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님의 베이커리-354화 (354/656)

제 354화

의문스러운 한시를 남긴 한국인 제과제빵사와 헤어진 직후, 황려권은 병원에서 연락을 받았다. 그는 서둘러 딸을 데리고 귀국했다.

비서가 예약한 비행기의 비즈니스석은 푹신하고 편안했지만, 마음 한구석에서 불안이 가시지 않았다.

「아빠, 할아버지가 많이 안 좋대요?」

황미미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팬 미팅 같은 거 괜히 한다고 했나 봐요.」

걱정으로 가득한 딸을 보며 황려권이 고개를 저었다.

「서둘러 돌아가자.」

「제가 괜히 고집을 부려서.」

「걱정하지 마라. 할아버지는 괜찮으실 거야.」

황려권은 자신 역시 초조했지만 애써 딸을 달랬다.

영원처럼 느껴지던 비행이 끝난 후 두 부녀는 공항에 내렸다.

미리 대기하고 있던 운전기사와 만나, 경호원을 대동해 병원으로 향했다.

부친은 국립대학병원의 최상급 병실에 머물고 있었다.

경비원이 지키고 있는 엘리베이터를 타, 최상층으로 향했다.

최상층 전체를 사용하고 있는 최고급 병실은 전혀 병실처럼 꾸며져 있지 않았다. 오히려 호텔 방처럼 화려했다.

방금 전까지 머물러 있던 비즈니스 미팅 룸처럼 넓고 쾌적한 거실을 지나 아버지가 누워 계신 침실로 향했다.

트윈 스위트룸처럼 두 개의 방이 연결되어 있는 병실에는 의사 한 명과 간호사 두 명이 상시 대기하고 있다.

완전한 VIP 대우다.

문밖에 서 있던 간호사가 의사를 불러 알렸다.

「선생님, 보호자들 오셨어요.」

문을 열고 나온 의사가 침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그 표정을 본 황려권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오늘 밤이 고비인가?」

「그 정도는 아닙니다만, 며칠 남지 않았다고밖에….」

「분명히 지난주까지만 해도 일 년은 거뜬하다고 하지 않았나!」

황려권이 호통을 쳤다.

의사는 고개를 숙이며 물러났다.

「들어가 보십시오.」

병실을 아무리 호텔처럼 꾸며놓아도 병실은 병실일 수밖에 없다.

부드럽고 푹신푹신한 거위 털 베개 옆에는 수액 줄이 깔려있고, 바로크식으로 우아하게 깎여있는 목제 침대 머리맡 위에는 심전도 모니터가 삑삑거리고 있다.

「아버지.」

「….」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황려권은 아버지의 침상 곁에 앉아 손을 꼭 쥐었다.

자글자글하게 주름진 작은 손은 어렸을 적 느끼던 크고 듬직한 손과 너무나도 다르다.

가슴이 절절하게 저려왔다.

이 거대하고 화려하여 스위트룸과도 같은 병실은 사실 단 한 사람만을 위한 호스피스 병동이었다.

그는 잠시 아버지의 옛 모습을 떠올렸다.

아버지는 천재라고밖에 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보통 당의 수뇌부라는 자리는 공공연히 혈연을 통해 세습되어가고 있던 시절, 그는 농민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당에 입문했고 순식간에 휘몰아치고 올라왔다.

찢어지게 가난한 시골 동네에서 농민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세 살에 천자문을 떼었고, 다섯 살이 되기 전에 논어를 읽은 영재라는 사실 역시 도움이 되었다.

처음에는 말단 비서직으로 시작해서 자연스럽게 권력의 최고 중추까지 올라간 아버지다.

언뜻 보면 단순히 자수성가한 남자의 이야기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버지에게는 괴벽이 하나 있었다.

그는 전생(前生)과 윤회(輪回)를 믿었다.

거의 망상이라고 할 만한 이야기였다.

우연히 아버지가 따로 적어놓은 노트를 보았을 때 황려권은 그것이 소설이라고 생각했다.

원래는 뭔가 해서 잠깐만 펼쳐볼 생각이었다.

아버지 것인지도 몰랐다.

그것은 제갈책이라는 이름의 고아가 인생을 바꿔줄 누군가를 만나 일월신교의 책사로서 살아가는 이야기였다.

한 줄 한 줄이 흥미로워 마지막까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조역 하나하나의 성격이 개성적으로 살아있을 것도 대단하다.

수백, 수천 명의 조연이 등장하는데 그들 한 명 한 명이 전부 실제 살아있던 사람처럼 특색이 있었다.

중간에 제갈책이 정보전을 이용해 정파와 사파, 그리고 일월신교가 중원을 삼분하도록 하는 계책을 실행하는 데 성공했을 때에는 황려권도 손에 땀을 쥐며 책장을 넘겼다.

마치 삼국지 속의 천하삼분지대계를 처음 보았을 때와도 같은 흥분이었다.

유능하고 매력적인 조역들이 적지 않았지만, 그중에서도 제일 눈에 들어오는 인물은 한 명이었다.

제갈책의 책략을 최강의 무력의 뒷받침해준 ‘천마’라는 자였다.

제갈책은 주군을 모시면서 책략 면에서의 성장만이 아니라 인간적인 면에서도 성장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마지막까지 주군에게 자신이 어느 가문의 출신이었는지, 마음속 깊이 품고 있는 비원(悲願)이 무엇인지 밝히지 못했다.

주군이 갑자기 어느 순간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젊었을 시절에는 어디론가 훌쩍 떠나서 인재를 발굴해 오는 일을 종종 해왔기 때문에 이것도 그런 것인가 했다.

하지만 그 기다림이 일 년, 이 년, 그리고 십여 년이 넘어가자 문제가 생겼다.

제갈책은 강했지만, 천마만큼 강하지는 않았다.

그는 잃어버린 주군을 수색하기 위해 일월신교의 힘을 소모해버렸다.

천마의 양아들이었던 혈도객은 교주가 되는 것을 극구 사양했고, 일월신교는 내부의 정쟁 때문에 풍비박산 날 지경에 이르렀다.

그리고 제갈책은 암습을 당해 죽었다.

하지만 소설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그는 풍천이라는 시골에 꼬마 아이로 다시 태어났다. 집안에 전기와 전화도 없을 정도로 가난한 집이었다. 그는 특별히 천재성을 드러낼 생각이 없었다.

‘콜라’라는 것을 볼 때까지는 그랬다.

그의 주군이 단 한 번, 지나가는 말로 언급한 적이 있었다.

「콜라?」

풍천은 아버지의 고향이다. 황려권은 이마를 찌푸리며 수기로 쓰여 있는 노트를 한 장 한 장 넘겼다.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만 같았다.

「그냥 흔한 환생물이 아닌가?」

본디 무공의 재능이 반드시 대물림되는 것은 아니나, 뛰어난 신체적 능력은 유전적으로 자손에게 물려지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정파건 사파건 강한 자의 혈족은 대개 강한 경우가 많다. 신체적으로 뛰어난 골격을 가진 자가 적절한 훈련을 통해 실력을 기르고, 나중에 부모의 지위를 물려받는 것이다.

하지만 정파나 사파와는 다르게 일월신교는 강자존을 우선으로 삼는다.

교주는 핏줄과 관계없이 강한 자를 후계자로 삼았다. 대신 후계자가 될 때 양아들로 입적하며 권력을 일부 이양하는 절차를 거친다.

부하들을 관리해야 하는 관리직의 성격이 있는 소교주 역할을 하면서 시험을 받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시험을 통과하면 교주의 자리에 오른다.

하지만 종종 그 ‘강한 자’가 교주의 혈연인 경우가 있었다. 제갈책은 자신의 주군인 검림이 선정할 소교주는 검림의 자손이기를 바랐다.

그래서 환희당의 당주를 비롯해 수많은 미녀를 소개했다.

처음에는 칠현금 공연에 초청한다거나(취미가 아니라며 오지 않았다) 호수에 배를 띄우고 뱃놀이를 하도록 권유한다거나(무공수련이 바쁘다며 거절했다) 하는 둥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도록 했다.

하지만 그런 수작들이 전부 실패로 돌아가자 나중에는 노골적으로 침실에 여인을 들여놓았다.

그것 역시 실패했다.

세력 안정화를 위해 정략혼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도 해보았는데, 검림이 그 강한 힘으로 상대 세력을 깨부수고 돌아오는 둥 제멋대로 해결해버렸다.

제갈책은 참다 참다 못해 물었다.

「일월신교의 찬란한 미래를 위해서 여쭙니다. 도대체 왜 여인을 찾지 않으시는 겁니까? 사실 남자가 좋습니까?」

그때 검림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콜라’가 뭔지 아는 여자라면 좋아.」

「그게 뭔데요? 방중술입니까?」

좀처럼 웃지 않던 검림은 정말로 미친 듯이 웃어젖혔다.

「푸하하하핫! 그건 아니야.」

「진짜 이러실 겁니까.」

「그리고 너한테 알려줄 수는 없지. 내가 뭔지 알려주면 그걸 가르쳐서 보낼 거잖나.」

「당연하죠.」

「그럼 안 돼.」

천하의 책사라 불리며 제갈공명의 재림이라고도 일컬어지던 제갈책은 그 수수께끼를 푸는 데에 실패했다.

하지만 십여 년 후, 어느 날 그는 두 번째 실마리를 얻었다.

혈도객과 제갈책, 그리고 검림이 함께 나들이를 나온 날이었다. 고작해야 몇십 명이 남지 않은 혈교의 잔당을 소탕하러 나온 가벼운 나들이였다.

원래는 혈도객 혼자 가는 길이었지만 검림이 따라간다고 하니 제갈책도 따라붙은 것이다.

「네가 애냐? 내가 얘랑 같이 간다고 따라 나오게.」

「전술적인 판단을 위해 제가 함께 갈 필요가 있습니다.」

「하하. 그 판단은 왜 나 혼자 갈 때는 다르지?」

「주군을 보조하는 것은 내 일이다.」

「나 혼자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건가?」

「두 사람 다 조용하고, 셋 다 간다.」

세 사람은 혈교의 잔당이 숨어있는 산으로 향하던 중, 성 문밖에서 들오리를 잡는 거지를 발견했다.

검림이 오리에 눈길을 주는 걸 본 혈도객은 전낭을 뒤져 은자를 꺼냈다.

거지는 오리를 이제 막 진흙에 감싸 구우려던 참이었다.

「이건 우리가 사겠다.」

「가, 감사합니다, 나리!」

혈도객이 은자를 주고 오리를 사는 걸 본 제갈책이 잔소리를 했다.

「그 은자 하나면 오리구이를 다섯 개는 사겠다.」

「교주님께서 원하셨다. 이따 돌아와서 먹지.」

혈교의 잔당을 전부 죽이고 돌아오는 길, 세 사람이 옹기종기 둘러앉아 오리고기를 뜯었다. 통통한 다리 살을 먹으며 검림이 지나가는 말로 한마디 했다.

「콜라 한 잔 같이 마셨으면 딱 좋겠네.」

제갈책은 잽싸게 입을 다물고 혈도객에게 눈짓을 보냈다. 혈도객이 말했다.

「그 ‘콜라’라는 것이 뭡니까? 제가 중원을 뒤져 찾아오겠습니다.」

그리고 검림이 또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절대 찾을 수 없을 테니 쓸데없는 노력 하지 말게나.」

「어떤 건지라도 설명해 주십시오.」

「글쎄- 헛된 노력일 텐데. 붉은색 ‘캔’에 든 검은색 ‘탄산음료’인데 말이지-.」

그리고 더 물어도 그는 더 이상 아무것도 설명해주지 않았다.

시골집에 갓 태어난 아이는 새로이 말을 배웠다. 예전에 쓰던 것과 같지만 조금 다른 글자를 다시 익혔다. 다른 아이들처럼 평범하게 굴면서 특별함을 숨겼다.

하지만 ‘콜라’가 있었다.

발음은 많이 달랐다.

붉은색 알루미늄 캔은 검림이 손가락으로 대충 그려서 보여주었던 그 모양이었다.

그 안에는 ‘검은색 탄산음료’가 들어있다.

이곳 세상 어딘가에 주군이 계시다.

그래서 소년은 자신이 숨기고 있던 재능을 떨쳐 보였다.

황려권은 아버지의 노트를 떠올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버지는 완전히 미쳐있었어.’

모든 천재들은 전부 괴팍한 면이 있다더니 그래서일지도 모른다. 괴상한 꿈을 꾸고, 그것을 진실로 믿었다.

드라마 속의 제갈책보다 더 심할 정도였다.

당시 작가가 되기 위해서 회사를 그만두었던 황려권에게 그 노트는 마치 신의 계시처럼 보였다.

그는 노트의 내용을 바탕으로 소설을 썼고, 소설은 드라마가 되었다.

아들과 손녀가 진행하는 드라마라며 제작까지 응원해 주던 아버지는 드라마의 내용을 보고서 기함을 했다.

‘감히 그분의 이름을 천박한 텔레비전 쇼 따위에 썼다’며 노발대발해 크게 화를 내다가 그대로 쓰러졌다.

‘그분을 볼 낯이 없다’라느니 어쩌느니 하는 헛소리를 하는 것이 정상인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결국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정밀 검진을 통해 폐에 자라고 있던 암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나이 때문에 암 제거 수술은 할 수 없었으나 가장 효과가 좋은 방사선 치료 요법을 시작했다.

「아버지, 제가 잘못했습니다.」

황려권은 침상에 있는 아버지 옆에 무릎을 꿇었다.

「….」

「그렇게 화를 내면서 싫어하실 줄 알았으면 안 그랬을 겁니다. 좋아하실 줄 알았어요…, 아버지의 습작 소설인 줄 알았습니다, 그걸 정말이라고 믿고 계신 줄 몰랐어요. 대본으로 각색하고 드라마화되는 모습을 보면 좋아할 줄 알았습니다.」

「….」

「그래도 지금 다, 잘 된 거잖아요. 드라마가 전 세계적으로 인기가 있어요, 아버지 손녀도 이렇게 인기를 얻었고 다 잘 되고 있습니다. 아버지만 일어나시면 괜찮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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