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님의 베이커리-343화 (343/656)

제 343화

진혁은 네 사람의 케이크를 전부 맛보았다.

동진이 만든 딸기 생크림 케이크는 푹신푹신한 시트 사이에 촉촉한 생크림이 풍부하게 들어있어 혀 위에서 사르르 녹았다.

“꽃봉오리라.”

“전 사실 제가 이미 필 만큼 폈다고 생각하는데, 이제 막 성인이 되기 전이니까요.”

“…그래.”

진혁은 이들이 어린아이들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강호에서는 15살이면 성인이 되고, 새끼 살수는 10살이면 첫 살인을 저지른다.

아이와 노인, 여자 앞에서 방심하는 이들이 많아서다.

현아가 만든 꽃봉오리 커스터드 버터크림 아몬드 케이크는 담백하나 뒷맛이 살짝 달았다.

“장식도 괜찮고. 맛도 괜찮네. 현아가 단 걸 좋아했잖아?”

“예, 저는 진짜 숨 막히게 단 게 좋긴 하지만요. 저번에 너무 설탕 붓지 말라고 하셔서, 계속 만들면서 설탕 비율을 조절해 봤어요.”

“그래. 이번에는 잘했어.”

혜정은 레드벨벳 케이크에 버터밀크와 식초를 넣어서 색깔을 냈다. 선명한 붉은빛 케이크에 크림치즈 프로스팅을 하고, 겉에는 역시 빨간 퐁당을 씌웠다.

위쪽에 올라와 있는 부스러진 초콜릿 조각들을 보며 혜정이가 울먹거렸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말 듯 무너질 것 같은데 균형 잡힌 탑을 올리려고 했어요.”

“그런 종류의 균형 감각은 최대한 많이 세워보고 이것저것 해보는 게 도움이 돼. 코코아보다 치즈 향을 강하게 냈는데, 왜 그렇게 한 거지?”

“보통 레드벨벳이 많이 달잖아요. 그런데 진혁 쉐프님은 단 걸 별로 안 좋아하신다고 들어서….”

“보편적인 입맛을 추구할 필요는 있지만 내 개인적인 취향을 맞추려고 하지는 않아도 돼. 어차피 이 다음에는 주영모 쉐프님이 심사할 테니까.”

“그때는 주영모 쉐프님 입맛을 맞추려고 했어요.”

“지금부터 약삭빠르게 굴 필요는 없어. 네가 심사위원 입맛을 알고 있는 대회에 나갈 일이 몇 번이나 있겠어.”

“그것도 그렇네요.”

다들 거제도에 내려가기 전보다 실력이 늘었다.

‘일주일이면 이 정도 늘어야지.’

그가 미미하게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으로 임진희의 케이크를 맛볼 차례다.

새하얀 퐁당에 흰색을 섞어 대리석 같은 질감을 냈다. 그렇게 씌워 놓은 건물에 병원 간판을 달았다.

높이가 30cm는 되어 보인다.

납작하고 평평한 케이크를 만드는 건 어렵지 않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케이크를 높이 쌓는 건 보통 잘 하지 않는다. 케이크가 위쪽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무너질 수 있기 때문이다.

웨딩 케이크를 만들 때도 2층, 3층을 만들 때는 별도로 케이크를 거치할만한 장식대를 마련해 올려놓으면서 해결한다.

하지만 이번에 진희는 단단한 초콜릿 브라우니 케이크 안에 기둥이 될 나무젓가락을 심으로 꽂아 넣어 만들었다. 특별히 가르쳐 준 적은 없는데 알아서 찾아보다가 스스로 개발했다.

어색한 데가 전혀 없지는 않다.

하지만 몇 개월 전만 해도 아예 빵 만드는 것을 해본 적이 없던 사람이 했다고 하기에는 엄청난 실력이다.

‘진짜로 실력이 많이 늘긴 늘었네.’

진혁이 물었다.

“나보고 취향 이상하다, 이상하다 하더니 너는 병원 모양 케이크를 만들었잖아?”

“제가 처음으로 사회 생활한 데가 병원이라서 그렇습니다, 선생님. 고객들이 오래 있고 싶어 하는 곳은 아니지만, 세상에 꼭 필요한 소금 같은 장소죠.”

“아니, 존댓말 안 해도 되고.”

임진혁이 떨떠름하게 말했다. 진희가 경어를 하니까 너무나 어색하다.

진희는 바로 설명했다.

“솔직히 병원에서는 그, 긴박감 같은 게 있거든. 지금 내가 이걸 안 하면 저 사람이 크게 다치거나 죽을지도 몰라. 무언가를 해야만 한다는 사명감 같은 게 날 계속 압박하고 짓눌렀어. 그걸 싫어하기보다 즐기는 사람도 있는데 나는 그게 부담이 되더라고. 출근해서 복도를 걸어갈 때 확 나는 병원 냄새야. 소독약 냄새라고 하나? 그 특유의 공간에 배어 있는 향이 있거든. 그 냄새를 맡을 때마다 진짜 심장이 빨리 뛰고 도망가고 싶은 기분이 들었어.”

“흠.”

“그래서 이 일을 언제까지 할 수 있을까, 다시 병원 일을 해야 하는 순간이 오는 게 아닌가 하는 맘도 없지는 않았어. 내가 사실 제과제빵사라기보다는 간호사라는 느낌이 계속 있었거든. 면허가 없는 것도 아니고 몇 년을 공부하고 했는데 아깝잖아.”

너무 많이 이야기해버렸다. 진희는 문득 입을 다물었다. 일을 그만두고 싶다고 하면 학비를 내주신 아버지에게 죄송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지금 제과제빵 외길을 걷고 있는 다른 고등학생들 앞에서 이런 이야기를 해도 될까? 그녀는 뒤를 돌아보았다.

세 사람은 진희를 비난하지도, 부러워하지도 않았다. 격려하는 것 같은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아, 그런데 병원은 그 톱니바퀴 같은 구조가 있잖아. 시스템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재량권이 별로 없어. 그런데 빵은…, 이런 샌드위치가 좋겠다, 이렇게 말하고 만들어 먹어 보면 또 맛있고, 메뉴에도 올라가고 하니까 그게 너무 좋은 거야. 엄마랑 아빠랑 일하는 건 생각만큼 너무 좋지는 않았는데.”

진혁이 웃었다.

“어머니가 직장 상사 역할을 하니까 당연히 힘들지.”

일월신교의 전대 교주도 진혁을 양아들로 받아들이며 소교주로 임명했다. 새로 생긴 양아버지는 직업적인 관계만이 아니라 가족적인 관계 또한 요구했기에 일일이 대응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다.

“자, 그럼 제일 자신 있는 조각을 주시죠.”

현아가 쭈뼛쭈뼛하며 물었다.

“저희도 먹을 수 있나요?”

“당연하지.”

진희는 큼직큼직하게 조각을 잘라서 나눠주었다.

“우와, 언니 브라우니 진짜….”

현아가 말을 잇지 못했다. 혜정이가 중얼거렸다.

“이게 재능 낭비 아니에요? 왜 여태까지 병원에서 일하고 있었대.”

동진이 말했다.

“브라우니가 무겁고 치밀한데 이렇게 촉촉한 건 어떻게 한 겁니까?”

“지방과 밀가루의 비율을 조절하면 돼. 케이크처럼 입안에서 살살 녹아서 촉촉한 브라우니를 만들지, 아니면 파운드 케이크처럼 치밀하고 단단한 브라우니를 만들지는 지방의 비율로 정해지는 거니까.”

“아니, 그건 아는데요. 어떻게 이렇게 겉은 단단하고 안은 촉촉하게 만들었는지 이해가 안 된다구요.”

“이게 한 종류의 브라우니 반죽이 아니고 두 개를 섞어서 선을 긋고 구워낸 다음에 합친 거야.”

“아니, 다 같이 바빠 죽겠는데 그런 건 또 언제 했대요?”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 만들었어.”

임진희가 주먹을 쥐었다. 단아한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예쓰!”

당장이라도 폴짝폴짝 뛰어오르고 싶지만 다른 학생들이 있기에 눈치를 보고 있는 모양이다.

“오늘 실기 점수는 내가 주영모 쉐프, 아니 원장님한테 전달할 거야.”

“감사합니다!”

짧은 심사를 마치고 진혁이 가게를 나섰다. 미리 이야기한 대로 김동진과 임진희가 그 뒤를 따라 나왔다.

“보육원은 이쪽으로 가면 돼?”

“예, 두 번 환승하면 됩니다.”

진혁은 노선도를 들여다보았다. 오늘의 일을 빨리 처리하고 드라마를 마저 보고 싶은데, 보육원은 너무 멀었다.

“그럼 그냥 택시 타고 가자. 택시비는 내가 낼게.”

진희가 순간적으로 애매한 표정을 지었으나 임진혁은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것은 아주 잘못된 판단이었다.

“도로가 아주 주차장 같네.”

“하하하.”

“저는 맨날 지하철만 타고 다녀서 몰랐어요.”

서울시에서 경기도까지 퇴근길의 도로는 지극히 붐볐다. 결국 지하철을 탔다면 한 시간이면 갔을 거리를 세 시간이나 걸려 도착했다.

보육원의 원장은 진혁을 반겼다.

“저희 보육원에도 임진혁 쉐프님 팬이 아주 많아요. 바쁘실 텐데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임진혁은 김동진의 임시 보호자 역할을 맡는다는 문서에 서명했다.

‘거참 시답잖은 걸 시키네.’

동진이는 짐을 챙겨왔다. 허름한 보세 브랜드 배낭은 언뜻 보기에도 얄팍했다.

돌아오는 길에는 지하철을 탔다. 지하철 안에서 대화를 나누며 진희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러니까 네 방에는 동진이가 살고, 네가 나랑 산다는 거잖아.”

동진이는 지하철에서 따로 서 있었다. 남매간의 사적인 대화를 나누도록 자리를 피해준 것이다.

“응.”

진희가 머뭇거리다 말했다.

“그럼 네가 너무 불편하잖아. 너만의 공간이 필요하다고 독립한다면서 서울로 올라와 놓고선. 괜히 내가 오지랖 부려서 너한테 민폐 끼치게 됐네.”

그녀가 미안해하는 모습을 보며 진혁이 피식 웃었다.

“걱정할 필요 없어. 어차피 다음 달부터 네 가게 오픈하고 나면 너도 정신없어서 집에 거의 못 들어올 거야.”

그가 태연하게 말하는 내용을 듣고서 진희는 크게 놀랐다. 절로 동공이 커지고 입이 벌어진다.

“망원에서 지하철역으로 두 정거장 거리에 있는 대학가인데, 거기도 유동 인구가 많아. 입지가 아주 좋아서 진영이 형이 엄청 추천하더라고. 지금 권리금 협상하고 있는 중이야. 기기들은 화웅에서 싸게 주신다고 했고. 내일 같이 가서 보자.”

진희는 입을 벙긋거리다가 간신히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갑자기?”

“예전부터 너 가게 차려 준다고 했잖아. 실력만 되면 바로 맡길 생각이었어.”

진희가 어이없어 입을 벌렸다.

“야, 너는 지금…. 그건 옛날에 장난친 거였잖아.”

“남아일언중천금이지. 바리스타 할 사람도 구해 놨는데, 네가 직접 한번 만나 봐.”

“….”

임진희는 깊이 생각에 잠긴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하철역에 내리고 진혁이 살던 오피스텔 방에 들어가고서는 입을 열었다.

“야! 벌써 정리한 거야? 이불까지 다 치웠네.”

전에 진희와 어머니가 들렀던 이후로 크게 달라진 점이 없었다. 마치 누군가가 살다가 이사가고 청소해 놓은 방처럼 보였다.

휑하니 텅 비어있는 거실 겸 방에는 원래 설치되어 있는 붙박이 수납장과 옷장이 보일 뿐이다.

‘아니, 그냥 짐이 없는데.’

진혁은 변명하지 않고 그냥 미리 정리한 척을 하기로 했다.

다만 그때와 다른 점은 일체형 세탁기와 주방시설, 그리고 제과제빵용 도구와 오븐이 있다는 것이다.

“먹을 건 좀 있나?”

진희는 성큼성큼 걸어가 냉장고 문을 휙 열어보았다. 냉장고 안에는 달걀과 치즈, 그리고 동물성 고형 크림이 있을 뿐이다.

쌀이나 김치 따위는 보이지 않고 각종 밀가루와 설탕, 소금이 있을 뿐이다.

집에서 무언가를 만들어 보고 싶을 때를 대비해서 챙겨 놓은 재료들이기 때문이다.

“제대로 해 먹는다더니, 순 빵만 먹고 있네.”

진희가 걱정이 섞인 말투로 말했다. 주눅 들어있던 동진은 조심스럽게 방 안을 둘러보았다. 자기 방을 다시 가져보는 것은 아주 오랜만이다.

“제가 여기서 살아도 된다구요? 감사합니다!”

김동진이 물기 어린 눈동자로 올려다보았다. 진혁은 이런 시선이 불편했다. 기껏해야 학원에서 과정을 밟을 3개월의 일이다.

진희가 물었다.

“그런데 진혁아, 네 짐들은 어디에 있어? 우리 집 열쇠 없잖아.”

“….”

진혁은 얼렁뚱땅 얼버무렸다.

“음, 네 잠자리는 네 걸로 새로 사는 편이 좋을 것 같아서 치웠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진작 말하지. 그럼 들어오는 길에 아예 내가 사 왔을 텐데.”

‘빨리 보내고 드라마를 보고 싶은데.’

결국 이불까지 같이 사러 가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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