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님의 베이커리-355화 (355/656)

제 355화

황려권은 무릎을 꿇고 아버지에게 몇 번이나 말을 걸었으나 아버지는 대답하지 않았다.

늙어 초라해진 아버지를 내려다보고 그는 한숨을 푹 쉬었다.

「…저는 가보겠습니다, 아버지. 조금 후에 다시 올게요.」

황려권이 방을 나서고 그다음에 황미미가 쪼르르 달려 들어왔다.

그녀는 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귓가에 입술을 가까이 대고 속삭였다.

「할아버지, 저 이번에 할아버지가 부탁하신 대로 한국 땅에 다녀왔어요. 제육볶음도 맛있었고 불닭볶음면도 좋았어요. 나중에 건강해지시면 같이 먹으러 가요. 특이하게 매운 음식들이라, 할아버지가 드시면 좋아하실 거예요.」

아버지와 할아버지 사이의 갈등을 모르는 미미는 잠들어 있는 할아버지가 좋아할 만한 이야기를 이것저것 늘어놓았다.

「거기서 진짜 인생 케이크를 찾은 거 있죠. 제가 전에 말씀드렸던 페이스트리 쉐프 기억하세요? 국제 대회에서 우리나라 팀이 완전히 망신당했다고 제가 말했었잖아요. 거기서 우승한 팀원이에요. 팬 미팅에 느닷없이 검 모양의 케이크를 가져와서 혼자 먹고 있는데 그게 너무 뜬금없어서, 뭐라고 할 말이 없었어요. 다른 배우들은 저 사람이 캐스팅 받으려고 온 거라고 하고, 너무 웃겨서 그냥 가만히 있을까 하다가 솔직하게 얘기해줬죠. 저 사람 배우 아니라고.」

할아버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쓸데없는 얘기 하지 말라고 눈을 부라리던 때가 그리울 정도다.

주름진 할아버지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혀 있다.

미미는 너무 차갑지도 않고 따뜻하지도 않은 물수건을 가지고 와서 할아버지의 이마를 닦아 드렸다.

「할아버지도 그 케이크 드셨으면 좋아하셨을 텐데.」

그녀가 중얼거렸다.

「단 거 좋아하시잖아요.」

황려권은 부친의 여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딸에게 숨기려 했다.

하지만 미미 역시 모르지 않았다.

그녀는 할아버지가 간절히 원하는 무언가가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그것이 대체 뭔지는 알 수가 없었다.

할아버지는 손녀에게 중요한 이야기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아버지도 마찬가지다.

「그 검 케이크 진짜 멋있었어요.」

미미는 먹다 만 케이크 사진을 꺼내서 할아버지 앞에 보여주었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눈을 감고서 콧줄에 연결된 산소를 받아들이며 쌔액쌔액 힘들게 숨을 쉬고 있을 뿐이다.

할아버지의 몸에 달린 의학적 기구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한쪽 팔에 연결된 주삿바늘을 통해 맑고 투명한 수액이 방울방울 떨어지고 있다.다른 팔에는 하얗고 투명한 2L짜리 두툼한 영양 수액을 맞고 있는데, 이는 식사를 대체하는 보조 제품이었다.

환자복 바지 위로 나와 있는 소변줄 끝에는 소변 주머니가 매달려 있다.

그 색깔도 불길하게 검붉어, 미미는 마음이 좋지 않았다.

「….」

무언가 더 중요한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은데 더 이상 꺼낼 말이 없다.

「할아버지는 원래 이런 성격 아니잖아요, 어서 일어나서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라고 호통치셔야죠.」

미미가 쓸쓸하게 중얼거렸다.

고운 아미에 슬픔이 서리며 주름이 잡힌다.

팬들이 보면 안타까워하면서 울부짖을 만큼 가녀리고 아름다운 모습이다.

하지만 눈을 감고 간신히 숨만 쉬고 있던 할아버지는 입술조차 달싹이지 않았다.

그녀는 할아버지의 손을 어루만졌다.

‘이제 할 말도 없네….’

무언가 밝고 즐거운 이야기를 들려드리고 싶었다.

할아버지가 좋아할 만한 이야기를.

드넓고 화려한 병실 안에 침묵이 내리 앉았다.

미미가 입을 다물자 조용해져 버린 것이다.

그녀는 갑자기 덜컥 무서워졌다.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심장이 두근두근 뛴다.

할아버지의 손을 꼬옥 잡으며 미미는 눈을 꾹 감았다.

‘아냐, 내가 여기서 울면 안 돼. 방금 전에 만났던 간호사가 말해 줬잖아.’

시각과 미각, 후각을 잃어도 마지막까지 청각과 촉각이 살아있다고 했다.

지금 반응은 하지 않아도 듣고 있을 테니, 아직은 울지 말라고 말해주었다.

20년이 넘게 암 병동 호스피스에서 일해왔다는 간호사는 지금은 자신보다 할아버지의 감정을 살필 때라고 조언해주었다.

‘내가 울면 할아버지가 그 소리를 듣고서 슬퍼하실 거라고 했어.’

그러니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후회하지 말고 여기서 전부 하라고 했다.

미미는 이 이야기가 어떤 뜻을 내포하고 있는지까지는 눈치채지 못했다.

언뜻 보면 죽어갈 자를 위해서 하는 이야기처럼 들리기도 한다.

하지만 사실은 산 자를 위한 위로다.

임종이 얼마 남지 않은 자의 앞에서 울기만 하다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다 못하고 애도하는 가족들을 격려하는 이야기인 것이다.

그녀는 입을 다물고 병실을 나섰다.

마음껏 이야기할 수 있도록 병실을 비워 주고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간호사가 물었다.

「오늘은 일찍 가시네요?」

「예, 더 이상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아요. 이러다가 더 울어버릴 것 같고.」

금방이라도 눈물이 고여 톡 떨어질 것처럼 촉촉한 눈동자를 보며 간호사가 부드럽게 웃었다.

「엄청나게 특별한 이야기를 하실 필요는 없답니다. 그냥 손녀 따님의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기쁘실 거예요.」

「제가 목적이 없는 잡담을 하는 걸 좋아하지 않으셨어요. 항상 쓸데없는 말이 많다고 호통치셨거든요. 말이 많으면 다른 사람들이 그 말을 듣고서 알아챌 수 있는 것이 많으니, 항상 감정 표현도 언어적 표현도 최소한으로 하는 것이 좋다고 하실 정도였어요. 괜히 말 많이 하다가 어디 가서 이용당하기나 한다고, 그렇게 순진해서 세상 사는 데 좋을 것 하나 없다고 불평하시고 그러셨는걸요.」

「…보통 할아버지들은 천진난만하고 순진하다고 좋아하시지 않나요?」

간호사가 어색하게 웃었다.

「보통 할아버지가 아니셨으니까요. 그래도 저한테는 좋은 분이셨어요. 아버지한테는 엄청 엄격하게 구셨지만요.」

「손녀 따님분께서는 느끼지 못하셨겠지만, 손녀분께서 다녀가시고 나면 심박 수도 안정되고 호흡수도 좋아져요. 표현은 못 하셔도 분명히 듣고 좋아하시는 거예요.」

「진짜 그럴까요? 그럼 몇 마디 더 하고 갈까요.」

미미는 시계를 보았다.

아직 십여 분 정도의 여유가 있다.

사전제작 드라마인 <천마>는 이미 완결까지 촬영을 끝냈다. 전부 방영되려면 몇 달이 더 걸릴 것이다.

하지만 드라마의 인기는 하늘까지 치솟았고, 팬 미팅이나 쇼케이스 등의 행사는 여기저기에서 개최될 예정이었다.

거기에 대학 입학에 관련된 고민과 차기작 대본을 검토하는 일까지 겹쳐 미미 역시 생각할 일이 많았다.

하지만 할아버지가 언제까지나 이 자리에 계실지는 모르는 일이다.

미미는 마음을 정했다.

「저 그러면 조금만 더 할아버지 곁에 있어 드리고 갈게요.」

「그럼요.」

그녀는 다시 문을 열고 들어갔다.

미미는 누워있는 할아버지 곁에서 손가락을 조물조물 주물렀다.

그녀는 이런저런 옛이야기를 할아버지의 귀에 속삭였다.

「할아버지, 있잖아요. 원래 손녀라고 해도 여자 앞에서 남자가 누워 있는 게 아니라고 하셨잖아요.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린가 했는데, 지금은 그 생각이 나요. 제 앞에 누워 계시는 할아버지를 볼 일은 영원히 없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지난번에 왔을 때도 했던 옛이야기를 하고 난 다음에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져, 그녀는 옆에 펼쳐져 있던 한 시집을 집어 들었다.

「달의 그림자는 땅에 닿지 못하나, 태양의 빛은 너울을 펼치어 다정히 어루만지노니.」

할아버지가 평소 좋아하시던 시 몇 편을 읽어드리고 나자 목이 쉴 지경이 되었다.

물 한 잔으로 목을 축인 미미가 문득 생각나 말을 걸었다.

「저기 할아버지, 저 오늘 할아버지가 좋아할 것 같은 시를 들었어요.」

당연히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해가 뜨기 직전에 밤이 가장 어두우니, 암천은 사실 밤이 아니라 새벽을 이름이라.」

언뜻 할아버지의 손이 꿈틀거린 것도 같았다.

「웃기죠? 저는 사실 그, 드라마에 나오는 암천은 가장 깊은 밤을 말한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드라마 팬분이 그렇게 말씀하셔서 신기했어요.」

힘없이 늘어져 있던 손가락 끝에 힘이 들어와, 점차 손을 맞잡아온다.

역시 할아버지가 좋아하실 줄 알았다.

「할아버지는 해나 달, 밤이나 낮과 관련된 시를 좋아하시잖아요….」

조금 흥분한 미미는 할아버지를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방금 전에 손끝에 닿아온 감촉이 무색하게 할아버지는 눈을 감고 있었다.

그녀는 다시 한 번 같은 한시를 속삭여 보았다.

「해가 뜨기 직전에 밤이 가장 어두우니, 암천은 사실 밤이 아니라 새벽을 이름이라.」

착각이 아니었다.

할아버지가 손끝을 다시 움직여 왔다.

「그래서 이 시도 마음에 들어 하실 줄 알았어요….」

하얗고 매끄러워 진주와도 같이 고운 여배우의 손이다. 그 양손은 자글자글하고 주름이 많으며 거무튀튀한 노인의 한쪽 손을 소중하게 감싸 안았다.

「ㄴ, ㄴ-.」

할아버지는 눈을 뜨지 못한 채였다. 하지만 입술을 달싹거리며 무어라 말하려고 했다.

미미는 긴장해서 할아버지의 양손을 꼭 쥔 채 그 얼굴을 바라보았다.

간절하고 필사적이며, 무언가를 한결같이 찾고 있는 저 얼굴.

그녀가 수십여 년간 봐왔던 표정이다.

눈을 감고 있어도, 온몸에 힘이 없이 병원에 누워 있어도 그 강철 같은 의지는 사라지지 않았다.

「할아버지, 다시 말씀해 보세요.」

「누, 누-ㄱ.」

「누구냐고요?」

뜨거운 것이 떨어져 노인의 손을 적셨다.

십 대 여배우는 여태까지 참고 있던 눈물을 펑펑 흘리며 속삭였다.

「저에요, 할아버지. 할아버지 손녀딸 미미요.」

며칠 만에 할아버지가 다시, 의식을 되찾았다.

지금 이 순간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지만, 곧 호전되실 것이다.

그녀는 할아버지가 순간 짜증스럽게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ㄴ, 누-, 누구, 그.」

「저예요오오오오!」

감격에 젖은 미미는 할아버지를 뜨겁게 포옹했다.

◈          ◈          ◈

두 달 후.

해와 달 명동점이 손익분기점을 초과해 명백히 흑자를 내기 시작했다. 장부를 계산해본 진희는 자리에 앉아 꺼이꺼이 울었다.

“어흑흑흑흑.”

“사장님! 울지 마세요!”

“사장 언니! 언니가 울면 어떡해.”

학원에서부터 함께 해왔던 오픈 멤버 두 사람이 진희를 위로했다.

백진영의 소개를 통해 오픈 때부터 함께했던 바리스타 신후겸이 흐뭇하게 미소지었다.

“처음 오는 날부터 제가 함께하는 한 가게가 망할 날은 없다고 말씀드렸잖습니까.”

“네에, 네에.”

각종 바리스타 대회에서 우승한 경력이 있는 신후겸은 예술가적 기질이 강한 사람이었다.

“가족에게 투자받아서 운 좋게 가게 열었다가 말아먹을까 봐 그동안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요.”

“언니, 여기는 입지부터 망할 수가 없게 되어 있는 가게인데요.”

“세상 모든 가게는 언젠가는 다 망하게 되어 있어. 단지 빨리 망할지 늦게 망할지의 차이지. 사람들이 전부 늙어 죽는 것처럼 말이야.”

“아니, 거기서 늙어 죽는 얘기가 왜 나와요?”

“내가 병원에 오래 있었잖아. 거기 있다 보면 보여. 진료받으러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 다 언젠가는 죽어. 나도 저렇게 가겠거니 하는 생각이 든다니까. 세상에 영원한 건 없어.”

“자자, 흑자 나서 축하하고 있는데 엉뚱한 소리 하지 마시고요.”

“오늘은 퇴근하고 맥주 회식해요! 제가 쏠게요!”

“아니, 내가 나름 내가 사장인데 동진이 너한테 그렇게 말할 수는 없지.”

동진이가 새로 발급받은 신용카드를 팔랑팔랑 흔들며 말했다.

“저 진혁이 형이랑 같이 개발한 그 케이크 인센티브 들어왔어요.”

진희가 씩 웃었다. 그녀는 손을 뻗어 김동진의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그냥 잘 먹겠습니다 하고 회식이나 따라서 와. 오늘 저녁엔 치킨이랑 맥주 먹자!”

“예이!”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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