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41화
카메라는 담담한 시선으로 제갈책을 따라갔다.
다 같이 잡혀 온 상태에 똑같이 꼬질꼬질하게 더러워진 상태인데도 제갈책은 차별을 받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따돌림을 당했다.
그릇에 담긴 멀건 죽을 나눠 주어 허겁지겁 먹는 동안에도 다른 소년들에게 걷어차인다.
언제 죽을지 모른다며 겁에 질려 있는 고아 소년들은 강자에게는 약하고 약자에게는 강했다. 삼류 무사에 불과하지만, 그들에게는 강력한 이들인 일월신교의 관리 무사들에게는 벌벌 기면서, 힘이 없어 반항할 수 없는 제갈책은 걷어차고 무시한다.
이것이 정말로 일월신교의 일이라면, 이는 진혁이 제대로 된 고아 개혁안을 제출하기 전의 일로 보였다.
그는 오랜만에 옛 생각을 떠올리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나는 제갈가의 핏줄은 부하로 데리고 있었던 적이 없는데.’
평교인 출신이 아닌 놈들은 죄다 고아 출신이니 그중에서도 제갈가의 방계가 있었을 가능성도 아예 없지는 않다.
‘머리 쓰기로 유명한 가문이잖아.’
제자 중에서 그나마 머리가 잘 돌아가는 놈은 광안마와 혈도객 정도밖에 없었다. 혈도객은 정파 명문 출신이니 말할 것도 없고 광안마 놈은 일월신교의 교인인 어머니 아래에서 태어났다고 했다.
“흠.”
저 동굴은 묘하게 낯이 익었다. 일월신교에 아직 입교하지 않은 이들이 원한다면 살게 내버려 두는, 수많은 동굴 중의 하나다.
진혁도 저것과 비슷한 동굴 속에서 살수 동기들과 함께 살다가 동료들을 전부 죽였다.
‘저놈의 동굴은 비슷하긴 한데. 동굴은 사람이 죽어도 계속 그 자리에 남아 있는 거니까 말이지.’
아는 놈이 쓴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긴가민가하니까 멈춤 버튼을 누르지 못하고 계속 보게 된다.
‘…강호를 이야기로 소비하는 것을 이렇게 보게 되다니.’
진혁은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 다음이 궁금해서 손을 멈출 수 없다.
그리고 고아들 중 대장 노릇을 하던 개똥이가 크게 앓았다. 제갈책은 알고 있었다는 듯이 썩은 미소를 지었다. 이제는 구속에서 풀려난 그는 동굴 안쪽에서 이끼를 뜯어와 으깨어 개똥이에게 먹인다.
개똥이는 무사히 회복하여 살아났고, 제갈책에게 은혜를 갚겠다고 맹세한다.
그리고 그들 역시 임진혁이 밟아왔던 것과 비슷한 ‘시험’을 시작했다.
진혁은 턱을 괴고서 소년들의 사투를 지켜보았다.
이야기상 중요한 장면이 아닌지, 어리고 힘없는 소년들이 독기를 뿜으며 서로를 죽이는 장면은 짧게 편집되어 금방금방 지나갔다.
지나치게 생략되었기 때문에 소년들이 정확히 어떤 시험을 받는지도 그저 몇 초간 훌쩍 지나갈 뿐이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제대로 보지 못했을 것이다.
‘통나무 쪼개기하고 물 떠오기라. 정도는 너무 일반적인데. 이건 정파의 무가에서도 신입들에게 전부 시키는 거잖아.’
진혁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아이들이 입고 있는 거적때기 같은 옷들도, 동굴의 모양도, 시험의 양식도 전부 애매했다. 단 하나도 확신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가 지켜보는 사이에 화면 속의 제갈책은 마지막 시험에 다다랐다.
개똥이는 단 한 사람만 빼고 다른 이들을 전부 죽였다. 덩치 큰 소년은 온몸에 피칠갑을 한 상태로 비틀거리며 동굴을 걸었다.
그는 두 사람만이 아는 은신처로 향했다.
동굴 속 한 귀퉁이에는 폭포처럼 물이 흐르는 구석이 있다. 개똥이가 물을 그대로 맞으며 걸어가자 그 뒤의 빈 공간이 드러났다.
구석에 정좌해 앉아 있던 제갈책에게 개똥이가 다가왔다.
“이만하면 네 은혜는 충분히 갚았지.”
시험 내내 제갈책의 뒤를 지켜주느라 개똥이는 입지 않아도 될 부상을 입었다.
그는 방금 맞은 폭포 물에 씻겨 내려간 피를 거칠게 털어냈다.
제갈책은 말없이 그릇을 내밀었다.
밀기울 같은 죽이 담겨있는 그 그릇을 본 개똥이가 눈을 둥그렇게 떴다.
죽 안에는 새하얀 생선 살이 듬뿍 들어있었다.
“…뭐야.”
배급하는 식사는 소량의 쌀로 쑤어 만든 풀죽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나마 물고기라도 잡아 오는 것은 어떻게 된 일인지 이 동굴의 숨겨진 길목까지 구석구석 다 아는 제갈책밖에 없었다. 하지만 제갈책은 평소에는 혼자 몰래 물고기를 뜯어 먹고 버렸다.
오늘은 안 하던 짓을 다 한다. 개똥이가 코웃음을 쳤다.
“물고기를 갖다 바친다고 해서 내가 널 살려줄 줄 알고.”
“날 살려두면 너는 매일매일 신선한 생선을 먹을 수 있을 거야.”
재주도 좋아서 불도 피워 제대로 구워 놨다. 지푸라기와 굴러다니는 흙돌밖에 없고 눈앞에 폭포가 있어 습한 이 환경에서 용케 불을 붙였다는 점이 대단하다.
개똥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한 손을 치켜들었다. 그가 양손으로 목을 조르기만 해도 제갈책은 바로 죽을 것이다.
그때 제갈책이 입을 열었다.
“네가 먹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남겨 놓았어.”
난 곧 죽을 거니까, 라는 말이 생략되어 있다.
두 소년의 눈이 마주쳤다. 아직 다 자라지 못한 체구에 앳된 얼굴이지만 표정만은 전장에 나간 병사들처럼 비장하다.
“…네놈이 그래도 은혜를 모르는 개잡종은 아니구나.”
개똥이는 손에 묻어있는 피를 닦지도 않고 허겁지겁 그릇을 제 앞으로 가져왔다.
그리고 입에 들이붓듯이 그대로 삼켰다.
우당탕.
낡은 그릇이 그대로 바닥에 떨어져서 튕겨 나갔다. 나무를 깎아 만든 그릇은 두세 번 튕겼다가 그대로 또르르 굴러갔다.
마치 그 그릇처럼 개똥이 역시 천천히 쓰러졌다.
“커헉, 헉!”
덩치 큰 소년은 손끝부터 찌릿해 오는 감각에 신음을 토했다. 그릇이 떨어진 것도, 안쪽에 담겨있던 내용물이 쏟아진 것도 깨닫지 못했다. 개똥이가 천천히 바닥에 무너졌고, 제갈책은 그 소년의 목에 그대로 젓가락을 찔렀다.
소년이 죽는 것을 무심히 지켜보며 제갈책이 중얼거렸다.
“너 같은 것이 서시유(西施乳)에 죽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해라.”
진혁은 그 광경을 보았다.
‘…하광인가?’
그는 그 독을 알아보았다.
황하강이나 요하강에서 주로 나는 중국산 토종 민물 복어는 그 색깔이 노랗다고 하여 한국에서는 황복이라 한다.
한편 강호에서는 이 황복을 하광(河胱)이라 부른다. 사천당문에서는 이 화광의 내장 중 곤(鯤)을 천하일절의 독이라고 하여 암기에 발라 사용한다. 해독법이 없는 신경독이기 때문에 천하의 독중 일절이라 불렸다.
‘생각해보면 복어 내장을 손질하면서 독을 빼내기는 어렵지만, 그 반대는 아주 쉽단 말이지.’
진혁은 어린 소년의 지략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곤은 수컷 복어의 정액을 말하는데, 그것이 정확히 뭔지 몰랐던 이들은 이 곤을 ‘서시유’ 즉 서시의 하얀 젖이라 불렀다.
서시는 고대 춘추시대의 미녀다. 월왕 구천은 복수를 꿈꾸며 미녀 서시를 오왕에게 보냈고, 오왕은 서시에 홀려 결국 나라를 망하게 했다. 경국지색의 미녀를 먹으면 죽을지도 모르는 미식에 빗대어 서시유라고 이름을 붙인 것이다.
‘그 당가 놈은 곤이 아주 맛있으니까 먹자고 했지.’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던 진혁은 계속 사양했다.
굳이 수컷 복어의 정액을 먹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부유하고 권력 있는 자들은 이 죽음의 진미를 즐겼다.
‘저거 광안마 녀석도 좋아했는데.’
부하 녀석이 끈질기게 강권해도 진혁은 절대로 먹지 않았다. 하지만 녀석은 그게 얼마나 맛있고 몸에 좋은지 열심히 이야기했다. 끝내 털어놓은 속내는 진혁이 먹고 멀쩡하면 얼마나 강한지 그 위엄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어처구니가 없는 놈.’
고작 그런 걸 먹는 걸로 보여지는 것 따위는 필요 없다.
진혁은 팔짱을 꼈다.
제갈책은 회귀자의 지식을 이용해 점차 일월신교 안에서 발을 넓혔다.
약관이 되던 해 그는 한 사람을 만난다. 그자는 자신과 같은 고아 출신이나 뛰어난 무술 실력과 인망으로 일월신교 내에 떠오르는 신성(新星)이라 평가받고 있는 자.
그자는 이전 삶에서 자신의 적이 되었고, 치열하게 싸웠다.
자신의 부하를 소중히 여긴다는 장점이 있었으나 끝내 배신당해 죽었다.
제갈책은 이번에는 그자의 곁에서 함께할 계획이었다. 적으로써 바라본 그가 어떤 자인지 알았기에, 상대를 설득할 자신이 있었다.
“암천대주님을 만나러 왔습니다.”
‘설마.’
암천대가 숙식하는 건물을 보고 진혁은 떨떠름하게 눈을 잠시 감았다.
‘저기가 어디를 봐서 살수들이 사는 건물이야.’
건물 앞에 조각되어 있는 석조 사리탑이 시야에 보일 때마다 진혁은 드라마에서 미묘하게 흥미를 잃었다.
‘아까 애들끼리 싸우는 것도 그렇고, 분명히 어설퍼.’
그것은 주먹질이 오가는 혈투라기보다는 서로 동작을 맞춘 춤 같았다. 여러 명이 어떻게 움직일지 미리 수없이 연습을 거듭해서 딱딱 각이 맞는 군무 말이다.
주먹에 힘이 전혀 들어가지 않는데 영상만 기막히게 뽑았다.
‘도대체 이 영화의 무술 부분 어디가 뛰어나다는 건지.’
현대에 온 후 무협 영화나 드라마 따위를 찾아본 적이 없는 진혁이었다. 그렇기에 이 중국 드라마의 무술 영상이 타 드라마에 비해 얼마나 완성도가 높은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
진혁은 화면에서 잠시 흥미를 잃었다. 그는 가방 안에서 스태프들이 챙겨주었던 생수병을 꺼냈다.
그때 화면 속에서 첫 만남이 이루어졌다.
“내가 당신을 여기까지 만나러 왔는데 나와 보지도 않는단 말이오? 아무리 도산검림이라 불리는 암천대주라 하여도 지나친 무례요.”
진혁은 그 익숙한 이름을 듣고 눈을 크게 떴다.
“…!!”
암천이라는 단어 자체는 삼류 무협지에서도 자주 사용한다. 그러니 일월신교 내에서 암천대가 존재했던 것까지는 우연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가 기억하기에 도산검림이라 불리는 자가 암천대주였던 순간은 일월신교의 역사 중에서 단 한 번밖에 없었다.
바로 임진혁 자신이 암천대주로 있었던 때다.
「마침내 인생을 바꿔줄 만한 주군을 만났다.」
화면 속의 제갈책이 나레이션을 하면서 화면이 암전했다. 이번 화가 끝난 것이다.
“…야, 이 광안마 놈아. 네 이름이 개똥이라며.”
그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손에 들고 있던 생수병을 꽉 움켜쥐어 순간적으로 생수병을 터트릴 뻔했다. 그러나 게임 패드를 부술 뻔한 경험을 되새기며 마지막 순간에 제어했다.
-부르르르르르
스마트폰이 울렸다. 진혁은 바로 전화를 받았다.
“무슨 일이야.”
“진혁이 너는 여보세요 도 안 하냐?”
전화기 너머에서 임진희가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무슨 일인데.”
다음 화가 자동재생되어야 하는데 일단 정지 버튼을 눌러 놓은 상태다.
진혁이 낮은 목소리로 용건을 묻자 진희가 조잘거렸다.
“지금 내가 쓰고 있는 방 말이야. 동진이도 같이 살까 봐.”
“왜.”
“걔 지금 보육원에서 시키는 일 하느라 새벽부터 잠 줄여서 청소하고 빨래하고 한 대. 그러느라 맨날 반죽하는 시간 놓치잖아. 애가 나쁜 애는 아니고, 하려는 의지도 있어. 어차피 방 두 개고 학원 바로 앞이니까 동선도 편리하고.”
진혁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안 돼.”
“…어? 아니, 왜?”
“아무리 어린놈이라도 남자야. 한 지붕 아래에서 자는 거 아니야.”
전화기 너머에서 긴 침묵이 흘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