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50화
사회자는 이제 막 행사의 목적을 설명하고 있었다.
“여기까지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의 팬 미팅은 드라마 천마의 팬 여러분께….”
모두가 사회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가운데 두 사람은 다른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동진은 행복에 겨운 표정으로 말했다.
“전에 형이 다크 초콜릿 카다멈 타르트를 만들었잖아요. 약간 그거랑 비슷한 느낌인데. 벨벳처럼 촉촉하면서도 속 깊은 맛은 씁쓸한 가운데 향긋한 나무와 꽃향기가 풍기는 거요.”
임진혁이 만든 디저트에는 항상 분명한 의미가 있었다. 새롭고 신선한 모양과 그 형태에 담긴 뜻을 살펴보고 이해하는 것은 낯선 숲길을 지도 없이 걸어가는 것처럼 흥분되고 즐거운 일이었다. 동진이 코와 혀, 눈을 사용해 삼켜 씹어버릴 듯 검 케이크의 냄새를 맡았다.
“그래.”
“약간 그거랑 비슷한 것 같기도 해요.”
아직 맛을 보지도 않고서 후각으로 이렇게 과거의 비슷했던 음식들을 떠올리며 하나씩 하나씩 세세하게 비교한다.
지음(知音)이 성장해 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진혁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향신료 중에 로즈마리와 카다멈이 비슷한 향을 내잖아.”
“월계수 잎도 그랬던 것 같아요.”
“그 세 가지가 주요화합물을 공유할 거야. 카디올이었나? 이 풍미화합물이 나무와 민트 향을 내는데, 조금씩 다르지.”
“카다멈은 꽃과 시트러스 향이 조금 더 강했던 것 같은데요?”
“로즈메리는 장뇌 향이 조금 더 강해.”
낯선 단어에 동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형, 저도 이것저것 먹어봤다고 생각했는데 장뇌 향은 도대체 뭐에요?”
“장뇌목이라는 나무가 있어.”
“처음 들어봐요. 우리나라에도 있는 나무에요?”
“음…, 글쎄. 중국에는 확실히 있는데. 옛날이야기도 있어.”
“옛날이야기요?”
진혁은 장뇌목이 한국에 있는지 어떤지 잘 알지 못했다. 그는 그냥 자신이 알고 있는 짧은 이야기를 간단하게 설명해 주었다.
“옛날옛적에 중국의 북쪽 지방에서 있었던 일이야. 큰 절이 있어 서른 명이 넘는 중이 머물고 수많은 신도들이 시주를 하러 왔다고 해. 거대한 뱀이 들어와서 많은 사람들이 죽고 난 다음에 그 절은 아예 폐허가 되었지.”
“그 절이 장뇌목으로 만든 목제 건축물이었대요?”
“그런 건 아니고. 우연히 어느 거지가 그 절에 들어온 거야. 밤에 추워서 잠을 자려는데 땔감이 없어서 보니 중들이 도망갈 때 놓고 간 장뇌목 나막신들이 보였대. 그걸 모아서 간신히 불을 붙이는 데 성공한 거지. 밤에 그 불 곁에서 잤는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거대한 구렁이가 온몸을 비튼 상태로 흰 배를 내놓고 죽어 있더래.”
“왜요?”
“장뇌목을 태우면 뱀을 죽이고 삿된 것을 쫓아내는 효능이 있거든.”
그것은 광안마가 알려 준 이야기였다.
새삼스레 옛이야기를 하며 진혁이 빙긋 웃었다.
“그러니까 초콜릿에 로즈마리를 더하면 은은한 장뇌 향이 풍기고, 정신을 깨우고 마음을 맑게 하는 역할을 해주지. 뭐, 벌레나 뱀까지 쫓는 건 무리지만.”
“신기하네요. 형은 진짜 아는 게 많아요.”
“그렇지는 않아. 나보다 더 아는 게 많은 사람도 얼마든지 있는걸. 나는 오히려 몸을 쓰는 쪽이지.”
책사는 따로 있고, 무공을 사용하는 쪽이 편하다. 평생 그렇게 살아왔다. 빙긋 웃는 진혁을 바라보며 동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형은 자기 자신을 너무 몰라요. 어, 저기. 지금 배우들 나오나 봐요!”
“이거 맛보지 않고 가게?”
“아윽.”
김동진(18세, 남고생)은 갈등했다.
‘좋아하는 배우가 등장할 텐데. 케이크에서 시선을 떼어야 하는데.’
케이크는 언제라도 먹을 수 있지만, 이 배우는 다시 볼 수 없다. 그 배우가 한국에 올 일도 없을 것이고 동진이 이런 행사에 참여할 수 있을 리도 없다.
이번에는 우연히 임진혁을 따라오게 되어 참가할 수 있었지만, 사실 동진 자신이 혼자였다면 절대로 올 수 없었을 것이다.
이번에 운이 좋게 진희의 가게에 취업하게 되며 독립적인 수입이 생겨서 미래를 향한 길이 언뜻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여유는 결코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에게는 한순간 한눈팔면 그대로 거리에 혼자 내팽개쳐질지도 모른다는 절박감이 있었다.
‘덕질도 먹고살 만한 여유가 있어야 하는 거지. 지금 내 처지에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욕심을 내서.’
동진이 눈을 깜빡깜빡하면서 고개를 들었다.
케이크와 무대를 번갈아 보다가 그는 케이크를 향해 고개를 처박았다.
진혁이 물었다.
“왜? 무대 보고 먹어도 돼. 내가 그새 다 먹을 것도 아니고.”
그는 벌써 검날을 반으로 잘라, 미리 챙겨온 얇은 종이 접시 위에 올려놓은 상태였다. 조금 전까지 희미하게 떠돌던 초콜릿과 로즈마리, 그리고 생소한 나무 향기 ? 김동진은 이것이 진혁이 설명해준 장뇌 향일 것이라 짐작했다 ? 아주 미미한 감귤 향이 선명하게 김동진의 후각을 강타했다.
마치 코가 눈이 되기라도 한 듯, 빨려 들어갈 것처럼 시선을 떼지 못하고 동진은 케이크를 바라보았다.
“아니, 진짜 형은 어떻게 하길래 케이크 자르는데 소리도 안 나요? 볼 때마다 신기하네.”
정말로 금속 모양으로 된 것처럼 광택을 내며 빛나던 케이크다. 크림을 뭉개거나 겉모양이 망가지지 않게 소리 없이 잘라내는 모습을 볼 때마다 동진은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자신이 케이크를 자를 때, 칼 옆으로 크림이 묻어나오고 장식이 망가지는 것과 비교되어 더 그랬다.
“케이크를 자르는데 왜 소리가 나. 탁자나 의자를 자르는 것도 아니고.”
“가구 자르는 거랑 비교할 일은 아니죠.”
동진은 스푼을 들어 올렸다. 임진혁이 잘라 옮겨 준 케이크 조각은 검집의 끝부분이었다. 오래 써서 닳았으나 소중하게 보관하며 기름을 먹여 손질해 와 반질반질한 소가죽 같은 겉껍질이 씌워져 있다. 퐁당으로 이 정도 디테일을 내려면 분명히 여러 시간 이상 다듬어야 했을 텐데, 동진이 알기로 지난 밤 진혁은 분명 해와 달 본점에서 늦게까지 일하다 왔다.
오늘 다른 곳에 가기 때문에 미리 반죽을 좀 해놓는다고 얘기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덕질을 하려면 진짜, 형처럼 해야 하는구나. 자기 일도 하고 또 잠을 쪼개서 하는 거야. 내가 덕질은 그렇게 하는 게 아니라고 진혁이 형한테 뭐라고 할 게 아니었어.’
원래 존경하는 사람이지만 이런 모습을 볼 때마다 점점 더 경애하는 마음이 깊어진다.
“배우 본다며.”
“이거 한 입만 맛보고요. 냄새가 너무 좋아요.”
김동진이 말했다.
“그리고 지금은 남배우잖아요. 소당주님 나오면 그때 보죠, 뭐.”
임진혁은 고개를 들어 배우를 바라보았다. 마침 그 배우 역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뭐, 마음대로 해.”
진혁은 대수롭지 않게 다시 케이크를 바라보았다. 그는 포크를 집어 크림을 묻혔다.
“다음에는 포도와 로즈마리를 섞어도 괜찮겠는데.”
“오, 그것도 좋을 것 같아요!”
◈ ◈ ◈
제갈책 역할을 맡은 배우 리슈잉이 무대에 오르며 입을 삐죽였다.
표정 연기에 뛰어나고 감정 표현을 잘하는 좋은 배우다. 아역으로 데뷔한 후 승승장구하다가 최근 5년간에는 거의 제대로 된 연기를 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번에 <천마>가 성공하며 리슈잉 역시 다시 주목받는 배우가 되었다.
‘성공과 실패를 다 겪어서 그런지, 조울증 환자처럼 오르락내리락하는 기분 폭만 좀 적으면 좀 상대하기 나을 텐데 말이야.’
사회자는 리슈잉을 흘끔 바라보았다.
그는 오늘 나오면서 팬 미팅을 위해 무대 의상을 완벽하게 입고 분장도 해야 한다고 우겼다.
어디까지나 <천마>의 팬들을 만나기 위해서 왔으니, <천마>의 캐릭터로서 사람들을 만나야 한다고 말이다.
그래서 리슈잉이 아닌 다른 배우들 역시 무대 의상을 착용하고 분장을 해야 했다.
다행히 반응은 좋았다.
이미 중국의 북경과 상해 등 여러 도시에서 성공적으로 팬 미팅을 개최하며 리슈잉은 내내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첫 해외 팬 미팅인 한국에서 이런 일이 발생할 줄은 몰랐다.
‘팬이 행사에 와서 배우를 안 보다니.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뒤쪽에서 행사를 감독하고 있던 진행자가 사회자에게 인이어 마이크로 속삭였다.
‘아니, 저 사람들은 도대체 여기에 뭐하러 온 거야? 배우가 기분 나빠하잖아. 저 사람들 치울 수 없어?’
사회자는 무대 뒤쪽에 눈길을 힐끔 주며 손짓으로 신호를 보냈다.
저들이 칼을 들고 난입한 것도 아니고, 행사장에서 소란을 피운 것도 아니다.
미소를 짓고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며 가져온 음식을 먹고 있을 뿐이다.
그 가져온 음식이 엄청나게 화려하고 멋있는, 검 모양의 케이크라는 점이 특이하긴 하다.
통역사가 소리 높여 외쳤다.
“제갈책 역할의 리슈잉 배우님이십니다! 박수로 맞이해 주세요!”
“와아!”
팬들은 신호라도 받은 것처럼 일제히 움직였다.
제각각 준비해 온 보랏빛 야광봉을 잡아 V 모양으로 쭉 떨어뜨렸다가 다시 들어 올렸다.
단 두 사람만이 그 행동을 하고 있지 않았다.
무대 앞에서 팬들을 바라보고 있던 리슈잉의 입가가 살짝 떨렸다.
그는 소리를 지르거나 화를 내지 않았다. 그저 시무룩해졌을 뿐이다.
「한국에 계신 팬 여러분 만나서 반갑습니다.」
연기자는 무대에서 표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는 일생의 친우를 만난 것처럼 반갑게 인사하고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임진혁은 주변 사람들이 다 같이 보랏빛 야광봉을 흔드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가방 안에 미리 준비해 왔다고 해서 굳이 보라색 야광봉을 흔들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았기에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반면에 김동진은 케이크의 맛에 홀려 있었다.
“형, 이거 진짜 최고예요.”
“구체적으로 얘기해봐.”
“드라이 화이트 와인은 따로 끓인 거죠? 향만 남기고 완전히 다 날아가게 한 거고요. 이 다크 초콜릿과 로즈마리 크림 자체만 따로 식히고 굳혀서 디저트로 내도 될 것 같은데.”
그는 입가에 크림을 묻히고 정신없이 말했다.
“진짜 최고예요. 이거 진희 사장님도 맛보셨어요? 맛보면 메뉴 가지고 오고 싶다고 하실 거 같은데.”
“거기에는 안 어울려. 이거 건강에 좋은 메뉴는 아니거든.”
“장뇌 향은 건강에 좋다면서요?”
“로즈마리에서 일부러 장뇌 향이 잘 드러나도록 초콜릿을 훨씬 더 다크한 걸로 썼어. 카페인 함유량도 많고 지나치게 달지. 정백당도 몇백 그램씩 들어간다고.”
“음, 확실히 진희 사장님이 추구하는 스타일의 빵은 아니네요.”
“그래. 거기는 디저트 가게가 아니라 매일매일 먹어도 건강에 좋은 식사 빵을 파는 가게로 나가기로 했잖아. 맛있다고 해서 아무거나 들여놓으면 그 목표 자체가 흐려지지.”
“으앗! 형, 지금 저 야광봉 흔들었어야 했는데.”
“아직 그 여배우 안 나왔다.”
“다행이다.”
김동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손으로는 계속 케이크를 퍼먹으며, 잠시 시선을 떼고 무대를 흘깃 바라보았다.
“또 남자네. 소당주님은 언제 나온담.”
도산검림 역할을 맡은 배우, 장춘이 앞으로 나섰다.
「반갑습니다.」
그는 리슈잉처럼 시무룩하거나 실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재미있다는 듯이 진혁을 바라보았다.
‘흥미로운데. 저 케이크도 가까이에서 보고 싶고.’
진혁은 그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뭐야, 저놈은?”
“소교주 평상복을 입고 있잖아요. 딱 보면 도산검림이구만.”
진혁이 짧게 평했다.
“약한 주제에 여기를 왜 쳐다보고 있는 거지.“
주막에서 시선을 준다는 것은 시비를 거는 것과 똑같은 일이다. 어느 정도 무공에 자신이 있는 자가 아니라면 실례되게 타인의 식사를 관찰하지 않는다.
눈이 있어도 고개를 들지 않고 귀가 있어도 못 들은 척하는 것이 강호의 예의다.
동진이가 조그맣게 속삭였다.
“…어, 형. 지금 이렇게 특이한 케이크를 갖고 와서 먹고 있는데 안 쳐다보면 그게 더 이상한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