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46화
수다를 떨면서 드라마를 보다 보니 어느샌가 새벽 시간이 되었다.
앞편을 보지 못한 백진영은 중간중간 지나간 옛 에피소드의 사건들을 물어보면서 내용을 따라갔다.
언뜻 보면 어두워 보이는 내용이지만, 초반에 어둡고 비장했던 시작과는 달리 중간부터는 연출 자체를 가볍고 즐거운 풍으로 하고 흥겨운 음악을 깔았다.
18화에서 변장한 제갈책은 무림맹을 향해 홀로 북상하였다. 시청자들에게 알려주지 않은 어떤 정보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쟤는 거지같이 변장한 것보다 귀티나게 하는 편이 더 어울려.”
“원래 귀한 집 아들이잖아요.”
부유한 문사 집안의 학사 송문기로 변장한 제갈책은 하오문의 지부인 고급 기루에서 여아홍을 주문한다.
“저자가 송씨 집안의 귀한 장남이라고? 그렇다면 이 정도는 금방 알아보겠군.”
하오문의 지부장 방정은 제갈책이 정말로 송문기인지 아닌지 의심하여, 가짜 여아홍을 내놓는다.
하지만 제갈책은 속지 않았다.
제갈가의 방계로 귀하게 자랐던 그는 입맛이 까다롭고 한 번 먹어본 것은 잊지 않는 미각을 갖고 있었다.
어렸을 적 아버지의 여아홍을 훔쳐 마신 적이 있었던 제갈책은 어렵지 않게 여아홍이 가짜라는 사실을 파악하고 상대를 추궁한다.
방정은 자신의 꾀에 빠져 송문기가 진짜라고 믿고, 그에게 정보를 건네준다.
그것은 송문기가 실은 무림 맹주 남궁소천의 친자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문서였다.
박진감 넘치게 진행되어 가는 중, 백진영이 중얼거렸다.
“나도 한 번 마신 커피는 맛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왕이면 재현할 수 있으면 더 좋구.”
진혁이 웃었다.
“신비감이 없어져서 불편할지도 모르지. 뭘 먹을 때 어떻게 하면 이걸 만들 수 있는지 다 분석할 수 있으면 시시하지 않을까.”
“한 번 맛본 걸 기억하고 구분할 수 있는 거랑 뭐랑 뭐가 들어있는지 구분할 수 있는 건 다른 일이잖아요?”
“음.”
“저도 한 번 먹은 건 기억하는데 그렇다고 그걸 똑같이 만들 수 있는 건 아니거든요. 그리고 오히려 주눅이 들어요.”
“입맛이 예민하면 좋은 제과제빵사가 될 수 있을 텐데?”
“사실 요새는 꼭 반드시 그런 것도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자꾸 들거든요.”
동진이 풀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왜?”
“제가 만든 게 솔직히 맛이 없어서….”
제과제빵 실력을 인정받아 학원에 스카웃되어 온 소년이 말을 흐렸다.
“흠.”
진혁은 잠시 생각해 보았다.
“어떤 거하고 비교하고 있는데?”
“진혁 선생님이 만드신 거나, 주영모 원장님이 만드신 거는 진짜 맛의 차원이 달라요.”
백진영이 피식피식 웃었다.
“투자한 시간부터가 다르잖아. 지금 진혁이랑 네가 만든 케이크를 비교하면 안 되지. 지금 저기 나오는 소년도 봐. 실력이 없는데 처음부터 고수가 되려고 한다고 하다가 금방 좌절하잖아.”
예가 나빴다. 소년이 어두워진 표정으로 입을 다물자 백진영이 황급히 격려했다.
“계획은 구체적이고 실용적인 게 좋아. 너는 당장 내일 세계 최고의 제과제빵사가 되겠다, 이런 것보다 오늘 케이크를 한 개 굽고 어떻게 할 것이다, 이런 걸 할 때거든.”
틀린 말은 아니다. 진혁이 손을 내밀었다.
“눈 감아 봐.”
“예?”
느닷없는 말에 동진이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진혁이 미간을 좁혔다.
“눈을 크게 뜨라는 게 아니고, 감아 보라고.”
“엣, 네!”
김동진은 눈을 감았다.
그건 살포시 눈꺼풀을 내려 눈을 감는 것이 아니었다. 긴장한 나머지 있는 대로 얼굴을 찡그려, 모든 안면 근육을 다 사용해 얼굴을 일그러뜨린 모양이었다.
“푸하하핫! 그게 뭐야?”
백진영은 그만 웃어버렸다. 임진혁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입 벌려 봐.”
단순한 문장에서도 거부할 수 없는 위엄이 느껴졌다.
“?!”
영문을 모르는 동진은 파르르 떨었다.
‘내가 뭘 잘못한 건가?’
분명히 방금 전까지 드라마나 과자 따위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분위기가 좋았다. 하지만 지금은 자신이 뭔가 큰 잘못을 한 것처럼 느껴졌다.
그는 눈을 감고 입을 벌리라고 한 후에 할 만한 행동이 무엇인지 상상조차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더 두려웠다.
긴장해서 심장이 빠르게 뛰고, 그 소리가 귀에 쿵쿵 울린다.
“먹어 봐.”
“웁?!”
입안에 무언가 쑤셔 넣어졌다.
괴롭히려는 것처럼 거친 동작이 아니었다.
입안에 손수건을 밀어 넣은 후에 얼굴을 때리려는, 그런 종류의 행동이 아니었다.
오히려 손가락이 입안이나 입술 어디에도 닿지 않았다.
닿은 것은 단지 과자 조각뿐이었다.
바삭하고 달콤한 과자는 입안에서 사르륵 부서졌다.
겉에는 약간 끈적끈적한 것이 묻어 있다.
“이건 초콜릿 바나나칩이잖아요.”
저도 모르게 눈을 떠버린 소년이 조그만 목소리로 항의했다. 불안하고 두려운 마음은 황당함과 억울함으로 덮였다.
커다란 손이 눈을 덮었다.
“눈 감고 다시 맛봐.”
이번에는 두렵지 않았다. 소년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가, 입안에 들어오는 부드러운 맛을 느꼈다.
옆에서 백진영이 말했다.
“그건 방금 전과 완전히 똑같은 과자잖아? 왜?”
아니었다.
이번 과자는 아까 과자와는 달리 첫 번째 느껴지는 맛이 좀 더 느끼했다.
김동진은 스스로 눈을 꼭 감았다.
“음, 이거는 좀 달라요. 방금 것과 비슷하긴 한데 첫맛도 다르고.”
비슷비슷한 첨가제를 넣은 과자들은 자극적이고 맛이 강렬하다. 특히 특정 과자를 모방해서 나온 후기 과자들은 더 그렇다. 아예 대놓고 똑같이 따라 하려고 최선을 다한 물건들이기 때문에 구별하기가 쉽지 않다.
“구별 잘 하네. 이건 B사의 모방 상품이야.”
“비슷한 시기에 나오지 않았어? 뭐가 오리지널이고 어떤 게 모방인지 어떻게 구분해?”
백진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김동진이 중얼거렸다.
“이 과자가 겉에는 초콜릿이 발라져 있긴 한데 원래 포인트는 그게 아니거든요. 손가락보다 조금 작고 긴 모양의 과자가 안에 구멍이 숭숭 뚫려서 씹었을 때 바삭한 느낌이 드는 게 포인트에요. 그리고 거기에 표면의 초콜릿이 너무 눅진하게 녹지 않아야 하는데, 두 번째 과자는 그걸 제대로 따라 하질 못했어요. 구멍 크기가 너무 커서 좀 씹히는 맛도 덜하고, 초콜릿도 너무 싸구려를 썼구요.”
“모방한 게 더 좋은 재료를 썼을 수도 있잖아.”
백진영은 두 종류의 과자를 집어 들었다. 그는 한 입씩 먹어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거 둘 다 맛 똑같은데. 같은 거 아냐?”
진혁이 봉지를 흔들어 보였다.
“다른 거야. 이건 ‘초콜릿 바나나 레그’고 이건 ‘달콤 까망 바나나’야.”
“이거 제가 둘 다 아는 과자거든요. 달콤 까망이가 1년쯤 더 늦게 출시됐어요.”
“거참, 다시 봐도 신기하다. 네가 정말 미각이 예민하긴 해.”
백진영이 감탄하며 말했다. 김동진은 원망도, 두려움도 없는 눈으로 임진혁을 올려다보았다.
“솔직히 맞는 줄 알았잖아요.”
임진혁이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널 왜?”
소년은 이것저것 이유를 짜냈다. 하지만 무엇을 둘러대도 목이 턱 막혀왔다.
호의를 보여주며 보호자로서 책임진다고 하고서 이불까지 새것을 사주었다.
거기에 어떤 불순한 의도가 있는지 순간적으로 의심했다고 대답하다가 다시 쫓겨날까 봐 겁이 났다.
“갑자기 건방지게 임진혁 선생님처럼 되고 싶다고 했잖아요. 지금 아무것도 아닌데.”
진심을 일부 섞어서 대답한 그 말에 진혁이 피식 웃었다.
“당연히 그래야지.”
“예?”
“너는 맛이 어떤 식으로 구성되어 있는지 아주 민감하게 느껴. 그건 비단 타고 난 것만이 아니라, 환경적으로 다양하게 맛있는 음식을 접하면서 갈고 닦은 거지. 그렇기 때문에 지금 너 자신의 음식이 평범하고 부족하다고 느끼는 거야.”
맛있는 것도 먹어 봐야 안다.
진혁이 만든 것은 분명히 맛있지만, 그것이 어느 정도로 맛있는지 명확하게 깨닫고 그 이유를 설명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냥 “맛있다.”는 말을 듣기만 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이 녀석은 지금 아직 다 크지 않았다.
조금 더 제대로 키운다면 진혁에게 있어 분명히 훌륭한 지음(知音)이 되어줄 것이다.
그는 아까와는 다른 시선으로 소년을 바라보았다.
“너의 차이점이 뭔지 알겠어?”
“음.”
진혁이 간단하게 평가했다.
“볼 줄 모르는 놈이 욕심내는 건 만용이지만, 눈에 보이는 사다리를 오르고 싶어 하는 건 인간이라면 당연한 일이야. 너는 쟤보다는 오히려 제갈책 과에 가깝지.”
“윽, 그건 칭찬이 아닌 것 같은데요.”
질색했다.
“왜? 쟤는 나름 능력 있는 놈인데.”
진혁이 말했다.
“무공도 잘 하긴 하는데 악당이잖아요. 시작하자마자 사람 죽이고. 계속해서 사람들 배신할 궁리만 하고. 너무 이기적인 놈이에요.”
“무슨 소리야.”
진혁이 코웃음 쳤다.
“저 녀석은 무공이 쓰레기야. 하지만 보는 눈이 있어서 자기가 쓰레기인 줄은 알아. 그래서 근성을 갖고 열심히 노력하는 편이지.”
여태까지 별로 말이 없던 진혁이 길게 이야기하자 동진과 진영이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예?”
동진이 떨떠름하게 반문하고 백진영이 간단하게 평가했다.
“저놈이 노력파라고? 전혀 아닌 것 같은데. 당장 봐도 노력하는 모습보다는 다른 사람들이 가진 것을 빼앗으려고 하는 것밖에 안 보인다고.”
진혁은 백진영의 말에 상관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저래 봬도 자기가 한 번 신뢰한 사람은 죽을 때까지 믿는 놈이야. 누군가를 믿을만한 사람으로 판단하기까지가 오래 걸려서 그렇지.”
“아무리 봐도 그런 캐릭터는 아닌 것 같은데요…. 처음에 검림 나왔을 때 평생의 주군이니 어쩌느니 하면서 모실 것처럼 굴어서 책사 역할을 하려는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었잖아요. 사실은 후보 자격이 없는 자기가 인망 있는 사람 옆에 달라붙어서 다른 사람들을 회유하고, 세력을 만들어 자기가 소교주가 되려는 게 목적이고.”
“음, 그리고 그 와중에 절세 고수가 되려고도 하고. 죽인 사람도 백 명이 넘는 게 확실히 협객형 주인공은 아니야.”
캐릭터, 그리고 이야기.
드라마는 아직 거기까지 진행되지 않았다.
진혁이 천천히 말했다.
“여하튼 그게 중요한 이야기인 건 아니지. 너는 보는 눈이 있어. 그건 아주 큰 장점이다.”
“네.”
“화가는 자기가 볼 수 있는 만큼 그릴 수 있고, 가수는 들을 수 있는 만큼 노래가 부를 수 있다고들 하지. 그러니까 너도 지금 느끼는 맛을 네 목표로 삼고 연습하고 노력하다 보면 제대로 만들 수 있는 거야.”
“예.”
“슬슬 너희들도 내일 출근 준비해야지?”
시계를 본 백진영이 재촉했다.
“진혁이 너는 진희 씨네 가서 잔다며? 너무 늦었으니까 여기서 자고 가.”
사실 잘 생각이 없었다. 진혁이 침묵하자 동진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저 때문에 나가실 거 없어요, 선생님 집인데요. 그냥 주무시면 되는데요.”
“괜찮아.”
진혁이 빙긋 웃었다.
“진희가 걱정할 테니까 나는 들어가 볼게.”
적당히 진희 핑계를 대고 가게로 갈 생각이었다. 오늘 산더미 같은 과자를 하나씩 맛본 결과, 어떤 빵을 만들면 좋을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가게로 가서 빵을 조금 만들 생각이었다.
진혁은 동진에게 문을 열어주고 자리를 떠났다.
엘리베이터가 아닌 계단을 통해 내려가는 진혁에게 동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임진혁 선생님네 집안 말인데요.”
“응?”
“혹시 조폭이나, 뭐 이쪽 후계자인 거에요? 집안에 반발해서 제과제빵을 하고 있는….”
“무슨 소리야? 그냥 평범한 빵집 아저씨신데. 아주 좋으신 분이야.”
진혁은 그들에게 들리지 않게 피식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