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59화
죽은 것처럼 순간적으로 숨을 멈추고 있던 노인이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들었다.
헉헉거리며 숨을 고른 후 그가 말했다.
「이거 의사 놈들한테는 잘 통하는데요.」
진혁이 피식하고 웃었다.
「비실비실한 노인이 갑자기 숨을 멈추면 당연히 심박 수가 올라가지.」
광안마, 이제는 황태명이라 불리는 자 역시 마주 보며 웃었다.
「빵을 만들고 계시다고요.」
제과제빵은 진혁에게 있어 삶을 살아가는 방식 그 자체가 되었다.
당장 밀가루 하나만 해도 그렇다.
상급의 밀가루와 하급의 밀가루라고 단순하게 나눌 수 없다.
어떤 밀가루는 곱디고운 하얀 빵을 구워내는 데에 적합하고, 또 다른 밀가루는 겉은 바삭바삭하고 속은 촉촉한 과자를 구워내는 데에 적합하다.
그것은 마치 누군가는 신체 구조상 창을 다루는 것이 적합하며 다른 이는 활을 익히는 것이 더 나은 것과도 일맥상통한다.
말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제과제빵은 이제 더 이상 단순히 ‘아버지의 일’만이 아니다. 처음에는 아버지의 일을 돕기 위해서 시작했을 뿐이지만 지금은 그의 삶 전체를 꿰뚫는 하나의 화두다.
최고의 맛(美味)이란 모두가 숭앙하는 고금 최강의 절세무공과도 같다. 그 어떤 강한 무공이라도 그에 상응하는 파쇄방법이 반드시 있게 마련이다. 가장 강한 창과 가장 강한 방패를 말하는 모순(矛盾)이라는 말처럼, 가장 맛있는 맛 역시 각자의 취향에 따라 미묘하게 달라져 버린다. 그래서 최고의 맛을 추구하는 진혁의 길에는 끝이 없었다.
아무리 수련하고 연습해도 자신이 모르는 길이 그 앞에 끊임없이 펼쳐진다.
지음(知音)을 찾아 나날이 새로운 빵과 과자, 케이크를 개발하는 것만으로도 하루하루가 즐겁다.
이는 이전에 무술 수련을 하면서 새로운 경지를 개척해 나가던 그때와 크게 다르지 않다.
진혁은 지금의 이 벅차고 신나는 감정을 옛 부하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랐다.
광안마는 한때 무(武)를 숭앙하며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들은 무인들이라고 여기던 시절의 사람이다.
일월신교의 제일 주력(主力)은 무인들이며 오직 그들만이 천하제일의 무공을 수련해 어리석은 인간들을 구할 것이다.
진혁은 덜 익은 밀가루 반죽이 발효되어 숙성하고 구워져 완전히 새로운 빵으로 변화하는 것처럼 이미 완벽하게 다른 인간이 되고 말았다.
그러한 자신에 대해서 설명하고 싶었으나 한두 마디로는 말할 수 없었다.
「그래.」
진혁은 가볍게 말했다.
저 치밀하고 음흉한 광안마 녀석은 이미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전부 다 알고 있을 것이다.
어떤 텔레비전에 출연했으며 어느 대회에서 어떤 상을 탔는지 모두 다 파악하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애초에 변명할 생각도 없지만, 변명해도 소용없다. 진혁은 담담하게 사실을 인정했고, 광안마가 어떤 이야기를 할지 기다렸다.
하지만 황태명는 임진혁의 예상과 달리 완전히 다른 반응을 보였다.
「아주 좋으신 생각이십니다!」
「응?」
「일월성신의 은혜를 세상에 널리 퍼트리기 위해 일단 권력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신 것이시지요? 보통 사람들에게 있어서 맛있고 따뜻한 빵이란 건 단순히 안온하고 평범한, 건전한 가정의 상징일 뿐입니다. 하지만 보통 사람과는 다르신 주군에게 있어서는 이 또한 세상을 바꾸기 위한 한걸음에 불과하실 뿐이겠지요. 역시 주군께서는 만인을 다스릴 웅대한 계획을 가슴에 깊이 품고 계신 것입니다! 서양 사회에서 누가 어떤 빵을 먹느냐는 옛 중화에서 누가 보랏빛과 붉은색 옷감을 두를 권리를 갖느냐는 것과 마찬가지로 권력에 대한 사회적 함의를….」
노인은 형형하게 눈빛을 빛내며 끊임없이 주절주절 떠들었다.
서구 사회에서 빵이란 단순히 주식이 아니며, 동양의 ‘밥’과 마찬가지로 매일 함께하는 동료에 가깝다는 이야기는 어느샌가 세계사로 흘러갔다.
프랑스에서는 검은 빵을 먹는 이들과 하얀 빵을 먹는 이들이 서로 갈등해 왔다.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의 이야기는 물론이고, 프랑스 정부의 바게트 세에 대한 이야기까지 꺼냈다.
「마침내 정부는 결단을 내려 빵에 세금을 부과했고, 특정한 밀가루를 사용하도록 법률까지 만들지 않았습니까!」
기침이 새어 나올 것처럼 연하고 흐린 목소리는 강렬하고 날카로운 감정을 담아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20세기 초 기존 미국 시민은 ‘흰 빵과 검은 빵’ 이야기를 꺼내며 이민자들을 차별했지요. 검은 빵 따위를 먹는 사람은 갓 이민 온 노동자거나 야만인들뿐이라는 사회적 차별을 내세웠습니다. 그런 차별을 겪은 이들은 매일 먹던 검은 빵을 하얀 빵으로 바꾸었고- 한국 전쟁은 또 어떻습니까. 미군 부대에서 배급받은 하얀 밀가루는 한국의 식생활을 완전히 바꾸었지요!」
현대 사회에 있어서도 <식계급 갈등>은 계속되고 있다. 저렴하고 건강에 좋지 않은 패스트푸드가 아닌, 몸에 좋은 자연식을 먹으라는 ‘웰빙’이 유행하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하지만 과연 누가, 얼마나 건강한 음식의 혜택을 볼 수 있는가?
황태명은 설교하는 목사처럼 열정에 가득 차 거친 목소리를 계속해 토해냈다.
그것은 차라리 비명에 가까웠다.
「우리 일월신교는 항상 가장 가난한 자들의 편에 서 있었습니다. 고아와 도둑, 세금을 못 내서 밭을 압수당하고 쫓겨난 농민들이 교인들의 근본이었습니다. 지금 풍요로운 만큼 빈부격차가 더 격심한 이 시대에 필요한 것이야말로 바로--!!」
선거 유세 같은 그 처절한 연설을 듣고 있는 이는 단 한 명뿐이다. 그 관중이 쓸쓸하게 눈을 감았다.
한숨을 섞어 그가 물었다.
「하아. 너 지금 네가 있는 병실은 보고 말하는 거냐.」
비단 침대보가 깔린 최상급 병실.
이곳에 하루 머물려면 상상할 수 없는 만큼의 금액을 지불해야 한다.
돈만 있다고 해서 머무를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사회경제적으로 어떠한 ‘힘’을 가진 자들만이 이곳에 머물 수 있다.
진혁은 눈앞의 황태명을 바라보고 크게 숨을 한 번 몰아쉬었다.
하마터면 착각할 뻔했다.
그는 광안마가 아니었다.
「물론 능력 있는 자들은 그에 맞는 대우를 받아야 하는 법입니다.」
한때는 광안마였지만 지금은 황태명일 뿐이다.
현대 중국의 교육을 받고 자라나, 새로운 역사와 놀라운 지식을 얻고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내가 변한 것처럼 말이야. 이 녀석도 나름대로 성장한 거지….’
검림의 삶을 겪은 임진혁이 더 이상은 일월신교의 교주가 아닌 것처럼 말이다.
말을 끊을 타이밍을 놓치고 멍하니 듣던 임진혁이 중간에서 말을 잘랐다.
「숨이나 쉬고 말해.」
「이 모든 역사와 미래를 꿰뚫어 보시고 ‘빵’이라는 소재를 선택하여 앞으로 어리석은 인민을 계도해 나가시며 일월신교의 새로운 앞길을 개척해 나가실, 위대한 분의 앞에서 제가 감히….」
고장 난 라디오처럼 끊임없이 찬양 연설을 토해내는 걸 보니 그 뿌리 깊은 충성심은 여전하다.
더 이상 듣고 있으면 한도 끝도 없을 것이다.
임진혁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아니, 내가 김치 좀 만들어 보겠다고 정주간에서 왔다 갔다 할 적에는 죽어라 말렸잖아.」
관심도 없는 세계사를 소소한 구석까지 줄줄이 늘어놓는다. 자칫해서 이 이야기에 휘말려 들면 결국 저놈이 하자는 대로 하게 된다.
그래서 벌이게 된 일들이 한둘이 아니다.
「교주의 체면이 깎이느니 어쩌느니 배추도 못 만지게 하더니 말이야.」
진혁이 따지고 들자 황태명이 빙긋 웃었다.
「그래서 저희가 맛있는 빵을 만들어 드렸잖습니까.」
아주 옛날의 일이다.
치킨이나 콜라는 포기하더라도 고로케는 먹고 싶었다. 고기 따위의 소를 넣어서 만든 빵을 기름으로 튀긴 빵이라고 지나가는 말로 이야기한 적이 있다.
그랬더니 애들이 반년이라는 시간에 걸쳐 노력하여 기름으로 빵을 튀겨왔다.
솔직히 말해서 빵은 맛이 없었다.
광안마는 교주님이 고안한 빵이니 맛있을 수밖에 없다며, 미미(美味)라는 글자를 새겨서 튀겼다.
진혁은 문득 무언가를 깨달았다. 그는 고개를 들어 옛 부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신강의 위구르 자치구. 거기에서 팔고 있던 전통 빵, 네놈이 만들어 놓은 거냐?」
「당연하죠.」
「몇백 년, 아니 천 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빵이라고 하던데.」
「그래야 잘 팔리죠.」
「야, 이놈아!」
임진혁은 이마를 짚으며 눈앞의 노인을 응시했다.
‘어쩐지 천 년이라고 하는데 시간이 안 맞더라.’
분명히 청대는 아니고 송대 말기 같은데 이상하다,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시점이 바뀌었겠거니 하고 내버려 두었다.
그렇지만 그것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황태명이 유들유들하게 말했다.
「당장 십 년만 지나도 강산이 변하는데 똑같은 글자와 모양이 새겨진 빵이 천 년 동안 그대로 유지될 리가 있습니까?」
그때 느꼈던 감동이 전부 사라져 버리는 것만 같다.
「하아.」
「그것밖에 못 찾으셨다니 안타깝군요.」
「뭐야, 또 있어?」
「항주의 호수에도 천 년 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진흙 오리구이 명물 요릿집이 있고요, 그리고 또 사천 당가 들어가는 마을께에도 멋진 암자가 지어져 있습니다.」
「거기에는 왜?」
「옛날에 저희가 노숙했던 폐가 있잖아요, 그 위치를 개발해서 리조트를 지었습니다. 이박 리조트라는 이름입니다.」
「이박?」
「교주님과 저희가 그곳에서 이틀 밤을 묵었지 않습니까. 그때 먹었던 메뉴인 흰밥과 찐 만두도 메뉴에 올라가 있습니다. 천 년 동안 전해져 내려오는 전통 음식이라고 아주 인기가 좋아요. 그 근처에 지나가는 관광객마다 꼭 들리는 코스입니다.」
혈도객과 광안마, 검림은 중국 전역을 함께 다녔다.
더 이상 그 사람들은 없지만, 추억만은 생생했다.
사람은 없지만, 땅은 변한 곳 없이 그대로 존재한다.
황태명은 그 추억들을 하나씩 하나씩 되살려 이곳저곳에 건물을 지었다.
위구르에서는 빵을 만들어 기념품으로 지정하고, 가게에서 팔았다.
항주에는 요릿집을 개업했다.
혹시라도 임진혁이나 누군가가, 자신이 죽은 후 언젠가라도 찾아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이것저것 안배해 놓았다.
시간도 장소도 정해져 있지 않은 약속이다.
심지어 이름도 얼굴도 모른다.
「주군, 시대가 변했습니다.」
끝내 아무도 만나지 못하고 죽을 것을 각오하고 있던 노인은 지금 행복해 보였다.
그는 평생의 숙원을 이루었고, 지금 당장 이곳을 떠나도 여한이 없었다.
「그래, 아주 많이 변했지.」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무력(武力)보다 금력(金力)이 더 우세한 세상입니다. 예전에도 그랬지만요. 하지만 굶주린 이들에게는 돈보다 한 덩어리의 빵이 더 중요할 수 있습니다. 주군께서는 지금 맞는 길을 가고 계신 겁니다.」
「….」
「특별히 권력 다툼을 하고 싶었던 건 아닙니다. 그저 살다 보니 몇 푼의 돈을 만지게 되었고, 저를 따라다니는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그 모든 것을 주군께 맡기고 싶습니다.」
「헛소리하지 말고.」
「물론 여기 오기 전에 유언장은 전부 처리하고 왔습니다.」
「나보다 먼저 가는 것은 불충(不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