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48화
한 달이 지났다.
새 가게를 오픈하기 전날이다.
진희는 최종적인 점검을 위해서 가게에 갈 예정이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부산하게 준비하는 진희를 보면서 임진혁은 새로 얻은 가게의 위치를 떠올려보았다.
‘지금 출발하면 30분쯤 걸리려나.’
명동역에서 걸어서 그리 멀지 않은 위치에 있는 가게는 진혁이 민병철을 통해 소개받은 곳이었다.
‘이 정도는 나쁘지 않지.’
임진혁은 깃털처럼 연약하고 체력이 약한 진희를 위해 많은 것을 고려했다.
일부러 땅값 비싸고 치안이 좋고 경찰서 근처에 있는 부지를 선정했다.
애초부터 무리하지 않고 일할 수 있게 함께 일할 페이스트리 쉐프를 둘이나 데리고 시작하게 하기도 했다.
“가게 점검하는데 같이 가자.”
진혁은 벽시계를 올려다보았다.
“어제는 혼자 가도 된다며?”
“너 바쁘니까 나 혼자 가서 본다는 거였지. 그런데 나만의 가게가 아니잖아. 사실 너도 본사 사장님이고 투자자고 하니까 같이 가서 확인하는 게 맞는 것 같아.”
“그래.”
어차피 몰래라도 따라갈 생각이었던 진혁이 쉽게 수긍했다.
두 사람은 명동역까지 지하철을 타고 이동했다.
“벌써 내일이면 가게를 연다니 너무 긴장돼.”
진희가 중얼거리자 진혁이 고개를 저었다.
“시작하면 몇 달 동안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거야. 동진이나 혜정이도 신입이니까 더 그렇고.”
진혁은 좀 더 유능한 다른 제과제빵사를 붙여주고 싶었는데 임진희가 그 둘을 고집했다.
보육원에서 하는 추가노동을 하지 않게 된 동진이는 급격하게 솜씨가 좋아졌고, 제대로 된 케이크나 과자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혜정이는 원래 제과제빵 관련 대학에 진학할 계획이었는데 언니랑 같이 일하고 싶다며 따라오기를 자청했다.
진희는 자신처럼 경력이 짧은 사람과 같이 배우고 성장하는 게 낫다고 말했다.
“나보다 연차 높은 사람이 후배로 들어오는 것처럼 무서운 일도 없다니까.”
“잘 아는 사람에게 배우는 게 낫지 않나?”
“너도 와서 봐줄 거고. 뭐가 걱정이야?”
“그건 그렇지.”
가게 앞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임진혁이 미간을 좁혔다. 인기척이 있었다.
‘가게 안에 사람이 너무 많아.’
아직 영업을 시작하지도 않은 가게인데 도둑이 들었을 리는 없다. 동진이나 혜정이가 미리 와 있을 수는 있지만 이렇게 열 명이 넘게 모여있을 리는 없다.
‘주방기기나 제과제빵용품들은 옮기기 무거운 물건이니 도난당할 리는 없다고 해도….’
진혁은 안쪽에 누가 있는지 깨달았다.
그들은 전부 익숙한 사람들이었다.
혹시 몰라 임진혁은 앞으로 한 걸음 나서며 자신의 몸으로 진희를 가렸다.
“축하합니다!”
폭죽에서 조각조각 색종이가 쏟아져나오며 비처럼 내렸다.
진혁은 옆으로 한 걸음 비켜서 색종이들을 피했다.
반면에 진희는 그 색종이의 비를 그대로 맞았다.
머리카락과 이마, 콧잔등에 붙은 색종이를 손등으로 쓸어 치우며 진희가 미간을 좁혔다.
“오늘 우리 생일 아닌데.”
“예? 6월 25일 아니에요?”
진희는 가게 안을 바라보았다.
어저께 왔을 때까지만 해도 없었던 아기자기한 실내장식들이 추가되어 있다.
상아색 실크 벽지를 바르고 원목 가구를 써서 북유럽풍으로 실내를 꾸몄다.
진혁이 세상에 이상한 사람이 많다며 격렬하게 반대해서 오픈 키친을 하지는 못했다. 주방은 안쪽에 따로 있다.
빵 진열대가 양쪽에 쭉 늘어서 있다.
손님이 와서 앉아 있을 수 있는 테이블과 의자는 별도로 마련하지 않았다. 대신 스탠딩 바에 가까운 탁자가 창가에 하나 설치되어 있다. 음료가 나오기를 기다리는 이들이 잠깐 머무를 만한 장소다.
진희는 건강에 좋은 식사용 빵과 그린워터 샌드위치를 팔 수 있는 가게를 원했다.
임진혁은 진희가 불특정 다수의 손님에게 하루 장시간 노출되지 않기를 바랐다.
두 사람의 의견을 전부 반영해 테이크아웃 형 빵집 매장이 완성되었다.
지금 앉아있을 곳 하나 없는 그 공간에 사람들이 빽빽하게 서 있었다.
천장에는 무지개 색깔별로 헬륨 풍선이 둥실둥실 떠 있고, 벽은 파랗고 빨갛게 묶여있는 리본으로 장식되어 있다. 그리고 A4 용지에 글자를 하나씩 출력해서 이어 만든 장식이 벽에 붙어있었다.
[임 진 혁 희 생 일 축 하]
두 사람의 이름이 멋대로 합쳐져 있다. 그 종이를 본 진희가 헛웃음을 지었다.
“오늘 우리 생일 아닌데. 누가 6월 25일이라고 했는데?”
김가영과 백진영, 혜정이와 김동진. 네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최종적으로 다들 바라본 사람은 백진영이었다.
모처럼 공방에 휴가를 내고 멀리서 온 김가영이 괴상한 표정으로 남자친구를 바라보며 입술을 오물거렸다.
‘뭐라고 말 좀 해봐.’
백진영이 머쓱하게 말했다.
“내가.”
“누가 그랬는데?”
“삼촌이 6월 25일이라던데.”
“그건 우리 아버지 생신인데? 그것도 음력이야.”
그렇지 않아도 진희가 잊지 말라고 여러 번 언급했던 터다. 다음 달 아버지 생일 즈음에 맞추어 서울로 모셔서 식사를 대접할 계획이었다.
“하하하하.”
혜정이가 어설프게 웃었다. 김동진이 손을 번쩍 들었다.
“그러면 제가 만든 아몬드 레드벨벳 케이크를 맛보는 날로 하죠.”
“그냥 아예 개업 축하로 바꿉시다.”
백진영은 뻘쭘하게 생일이라고 쓰여 있는 종잇조각을 하나둘씩 떼어냈다. 김가영이 반대쪽에서부터 종이를 떼는 것을 도왔다.
가영이 옆에서 조그만 목소리로 구박하는 소리가 다 들렸다.
“오빠는 어쩌면 그렇게 큰 실수를 할 수가 있어?”
“내가 한 건가, 삼촌이 한 거지.”
“지금 여기에 있는 사람들이 다 그것 때문에 모였는데 말이야. 난 일 년에 한 번밖에 없는 휴가를 썼는데 다음에 진혁 쉐프님 진짜 생일일 때는 못 오잖아.”
“아니, 그러면 넌 내 생일일 때는 안 올 셈이었어…?”
백진영이 쩔쩔매면서도 질문하는 것을 들으며 진혁은 키득 웃었다.
“어쨌든 생일은 아니니까, 진희네 빵집 오픈하는 걸 축하하는 자리로 하지.”
“그래요!”
서프라이즈 생일 파티처럼 준비했던 작은 모임은 진혁의 제안을 통해 가게 창업을 축하하는 스탠딩 파티로 바뀌었다.
“진희 누나, 진짜 축하해요.”
김동진이 직접 준비해서 가져온 핑거 푸드 트레이를 내밀었다.
그것은 언뜻 보면 베이컨 아스파라거스 말이처럼 보였다.
“이야, 아스파라거스 말이 잘 만들었네?”
혜정이가 감탄하며 입안에 넣었다. 그리고 눈을 크게 떴다.
“이건 베이컨도 아니고 아스파라거스도 아니잖아?”
동진이 신나서 말했다.
“히히. 아니지롱!”
“뭔데?”
“미니 말차 초콜릿 케이크요.”
“이야, 잘 만들었네.”
베이컨처럼 만들어 놓은 것은 달콤하기 그지없는 퐁당이고, 안쪽에는 말차 초콜릿 케이크가 들어있다. 원래 맛있게 만드는 녀석이긴 했지만 이 정도로 디테일하게 재현하지는 못했다.
백진영이 감탄했다.
“이거 멀리서 보면 감쪽같다. 왜 그, 진혁이가 디저트 서바이벌 쇼에 나왔을 때 별 기기괴괴한 걸 다 정교하고 세밀하게 재현해놨잖아. 좀 그거 따라가고 있는 것 같은데.”
“형이 많이 가르쳐줬어요. 그냥 시간 들이면 잘 나오더라구요.”
“아니야, 다른 사람들은 시간 들여도 그렇게 안 나와….”
제과제빵에는 자신이 없는 김가영이 중얼거렸다.
반면에 혜정이가 준비해 온 것은 좀 더 평범한 빵이었다.
“별건 아니구요. 다들 배고프실 것 같아서 만들어 왔어요.”
하얀 식빵에 잘게 썬 햄과 치즈를 한 장씩 집어넣은 얇은 샌드위치다.
“이건 대만식 샌드위치 따라 한 건가?”
“맞아요. 그런데 소스 맛이 안 나서 제가 생각했던 거랑은 좀 다르게 나왔어요.”
샌드위치를 한 입 베어 문 동진이가 참견했다.
“설탕을 너무 많이 넣어서 그래.”
혜정이 시무룩해졌다.
“맛없어?”
“음, 어디를 개선하면 될지 명확히 보이는 단점이 하나 있으니까. 그건 좋은 거야.”
진희가 혜정이를 위로했다.
“그 단점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친구가 옆에 있다는 것도 좋은 거고.”
“알았어, 고마워.”
진혁은 그런 임진희를 흐뭇하게 지켜보았다.
‘애가 사람 다루는 건 잘 해.’
다 같이 샌드위치와 미니 케이크를 나누어 먹었다. 김가영이 진희에게 조그만 상자를 주고서, 진혁에게는 작은 봉투를 내밀었다.
“이거는 진바라기에서 보내는 생일 선물이에요.”
“가영 씨가 왜 그런 걸 챙겨?”
“지숙 언니가 부탁했거든요.”
진혁이 붉은색을 좋아한다고 했던 것을 기억하는 듯, 새빨간 봉투에 금박으로 글씨가 박혀있었다.
진혁이 떨떠름하게 물었다.
“생일이 아닌데도 괜찮을까?”
“이건 어차피 이 날짜 맞춰서 드려야 했던 거라 괜찮을 거예요.”
그것은 이번에 방한하는 드라마 <천마>의 팬 미팅 티켓이었다.
김동진이 흥분해서 말했다.
“우와! 이거 선착순 100명 선발했던 거잖아요. 이걸 어떻게 구하셨대?! 돈이 있어도 못 구한다고 하던데.”
임진혁이 미간을 좁혔다.
“팬 미팅?”
“형이 드라마 엄청 좋아하잖아요. 배우들 방한해서 사인도 해주고 후일담도 얘기하고 그런대요.”
“아니, 정말로 관심 없는데.”
진혁은 무협 드라마의 배우들에게는 관심이 전혀 없었다. 드라마 자체의 내용이 어떻게 흘러갈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있지만, 그것은 특정 배우에 대한 개인적인 호감이 아니었다.
그들은 진혁에게 있어 우상화된 무언가가 아니라, 자신의 옛 추억을 어설프고 우스꽝스럽게 재현해내고 있는 부족한 인물들이었다.
광안마는 제갈책 배우보다 더 하얗고 비쩍 말랐으며 키가 작았다. 조그만 녀석이 눈에 독기를 담고 돌아다니면서 여기저기서 호통을 쳤지.
혈도객은 조금 더 덩치가 컸다. 외공을 익힌 것도 아닌데 등빨이 좋아서 사람들이 내공의 고수가 아닌 외공의 고수라고 오해를 했다.
정보를 탐색하기 위해 완전히 낯선 사람들이 하는 연극을 보고 있을 뿐이다.
지금 와서는 그가 알고 있었던 것과 전개가 달라지면서 방향 역시도 예측할 수 없게 되었다.
정말로 누군가 낯선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그렇게 구하기 힘든 티켓이라고?”
“네, 이거 선착순으로 DVD 프리미엄 한정 패키지 산 사람 중에서 응모한 사람들만 갈 수 있는 거잖아요. 100개를 사도 당첨 안 됐다던 사람들이 한둘이 아닌데.”
“그 한정판 패키지만 해도 십만 원이 넘는데 그걸 어떻게 100개를 사?”
“설마 정말로 백 개를 샀겠어요. 말이 그렇다는 거지.”
정지숙은 정말로 백 개를 샀을지도 모른다.
원치 않는 신세를 지게 된 진혁이 인상을 찌푸렸다. 진희가 관심 있게 티켓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팬클럽에서 왜 이걸 구해서 선물로 줬는지는 알겠다.”
“왜?”
“넌 케이크 말고 좋아하는 게 없잖아. 관심 있는 것도 없고. 그렇다고 너한테 케이크를 선물할 수도 없으니까.”
“넌 전에 했잖아.”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이왕이면 좋아하는 거, 기뻐할 만한 거로 주고 싶은 게 사람 마음이잖아.”
“구하느라 진짜 고생했겠는데.”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다고 전해줘.”
“진희 누나 선물은 뭐에요?”
“나까지 챙겨줄 건 없는데.”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환한 표정으로 진희가 작은 상자의 포장을 풀었다.
“진주 귀걸이야?”
“이건 제과제빵사로 일하면서도 계속할 수 있는 액세서리니까.”
“언니 미인인데 별로 안 꾸며서, 제가 골라 봤어요.”
혜정이가 수줍게 얘기했다.
“비쌌을 텐데.”
“돈은 저희가 다 같이 모았어요.”
“고마워.”
진희가 동진이와 혜정이, 김가영과 백진영을 돌아보며 말했다.
“정말로 고마워. 내일부터 좋은 가게가 되도록 잘 하자.”
“그래!”
“그래요.”
작은 파티가 마무리되어가며 김동진이 자연스럽게 드라마 이야기를 꺼냈다.
“형 있잖아요. 진짜 미래를 보는 능력이라도 있는 거 아니에요? 애들이 완전 야단이에요.”
“뭐가?”
“배경 소림사 건도 그렇구요. 무공을 잘하게 될 거라고 그랬잖아요, 착한 애가 될 거라고.”
진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건 보면 보이잖아.”
백진영이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어. 걔는 처음에 아무리 봐도 조조 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고.”
“조조 과?”
“전통적인 협객 히어로가 아니라 안티 히어로 과에 가깝다고 해야 하나? 오히려 비극적인 운명을 타고나 운명에 저항하는 캐릭터 말이야. 배트맨이라고 하기엔 좀 멀리 나갔고, 오히려 조커라고 해야 하나.”
“호구 잡히는 게 아니고 자기 잇속 챙길 거 다 챙기면서 생존을 위해 발버둥 치는 그런 거 말이야?”
진희도 대화에 끼어들었다.
“요즘 인기는 좀 있는 것 같긴 하더라. 착하고 남들이 이것저것 해달라는 거 다 도와주면서 호구 잡히는 것보다는 낫다고 그러던데. 난 그래도 그런 애들보다는 착하고 정의로운 기존 주인공이 좋았거든.”
“아니, 진희 누나가 최신편을 못 봐서 그래요.”
“그래? 요즘은 어떤데?”
“아이돌 빠순이 같아요.”
“큭.”
진혁은 그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아니, 그 제갈책이 아이돌 빠순이라니 무슨 소리야. 뭐 야광봉이라도 흔들어?”
“비슷해요. 진짜 사람을 믿기 시작하더니 엄청나게 변하는 게 진혁이 형 예언이랑 똑같다니까요.”
백진영이 물었다.
“진혁이가 무슨 예언을 했는데?”
“진영이 형도 같이 들었잖아요. 쟤가 사람을 못 믿어서 그렇지 사실은 착한 애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