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님의 베이커리-360화 (360/656)

제 360화

「저는 이제 틀렸습니다.」

황태명이 고개를 저었다.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임진혁 역시 모르지 않았다. 보기만 해도 알 수 있다. 이미 전신 곳곳에 암이 퍼져 있다.

건강이 좋아져서 지금 눈을 뜨고 꼿꼿이 앉아 있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회광반조(回光返照).

죽기 직전에 잠시 눈을 떠서, 기력을 되찾은 듯이 행동하는 것뿐이다.

진혁은 오랜만에 겪는 무력감에 지그시 미간을 좁혔다.

무공은 만능이 아니며, 내공은 모든 것을 해결해줄 수 없다.

이 ‘암(癌)’은 황태명의 육체 내부에서 발생한 것이다.

전신을 갉아 먹히고 있는 암 환자에게 진기를 주입해봤자 오히려 역효과다.

‘진희가 그랬지. 어린애들이 암에 걸리면 더 빨리 악화된다고.’

암은 죽어야 할 세포가 죽지 않고 더 과하게 자라, 마침내 본래의 형태를 잃고 주변의 세포마저 잠식하는 질환이다.

그래서 세포의 성장 속도가 느린 노인이 발병한 경우에는 암이 침식하는 속도 역시 늦다.

큰이모의 뇌종양이 커져가는 속도가 느렸던 것 역시 같은 이유다.

그 종양은 아주 자그마한 크기였기에 충격을 가해서 파괴하는 정도로 치유가 가능했다.

하지만 지금 황태명의 전신은 이미 암세포로 뒤덮여 있다.

그 암세포를 전부 죽여버린다면 암세포가 죽기 전에 황태명이 먼저 죽을 것이다.

진기를 주입하는 방법도 효과가 없다.

진혁이 진기를 주입하면 세포의 성장과 활성을 촉진시키고 기운이 난다.

그러니 이 경우에 진기를 주입한다고 하면 암세포 역시 더 빠르게 성장하여 고통을 더해줄 것이다.

「주군, 저는 이제 충분히 살았습니다.」

「….」

「장강의 앞 물이 흘러야 뒷물도 흐르는 법이죠. 백 년 넘게 모셨고 다시 뵙기만 한 거로도 저는 충분합니다.」

진혁은 묵묵히 황태명을 바라보았다.

부모님이나 진희와 함께 한 시간보다 그와 같이 있었던 시간이 더 길다.

지금은 거의 잊어버렸지만 군대 동기와도 같다.

오래 머물기에는 좋지 않은 곳이었고 고생도 많이 했다.

하지만 전부 나쁘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좋은 일도 몇 가지 있었다.

그리고 그 좋은 일이 있을 때는 반드시 그가 곁에 있었다.

아직 하지 못한 이야기, 나누지 못한 추억이 한가득하다.

「….」

‘나는 충분하지 않은데.’

얼굴도, 체격도 다르지만, 충분히 알아볼 수 있다.

눈을 가늘게 뜨면서 상대방을 평가하고, 자신이 마음대로 해도 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멋대로 조종해서 이용하는 놈이다.

사람 좋은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지만, 안에는 구렁이가 몇 마리는 들어 있다.

그런 녀석이 지금은 많이 변해 있다.

허(虛)의 묘리를 깨달은 스님처럼 허허 웃으며 자신의 임종을 준비하는 모습이 낯설다.

진혁은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혼인하니 좋더냐.」

광안마는 혼인을 하지 않았고 여인을 가까이하지도 않았다.

주군이 먼저 혼인하지 않는 이상 충의를 어기고 자신이 결혼할 일은 없다고 당당하게 선언했다.

황태명이 입가를 끌어올리며 말했다.

「주군이야말로 그 나이까지 아직 결혼은커녕 연애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좀 늦으신 거 아닙니까.」

‘이 자식, 역시 조사했어.’

부모님의 약력을 비롯해 임진혁 본인의 학력과 경력, 제과제빵 대회 수상 경험, 텔레비전 출연 등에 대해서 전부 파악했을 것이다.

사생활 역시 알아보았을 터다.

황태명이 부드럽게 말했다.

「이 세계에는 콜라를 아는 여인이 많을 텐데요.」

「….」

「주군은 그냥 여자에게 관심이 없는 게 아닙니다. 누군가에게 마음을 허락하고 곁을 내주는 게 두려운 겁니다.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나셨으니 다른 사람들을 만나고 가까워지는 것이 좋습니다.」

「어쭙잖은 충고 같은 건 그만두고 자리에 누워.」

진혁은 가까이에 다가가 침대의 높이를 조절해주었다. 버튼 하나만 눌러도 스르륵 부드럽게 올라가는 환자용 자동 침대였다.

황태명은 사양하지 않고 침대에 몸을 기댔다.

그는 충심과 애정, 깊은 감정이 담긴 눈빛으로 진혁을 올려다보았다.

「백진영이라는 자는 주군에게 깊은 충성심을 갖고 있으나 좀 건방지더군요. 김가영이란 여자는 도기를 굽는 솜씨가 좋으니 어서 둘이 결혼시켜서 살림을 꾸리게 하면 좋겠습니다. 혼인에 비용을 보태주어 은혜를 입히면서, 백진영의 외가댁 사업에 투자금을 보태십시오. 좋은 사람이라 해서 좋게 보지만 말고 약점을 잡아두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리고 유일봉이라는 자는 집안이 가난하니 외부에서 돈을 써서 매수하려고 하면 쉽게 넘어올 수 있습니다. 어머니를 모시고 사는데 효심이 지극하니 그 어머니를 인질로 잡으시고….」

임진혁이 눈을 가늘게 떴다.

자신을 조사하는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으나 이 정도까지 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당연한 건가.’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그는 쉽게 수긍했다.

「그렇게 하시리라 생각했습니다.」

늙은이는 피곤하고 지쳐 보였다.

잠시나마 비쳐있었던 생기가 점차 빠져나가는 것처럼 그는 침대에 완전히 몸을 기댔다.

후우, 후우하고 숨을 몰아쉬고서 허공을 바라보았다.

침대 난간에 손을 올려놓고서 그가 입을 뗐다.

「주군은 부하들을 많이 아끼십니다.」

「그랬지.」

「그 점은 지금도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런가.」

「제가 없어도 그들이 곁에 있을 거라는 사실이 조금, 부럽네요.」

「….」

진혁은 방금 전에 떠올렸던 의문에 대한 답을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집요하리만큼 치밀한 조사를 한 동기는 자신이 생각한 것이 아니었다. 자신 대신에 곁에 머무를 사람들에 대한 ‘질투심’ 때문이었다.

광안마는 전부터 질투심이 많았다.

자신보다 더 좋은 가문에서 자라나서 진혁의 제자로 일월신교에 입교한 혈도객을 질투했다. 자신보다 강한 무공의 고수를 질투했고, 자신보다 더 검림과 가까운 이를 질투했다.

그리고 이번에는 ‘임진혁’의 곁에 더 오래 있었고, 오래 있을 이들을 질투하였다.

진혁이 잠시 생각에 잠겨 있는 동안 황태명은 자신이 얼마나 유능한지, 어떤 안배를 해놓았는지 주절주절 늘어놓았다.

「중국 전역에 사놓은 땅이 있습니다. 거기에 빵 공장을 만들면 됩니다.」

그것은 단순히 말만이 아니었다. 그는 침대 오른쪽에 있는 서랍을 향해 손을 뻗었다.

진혁은 그 손이 서랍에 닿도록 당겨 주었다.

서늘한 체온은 광안마의 몸이 얼마나 상태가 안 좋은지 새삼스럽게 다시 상기하게 해 주었다.

다시 한 번 무력감이 파도처럼 흘러왔다.

‘오행진을 써 볼까. 아니야, 그것 역시 진기를 회복시키는 역할이 있으니 좋지 않아. 암을 파괴하는 것도 안 돼. 환골탈태하는 것을 이 녀석이 견딜 수 있을지, 어떨지도 모르고.’

머릿속으로 이것저것 방법을 생각해 보아도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진혁은 방금 자신이 놓친 말을 다시 상기하고 물어보았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말아. 나는 지금 알아서 잘 하고 있다니까. 인센티브도 계속 들어오고 있어서 충분해.」

「원래 사업이란 규모가 크면 클수록 더 좋은 겁니다. 일월신교의 뜻을 세상에 널리 퍼트릴 수 있으면 더 좋죠. 그리고 인력도 전혀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충분히 교육해 놓은 ‘잊혀진 아이들’ 역시 있습니다.」

황태명이 느리지만 또렷하게 말했다.

「잊혀진 아이들?」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여기서는 아이를 둘 낳으면 출생신고를 하지 못합니다. 부모가 버린 아이들을 모아서 따로 교육시켰죠. 아주 충실하고 성실한 아이들입니다.」

진혁이 노파심에 물었다.

「그거 고독(蠱毒)술로 키운 건 아니지?」

「에이, 절 뭐로 보시는 겁니까.」

백 명의 아이들을 밀폐된 동굴에 집어넣고, 서로 싸우게 만들어 가장 강한 자만이 살아남게 하는 기술이다.

진혁은 그 방법이 실패했다고 생각해서 폐지시켰다.

「그렇게 하면 천 명 중에 백 명밖에 쓸만한 애를 얻지 못하지 않습니까. 저는 더 좋은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그래, 믿는다.」

노인의 눈동자가 잠시 투명하게 반짝였다.

그는 무어라 입을 열려고 하다가 다시 입을 다물었다.

정말로 힘이 다한 것처럼 보였다.

「하아, 하아.」

절세 고수라 하더라도 시간(時間)을 잡아맬 수는 없다.

죽은 사람을 살릴 수도 없다.

임진혁은 묵묵히 황태명을 내려다보았다.

누워서 쌔액쌔액 숨을 내쉬던 노인이 고개를 들었다.

「주군, 일생일대의 부탁이 있습니다.」

그는 미약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진혁은 이런 표정을 여러 번 본 적이 있었다.

아주아주 좋은 생각을 떠올렸다는 듯한 얼굴로, 곧 얼토당토않은 소리를 할 것이다.

진혁은 황태명이 무슨 소리를 할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들어보고 나서 결정하지.」

「제 손녀는 겸손하고 예쁩니다. 나이도 아직 어리지요. 스무 살이면 딱 좋은 나이 아닙니까. 감히 주군께 부족하지 않으리라 장담할 수 있습니다. 제가 눈을 감기 전에 혼인하시는 모습을 보고 싶….」

진혁이 눈을 크게 떴다.

‘야, 이 새끼야!’

침대에 앉아 숨을 달싹이는 노인네가 아니었다면 벌써 한 대 후려갈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아무리 약한 힘으로 친다고 해도 때리면 죽는다.

임진혁은 침착하게 고개를 저었다.

「중매쟁이 노릇은 그만할 때도 되지 않았나.」

「아주 훌륭한 해결책입니다! 명분도 있습니다. 방만하고 거짓말쟁이인 아들을 배제하고 손녀사위에게 전 재산을 상속하는 거지요.」

「상속 따위는 필요 없다니까.」

「손자는 세 명이 좋겠군요.」

「너 내 말 안 듣고 있지?」

「장남의 이름은 제갈책의 책, 차남은 이도명의 명을 따서 명이, 삼남은-.」

아주 오랜만에 듣는 이름이다.

이도명은 혈도객의 잊혀진 본명이었다. 그는 아버지를 살해한 후에 자신의 이름을 완전히 버렸으며, 이 씨 세가에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

본인이 엄청나게 싫어하는 그 이름을 굳이 꺼내서 붙여 주려고 한다.

혈도객을 싫어하면서도 좋아하는 그 모습에 예전 일이 그대로 떠올라 진혁은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 녀석은 그 이름을 싫어하잖냐.」

「그러니까 그 이름을 써줘야죠. 아무도 기억하는 사람이 없으니 우리들이라도 기억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네 아들이 드라마를 만들었잖아.」

「하지만 그건 그냥 이야깃거리일 뿐입니다, 천박한 아들놈의 장난 짓일 뿐이죠.」

진혁이 웃었다. 한국에 무협 드라마 파문을 일으킨 거대한 문화적 흐름을 단순히 장난으로 치부하는 노인의 완고함이 우습고도 반가웠다.

「음…, 생각보다 재미있어. 한 번 봐.」

노인의 이마에 잡힌 주름이 꿈틀거렸다.

「주군께서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기꺼이 그렇게 하겠습니다. 대신 이 노년의 소중한 시간을 주군의 곁에서 보내는 것을 허락해 주시고 손녀딸과의 결혼을 어서 빨리 진행….」

「아니, 안 봐도 돼. 그렇게까지 중요한 건 아니니까.」

광안마는 임진혁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몸 상태니 뭐니 하는 소리를 지껄이며, 임진혁이 중국 진출을 하겠다고 인정하게 만들었다.

그게 바로 어제의 일이다.

진혁은 민병철에게 말했다.

“다 잘 될 수밖에 없어. 지금 투자된 돈의 규모만 이 정도니….”

이미 중국 관헌의 허가는 모두 받았다. 중국에 진출하기 위해서 제일 어려운 단계는 이미 끝마친 셈이다.

황태명이 반나절 만에 손끝을 움직여 이룩한 성과다.

그 서류를 훑어본 민병철이 눈을 크게 떴다.

“20분만 시간을 줘.”

“응?”

“비행기 표 좀 취소하고 올게.”

사업가로서의 도전적인 기질이 발동한 민병철이 신나서 뛰쳐나갔다.

“고마워, 병철이 형.”

그 뒷모습을 보며 진혁이 빙긋 웃었다.

◈          ◈          ◈

한편 황려권은 이게 어찌된 일인지 전혀 알 수 없었다. 병원에 찾아갔지만, 아버지를 만날 수 없었다.

「아버지를 뵙고 싶네.」

「거절하십니다.」

낯익은 경호원들이 사라지고, 처음 보는 이들이 나타났다. 그는 황태명의 경호를 책임지고 있는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왕 대장님, 접니다. 황려권입니다.」

「대상자는 현재 전화를 받을 수 없습니다.」

자신의 수족이 되어 움직여 주었던 아버지의 부하들이 사라졌다.

「황려권 님은 더 이상 저희에게 명령을 내리실 수 없습니다.」

「아니, 대체 어째서.」

그는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연락하였으나 답을 얻을 수 없었다. 그러다가 예전부터 친분이 있던 경호 팀의 막내에게서 힌트를 얻을 수 있었다.

「려권 형님! 사실은 비밀입니다. 모른 척해주세요. 정확한 건 아니지만, 황 어르신의 사생아가 나타났다는 소문이 있어요. 재산을 완전히 다 그쪽으로 물려주실지도 모른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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