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40화
다음날.
주영모가 없는 주영모 베이커리에서는 학생들이 열심히 연습하고 있었다.
오늘 오후에는 거제도에서 상경한 진혁이 직접 최종 결과물을 평가하기로 했다.
“다 되어가?”
“응!”
혜정이는 이미 케이크 굽는 것을 끝내고 데코레이션용 크림을 휘핑하는 중이다. 진한 달걀노른자가 들어가면서 하얀 크림은 점점 더 노란색으로 물들어갔다.
현아의 케이크 역시 냉각기에서 식히는 중이다. 그녀는 커스터드 크림이 아닌 버터크림을 휘핑하고 있다.
반면에 새로운 크림 레시피를 실험하고 있던 진희는 전혀 다른 재료를 섞고 있었다.
무거운 휘핑크림과 코코아 가루, 그리고 정제 설탕이 들어가 있는 스테인리스 볼에 비장의 재료를 넣었다.
진한 술향기가 퍼져나가자 석현아가 코를 킁킁거렸다.
“언니 크림에 술 넣는 거예요?”
“응.”
“무슨 술이요?”
“지난 명절에 아버지가 선물 받았던 브랜디. 좋은 거래.”
“그런 걸 요리에 써도 되나요?”
“어차피 술 끊으셨고 집안에 마시는 사람 없으니까 괜찮아. 새로운 크림 개발하는 데 썼다고 하면 이해하실걸?”
원래 가득 차 있어야 할 냉각기 한구석은 빈자리가 있어 휑하다. 세 명이 만든 케이크 3개가 들어가 있지만, 한 명이 아직 케이크를 굽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거 휘핑하는 게 진짜 힘들어.”
진희가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자 석현아가 웃으며 말했다.
“언니, 제가 마실 것 좀 사 올까요? 너희는 뭐 마실래?”
“나는 바나나우유.”
“그럼 난 탄산수!”
제각각 먹고 싶은 것을 이야기하는데 동진이만 입을 다문 채였다. 현아가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동진이 너는 아이스 아메리카노지?”
“…응. 고마워.”
“무거우니까 내가 같이 가서 들어줄게.”
현아와 혜정이는 음료수를 사러 나갔다.
진희 혼자 남아 초콜릿 브랜디 크림을 저었다.
즐겁게 떠들며 이야기하던 현아와 혜정이가 나가고 나자 연습실은 놀랍도록 조용해졌다.
침묵이 한참 흐르고 동진이 부러움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진희 누나는 부러울 게 없겠어요.”
그는 쥐구멍으로 기어들어 갈 듯이 조그만 목소리로 말했지만 다른 사람들보다 귀가 예민한 진희는 귀신같이 알아들었다.
“응?”
그녀는 미간을 좁히며 뒤를 돌아보았다. 진혁과 똑같은 표정이었다.
동진이는 깜짝 놀라서 한 걸음 물러났다.
“네가 나보다 반죽은 훨씬 잘하잖아.”
“아니, 그런 거 말고요. 반죽은 연습하면 되는 거고.”
동진은 고개를 푹 숙였다.
주름이 없는 팔꿈치나 목, 무릎을 보면 아직 10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얼굴에는 주름이 가득하다.
입을 다물어버린 소년은 나이보다 한참 늙어 보였다.
진희는 대답을 들을 때까지 비키지 않을 기세로 팔짱을 끼고 동진을 노려보았다. 이번 기회에 한마디 할 생각이었다.
“누나. 그러니까 누나네 형은 누나를 엄청 아끼잖아요.”
“오히려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지.”
“학생들 가르칠 급이 아닌데 진희 누나 때문에 여기 와서 일부러 학생들 가르치는 거라면서요. 애들이 다 얘기하는데요.”
“….”
진희는 동진이의 뺨을 잡아당겼다.
“아야얏!”
“어린애가 쓸데없이 눈치만 보고 말이야!”
“아, 왜 잡아당겨요!”
진희가 단언했다.
“걔는 지금 나 때문에 여기에 와 있는 게 아니야. 지점장이 될만한 인재를 키워 보려고 여기에 와 있는 거라고. 능력 있는 재목을 발굴하고 쓸모 있게 만드는 게 목적이란 말이야.”
“…!”
동진이 눈을 깜빡였다. 동공이 커지며 진희를 담는다.
“동생이랑 노닥노닥 놀러 온 게 아니라고.”
“…누나가 놀러 온 것 같다고 하는 건 아니에요.”
“그럼 뭔데? 왜 다른 애들한테 반죽을 부탁해? 실력이 나쁜 것도 아닌 애가 게으름 부리면 보기 나쁘다, 너.”
“그건….”
동진이 주저했다. 그는 한참이나 머뭇거리다가 어렵게 말을 꺼냈다.
“지금 보육원에서 저만 특별 대우를 받고 있단 말이에요. 여기 학비하고 재료비는 주영모 원장님이 지원해주시는데, 여기까지 오는 차비는 보육원에서 내주고….”
“그래서?”
“원래 제 나이면 동생들 돌보고 기저귀 갈고 그런 거 해야 하는데, 다른 애들이 그걸 대신 해주고 있어서 여기 올 수 있는 거라서. 새벽에 세탁기 돌린 거 널고 차 타면 아무리 빨리 와도 그 시간이거든요.”
진희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지난주에 수업하는 일주일 내내 지각하면서 이제 와서 얘기하는 사정이 그거야?”
“옛?”
“처음부터 미리 얘기를 했어야지. 그럼 어른들이 뭔가 해줬을 걸 아냐.”
“괜히 변명하는 것 같이 보이잖아요.”
“더이상 말할 필요 없어. 내가 알아서 해결할 테니까.”
진희가 당당하게 선언했다. 그녀가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 ◈ ◈
그날 새벽, 임진혁은 숙소를 나오며 부모님께 전화로 인사를 드렸다.
“먼저 올라갑니다.”
“그래, 조심히 가고. 소망시에 또 들러라.”
“네.”
짧은 대화를 마친 진혁은 밴에서 내릴 채비를 했다.
고현 터미널에서 부산역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거기서 KTX로 갈아탈 예정이다.
제작진들이 마지막까지 아쉬워했다.
“그냥 저희가 데려다 드려도 되는데요. 조금만 돌아가면 됩니다.”
“괜찮습니다.”
다음 에피소드 촬영부터는 주영모와 새로운 게스트 쉐프가 진행할 것이다.
메인 작가나 김산호 PD 등 여러 사람이 진혁을 설득하려 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쓸데없이 기력을 낭비할 필요는 없어.’
누군가에게 열과 성을 들여 교육한다면 그 사람들은 내가 받아들여 직접 키울 사람들이어야 한다.
그래서 진혁은 이번에 얻은 교훈을 바탕으로, 지점의 장이 될 인재들을 선별해 직접 교육시킬 예정이었다.
“조심히 가세요!”
“예.”
제작진들이 탄 밴을 배웅하고 나서, 그는 무사히 부산행 버스를 탔다.
부산역에 도착해서 KTX에 타자마자 임진혁은 드라마를 켰다. 미리 숙소에서 구매하고 무선인터넷 환경에서 다운 받아두었다.
제작진들이 1화라도 같이 보자고 했지만 혼자 보고 싶었기 때문에 거절했다.
‘한 편만 보면 알 수 있어. 그리고 난 다음에 진희와 다른 애들을 어떻게 교육해서 점장으로 만들 수 있을지 제대로 된 프로그램을 짜는 거야.’
이번에 김춘배와 이남희를 가르쳐서 깨달음을 얻었다.
암시를 건 다음에 자신이 가르치고 싶은 만큼만 잔뜩 쑤셔 넣는 것은 소용없으며 스스로 할 마음이 들게 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그전에 확인할 건 미리 확인해둬야지.’
대신 마음 한구석에 자리잡혀있는 의문을 해소할 생각이었다.
“….”
별것도 아닌데 괜히 긴장이 된다.
오프닝이 시작하면서 스산하고 애처로운 풀피리와도 같은 가락이 처연히 흘러나왔다.
옆에 앉아 있던 중년 남자가 헛기침을 하며 눈치를 주었다.
“거, 이어폰 좀 끼고 보지.”
진혁은 가볍게 목례를 해 보였다.
“죄송합니다.”
주머니를 뒤적거렸으나 이어폰 같은 것은 당연히 없었다. 평상시에 음악을 듣지도 않고 드라마를 듣지도 않으니 당연한 일이다.
곤란한 상황이다.
그는 천장을 한 번 올려다보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창밖에는 새카만 지하의 벽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진혁은 결국 다시 스마트폰의 드라마 시청 앱을 켰다. 대신 이번에는 아예 소리를 꺼버렸다.
드라마가 시작되었다.
지하도의 벽처럼 검은 화면 위에 어렴풋이 달이 떠오르며 세상이 빛으로 물들어갔다.
심산계곡 깊은 곳을 배경으로 멀리 둥근 산봉우리와 직선처럼 쭉 뻗은 산맥이 비춘다. 그 아래로 구중궁궐 같은 건물이 보였다. 기와를 올린 목제 건물 변두리 한쪽 구석에 보이는 석탑들이 언뜻 눈에 띈다.
진혁은 그 지역을 알아보고서 어이가 없어 입을 벌렸다.
‘…여기는 거기잖아.’
들어가 본 적은 없지만 절 바깥에서는 본 적이 있다.
이야기는 익히 들어왔다.
정파를 선도하는 애국지사들이 모여있는 ‘그 절’이다.
본디 전각에서 보면 숭산이 한눈에 들어온다고 했다.
숭산의 둥근 부분이 부처님의 머리요, 직선 부분이 부처님의 몸이라 하여 일부러 그 광경을 밤낮으로 지켜볼 수 있는 위치에 소림사를 지었다.
무승들이 수련하는 모습을 부처님께서 굽어살피시며, 수련하는 이들 역시 부처님을 보며 힘을 얻을 수 있도록 하였다고 했다.
‘산문에 종루, 그리고 저긴 대웅전이잖아.’
점차 줌인 되면서 언뜻 보이는 건물 현판들 역시 이곳이 절간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진혁은 드라마에 전혀 몰입할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전부 비슷비슷한 중국 건물로 보일지 모르겠지만 그는 이곳이 어딘지 너무나 뚜렷하게 알 수 있었다.
‘숭산에 있는 이 정도 규모의 절이라면 거기밖에 없다고.’
소림사, 그곳을 배경으로 촬영했다.
교회에서 부처님 오신 날 행사를 하고 있는 격이다.
내용은 그리 복잡하지 않았다.
명문 제갈가의 방계 후손 제갈책은 부모를 잃고 고아로 떠돌다가 깊은 산에서 길을 잃어 헤맸다.
전날 밤늦게까지 비를 맞아 열이 오르던 그는 먼 곳에서 희미한 불빛을 발견해, 간신히 그 앞에 도착했다.
산골짜기에 있는 외딴 초가집 대문 앞에 쓰러진 그를 보며 닭들이 울부짖고, 닭 소리를 들은 아주머니가 문을 열고 나왔다.
“이게 누구야. 열 살은 되었니? 어디서 왔니?”
친절한 아주머니는 낯선 소년을 환영했다.
그것은 정말로 환영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었다. 재산이라고는 씨암탉 한 마리와 수탉 한 마리밖에 없는 가난한 여자다. 그녀는 수탉을 잡아 가마솥에 팔팔 끓여 허약한 제갈책에게 내놓았다.
“네가 내 아들을 똑 닮았어.”
그녀는 제갈책이 벗어놓은 헌 옷을 삶아서 빨면서 자신의 아들과 남편 이야기를 했다.
결국은 열병으로 남편과 아들을 잃었다는 슬픈 이야기였다.
험난한 산행으로 힘들어하며 열이 올라 드러누운 제갈책의 이마에 차가운 물수건을 올려주는 아주머니는 한순간이나마 행복해 보였다.
아주머니는 이름도 모르는 제갈책을 자신의 아들처럼 돌보았다.
닭고기를 먹고 회복한 제갈책은 한밤중에 부엌에 숨어들어 식칼을 훔쳐냈다.
“죽어라, 이 악마!”
그리고 그 아주머니를 칼로 찔러 죽여버렸다.
“…?”
진혁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1화만 보고 난 다음에 꺼버리려고 했는데 1화가 애매한 지점에서 끝나버렸다.
드라마가 꺼진 후 검은색이 된 LCD 화면에는 진혁 자신의 얼굴이 비추었다. 어이가 없는 것 같기도 하고 허무해 하는 것 같기도 한 표정이었다.
‘….’
진혁은 2화를 클릭했다.
지금까지 봐서는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이거 계속 봐야겠는데.’
그는 이 상황이 어떻게 되어가는 것인지 조금 더 지켜보기로 했다.
잊지 않고 자막도 켰다.
2화가 시작되자 곧 일월신교의 교인들이 나타나 교도를 죽인 제갈책을 압송해 갔다.
감옥이라고 하기도 어려운 어두운 동굴에 갇힌 소년은 양손과 발목이 묶인 채였다.
다른 쪽 벽에는 발목에만 사슬이 묶여 있는 또래들이 모여 있었다.
꾀죄죄하고 더러운 옷을 입은 어린애들은 전신이 묶인 제갈책을 피하며 한쪽 구석으로 모여들었다.
감옥 구석에 드러누워 손발이 묶인 채인 제갈책은 음침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꿈이 아니었어.”
비쩍 마른 어린애지만 그 눈빛은 늙은 생강처럼 맵다.
“큭, 큭큭크큭….”
그는 미친 사람처럼 웃어젖혔다.
“그 노파는 마교의 끄나풀이 맞았어.”
어둠 속에서 눈빛만이 형형하다. 소년의 목소리는 메아리처럼 잦아들었다. 대신 이제는 나레이션이 드라마에 깔렸다.
「내가 여든 평생 경험한 게 꿈이 아니라 전부 현실인 거야. 크크큭.」
진혁은 묵묵히 화면을 응시했다.
‘회귀자가 드라마 주인공인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