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58화
만남은 짧고 강렬했다.
가게 문이 닫힐 무렵, 다 죽어가는 노인이 휠체어를 타고 <해와 달> 본점을 찾아왔다.
검은 양복을 입은 경호원들이 뒤를 따랐다.
주욱 늘어선 줄을 무시하고 바로 문으로 향하자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던 이들이 수군거렸다.
“손님! 기다리시는 분들도 계셔서 이렇게 들어오시면 곤란합니다.”
뼈와 가죽만 남은 노인은 형형한 눈빛을 빛내며 외국어로 무어라 말했다.
경호원 중 유난히 색깔이 옅은 양복을 입고 있는 남자 한 명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는 지폐 묶음을 건네고 번호표를 샀다.
갑자기 횡재한 대학생은 돈을 받고서 신나서 그 자리를 떴다.
“사장님, 여기 좀 와 보세요.”
오랜만에 가게에 나와서 반죽을 하고 있던 임진혁은 고개를 들었다.
무공이라고는 전혀 익히지 않은 노인이 가게 안으로 막 들어오고 있었다.
그 눈빛은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을 다 잡아먹을 것처럼 굶주려 있었다. 마치 고절한 무공을 갈구하는 하류 무사처럼, 아들에게 먹일 풀뿌리를 캐다가 진흙으로 과자 모양을 만들어 물어 개어주는 어머니처럼 처절했다.
흔히 보기 힘든 눈빛이다.
외모도 인종도 연령도 다르지만, 진혁은 그 눈빛을 전에 본 적이 있었다.
그리고 이 노인의 귀는 아주 익숙했다. 얼마 전에 보았던 원작자와 그 원작자의 딸인 여배우, 그 둘과 닮은 모양이었다. 특징적으로 귓바퀴가 구부러지면서 귓불이 거의 없는 귀다.
‘…설마 너냐?’
한순간 세상이 부옇게 된 것처럼 보였다.
전동 휠체어의 무거운 고무 타이어가 문지방을 지나면서 덜그럭 소리가 난다.
바로 옆에서 백진영이 뜨거운 커피를 내리고 있다. 어렴풋한 꽃향기가 섞인 진한 커피 향이 코끝을 감돈다.
석양이 져가는 시간, 붉은 하늘은 점차 남빛으로 물든다. 하지만 가게 안은 어두워져 가는 바깥세상과는 달리 눈부시게 밝다. 투명한 수정 조각을 매단 샹들리에는 촛불 모양의 LED 조명이 내뿜는 빛을 반사해 반짝반짝 빛난다.
탁자에 앉은 손님들은 저마다 빵을 맛보고 커피를 마시며 하하 호호 웃고 있다.
노인은 이 가게와 절대로 어울리지 않았다.
평범하게 빵을 사러 오거나 커피를 마시러 온 보통 사람은 <해와 달>에 들어오는 순간 오행진의 효과에 의해 평안을 얻는다.
가게가 이름을 널리 알린 데에는 그러한 부수적인 효과도 있었다.
하지만 이 노인은 진 안으로 들어와도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았다.
굶주린 늑대처럼 필사적인 눈빛으로 두리번거리며 사람을 찾는다.
그는 오픈 키친에 서 있는 임진혁을 보고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자신만이 알고 있는 무언가를 찾기 위해서인 것처럼 보였다.
이 광경은 그대로 박제된 것처럼 임진혁의 심상 깊숙이 남았다.
‘나는 너를 찾지 못했는데 네가 나를 찾아왔구나.’
노인은 전동 휠체어의 버튼을 눌렀다.
아주 약한 힘으로 눌렀는데도 불구하고 고급스러운 전동 휠체어는 윙 하는 소리를 내며 앞으로 돌진했다.
진열장에서 빵을 고르려고 줄 서 있던 이들이 표정을 찡그리며 뒤로 물러났다.
“뭐야, 저 사람은.”
“어디 아프신가?”
임진혁은 툴툴거리는 이들의 목소리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다.
평소에 손님을 최우선시하는 그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진혁은 반죽하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밝은 대낮에 가게로 찾아온 데에는 분명히 목적이 있지.’
그가 기억하는 그 부하 녀석은 비밀리에 일을 처리하는 습관이 있었다.
아무도 없는 밤에 방문하여 대화를 나누고, 결과가 좋지 않다면 은밀하게 처리한다.
‘이렇게 영업장소로 찾아온 건 대외적으로 압박을 가하기 위해서가 분명해.’
그래서 그는 압력에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옛 부하일지도 모르는 자에게 위엄있는 모습을 보이고 싶어서만은 아니다.
‘옛날에 어떤 인연이었건, 지금 내 자리를 위협하면 안 되지.’
휠체어는 오픈 키친의 바로 앞에 멈춰섰다. 진혁은 그 휠체어를 살짝 보았다. 그는 타본 적도 없는 최고급형 모델이었다.
‘잘 살긴 잘 사나 보군.’
그건 어쩌면 조금은 다행일지도 모른다.
마음 한구석이 조금 가벼워진다.
늙을 대로 늙어 언제 죽을지 모르는 몸이더라도, 여태까지의 생이 결핍되고 부족하여 혹독한 시련을 겪지는 않았다는 이야기이니 말이다.
진혁이 입을 열기 전에 노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콜라가 무엇인지 아나?」
임진혁이 빙긋 웃었다.
저절로 웃을 수밖에 없었다. 바닥의 바닥까지 의심하고 또 의심하는 그 모습은 이전의 자신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
마지막까지 의심하는 저 모습이 아주 익숙했다.
진혁은 나지막하게 대답했다.
「그게 뭔데? 방중술인가?」
노인에게 감히 반말로 대답하는 임진혁을 보고 경호원들이 술렁거렸다.
하지만 노인은 오른손을 아주 살짝 들어 올려 경호원들이 경거망동하지 않도록 했다.
「그건 아니지.」
「진짜 이러실 건가요.」
「그리고 너한테 알려줄 수는 없지. 내가 뭔지 알려주면 그걸 가르쳐서 보낼 테니까.」
「당연하죠.」
「그럼 안 돼.」
의미도 없고 뜻도 없는 것 같은 대화다.
천 년 전인지 언제일지 모를 옛날에, 지금과는 다른 장소에서 나누었던 이야기다.
천하에서 오직 광안마와 검림, 두 사람에게만 의미 있는 대화였다.
노인의 심장이 두근거리며 빨리 뛰기 시작하는 것이 ‘보였다.’
이러다가 갑자기 멈추지나 않을지 걱정될 정도의 속도였다.
황 씨 노인의 동공이 커지며 입이 천천히 벌어졌다. 금방이라도 기절할 것처럼 놀란 것으로 보였다.
백진영이 뒤에서 끼어들었다.
“저기, 이분 괜찮으신가? 아시는 분이셔?”
“지금 그걸 확인하는 중이야.”
“사장님, 그럼 제가 여기 보고 있을 테니까 잠깐 다녀오세요.”
직원들이 한두 마디씩 이야기했다.
백진영이 속삭였다.
“여기 이 보디가드들 보니까 보통 분이 아니신 것 같은데, 반죽이랑 빵은 여유 있지? 잠깐 같이 나갔다가 와. 할아버지 이러다가 쓰러지실까 봐 겁난다.”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반죽은 충분히 있어. 내일 걸 하던 중이었으니까.”
짧은 대화를 나누고 그는 사무실로 향했다. 조리복을 벗고서 붉은 셔츠와 청바지로 갈아입었다. 보통 지인이 온다고 해서 가게를 비우지는 않지만 이번만은 특별히 예외다.
바깥에서 백진영이 기존에 있던 손님들께 양해를 구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건강이 좋지 않은 먼 친척 어르신께서 오셔서 임진혁 쉐프님이 잠깐 자리를 비우실 겁니다.”
“아~ 친척이셨어?”
“그럼 어쩔 수 없지.”
백진영이 둘러댄 말에 다들 납득하는 것 같은 분위기였다.
진혁이 미간을 살짝 좁혔다.
‘친척이라고.’
당장 나가서 아니라고 말하고 싶지만 일단 이 자리를 떠나기로 했다.
◈ ◈ ◈
임진혁은 노인의 경호원에게 말했다.
「병원이라도 가는 것이 좋겠는데.」
경호원은 젊은 애송이가 멋대로 지껄이는 말을 완전히 무시했다. 하지만 노인은 그 말을 들었다. 그가 조용히 말했다.
「아까 들렀던 병원으로 가지.」
노인과 진혁이 문밖으로 나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검은색 리무진이 두 대 나타났다.
노인은 첫 번째 차에, 임진혁은 두 번째 차에 탔다.
극진한 대우를 하며 귀빈 취급을 받았으나 아무도 진혁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자동차의 쿠션은 푹신했고, 냉장고에는 미니바가 완비되어 있었다.
진혁은 모든 음료수를 거절하고 그저 앞차가 어떻게 가는지만 신경을 썼다.
‘아직 긴가민가한가 보군.’
그 의심 덩어리가 고작 한두 마디 대화를 나눈 거로 모든 것을 믿을 리 없다.
진혁은 사실 이대로 자신이 중국으로 납치되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다.
만일 자신을 믿지 않고 오히려 의심한다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저놈은 마치 선로가 없는 폭주 기관차와도 같아서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은 뭐든지 어떻게든 해내는 능력이 있다.
‘하지만 무공도 모르는 애송이들을 상대로 몸을 빼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니.’
그리고 진혁은 그런 광안마를 압도(壓倒)하여 지배했다.
허튼 생각을 하면 적당히 손을 봐줄 생각이었으나, 유감스럽게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자동차는 인천항 같은 곳이 아니라 강남의 사거리를 향했다.
전국에서 유명한 사립대학병원이었다.
차에서 내린 후에는 최상층의 최고급 병실로 안내받았다. 로비에서 엘리베이터를 타는 도중에도 계속 경호원 군단이 따라붙었다. 양복을 입은 자들이 보이는 곳에도, 보이지 않는 곳에도 머물러 있다.
복도를 지나가는 한국인들이 얼핏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저기는 왜 저렇게 외부인들이 많대?”
“중국에서 온 VIP래.”
“돈이 엄청 많은가 보네.”
마침내 20층에 도착했다.
이런 고급 병실을 처음 보는 진혁은 주변을 죽 둘러보았다.
‘완전히 호텔 같은데.’
창문에서는 서울 전체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거실과 침실이 별도로 준비된, 호텔 스위트룸과 같은 형태다.
경호원들은 노인을 휠체어에서 침대로 부축하며 옮겨갔다.
진혁은 손을 대지 않고 멀리서 가만히 서 있었다. 그는 그저 지켜보기만 했다.
경호원들은 은근히 임진혁을 경계하며 견제하고 있었으나 그는 그런 것보다 다른 데에 신경을 썼다.
‘너무 가벼워 보이는데.’
눈을 감은 노인은 아주 약해 보였다. 기껏해야 40kg도 나가지 않을 것처럼, 뼈와 가죽만 남아 있다. 금방이라도 죽어 넘어진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다.
‘좀 먹여야 쓰겠어.’
그는 지금 미국에 수출하고 있는 환자용 유동식을 떠올렸다.
레토르트 식품으로 만들었지만 원래 레시피가 머릿속에 선하다.
노인은 다른 사람들을 전부 물리쳤다. 경호원 한 명이 무어라 항의했으나 그대로 무시했다.
「다 나가.」
보디가드들이 전부 문밖으로 나가고 임진혁과 노인, 단 두 사람만이 남았다.
노인이 헛기침하며 입술을 달싹였다.
「크흠, 흠.」
확신과 불신이 반쯤 섞인 목소리가 떨려왔다.
「콜라와 같이 먹으면 좋을 것은.」
진혁이 농담하듯 가볍게 대답했다.
「들오리.」
노인의 손끝이 떨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표정은 전혀 동요하지 않는다. 시선을 임진혁의 얼굴에 고정한 채 노인이 물었다.
「그 들오리의 가격은.」
진혁이 손가락으로 자그마한 은자의 모양을 그려 보였다.
「은자 하나.」
노인이 주름지고 메마른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는 더 이상 말하는 것조차도 힘겨워 보였다.
「다섯 마리는 살 수 있는 가격인데.」
진혁이 피식 웃었다.
「그놈이 물가를 좀 몰라. 만두 장사도 잘 못 하고.」
황 노인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하지만 그는 울거나 얼굴을 찡그리거나 웃거나 하지 않았다.
「…크흑, 흑.」
노인이 설핏 웃는 것처럼 보였다.
「붉은색 캔에 든 검은색 탄산음료인데 말이지.」
사막처럼 메마르게 일그러진 얼굴에 눈물이 한줄기 흘러내렸다.
「주군.」
진혁이 짧게 읊조렸다.
「광안마.」
그 이름을 실제로 입에 올리는 것은 정말로 오랜만이었다. 광안마 놈은 자신이 ‘광안마’라고 불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제갈공명과도 같은 인재라고 우기면서 ‘군사’라고 불리기를 원했다. 그렇게 불리기는 죽기보다 싫다고 아득바득 우기면서 표정을 전혀 관리하지 못했다.
그래서 진혁은 그 녀석을 항상 ‘광안마’라고 불렀다.
평소에는 그렇게 표정 관리를 잘하는 냉철한 녀석이 그 이름만 들으면 있는 대로 얼굴을 찌푸리면서 짜증을 내는 것이 우습고 재미있었다.
그래서인지 드라마 <천마>에서도 그 이명은 전혀 언급된 적이 없었다.
아주 오랜만에 그 이름을 들은 노인은 짜증을 내지 않았다. 그는 해맑은 미소를 지었다.
노인은 침대에서 몸을 앞으로 수그렸다.
뻣뻣한 몸을 비틀어 고개를 숙인다.
양 손가락을 갈퀴처럼 구부려 바닥을 짚되, 허리는 평평하게 하고 무릎을 꿇는다.
대꼬챙이처럼 마른 몸이 흐느적거리며 서툴게 배례(拜禮)를 올렸다.
진혁이 처음 받는 절이었다.
“천하제일! 신교만세!”
거칠기 그지없어 도랑을 긁는 것 같은 목소리가 가늘게 새어 나왔다.
수천, 수만 명의 교인이 외치던 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작은 소리다.
그리고 노인은 그대로 굳은 것처럼 움직임을 멈추었다.
가늘게 내쉬던 숨조차 멈춘 것처럼 보였다.
「어이.」
임진혁이 말했다.
「그런 장난쳐도 재미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