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님의 베이커리-345화 (345/656)

제 345화

“결제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신용 카드 일시불로 해 주세요.”

‘이 손님은 진짜다!’

가전제품 매장의 판매원이 눈을 빛냈다.

젊은 남자 손님들이 전자 제품을 살 때는 보통 까다롭게 군다. 인터넷을 통해 확인한 모델명을 체크한 후 실제로 어떻게 생겼는지 구경한 다음에 바로 떠나가 버린다.

하지만 이 손님은 모델명이고 뭐고 따지지 않았다. 이것저것 살피며 어슬렁거리지 않고 바로 눈앞에 있는 물건을 골라서 사 버렸다.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한 20대임에도 불구하고 중년 이후의 이들이 하는 것과 비슷한 행동이다.

판매원은 도박을 걸었다.

“손님! 혹시 스피커는 필요 없으십니까?”

“스피커요?”

“지금 이 텔레비전은 자체 음질도 좋은 편입니다. 그런데 <천마>같이 음악에 돈 많이 들이붓는 드라마는 홈시어터가 있으면 진짜 음질이 다르거든요. 보세요, 제가 스피커를 꺼 보겠습니다. 여기 이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소리 하고, 제가 스피커를 틀어드렸을 때 나오는 소리하고 다르죠.”

그는 텔레비전 앞에 서서 스피커를 껐다.

어느샌가 분위기가 부드러워져, 텔레비전에서 낭랑한 칠현금 소리가 흘러나왔다.

자체 스피커의 질은 나쁘지 않았지만, 따로 서 있는 2개의 우퍼 스피커와는 차원이 달랐다.

“이 스피커가 텔레비전 자체 스피커보다 저역과 고역 대역폭을 훨씬 더 커버하고 있습니다. 소리 지향성부터 차원이 다르죠.”

진혁이 반가운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 그렇죠. 음파가 퍼지는 모양 자체가 다르네.”

음파는 공기의 진동이다. 상식적으로 일반인들은 그 모양을 볼 수 없다.

‘음파가 퍼지는 모양을 어떻게 알아? 허세 쩌네.’

하지만 보통 이렇게 설명하면 대충 알아듣는 척 하기 마련

판매원은 제일 비싼 스피커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곳은 명품 스피커 매장이 아니고 대형 마트에 딸린 소규모 가전제품 매장이기에 제일 고가의 스피커라고 해도 150만 원 정도였다.

“좋은 스피커는 주파수 응답이랑 지향성을 챙기셔야 하는데, 웨이브 가이드가 있는 게 소리 지향성이 훨씬 좋아집니다. 그러니까 이 제품이 제일 좋은 거죠.”

텔레비전 가격의 절반이다. 하지만 팔린다면 판매원의 이번 달 수당은 치솟을 것이다.

두근두근한 심정으로 눈앞의 호구 손님을 바라보자, 손님이 입을 열었다.

“말씀하신 제품은 앞부분에 포트가 여러 개 있군요.”

“예, 사용하시기 아주 편리하죠. 옆에 있는 거하고 비교해보시죠. 제가 틀어서 보여드리겠습니다.”

모처럼 온 큰손 손님이다. 판매원은 허리를 굽신거리며 응대했다.

옆에 있는 스피커는 상대적으로 저렴한 모델이었다. 이쪽은 앞에 포트니 뭐니 잡다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기본 소리는 저쪽이 좋긴 한데 괜히 앞쪽에 포트 같은 걸 설치해서 소리가 울리네. 음파가 나오면서 저기서 구부러져서, 결과물은 이쪽이 더 좋아.”

임진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 스피커도 일시불로 같이 주세요.”

“에에, 예! 감사합니다!”

동진이는 옆에서 입을 다물지 못하고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텔레비전만 해도 삼백여 만원, 거기에 스피커까지 더하니 사백여 만원에 달했다.

‘아버지가 이런 걸 살 때도 이런 식으로 바로 사지는 않았는데.’

“지금 바로 배달되나요?”

“예, 바, 바로는….”

뒤쪽에서 허겁지겁 뛰쳐나온 점장이 끼어들었다.

“제가 제 차로 바로 배달해 드리겠습니다. 자택이 이 근방이신가요?”

“예.”

“벽걸이로 하십니까, 아니면 TV 대 위에 올려놓으십니까? 원래 설치비를 따로 받지만 저희가 무료로 해드리겠습니다.”

진혁은 방금 자신에게 팔린 텔레비전을 바라보았다. 방금 전까지 응대하던 직원은 창고로 달려간 후다. 점장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리고 백만 원 이상 구매를 하셔서 상품권을 드릴 건데요, 이쪽으로 오셔서 신청하시면 됩니다.”

진혁은 텔레비전 화면을 바라보았다. ‘다음 편에 계속!’ 하면서 끝나버린 드라마를 보니 허무했다.

“…알겠습니다. 배송은 오늘 당장 해주지 않으셔도 됩니다. 내일 오전 중에는 가능합니까?”

“예! 저희 기사가 가서 설치해드릴 겁니다.”

◈          ◈          ◈

임진혁은 집에 돌아와서 훈제 오리고기를 구워 주었다. 동진이가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도록, 이미 설치해 둔 환영마라진에 인식시켜 두었다.

“집에 누구 데려올 일 있으면 나에게 미리 말해.”

“에이, 제가 잠깐 머무는 건데 누굴 어떻게 데려와요.”

“말없이 같이 오면 안 좋은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

“그럴 일 없다니까요.”

안 좋은 일이 어떤 것인지 상상하지도 못하며 김동진이 웃었다. 소년은 산더미같이 쌓인 과자를 보면서 행복해했다.

“이 과자 진짜 많네요. 종류별로 하나씩은 다 사 온 것 같아. 이대로 과자 가게를 열어도 되겠어요.”

“가게를 왜 열어. 먹어야지.”

“저희끼리 먹기엔 좀 많은 것 같은데.”

“같이 먹으면 되지. 사람을 더 불러도 되고.”

“이 시간에요?”

“아마 안 자고 있을걸.”

그는 내친김에 옆집에 있는 백진영도 불렀다.

“어! 동진이 아니냐?”

문을 열고 들어오던 백진영이 반가워했다. 김동진이 눈을 크게 뜨며 놀랐다.

“진영이 형이 왜 여기 있어요?”

서로를 반기는 두 사람을 보면서 임진혁이 물었다.

“그러게. 두 사람이 어떻게 알아?”

백진영은 냉큼 자리 잡고 앉아 훈제 오리고기를 집어 먹었다.

“왜, 내가 전에 얘기했던 애 있잖아. 미각이 기가 막히게 예민하다고. 얘가 걔야.”

그러고 보니 그런 이야기를 들었던 것 같기도 하다. 보육 시설에서 제과제빵 교육을 하러 나가자고 몇 번 이야기를 조율하다가 다른 일정이 생기면서 못 갔다.

하지만 그 보육 시설은 가톨릭계 종교재단에서 설립한 곳으로 이번에 방문한 곳과 달랐다.

진혁이 물었다.

“보육 시설이 다르던데?”

“나이가 차서 옮겼어요.”

“아하.”

오랜만에 만난 백진영과 김동진은 신이 나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화제는 다른 것이 아니라 임진혁에 대한 것이 주였다.

“진혁이랑 같이 살면 좋아. 얘가 먹을 거 하나는 기가 막히게 챙겨 먹이거든.”

“임진혁 선생님은 손이 진짜 커요. 조금 전에 텔레비전하고 스피커를 바로 막 사는 거 있죠.”

“애가 보는 눈이 있어서 아무거나 막 사지는 않았을걸. 필요하니까 샀겠지.”

분명히 본인이 눈앞에 있는데도 제삼자가 된 것처럼 두 사람이 계속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상황이다. 진혁이 끼어들어 대답했다.

“드라마 보려고 샀어.”

“무슨 드라마? 너 TV 안 보잖아.”

김동진이 대답했다.

“<천마> 좋아하신대요.”

“그래? 요즘 그거 커뮤니티에 유명하긴 하더라. 난 바빠서 아직 못 봤는데, 그렇지 않아도 보려고 했어.”

“진영이 형이야말로 TV 안 보잖아? 게임방송만 보는 거 다 아는데.”

“이번에 중국하고 한국에서 합동 개발해서 <천마> MMORPG 게임이 나온다잖아. 지하철에도 대문짝만하게 광고 붙어 있더라. 그래서 드라마 보고 할지 말지 결정하려고 했지.”

“게임이 나와요? 진짜 흥하긴 흥했나 봐. 지금 중국은 50화인가? 방영하고 있거든요.”

“무협 게임은 처음인데 재밌을 것 같아.”

“그럼 지금 같이 보면 되겠다. 안 그래도 진혁이 형이 다시 정주행할 거라고 하더라구요.”

임진혁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난 13편부터 볼 건데?”

백진영이 신나서 말했다.

“그럼 13편부터 보면 되지. 우리 집 가서 보자.”

“처음부터 봐야죠!”

“나 드라마 중간부터 보는 거 잘해. 앞의 내용을 완벽하게 추리할 수 있다고. 숙모 보시는 아침드라마도 앞부분 다 맞혀서 숙모가 깜짝깜짝 놀랐다니깐?”

“진영이 형… 이건 아침드라마랑 장르가 완전 다르다구요.”

“탐정 만화 1화를 보면 범인도 다 맞출 수 있다고.”

백진영이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건 나도 안다고요. 제일 범인이 아닐 것 같은 사람이 범인이잖아요.”

김동진이 백진영과 함께 투덕거리는 것을 보며 진혁이 신기하게 쳐다보았다.

‘이 녀석 남자하고 여자 대하는 게 완전 다른데?’

혜정이나 현아 사이에 끼어 있을 때보다 지금이 훨씬 편해 보인다. 이게 동진이의 본모습일지도 모르겠다.

세 사람은 과자 봉지를 껴안고 먹을 것을 싸 들고 앞집으로 옮겨 왔다.

백진영이 13화를 틀어 주었고, 세 명이 나란히 소파에 앉았다.

얇게 튀겨낸 감자 칩을 색깔별로 전부 안고 있던 진영이 흐뭇하게 웃었다.

“진혁이 넌 과자도 안 먹던 애가 오늘따라 엄청 사 왔네. 양파 맛 내가 먹어도 돼?”

“먹어.”

“진혁 선생님이 과자를 안 드신다구요? 평소에 이만큼 과자 먹으면서 맛 연구하시는 게 아니에요?”

“나 쟤가 과자 먹는 거 이번에 처음 보는데.”

“그럼 설마 저 때문에….”

김동진이 감동한 표정으로 임진혁을 올려다보았다.

진혁이 짧게 말했다.

“드라마 시작한다. 조용해.”

그는 조용히 화면에 몰입했다.

진혁의 그 표정이 너무나 진지해서 백진영도, 김동진도 과자를 먹는 것을 멈추었다.

‘먹는 소리도 내면 안 될 것 같아.’

13화는 12화가 끝난 마지막 부분에서 그대로 시작하지 않았다. 시간상으로는 반년이 흘러 계절이 바뀌었고 배경적 무대는 사천으로 바뀌었다.

꽃이 피고 나비가 날아다니는 푸르른 봄, 검림과 제갈책 두 사람은 함께 사천 당문의 당가타를 찾아가고 있었다.

그들은 무림인의 행색을 하고 있지 않았다. 허름하게 꾸며 입고 표행을 하는 표사들 사이에 끼어서 허드렛일을 하며 따라갔다.

진혁이 보기에 옷은 지나치게 새것이었고 길은 너무나 깨끗했다. 말들은 지나치게 크고 건장했으며 마차 역시 고무바퀴에 알루미늄 테가 박힌 것이 현대의 문물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여태까지 보이다가 사라진 그 배경보다 훨씬 덜 거슬렸다.

진혁이 짧게 평했다.

“그놈의 소림사 배경이 사라지니까 좀 봐줄 만하네. 차라리 세트가 낫지.”

“소림사라뇨?”

“처음부터 일월신교 배경으로 나오는 곳 말이야.”

“거기가 소림사에요?”

“그걸 어떻게 알아?”

“딱 보면 알잖아. 상식인데. 숭산이 보이고 부처님 머리 있고. 보면 몰라? 동진이 너는 중국 유학도 했다며.”

“아니, 제가 중국 유학을 하긴 했는데 그냥 공립학교만 다녀서.”

김동진이 머쓱해 했다.

“진혁이 넌 아는 것도 많구나.”

드라마 속의 도산검림은 아무도 신용하지 않았다. 그는 소교주에게 직접 명령받은 기밀문서를 갖고 있었고 이를 당가에 전달해야 했다.

제갈책은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이곳에서 얻어내야 하는 것이 있었다.

‘그들은 지금 자기가 무엇을 갖고 있는지 몰라.’

이곳에서 빙정을 취하고 이후 불거북의 내단을 얻어 함께 복용해야 한다.

그는 도산검림의 힘을 이용해 이면에서 거래를 진행할 생각이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제갈 가문의 비기인 기관진식의 설계도. 그것은 절대 줄 수 없어.’

진혁이 몰입해서 드라마를 시청하는 동안 이미 내용을 다 알고 있던 김동진은 중국인 친구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천마> 앞부분 배경 어디서 찍었는지 알아? 숭산이 보이고 부처님 머리가 있고 어쩌고 하는데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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