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51화
장춘은 갑자기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배우로서의 본능이라고 해도 좋다.
‘이 사람은 진짜다.’
압도적인 위압감.
그것은 감추려고 해도 숨길 수 없다.
어떻게 저런 사람이 여기에 앉아 있는지 신기할 정도다. 그는 이제까지 이 정도의 위압감을 가진 배우는 단 한 사람밖에 만나보지 못했다.
‘한국의 배우인가? 젊은 나이에 저렇게 엄청난 배우가 한국에 있었다니. 왜 아직 알려지지 않았지?’
배우는 배우를 알아본다.
장춘은 자신의 감각을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이곳은 팬 미팅 자리고, 한 명만을 주목하고 있을 수는 없다. 그는 애써 시선을 돌리며 다른 사람들 모두에게 말을 걸었다.
“반갑습니다, 한국 팬 여러분!”
미리 공부해온 한국말로 짧은 인사를 하고 나서, 다들 간단하게 소감을 이야기했다.
다른 배우들이 차례대로 나서며 인사를 했다.
“그럼 이번에 소개해드릴 분은, 환희당의 소당주이자 은소화의 배우인! 황미미 씨입니다!”
“와아아아아!”
박수 소리가 엄청나게 커졌다.
본디 무협 드라마에는 여성의 비중이 적은 편이다. 하지만 <천마>는 그중에서도 특별히 더 그랬다.
환희당에서 기녀로 가장하여 정보를 수집하는 미녀들 말고는 여고수가 거의 등장하지 않았다.
‘그 시대에 여고수가 아예 없지는 않았는데.’
아미파의 문주였던 진철 사태와 그녀가 이끄는 여승들의 무리만 해도 그렇다. 정파 쪽에는 여고수가 꽤 있었고, 일월신교 내에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광안마와 얽힐 당시의 임진혁은 초반에 그들과 그다지 접점이 없었다.
그 결과 현재 드라마 속의 일월신교 내에 등장하는 거의 유일한 주연급 여성 역할은 환희당의 당주 한 명밖에 없었다.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
은소화의 배우인 황미미가 등장하자 반응 자체가 아예 달랐다.
김동진은 입가에 크림을 묻힌 채로 분홍색 야광봉을 흔들었다.
임진혁은 가만히 앉아서 그런 주변 사람들을 관찰했다.
강렬한 열기에 휩싸여 열광하는 사람을 보고 있노라니 저절로 옛 추억들이 떠올랐다.
‘충실한 교인들이 교주를 뵈며 감격한다고 할 때랑 비슷하군. 역시 현대나 옛날이나 크게 다르지 않아.’
들뜬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온몸으로 표현하는 사람들은 순수하고 행복해 보였다.
진혁은 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를 띄웠다.
다음 행사는 짧은 공연이었다.
황미미는 칠현금을 연주하며 낭랑하게 노래를 불렀다.
「가신 임은 다시 돌아오시지 않고, 황하의 강물은 덧없이 흘러갈 뿐이네-」
드라마가 처음 시작할 때에 흘러나왔던 것과 같은 음악이다.
새소리처럼 날카롭고 가느다랗던 선율은 점차 선명해지며 부드러워졌다. 비단 베개처럼 보들보들해진 노랫가락이 감각적으로 귀를 두드리자 진혁은 어쩐지 감개무량해졌다.
‘그때는 분명히 저런 노래가 아니었을 텐데. 이럴 줄 알았으면 그때 한 번이라도 좀 들어줄 것을 그랬나.’
드라마에서는 표현되지 않았으나, 당시 환희당의 당주와 소당주는 음공의 달인이었다.
그녀의 이름이 은소화인지 은대화인지는 이미 잊어버린 지 오래다.
단지 양녀로 맞아들인 딸의 음악적 실력이 뛰어났다는 이야기만 얼핏 전해 들었고 인상만이 어렴풋이 남아있다.
작고 볼품없는 여자였고 지금 무대에 서 있는 저 배우처럼 아름답거나 온화하지 않았다고 들었다.
숲속에 숨어 사는 마녀처럼 생겼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그녀는 종종 잔치에 초대되어 칠현금을 연주하곤 했는데, 하얀 면사포를 써서 얼굴을 가렸다.
정말로 못생겨서 그랬는지 아니면 지나치게 아름다운 미모로 불쾌한 일을 겪을까 그랬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애초에 환희당의 당주가 못생긴 딸을 양녀로 들인다는 것 자체부터 이상한 일이니 말이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환희당의 소당주는 음공 솜씨가 뛰어나, 수백 수십 명의 장정을 순식간에 재워버릴 수 있다.
정파와 대립하던 시절 삼류 무인들 백여 명을 노래 한 곡으로 단숨에 잠들게 해버릴 정도로 멋진 솜씨였다.
임진혁은 소당주가 실제 연주하는 칠현금을 들을 때마다 귀를 아예 막아버렸다.
아름다운 선율에 담겨있는 내공이 불쾌했기 때문이다. 덧붙여 당시에 그는 아무도 믿지 않았고, 믿을 생각도 없었다.
음공의 실력자 앞에서 무방비하게 귀를 노출시키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칠현금 공연이 끝나고 나서 짧은 뮤직비디오가 공개되었다.
이제 포토 타임 시간이었다.
“자, 그러면 원하시는 분들께서 이쪽에 줄을 서 주시면 됩니다!”
사람들이 줄을 서는 동안 동진이 물었다.
“형! 형은 같이 가서 안 찍어요? 모처럼 여기까지 왔잖아요.”
진혁이 동진에게 물었다.
“포토 타임을 하는 동안 이야기할 시간도 있을까?”
“그, 그런 건 없을걸요. 사진만 한 장씩 남기는 건데.”
“그럼 난 괜찮아.”
작가가 어떤 사람인지 물어보고 싶었을 뿐이다.
하지만 이 행사는 마치 교주가 진행하는 의식처럼 한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충실한 신도들은 종교의식의 순서에 따라서 고개 숙이고, 손뼉 치고, 감사하고 다과를 즐긴다.
‘뭐, 나쁘지는 않았는데.’
원하는 정보는 얻지 못했다. 하지만 모처럼 옛 추억을 즐기며 외출을 한 것으로 충분하다.
그는 눈앞의 케이크를 바라보았다.
식욕이 좋은 동진이는 이미 검집 부분을 절반 이상 먹어치웠다.
아직 검의 손잡이 부분이 남아 있다.
포토 타임을 위해 떠난 김동진을 흘깃 바라본 진혁이 미소지었다.
“여의주는 내가 먹어야겠다.”
이번에 설탕 공예로 만든 여의주는 완벽한 구형으로, 빛 아래에서 반짝반짝 빛났다.
이전에 금천복 할머니가 혼례를 올릴 때 강기사를 이용해 크로캉부쉬에 캐러멜 소스를 입혔다.
진혁은 이번 그 기술을 업그레이드하여, 거푸집이 아니라 진기를 이용해 사탕을 성형해 보았다.
처음에는 뜨겁게 녹은 설탕이 폭발하며 터져나가는 등 엉뚱한 사고를 겪기도 했지만, 몇 번의 연습 끝에 무리 없이 성공하였다.
그 과정에서 사탕에 평소보다 많은 양의 진기가 주입되었다.
영물의 내단처럼 거창한 것은 아니었으나 먹는다면 피로 정도는 싹 가실 것이다.
김동진이 요즘 오픈하는 가게에서 힘들어 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 먹여도 좋겠다 싶었다.
‘제 복을 제가 걷어차는데 일부러 떠먹여 줄 필요는 없지.’
둘이서 같이 먹고 있는데 여배우 따위와 사진을 찍는다며 먼저 자리를 떠나서 섭섭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광안마나 혈도객, 아니 일월신교의 그 어느 교인도 그와 식사하는 자리에서 먼저 자리를 뜨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것에 익숙해진다, 익숙해진다 하면서도 나도 아직 멀었어.’
무(武)를 쌓으려면 자신을 아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
그는 묵묵히 케이크를 떠먹었다.
드라마 속에서는 도산검림이 처음부터 제갈책을 믿고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진다.
그 사실에 감복한 제갈책은 도산검림을 온전히 믿고 자신의 몸을 의탁한다.
하지만 그 당시에 진혁은 환희당의 소당주를 비롯해 광안마 역시 믿고 있지 않았다.
그 점은 드라마와 실제가 크게 다르다.
‘뭐, 저놈이나 이놈이나 다 똑같은 거야. 누구나 최후의 한 수는 숨기고 있어야 하니까.’
광안마 녀석이 뭔가 쓸데없는 짓을 했다면, 동굴 속 깊숙이 숨어있던 15명의 암천대원들이 칼을 꽂아 죽여 주었을 것이다.
그 사건은 도산검림의 위기가 아니었다.
그저 제갈책-광안마에 대한 시험이었을 뿐이다.
그는 낮은 점수로 시험을 통과했다.
그냥 바로 검림을 구하면 됐을 텐데, 오랜 시간 동안 고민을 했다.
그리하여 광안마가 검림을 믿게 된 순간과 검림이 광안마를 완전히 믿게 되는 순간은 같지 않다.
‘20년쯤 더 걸리지.’
하지만 그 드라마를 쓰는 사람의 시선은 달랐다. 드라마 속의 검림은 전심전력으로 광안마를 아끼는 것처럼 보였다. 목숨을 걸고 구할 정도로 말이다.
‘역시 내가 만든 게 맛있어.’
진혁은 케이크를 맛보는 데에 다시 집중했다.
케이크는 달콤하고 촉촉하며 부드러웠다. 천상의 음식처럼 달콤한 맛 뒤편에 희미하게 서려 있는 나무의 향기가 유쾌하다.
‘동진이 그놈이 벌써 이 정도 맛도 구분할 수 있게 됐어.’
다음에는 또 어떤 맛으로 무엇을 만들지 생각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 ◈ ◈
황려권은 원래 해외 쇼케이스에 참석할 생각이 없었다.
원작 소설이 드라마가 되어 흥한 것은 좋은 일이지만, 집안에 우환이 있어 중국에 머무르려고 했었다.
하지만 귀하게 키운 외동딸이 몇 번이고 조르고 조른 끝에 결국 한국까지 따라오게 되었다.
제작사 측에서는 원작자 역시 함께 참석해서 드라마를 홍보해 주기를 원했다.
하지만 그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 공식적으로 얼굴을 드러내는 것을 원치 않아 관련된 요청을 전부 거절했다.
딸의 칠현금 공연까지만 보고 바로 중국으로 돌아갈 계획이었다.
행사에 늦게 참석한 손님인 척 어슬렁거리며 딸이 칠현금 공연을 시작하기 직전에 들어온 그는 예상외의 물건에 시선을 빼앗겼다.
그것은 아주 섬세하고 정교하게 세공된, 옛 동양풍 검 모양의 케이크였다.
황려권은 조용히 행사장 뒤쪽으로 물러나, 제작사 측 보조 PD에게 부탁했다.
「거기 이따가 저 사람 좀 불러 봐.」
「저 사람요? 아시는 분입니까?」
「그건 아닌데. 저 검 때문에 물어볼 게 좀 있어서.」
「그렇지 않아도 아까 PD님이 흥미 보이시던데요. 지금 목업보다 훨씬 잘 만들어졌다고, 끝나서 디자인 물어볼까 생각하시는 것 같더라구요.」
「어떤 사람인지는 알아?」
보조 PD가 소곤거렸다.
「아까 포토 타임 시작하기 직전에 장춘 배우님께서 말씀하셨는데요, 한국 배우 같대요.」
황려권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한국인 배우라고? 배우가 왜 저기서 케이크를 먹고 있어.」
「다음 시즌에 등장할 동방의 무인 캐스팅하려고, 한국 쪽 에이전시에 문의 넣은 상태래요. 그 천 리 밖에서도 쏘아 맞히는 동이족 궁수 역할 있잖아요. 웬만한 배우라면 다 알고 있을 거라고, 자기 몸값 높이려고 여기서 얼굴도장 찍고 있는 것 같다고 하던데.」
「허, 참.」
황려권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는 요즘 젊은이들의 생각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세상에는 정말로 별사람이 다 있구먼.」
「한국 사람들은 원래 적극적이라잖아요.」
「적극적인 데에도 정도가 있지. 쯧」
「어떻게, 먼저 얘기해 보시겠어요? 불러 드려요?」
「아닐세. 메인 피디가 이야기해 본다고 하면, 직접 이야기하라고 하지. 나는 어차피 이 행사에 정식으로 참석한 것도 아니니 내가 참견할 일은 아닌 것 같네.」
◈ ◈ ◈
자신의 내면을 관조하던 진혁이 케이크 조각을 마저 자르려던 참이었다.
“잠깐 이쪽으로 오시겠습니까? 저희가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행사장 한편에서 분주하게 오가던 자였다. 통역을 동반한 그는 진혁의 앞에 멈추어 섰다.
진혁은 눈앞에 있는 케이크를 한 번 보고서 고개를 들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그, 지금 드시고 계신 케이크 때문에 말입니다.”
“간식을 직접 가져와서 먹어도 된다고 초청장에 쓰여 있었습니다만.”
“예, 물론 그렇습니다. 그것 때문에 말씀드린 게 아니라고 하시네요.”
통역이 쩔쩔매며 말했다.
“실은 그 드라마 관련 일을 하시는 분이 여기 계십니다만, 그 디자인 때문에 여쭈어보고 싶은 게 있으시다고 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