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님의 베이커리-352화 (352/656)

제 352화

진혁이 웃었다.

“그럼 지금 이리로 와서 같이 드시면 좋겠군요.”

“예?”

「칼로 잘라내 단면이 드러난 순간부터, 케이크는 맛이 변합니다. 제가 지금 여기서 일어난다면 이 케이크는 보람없이 수분을 잃고 바싹 말라버려서 최선의 맛을 즐길 수 없게 되어버리죠. 가능하면 케이크는 제일 맛있을 때 먹는 게 좋으니까요」

진혁이 중국어로 말하자 보조 PD가 눈을 크게 떴다.

「북경어를 하실 수 있으십니까?」

「예.」

통역은 옆에서 뻘쭘하게 서 있었다. 보조 PD가 말했다.

「중국 진출을 위해 준비를 많이 하셨나 봅니다.」

진혁은 고개를 저었다.

「이제 겨우 국내에서 기반을 다지기 시작하는 참이라 지금 시기에 해외 진출은 무리가 있다고 봅니다.」

그는 ‘해와 달’의 새로운 지점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안토니오 펠루체나 브라이언 리가 미국 지점을 낼 생각은 없냐고 간간이 묻고 있지만, 그는 계속해서 거절하고 있었다.

‘차라리 프랑스에 지점을 낸다면 상징적인 의미가 될 수도 있겠지.’

빵의 본고장이라고 할 수 있는 파리.

미국이나 영국에서 온 페이스트리 쉐프들도 가게를 열었다가 파리지앵들의 입맛을 맞추지 못하고 망하는 일이 부지기수다.

그곳에 한국에서 온 빵 가게가 뿌리를 내리고 영업하는 데 성공한다면 그것도 나름 즐거운 일이 될 것이다.

보조 PD는 진혁을 다른 자리로 불러내는 데에 성공하지 못하고 자리로 돌아갔다.

「나보고 그 자리로 오라고 했다고? 케이크 맛이 어쩌니 하면서?」

당 세력가의 장남으로 총괄을 맡고 있는 메인 PD가 어이없어했다. 보조 PD가 말했다.

「사투리가 좀 섞이긴 했지만, 북경어를 유창하게 하는 걸 보면 정말로 열심히 준비를 한 게 분명합니다. 마스크도 괜찮고, 좀 건방지긴 하지만 한번 얘기만 해보시는 게 어떻습니까? 뭐라고 말하기 힘든 독특한 분위기가 있는 친굽니다.」

「글쎄, 아무리 봐도 열심히 준비한 사람의 태도가 아닌데. 올 테면 오고 말 테면 말라는 거 아닌가, 그거. 캐스팅 명단에 이름이라도 올려 달라고 겸손하게 요청하는 사람이 줄줄이 섰는데, 그런 놈을 굳이 만나러 가야 해?」

「얘기만 해 보시고 씨 알맹이가 굵은지 속이 텅 비었는지 직접 판단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메인 PD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포토타임이 끝나 이쪽에 와 있던 황미미가 끼어들었다.

「저도 저 케이크 저도 먹고 싶은데 같이 가면 안 돼요?」

「미미 씨가 남자 팬이랑 함께 식사를 하면 문제가 됩니다. 다른 팬들을 차별하는 행동이 되기 때문에 형평성에 대한 불만이 제기될 수 있어요.」

황미미가 투덜거렸다.

「저 사람, 아무리 봐도 팬이 아니라고요. 나를 바라보는 시선도 다르고. 완전 담담해. 명경지수 그 자체라고나 할까?」

「담담하다고요?」

「다들 야광봉 흔드는데 혼자 앉아서 케이크 먹고 있더라고.」

「풉.」

「직접 가서 얼굴 들이대도 저런 반응일지 궁금해요.」

검림 역할의 배우 장춘이 말했다.

「꼭 나 같은 반응이네.」

「장춘 선배가 내가 나올 때 야광봉을 흔들어야 할 필요는 없잖아요?」

「그게 아니고.」

장춘이 웃었다. 그는 제갈책 역할을 맡은 배우를 돌아보았다.

「제갈책은 네가 가까이 다가갈 때마다 얼굴이 빨개지잖아? 원래 대본상 그런 캐릭터가 아니었는데 말이지.」

리슈잉이 미간을 좁혔다.

「감독님은 그걸 더 좋아하셨으니까 상관없잖아.」

「제갈책은 아무리 봐도 그렇게 순정적인 캐릭터가 아니니까 문제지.」

「아니야, 내 제갈책은 원래 순정적이고 순수한 애라고. 비정한 강호에서 살아남기 위해 강철처럼 스스로를 단련한 끝에 날카로워 보이는 것뿐이지, 속은 부드럽고 말랑말랑한 남자라고.」

「그랬으면 벌써 옛날에 죽어 없어졌을걸.」

「회귀자니까 그 정보를 가지고 이만큼이나 살아남은 거지. 그러면서 성격이 바뀐 거고.」

「자자, 다른 배우가 맡아서 하고 있는 역할에 대해서 평가하는 건 하지 맙시다. 다들 프로 아니십니까?」

총괄 PD가 상황을 정리했다.

「출연시키는 것은 좀 그렇고, 적당히 돈푼 쥐여주고 케이크 디자이너나 사람이나 소개해달라고 하지.」

「그래요?」

「저 사람을 촬영장에서 보고 싶었는데 아깝다.」

「그 디자이너에게 ‘그걸’ 맡기시려구요?」

「그래. 새로이 등장할 암천대의 깃발과 새 소교주가 선택하는 일월신교의 문양 도안 말이야.」

「나쁘지 않겠네요.」

메인 PD는 직접 청년을 만나러 가기로 했다. 그는 따라오려는 다른 배우들을 막았다.

「황미미 씨도, 장춘 씨도, 리슈잉 씨도 안 됩니다. 팬 한 명이 좋아 보이는 물건을 가져왔다고 배우들이 우르르 몰려나가면 분위기가 어떻게 될지 아십니까.」

「다음부터 선물이 많이 들어오겠지?」

리슈잉이 해맑게 말하자 장춘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욕먹겠지, 아주 많이.」

「팬이 안티 되는 건 순식간이니까.」

메인 PD는 엉뚱한 사람이 앞에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황려권 선생님께서도 저 청년을 보고 싶으십니까?」

「PD님이 만난다면 괜찮네, 나는 그냥 잠깐 궁금했을 뿐이었으니까.」

「뭐가 궁금하셨어요, 아버지?」

「저 검 모양의 케이크 손잡이 말이야. 어디선가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어.」

메인 PD가 주춤거렸다.

현재 몸이 좋지 않아 병원에 입원해 있는, 황려권의 아버지는 한때 당의 주요 인사였다.

아들 황려권이나 손녀 황미미는 권력에는 관심 없이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고 있다.

그 이유는 황려권의 부친 되는 분께서 자리를 보전하고 있는 지금도 흔들리지 않고 단단히 권력을 손에 쥐고 있기 때문이다.

황미미가 어린 나이에 장대한 사극 드라마에 데뷔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덕분이었다.

세간에는 원작자의 딸이기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는 모양이지만 말이다.

자신 역시 권세가의 아들이지만, 황려권의 지위에 비하면 보잘것없다.

메인 PD가 굽신거리며 말했다.

「그러면 아예 행사가 끝나고 따로 초청해서 이야기를 듣지요. 그때 같이 오시면 되겠습니다. 아니면 여쭈어볼 것이 있으시면 제가 물어봐도 좋고요.」

「그래요? 그럼 그때 저도 가도 되나요?」

황미미가 생글생글 웃으며 물었다. 메인 PD는 황려권을 힐끔 바라보았다.

「… 보게 해 준다면 고맙겠네. 어차피 캐스팅된다면 촬영장에서 볼 것 아닌가? 캐스팅되지 않는다면 다시 볼 일이 없을 것이고.」

황려권이 말했다.

“저자가 앙심을 품고 따님에 대해 나쁜 말을 하고 다닐지도 모릅니다.」

미미가 활짝 웃었다.

「그럼 저도 나쁜 말을 퍼트리면 되죠.」

「예?」

「저 사람, 배우 아니에요. 페이스트리 쉐프에요.」

메인 PD가 깜짝 놀라 물었다.

「예?! 배우가 아니라고요. 아니, 그걸 어떻게 아십니까?」

「아까는 긴가민가했는데 지금 저 CCTV 화면 보니까 확실히 알겠어요. 저 한국 예능 좋아하잖아요? 저번에 SBC 텔레비전에서 봤어요.」

「한국 예능이라면….」

「디저트 서바이벌 쇼라고, 얼마 전에 수입된 거 있잖아요. 재능있는 한국인 쉐프인데 아버지에게 배운 빵 만들기 실력으로 온갖 제과제빵 대회에서 다 상을 휩쓸고 다니고 있대요. 중국 내에 팬클럽도 따로 있어요」

그녀가 초롱초롱 눈을 빛내며 말했다.

「저 가서 사인받고 싶은데.」

아무리 성숙해 보이고 연기에 뛰어나다고 해도 이제 내년이면 스무 살이 될 소녀다.

황려권이 나무랐다.

「그건 안 돼.」

「당연히 안 되죠, 아무럼요.」

메인 PD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황려권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드라마의 흥행을 이끌어가는 메인 배우가 저런 외부인에게 사인을 부탁해서는 안 될 일이다. 차라리 사인을 해주면 해주었지, 자칫해서 어딘가에 쓸데없는 이야기가 퍼져나가면 곤란하다.

황려권이 부드럽게 말했다.

「쟤 사인이 갖고 싶으면 내가 받아다 주지. 그러니까 네가 받지는 말아라. 묘령의 여인이 그런 걸 요청하면 사내새끼들은 오해하게 되어 있어요.」

「인사도 하고 악수도 하고 같이 사진도 찍고 싶은데요!」

「그건 이 아비가 어떤 사람인지 보고 난 다음에 말해주마.」

「아빠가 할아버지보다 더 심해요!」

「그건 아니지.」

「…그건 그렇지만요.」

부녀간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던 메인 PD가 이마를 짚었다.

「그러니까 지금 저 청년에게 황려권 선생님께서 사인을 받아다 주시겠다는 말씀입니까?」

「그래, 뭐 어려운 일도 아니지 않은가? 이렇게 됐으니 나도 같이 가세나.」

「….」

메인 PD가 발길을 멈추었다.

「행사 끝나고 따로 초청하겠습니다.」

「그래?」

「예, 팬 미팅 현장에서 원작자님이 나서서 갑자기 사인을 받으시는 것도 과히 좋은 광경은 아닙니다.」

「원작자라는 것을 다들 모르니 괜찮지 않을까?」

「역시 어렵겠습니다, 선생님.」

「우리 딸이 받고 싶다는데.」

메인 PD는 황미미를 힐끔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는 아주 많은 감정이 담겨 있었다. 미미는 눈치 없는 척 고개를 돌렸다.

그는 황려권에게 고개를 숙였다.

「끝나고 꼭 받게 해드리겠습니다, 선생님.」

황미미가 물었다.

「행사 끝나고 따로 초청한다면 어떻게 할 건데요?」

총괄 PD가 대답했다.

「방법이 다 있습니다.」

◈          ◈          ◈

팬 미팅은 성황리에 끝났다.

차례대로 줄을 서서 바깥으로 나가는데, 진혁은 남은 케이크를 다시 아이스박스에 담느라 조금 늦었다.

일월검 케이크는 이제 여의주를 물고 있지 않은 용의 머리가 양각된 검의 손잡이를 포함하여 절반 정도가 남은 상태였다.

‘사탕이 꽤 잘 됐지.’

마지막에 서 있던 진혁은 하얀색 봉투를 받았다.

“이게 뭐지?”

“포토카드에요. 오늘 참석한 사람들한테만 한정판으로 나누어준다고 그랬어요.”

김동진은 기다리지 않고 바로 하얀 봉투를 찢었다. 소년이 흥분해서 말했다.

“저, 저! 이거 봐요! 저 검림 나왔어요, 검림!”

잔뜩 들떠서 방방 뛰는 것이 어린아이처럼 즐거워 보였다.

항상 얼굴 한구석에 그늘이 있던 녀석이 이렇게까지 즐거워하는 것을 처음 보자 조금 낯설 정도였다.

진혁이 피식 웃었다.

“그래.”

“호, 혹시 임진혁 회장님은 봉투 안에 카드 어떤 거 들어 있어요? 제가 열어 봐도 돼요?”

사실은 다른 카드를 노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김동진이 손바닥만 한 하얀 봉투를 탐내자 진혁이 그냥 내주며 물었다.

“계속 형, 형 하다가 왜 갑자기 회장님이야?”

“사실 회장님 맞잖아요. 임진희 사장님은 가게 사장님이고, 가맹점 사장님은 회장님이라고 그랬단 말이에요.”

“됐으니까 뜸 들이지 말고 그냥 열어 봐라.”

“예에이!”

동진이는 봄 나비가 날개를 팔랑거리듯 양팔을 휘적휘적 저으며 온몸으로 기쁨을 표현했다.

보고 있기만 해도 웃음이 저절로 나오는 광경이었다.

“… 어? 이건 사진이 아닌데요?”

마치 사진처럼 두꺼운 두께의 종이 위에, 중국어로 짧은 단문이 씌어있었다.

김동진의 동공이 흔들렸다.

“이, 이건….”

“뭔데? 읽어 줘 봐.”

“형 중국어 잘하잖아요.”

“나 간체자는 못 읽는다.”

“아.”

동진이 쪽지의 내용을 천천히 읽어주었다.

“지금 집으로 가지 말고 에메랄드 홀 뒤편, 사파이어 홀로 와달라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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