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53화
사파이어 홀은 에메랄드 홀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형, 그럼 전 먼저 가요.”
“그래.”
출근 시간이 임박한 동진이를 먼저 보내고 진혁은 혼자서 복도를 걸었다.
고풍스러운 촛대 모양의 LED 조명이 환하게 켜진 복도는 장식 없는 실크 벽지와 우아한 대리석 바닥으로 잘 꾸며져 있었다.
얼마 전 임진희를 위해 인테리어 견적을 내보았던 진혁은 실내 장식의 가격대를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다음 가게는 아예 호텔처럼 고급스러운 전략으로 가는 것이 좋겠군.’
아버지의 가게인 소망 베이커리는 동네에서 방문하는 단골들이 주 손님이다. 반면에 해와 달 1호점은 대학가에서 20대 남녀 학생들을 상대로 빵을 팔았다. 임진희는 아예 건강에 관심 있는 30대 직장인들에게 식사 빵을 팔고 있다.
그린워터 샌드위치처럼 특정한 종목을 선정해서 공장처럼 찍어내는 식의 프랜차이즈를 해도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진혁은 그런 방식을 원하지 않았다.
‘각자 자기만의 특색이 있는 편이 좋지.’
그는 고동색 방문 앞에 섰다.
호텔의 상징인 그리핀이 정교하게 아로새겨진 양각 목제 문은 묵직하고 무거웠다.
그는 손을 뻗어 문손잡이를 잡았다.
기대감이 전신을 휘감았다.
오래전부터 기다리고 있던 무언가가 이루어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 ◈ ◈
사파이어 홀은 ‘홀’이라는 이름과 달리 자그마한 회의실이었다.
이백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에메랄드 홀과는 달리, 10여 명이 회의할 수 있는 비즈니스룸이었다.
한쪽 끝에는 거대한 빔프로젝터용 스크린이 설치되어 있고, 데스크톱 PC와 프린터 역시 준비되어 있었다.
쿠키와 초콜릿, 직접 내린 원두커피 등 간단한 다과가 준비되어 있었다.
진혁은 쿠키를 힐끔 바라보았다.
‘쿠키는 직접 제작하지 않고 공장에서 받아 쓰는군.’
「안녕하십니까.」
「예.」
진혁은 간단하게 인사하고 자리에 앉았다. 총괄 PD가 웃으며 물었다.
「임진혁 쉐프님이 맞으십니까, 페이스트리 쉐프님이라고 들었는데요.」
「예.」
언뜻 보면 취조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질문이었으나 진혁은 아무렇지도 않게 긍정했다.
「그렇다면 아까 준비해 오신 그 케이크 역시 직접 만드신 겁니까?」
「그렇습니다만.」
「혹시 디자인도 직접 하셨습니까.」
「예.」
「원래 송대 말기의 검에 대해서 지식이 있으셨나 봅니다.」
「그냥 생각나는 대로 만든 거죠.」
진혁은 턱을 괴었다.
대화는 그가 생각하던 것보다 훨씬 더 영양가 없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그는 혹시 그놈의 실마리가 있는지 없는지 찾고 싶었지, 케이크를 만들어 온 것에 대한 추궁을 받고 싶지는 않았다.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 중 무공을 익힌 사람은 딱히 없어 보였다.
‘광안마 녀석은 아무리 상황이 나빠도 무공을 창제해서 익힐 만한 놈인데. 그럼 여기엔 분명히 없는 거야.’
「그래서 저희가 정식으로 케이크의 문양이나 깃발의 도안 같은 것을 부탁드리고 싶습니다만….」
「그건 어렵겠습니다.」
◈ ◈ ◈
‘이놈 이거 진짜 물건이네.’
총괄 PD는 드라마 업계에서 생활하며 수많은 사람을 만나왔다. 그중에서는 인기를 얻고 싶어 하며 절박하게 매달리는 신인 배우도 있었고, 이미 최정상의 위치에 올라 거만한 연기자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가 정말로 높게 평가하는 이들은 권력자들이었다.
‘나라의 일을 하는’ 사람들은 밑에 있는 이들을 사람 취급하지 않았다.
그들은 세상 일들이 자신의 뜻대로 흘러가는 것을 중시해, 그렇게 되지 않을 상황 자체를 아예 상상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지금 눈앞에 있는 20대의 젊은 남자가 그러한 권력자처럼 위엄있는 모습을 보였다.
그는 보조 PD가 왜 직접 만나야 한다고 했는지 알 수 있었다.
결코, 만만한 애송이가 아니다.
<천마>의 팬들은 열성적인 코어 팬들이 많았다.
특히 이런 팬 미팅에 참여할 정도로 돈과 시간을 투자하는 이들은 극히 일부를 제외하면 모두 경제적인 여유가 있는 이들이다.
그들에게 실제 드라마를 만드는 제작진들은 마치 신의 뜻을 받드는 신관과도 같다.
등장하는 배우들은 신 그 자체로 우상화되어 모든 호의를 한몸에 받았다.
그래서 총괄 PD는 임진혁을 쉽게 생각했었다.
‘뭐라고 해도 저런 걸 만들어서 여기까지 올 정도면 열성 팬일 테니까, 몇 마디 칭찬해 주고 우리가 그 아이디어를 써준다고 하면 혹해서 다 좋다고 했어야 하는데 말이지. 쉽게 넘어오질 않네.’
그는 다시 한 번 칭찬을 해보았다.
「하지만 이번에 하신 이 검의 디자인은 아주 훌륭합니다. 이걸 입체적으로 만들어주신 것도 그렇구요.」
진혁은 고개를 저었다.
「이건 그냥 취미로 만든 겁니다. 저는 페이스트리 쉐프지 디자이너가 아닙니다.」
탁자 위가 썰렁해졌다.
진혁은 쿠키와 커피에 손도 대지 않았다.
‘공장제 쿠키를 맛보느니 아까 내가 먹던 케이크를 마저 먹는 게 낫지.’
바리스타가 직접 내린 것 같은 원두커피의 향기는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백진영이 새벽부터 우려내는 아인슈페너 쪽이 훨씬 더 맛있다.
진혁은 특별히 이 자리가 마음에 들지 않아 다과를 먹고 있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단지 더 맛있는 것을 얼마든지 먹을 수 있기에 굳이 맛없는 것을 먹을 필요를 느끼지 못했을 뿐이다.
하지만 반복되는 제안을 계속해서 거절하며 다과에도 아예 손을 대질 않으니 총괄 PD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혹시 다과가 마음에 드시지 않으면 따로 식사를 주문하겠습니다.」
「아까 케이크를 충분히 먹어서요.」
그때 한쪽 구석에 앉아 있던 어린 여자가 불쑥 입을 열었다.
「그 케이크 말인데요. 진짜 맛있어 보이더라구요. 아까 케이크 남았으면 혹시 저희가 맛볼 수는 없을까요?」
황미미였다. 옷도 아까와는 다르게 입었고 까만 뿔테 안경을 쓰고 머리를 질끈 묶어 아까와 동일한 여자라고 알아볼 수 없을 정도다.
하지만 외모만이 아니라 기운을 통해 사람을 판별하는 진혁은 이 여자가 누군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상관없습니다.」
진혁은 아이스박스를 풀어, 그 안에 있는 케이크를 내놓았다.
보조 PD는 눈치 빠르게 자리를 한순간 비웠다. 그는 곧 웨이터와 함께 돌아왔다. 웨이터는 여분의 접시와 포크를 하나씩 사람들 앞에 나누어 주었다.
진혁은 황미미 곁에 앉아 있는 장년인에게 시선을 주었다.
‘둘이 혈연이군.’
섬세하고 여성적인 미인인 황미미와 옆에 앉아 있는 남자는 언뜻 보면 전혀 닮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두 사람의 귀는 대단히 특징적인 모양을 하고 있었다. 오직 혈연 사이에서만 보이는 모양이다.
‘저자가 원작자인가? 아니면 그냥 다른 핏줄?’
아버지가 아니라 삼촌이나 나이 차이 많이 나는 오빠일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또한, 팬미팅에 원작자가 방문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저자는 자신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어 보였다.
진혁이 입을 열었다.
「여기 있습니다.」
그는 아이스박스를 풀어, 케이크를 꺼냈다. 그때 황미미가 옆에 있는 남자와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왜 먹다 남은 케이크를 먹고 싶어 하는 거냐.」
중년 남자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딸에게 조그맣게 속삭였다. 황미미가 방긋 웃었다.
「아빠! 진혁 쉐프님이 만드신 케이크를 실제로 먹을 수 있다니 너무 영광이에요.」
임진혁은 눈을 크게 떴다.
‘저 남자가 원작자라고?’
그렇다면 그는 몇 가지 물을 것이 있었다.
이 자리에 오기를 잘했다.
표정이 밝아진 임진혁은 묵묵히 케이크를 조각냈다.
◈ ◈ ◈
황려권은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무어라 말하려 했다.
하나밖에 없는 귀한 딸에게 외간 남자들이 먹다가 남긴 케이크를 맛보게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저 쉐프가 꺼낸 케이크는 생각보다 상태가 괜찮았다.
「먹다 남긴 거라고 해서 어떤 상태일지 상상을 못 했는데 생각보다 괜찮네.」
「당연히 먹고 있던 조각을 남겨온 건 아닙니다.」
페이스트리 쉐프는 대단히 독특한 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총괄 PD에게 자신이 어떻게 비칠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아니, 드라마 제작진에게 무언가를 원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오히려 제작진들을 면접하러 온 대단히 높은 사람처럼 굴었다.
소설을 쓰기 전에 광고회사에서 일했던 적이 있는 황려권이 딸에게 속삭였다.
「저 사람 말인데, 정말로 페이스트리 쉐프가 맞니?」
「당연하죠. 얼마나 인기 있는데요.」
「페이스트리 쉐프보다는 광고주 같아. 뭔가 일을 맡기고 싶은데 우리가 합당하지 않아서 언짢아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그것은 완전히 잘못된 추측이었지만 총괄 PD의 것보다는 사실에 가까웠다.
「우리 팬이라서 여기에 온 게 아니고요?」
황미미가 시무룩해 했다. 황려권은 황급히 딸을 달랬다.
「아니, 당연히 팬이라서 왔겠지.」
「그것보다 지금 이 케이크부터 먹어볼래요. 얼마나 맛있다고 하는데요. 한국에 와서 꼭 먹어보고 싶었는데 외출을 못 해서 못 먹었단 말이에요.」
단순하게 행복에 겨워하는 그 표정을 보고서 황려권은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그래, 네가 먹고 싶었던 거라니 됐다.」
황려권 역시 당 수뇌부의 외동아들로 귀하게 자랐다. 그는 본디 크림 따위가 많이 올라가 있는 달콤하고 촉촉한 것은 그다지 즐기지 않았다. 설탕이 많이 들어 있는 것보다는 씹히는 맛을 선호했다. 오징어포보다 살아있어 쫄깃한 오징어회를 좋아하는 것이다.
그는 딸의 얼굴을 흘깃흘깃 보며 예의상 포크를 집어 들었다.
‘쯧, 정말로 제대로 된 페이스트리 쉐프라면 먹다 만 케이크는 아예 내놓지 말았어야지. 나중에 다시 만들어서 갖다 바친다고 하거나, 아예 새로운 것을 만들어 왔어야지.’
그는 괘씸한 제과제빵사의 케이크를 한 입만 맛보고 내려놓을 생각이었다.
처음에는 그랬다.
「…!」
코끝에 감돌던 청량하고 상큼한 향은 고향 대죽숲을 떠올리게 했다.
혀끝에 살짝 닿았던 크림은 봄의 눈처럼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황려권은 방금 전의 그 맛을 다시 찾으려 포크를 움직였다.
어머니의 품처럼 따스하고 안온하게 혀를 감아오는 감촉은 선이 아니라 면이었다. 단순히 혀 위에 놓이는 것이 아니라 입안에 파도처럼 밀려들어 와 혀 전체를 감싼다. 분명히 미뢰가 없을 혀 아래쪽과 뿌리 끝까지 푹신푹신하고 부드러운 감촉이 다사롭게 포옹해주었다.
「엄청나게 맛있군!」
저쪽에서 총괄 PD가 감탄하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하지만 그런 쓸데없는 소리 따위에 신경을 기울일 새가 없다.
황려권은 자신의 접시 위를 탐닉했다.
진한 초콜릿 맛이 느끼하지도 싫지도 않다.
평소 과하게 달콤하고 인공적이어서 싫다고 생각했던 초콜릿 맛과 다르다. 상쾌한 나무 향기가 감도는 신기한 맛이었다.
‘먹으면 먹을수록 새로운 맛이 느껴져.’
세상을 떠난 아내가 남기고 간 귀한 딸이 옆에 있다는 사실조차 순간적으로 잊어버렸다.
그는 접시를 깨끗하게 비우고 나서야 고개를 들었다.
「호, 혹시 더 먹을 수는 없는가?」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전혀 엉뚱한 것이었다.
「해가 뜨기 직전에 밤이 가장 어두우니, 암천은 사실 밤이 아니라 새벽을 이름이라.」
젊은 제과제빵사 청년이 먹먹한 눈빛으로 황려권을 똑바로 응시했다.
겉으로는 20대처럼 보이지만 그 눈빛은 마치 산전수전을 전부 겪은 노인처럼 깊디깊었다.
「…그게 무슨 소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