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49화
김도을과 이재희는 제과제빵 방송을 통해 임진희가 가게를 개업했다는 소식을 알렸다.
입지가 좋기도 해서 조금씩 사람이 모이기 시작했다.
이제 개업한 지 보름, 아직 손익분기점에 도달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전화 통화를 통해 걱정하는 딸을 위로해 주었다.
“그 정도면 아주 양호한 거다. 다음 달 되기 전에 흑자가 날 거야.”
“그런 거예요? 지금 진혁이 돈 까먹고 있는 것 같아서 걱정인데.”
“아니야, 내가 처음에 가게 열었을 때도 6개월은 이익이 안 났어.”
“진혁이는 오픈하고 한 달 만에 바로 흑자였다던데요.”
“그건 걔가 이상한 거야. 진짜 특이한 케이스라고. 처음에 H & J는 입지도 좋은 데다가 원래 맛없기로 유명했는데 거기에 진혁이가 새로 빵을 가져오면서 화제를 몰고 시작했잖아.”
“그러고 보니 그랬네요.”
진희는 전화를 끊었다. 며칠간 걱정 때문에 잠을 설쳐서 눈 밑에는 그늘이 짙다. 거울에 비친 얼굴을 보며 그녀는 한숨을 삼켰다.
‘잘 되고 있는 거야.’
얼마 전에는 제빵 잡지에 실리기도 하는 둥, 가게는 점차 궤도에 올라가고 있다.
진혁은 벌써 <해와 달>의 3호점을 맡을 사람을 찾았다고 말했다.
이 상태로라면 4호점, 5호점이 생길 날도 머지않았을지도 모른다.
“내가 더 잘 해야지.”
진희는 찬물로 세수를 했다. 차가운 물이 얼굴에 끼얹어지자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모든 일이 잘 될 것만 같다.
그때 스마트폰에 메시지가 왔다.
“푸핫.”
메시지에 첨부된 사진을 보고 그녀는 그만 소리 내 웃어버렸다.
“별로 기대 안 한다며.”
◈ ◈ ◈
두 사람은 특별 주문한 아이스박스에 담긴 케이크를 SUV의 뒷좌석에 실었다.
트렁크에는 들어가지 않을 크기다.
특별히 부른 밴 형태의 택시 기사는 목적지를 확인하고 운전을 시작했다.
“그럼, 강남에 있는 K 호텔로 가시는 게 맞습니까?”
“예.”
“알겠습니다.”
기사가 출발하면서 동진이 들떠서 말했다.
“<천마> 팬 미팅에 저를 데려가 줘서 고마워요, 진혁이 형. 진짜 형밖에 없어요.”
팬 미팅 참가 티켓은 1인용이 아니라 2인용이었다.
누구와 함께 갈지는 처음부터 결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드라마의 열렬한 팬인 김동진이 옆에서 눈을 빛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백진영 역시 은근히 가고 싶은 의사를 내비쳤기 때문에 동진이는 살짝 마음고생을 했다.
그런데 갑자기 진영이 바리스타협회 교육에 초빙되어 가면서 자연스럽게 김동진이 팬 미팅에 같이 가게 되었다.
“그래.”
진혁은 입을 다물고 바깥을 바라보았다.
평소와 달리 차체가 높은 SUV를 타자 보이는 풍경이 조금 다르다.
동진은 스마트폰으로 방금 찍은 사진을 확인하고 있었다. 진혁이 물었다.
“아까 케이크 찍은 사진은 누구한테 보낸 거야?”
동진이 활기차게 대답했다.
“진희 사장님이요! 요즘 기운이 좀 없는 것 같아서 웃겨 주고 싶어서요.”
“이걸 보고 왜 웃어?”
“분명히 웃을걸요.”
그는 방금 찍은 사진을 다시 확인했다. 사진에 담겨 있는 것은 어린아이의 키만 한 장검이었다.
원래 실제 크기는 성인 여성의 키에 가깝지만, 진혁은 일부러 크기를 줄였다.
검집은 실용적이라기보다 예식용에 가까웠다. 초콜릿색 검집 위에는 승천하는 금빛 용이 양각으로 새겨졌는데 입에는 수정처럼 빛나는 투명한 구슬을 물고 있다.
검집의 끝까지 감고 있는 꼬리는 살짝 양각되어 있을 뿐이지만 검대에 걸릴 고리 부분을 지나면서부터는 그림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조각되어 있다.
그래서 머리와 뿔, 수염 그리고 송곳니가 드러나 물고있는 여의주까지 모두 완전히 입체적이다.
검집에서 꽂혀 있는 검은 손잡이만 보이는 것이 아니었다.
명대에 등장할 유엽도처럼 검날을 두 줄로 파놓은 혈조는 진혁이 아이디어를 냈던 것이다.
보통 유엽도는 70cm 정도의 길이지만 그는 일부러 특별히 창처럼 긴 칼을 만들어 썼다.
당대의 대장장이 중 명인이라 할만한 이가 몇 년에 걸쳐 운철을 단련해 만들었던 특별한 검이다.
반면에 손잡이는 화려한 검집에 비해 상대적으로 단순했다.
은빛으로 빛나는 손잡이에 검은 천을 칭칭 감아놓은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저 검은 가림천은 인면지주의 독에 젖은 거미줄을 베처럼 짜서 만든 특별한 것이라, 만독불침의 몸이 아니라면 잡을 수조차 없다.
진혁은 드라마에 애정을 담아 ‘일월검’이라 불렀던 검 모양 케이크의 사진을 다시 보았다.
“형이 팬 미팅에 관심 없다, 없다 하더니 이런 걸 만들어 왔잖아요. 사실은 엄청 기대하고 있으면서. 천마수라검은 아직 드라마 본편 내에 등장하지도 않았는데 얘기만 듣고 이 정도로 만들다니 정말로 대단해요. 하여튼 손재주도 좋고 상상력도 좋은 형이라니까.”
소풍 가는 것처럼 들떠 있는 김동진을 보니 진혁은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좋냐?”
“당연히 좋죠! 형도 엄청 신나 있잖아요. 이렇게 엄청난 걸 주문도 받지 않고 만들었으면서. 분명히 어제까지만 해도 없었잖아요. 사실대로 말해봐요, 밤새운 거죠?”
“그런 너야말로 밤새운 거 아니야?”
“말하는 건 괜찮은데 오랜만에 중국어로 글 쓰려니까 죽겠더라구요. 은소화 님한테 쓴다고 생각하니까 글씨도 예쁘게 써야겠고 문법도 틀리면 안 되고.”
“그 친구들하고 계속 메시지 주고받는다며.”
“그놈들하고 은소화 님하고 같나요, 어디.”
“은소화 님?”
“환희당의 소당주 말이에요. 황려권의 딸.”
진혁이 웃었다. 누구한테 편지를 그렇게 쓰나 싶었는데 결국 여배우에게 쓰는 모양이다.
“아, 걔.”
“걔라니요! 요즘 얼마나 잘 나가는 배운데요. 10대인데도 연기 천재라고 하잖아요. 처음에는 인맥 빨 때문에 캐스팅된 거라고 말이 많았는데 지금은 아무도 그 얘기 안 해요.”
“무슨 인맥?”
“지금 이 드라마가 소설 원작이잖아요. 그 원작자님 딸이래요.”
진혁이 눈썹을 추켜올렸다.
“그 배우도 오늘 팬 미팅에 오나?”
“그럼요! 지금 완전 히로인 역할이잖아요. 그래서 제가 오늘 꼭 가고 싶어서 진희 사장님한테 얼마나 사정사정해서 온 건데요.”
“결국 혜정이랑 당번 바꾼 거잖아.”
“그렇지만 결국 그것도 진희 사장님이 허락해서 가능한 거니까요.”
동진이 킥킥 웃었다.
“형 별로 관심 없다고 갈지 말지 고민한다더니 이렇게 빡세게 준비해서 가는 거 봐요. 그냥 솔직하게 인정해요.”
“뭘 인정해.”
“<천마> 드라마 좋아한다고요. 아니 그런 케이크까지 만든 이상 이제 부정할 수 없을걸요. 내가 오늘 야광봉도 형 것까지 다 챙겨왔어요.”
쇼핑백에 든 4개의 야광봉을 꺼내 보이며 김동진이 진지하게 말했다.
“보니까 형이 제갈책 좋아하는 거 같아서 내가 형 거는 보라색으로 두 개 준비해 왔어요. 걔가 요새 의리파 됐다고 남팬이 많다고 하니까 이상하지는 않을 거예요.”
“보라색이랑 제갈책이 무슨 상관인데?
팬질에도 덕질에도 아무 관심이 없는 임진혁을 보면서 김동진이 한숨을 쉬었다.
“걱정하지 말아요, 형. 아무것도 몰라도 괜찮아요. 내가 다 가르쳐 줄 테니까.”
“아니… 괜찮아.”
진혁이 고개를 저었다. 그는 특별히 이런 것들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누군가가 그처럼 환생했을지 궁금했을 뿐이다.
“원래 그런 데 가서 다 같이 흔들면서 배우는 거예요. 저도 처음에는 아이돌 콘서트 가는데 왜 이런 걸 가져가야 하나 싶었는데 가보니까 진짜 분위기가 다르더라구요. 다 같이 뭔가 하나가 되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한 달 반 동안 진희와 함께 일하면서 동진이와도 꽤 가까워졌다. 처음에는 거리를 좀 두는 것 같더니 어느샌가 자연스럽게 형이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다.
“그 사람들 사이에서 형이 가져온 조공품이 진짜 최고로 꼽힐걸요. 직접 만든 음식이라고 해도, 이 정도 수준은 없을 거예요.”
“특별히 최고로 꼽혀야 할 이유는 없어. 그냥 심심해서 만든 거니까.”
“심심해서 만든 게 이런 수준이라니….”
검 모양의 케이크를 만든 데에도 특별한 의미는 없었다. 김동진이 오해한 것처럼 너무나 신나고 즐거워서 기대되는 마음에 조공품을 만든 것이 아니다. 그저 오랜만에 옛 생각이 나서, 한시도 손에서 떼놓지 않았던 애검을 그려 보았다.
금속세공가였다면 철검을 제련했을 것이고, 떡을 빚는 이였다면 칼 모양의 떡을 구워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제과제빵사니까 제일 익숙한 재료로 만들었을 뿐이다.
일월검을 케이크로 만들면서 즐거웠다.
단지 그뿐이다.
호텔에 도착한 후 바퀴가 달린 카트를 빌려 케이크를 옮기고, 두 사람은 행사장으로 향했다.
“<천마> 팬 미팅에 참석하시는 분입니까? 에메랄드 홀은 이쪽으로 오시면 됩니다.”
고작 이백여 명의 손님들이 참석하기에는 넓은 장소였다.
스와로브스키 크리스탈 샹들리에가 휘황하게 번쩍이는 넓은 공간은 평소에는 결혼식용으로 사용될 것처럼 보였다. 넓고 화려한 무대 위에는 이미 사회자가 올라와 있었고, 한쪽 구석 테이블에는 사람들이 미리 제출한 선물이 놓여 있었다.
김동진이 소곤거렸다.
‘선물은 미리 모았다가 따로 개봉한대요.’
‘특별히 선물은 아닌데.’
‘그럼 주려고 가지고 온 게 아니었어요?’
‘내가 여기서 먹을 건데.’
‘아니, 형, 그건 아니죠.’
김동진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배우들한테 주고 싶어서 가져온 거잖아요.”
“외부 음식 반입도 된다고 했잖아. 여기서 너랑 같이 먹고 싶어서 가져온 거라고.”
진혁이 다시 한 번 말하자 동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 그거 진짜 이상해요… 형….”
동진은 몇 번이고 설득하려고 했다. 하지만 임진혁은 트레이 아이스박스에서 케이크를 꺼내어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행사장 안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그 테이블로 향했다.
“저건 뭐야? 공식 굿즈인가?”
“아이스박스에서 나온 걸 보면 얼음 조각이야?”
“진짜 멋있다.”
“오늘 행사해서 선물 준다던데 저것도 주는 건가?”
시선을 빼앗긴 것들은 일반 참가한 팬들만이 아니었다. 행사를 진행하기 위해서 앞에서 마이크를 들고 있던 사회자 역시 갑자기 구석 테이블에 나타난 케이크에 눈길을 주었다.
“지금 저쪽에서 꺼낸 저건 뭡니까? 오늘 행사에 쓰려고 특별히 주문한 건가요?”
“팬이 개인 지참한 물건으로 보입니다.”
“그럼 배우에게 선물하려는 건가?”
“선물 제출할 때 따로 내지 않은 걸 보면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만.”
“아니, 저런 걸 가져와서 그냥 자기들끼리 먹는다고?”
사회자가 어이없어하며 말했다.
“자신에게 관심을 갖게 하려는 수작인가?”
“어디 외부업체에 맡겨서 부탁한 것으로 보이는데요.”
“그런데 지금 우리가 만든 천마수라검보다 모델링이 더 좋아 보이잖아. 피규어는 아니겠지?”
“아이스박스에서 꺼낸 걸 보면 얼음 조각 같은데요.”
외부에서 하는 이야기들은 무시한 채 임진혁이 빙긋 웃었다.
“이거 네가 전에 말했던 초콜릿과 로즈메리 크림으로 만든 건데, 정말로 안 먹어 볼 거야?”
“설탕공예가 아니고요?”
“여의주만 설탕이야.”
“드라이 화이트 와인하고 레몬즙, 그리고 더블 크림을 베이스로 넣는다던 그거요?”
김동진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럼 먹어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