴다. 한 수저 뜨자 숟가락의 모양 그대로 둥글게 푹 패인 것이 마치 푸딩처럼 보인다. 동시에 보다 짙은 내음이 동진의 코에 흘러 들어갔다.
두 가지 중에서 고민하고 있던 동진이 손뼉을 쳤다.
“이거 향이 조금 달라요. 뭔지 알겠다!”
“뭔데?”
“진희 누나, 아니 진희 사장님도 이거 맛보면 바로 아실걸요.”
보통 타르트처럼 커다란 크림 브륄레를 자신의 앞에 놓고 면밀히 살피던 김동진이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그러니까 형, 아니 회장님은 중국에 치즈 케이크 전문점을 만들고 싶은 거야.”
“이건 크림 브륄레잖아. 왜 치즈 이야기가 나와?”
성인의 손바닥을 두 개 합쳐놓은 정도의 크기다. 백진영은 수저를 들어 보기 좋은 갈색으로 바싹바싹하게 구워낸 타르트 껍질을 뭉갰다.
갈색과 연갈색 가루가 뒤섞여 부서지며 바닥에 떨어지며, 그 안에 담겨 있던 노란 커스터드 크림도 같이 무너져야 했다.
하지만 먹음직스럽게 노르스름한 커스터드 크림은 중심 모양이 망가지지 않고 탱글탱글하니 형체를 유지하고 있었다. 가장자리만 슬쩍 무너졌을 뿐이다.
“이거 전에 만들었던 것보다 더 맛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전에 만들었던 것도 무시무시하게 맛있었는데.”
백진영은 눈을 감았다. 그는 푹신푹신한 구름에 안겨 둥실둥실하게 하늘에 떠 있는 것 같은 감각을 느꼈다.
혀에 느껴지는 이 폭신폭신함은 여태까지 느꼈던 것과 차원이 달랐다.
이대로 이 크림에 담겨서 그대로 한없이 하늘까지 상승하고 싶다.
“봄날의 뭉게구름 같은 맛이에요. 그리고 이 뒷맛…, 정말 치즈네.”
“너무 맛있어요.”
다들 한 마디씩 감탄하는 사이에 진혁이 세 번째 케이크를 꺼내놓았다.
“그리고 이것도 있습니다.”
그것은 언뜻 보면 평범해 보이는 일반적인 원형 케이크였다.
신선하고 향기 짙은 블랙베리가 촘촘하게 케이크 위에 올라가 있다.
가장자리에는 잘게 썰려 있는 피스타치오가 꼼꼼히 붙어 있다. 자연석을 그대로 갖다 붙인 한국식 성벽처럼 자유롭고 조화로워 보이는 모양이다.
동진이 키득키득 웃었다.
“이건 피스타치오 블랙베리 치즈 케이크에요?”
“먹어 보고 얘기해라.”
자신만만만 해 하는 동진을 신경 쓰지 않고 진희는 눈앞에 있는 케이크에 집중했다.
방금 전에 그저 보들보들하고 부드럽기만 하던 크림 브륄레 치즈 케이크와 선명하게 색깔이 다르다.
케이크 시트는 푹신하고 부들부들하다기보다 바삭하고 무언가 씹힌다.
하지만 한 종류가 아니라 두 가지의 씹힘 맛이 있었다.
진희는 눈을 감고 혀 위에서 조그마한 견과류 조각을 굴리며 이것이 무슨 맛인지 생각했다.
‘이건…, 피스타치오야. 겉에 장식에만 넣은 게 아니라, 케이크 시트에도 넣은 거야.’
그리고 무언가 하나 더 있다. 잇새에 씹혀 들어가고 있지만, 피스타치오처럼 까끌까끌하지도, 입안을 긁어대지도 않고 바삭바삭한 무언가다.
옆에서 동진이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케이크 시트에 계속 다이제스티브 비스킷을 섞는 이유가 뭐예요?”
“씹힘 맛을 두 종류로 만들려고.”
“흠.”
“오레오로 해도 괜찮은데, 그러면 초콜릿 맛이 너무 튀어.”
“아, 그렇지 않아도 그 생각 하고 있었는데.”
두 사람이 이야기를 교환하는 것을 보면서 진희는 마음속 깊이 생각했다.
‘미각도, 후각도 좀 더 훈련해야 해. 최소한 동진이만큼 해야 진혁이한테 부끄럽지 않지.’
그녀는 새삼스럽게 객관적인 시선으로 쌍둥이 오빠를 보았다.
임진혁은 대단하다.
20대 중반의 나이에 자기 힘으로 집안을 일으켜 세우고, 서울 한복판에 베이커리 카페를 냈다.
개업하면 1년 안에 98%가 망해버린다는 요식업계에서 놀랍게도 성공해 새로운 지점을 냈다.
그런 진혁에게 도움이 되지는 못할망정 노력 없이 얹혀가고 싶지는 않다.
진희는 힐긋 김동진을 바라보았다.
‘진혁이는 얘를 특별히 키우고 있는 거야.’
지금은 자신의 아래에서 일하고 있지만, 조금만 지나면 다른 지점으로 가서 자신과 대등한 위치에 올라설 것이다.
‘쟤는 얼마 전까지 고등학생이었잖아. 난 사회생활을 몇 년이나 했고. 제과제빵을 배운 경력 자체는 비슷해. 그러니까 최소한 동진이만큼은 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지.’
능력 없는 모습을 보여 진혁에게 민폐를 끼치고 싶지는 않다. 임진희가 심호흡을 했다.
‘열심히 하면 될 거야.’
케이크를 전부 맛본 사람들 앞에서 진혁이 브리핑을 하고 있었다.
“이미 대도시 전역에 가게를 전부 확보한 상태야.”
“벌써요?”
“중국 투자자분이 유능하셔서, 미리 가게를 전부 알아보고 구매하셨다고 하더라고.”
유키코가 놀라워했다.
“가게가 한두 개가 아닐 텐데 대단하네요. 보통 1~2개를 오픈하고 그 반응을 본 다음에 열 텐데. 한꺼번에 지점을 이렇게 많이 연다고요? 인력 채용과 시스템 구축부터가 큰일이네요.”
“최근에 스위트 바게트가 중국에 진출했다가 완전히 실패했던 거, 알아?”
“적자를 1,000억쯤 내고 완전히 접었다고 했잖아요. 아, 혹시…?”
“그 가게들을 저렴하게 사들이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인력은 완전히 새로 채용할 예정이에요.”
“그럼 제로에서 시작하는 건 아니네요.”
“스위트 바게트 말고 ‘투데이즈’도 중국 진출했다가 망하지 않았어요?”
“그렇지 않아도 거기도 같이 인수했어.”
“투자자님이 대체 얼마를 투자하셨길래.”
“거기서는 완전히 버리는 돈이니까, 가져가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하던데. 그 제과제빵 설비들을 처분하는 것도 돈이니까.”
광안마 녀석은 마지막까지 모든 것을 다 신경 써주고 떠났다. 치밀하고 손끝이 섬세하며 이기적인 놈이었다.
“그런데 중국 쪽은 그거 걱정해야 한다고 하던데요.”
“어떤 거?”
“외국인이 사업하는데 제한이 많아서 중국인 명의를 빌려서 사업하잖아요. 그럼 그 명의 빌려준 사람이 다 꿀꺽 삼켜버릴 수도 있대요.”
“그러게. 그럼 그 투자자님 명의로 사업하고 있는 건가?”
진혁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건 아니고, 그 투자자님의 손녀 명의야.”
백진영과 김동진, 임진희와 유키코 모두 진혁을 바라보았다.
“그럼 기껏해야 10대 소녀일 텐데. 커다란 돈 때문에 잘못된 판단을 하면 어떡해?”
“믿을 수 있는 사람이야?”
진혁이 간단하게 대답했다.
“응.”
◈ ◈ ◈
반년이라는 세월이 훌쩍 지났다.
중국 지점의 첫 개업식에 참석한 황미미가 감개무량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 엔젤 치즈 케이크를 이제 매일매일 먹을 수 있다니 너무 기뻐요.」
임진혁이 웃었다.
「맛있습니까?」
「네! 당연하죠.」
중국의 개업식은 한국과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일단 요란하게 폭죽을 터트려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것부터 시작한다.
거기에 인기 연예인이나 가수를 부르기도 하는데, 이번에는 명목상이지만 투자자 역할을 맡은 황미미가 직접 왔다.
덕분에 가게 앞에는 인파가 구름처럼 몰려 있었다.
황금으로 용을 수놓은, 여덟 겹의 붉은색 비단 의장을 걸친 임진혁이 앞으로 나서며 장엄하게 외쳤다.
「<해와 달> 중국 지점의 개업을 선포한다!」
황제의 의상을 입고 관을 쓴 진혁이 위엄있게 외치자 인파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선포한다!」
황후의 관을 쓰고 의상을 차려입은 황미미 역시 따라나서며 외쳤다.
‘쓸데없는 걸 부탁하기는.’
광안마는 자신의 손녀와 결혼하라고 이야기했으나 직접적으로 ‘결혼하지 않으면 유산을 주지 않겠다’ 따위의 조건을 걸지는 않았다.
그렇게 했다면 진혁이 아예 수틀려 유산까지 받지 않을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대신 간접적으로 접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