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38화
“진혁 쉐프 말인데, 체육 교사를 해도 잘했을 것 같아요.”
막내 카메라맨이 조그맣게 속삭이는 소리에 카메라 감독이 대답했다.
“체육 교사가 아니라 올림픽 코치가 아닐까? 뭘 해도 잘할 것 같은 사람이란 말이지.”
“평범하게 학교 다니다가 군대 갔다 오고 난 다음에 제과제빵을 배우면서 두각을 나타난 케이스인데요.”
“그럼 그냥 제과제빵에만 재능이 있나 보다.”
김산호 PD가 끼어들었다.
“진혁 쉐프 체력 좀 봐. 저 무거운 걸 가볍게 들고서 아무렇지 않게 뛰잖아. 올림픽 코치니 뭐니 할 필요 없이 국가대표 선수가 됐을지도 모른다고.”
“아버지가 빵집이 아니라 야구 코치를 하셨으면 야구 선수가 됐겠네요.”
“그렇지.”
제작진이 잡담을 나누는 동안에도 카메라맨은 카메라 렌즈를 통해 아름다운 풍경과 달리는 세 사람을 계속해 촬영했다.
모래사장이 아닌 아스팔트 길이다. 왼쪽에 쭈욱 펼쳐진 남색 바다에는 작은 파도가 넘실거린다. 해가 높은 시간, 흩뿌려진 은빛 점이 아름답게 반짝이고 작은 포구에는 조그마한 배들이 쪼르륵 밧줄에 묶여 있다.
바닷가를 배경으로 한 로맨스 드라마에서 연인이 등장할 것 같은 분위기지만, 실상은 다르다.
“맨날 가게 안에 처박혀서 타르트 만드는 것만 찍을 줄 알았는데.”
“진혁 쉐프 덕분에 버라이어티한 프로그램이 됐지.”
“지금 장르 완전히 스포츠물 아닙니까? 역경을 딛고 다 같이 달리는, 뭐 그런 거.”
중년 남녀가 헉헉거리며 엉망진창인 자세로 달리는 데 비해서, 임진혁은 전혀 자세가 흔들리지 않는다.
◈ ◈ ◈
김춘배는 죽어라 달렸다.
처음에는 온갖 잡념이 태풍처럼 휘몰아쳤다.
‘이런 달리기 따위보다 타르트를 더 많이 만드는 게 중요한데.’
몇 년간 수없이 많은 대출 서류를 만져오다 보면, 어느 순간 직감이 생길 때가 있다.
서류상으로는 아무 문제 없지만 실제로는 빌려주면 안 되는 기업이라는 사실을 구분할 수 있다.
어떤 것이 중요하고 무엇이 중요하지 않은지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것이다.
타르트를 굽는 것도 마찬가지다. 정확한 계량과 신선한 재료가 필요하다. 하지만 그 ‘신선한 재료’는 반드시 모두 모양이 예쁜 거로 골라 살 필요가 없다.
어차피 뭉개져 갈아서 브랜디와 함께 소스로 만들 것들은 덜 예쁜 것을 골라서 사용해도 된다.
‘아무리 값을 주더라도 상관없으니 신선한 재료를 써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적절한 값으로 재료를 사들인 다음에 너무 비싸지 않게 파는 게 중요해.’
그들이 처음에 책정했던 가격은 지나치게 높았다.
타르트 한 조각에 8천 원, 그리고 한 판이 몇만 원에 가까워진 가격은 나름 재료비와 인건비를 반영한 것이었다
전직 은행원답게 손해 보기 싫어서 내놓은 계산이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되었다.
‘어떻게 해서든 재료를 싸게 사들이는 게 더 중요해. 그리고 어떻게든 사람들이 호기심을 가질만한 물건을 만들어서, 일단 가게에 들어오게 해야 해. 이번에 축제 때 샘플로 주었던 타르트처럼 말이야.’
그는 듣도 보도 못한 신생 저축은행들을 떠올렸다.
고금리의 단기 저축을 미끼상품으로 끌어들여, 새로운 은행으로 오도록 한다.
하지만 보통은 신용등급이 높은 제1금융권의 은행을 이용한다.
지금의 자신이 그런 신생 저축은행이나 마찬가지인 처지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절로 무거워진다.
‘내가 여기서 왜 이러고 있지.’
달리던 발걸음도 저절로 축 처졌다.
은행 본점과 지점 합동 체육대회 때에도 중역이란 이유로 달리기는 하지 않았다. 이런 건 신입 사원들이나 하는 일이다.
화합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신입사원들을 다른 팀끼리 묶어서 이인삼각 달리기를 하게 시키는 것도 그냥 구경했다.
‘어린 것들이 근성 없이 힘든 척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들도 힘들었던 모양이다.
“계속해서 달리십시오.”
김춘배의 걸음이 뒤떨어지자. 임진혁이 옆에서 다가왔다.
그는 격려하는 것처럼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갔다.
“어어어?”
하지만 그 동작은 단순히 어깨를 두드리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효과를 보여주었다.
어깨부터 찬찬히 퍼지는 따끔한 통증이 전신을 향해 달려나간다. 그리고 에어컨 바람이라도 맞은 것처럼 온몸이 서늘해졌다.
기운을 조금 되찾은 김춘배는 계속해서 뛰었다.
20여 분이나 지났을까?
어깨가 축 늘어지고 골반이 흔들린다.
이제 달린다기보다 흐느적거리는 것에 가깝다.
처음에는 또렷하게 형태를 띠고 있던 생각은 점점 더 허물어졌다. 더 이상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다.
마침내 머릿속이 완전히 하얘진다.
사업에 대한 걱정도, 타르트를 어떻게 하면 맛있을 수 있을까 하는 고민도 전부 날아갔다.
“이제 여기까지입니다. 돌아가죠.”
김춘배는 헉헉거리며 숨을 몰아쉬었다. 두 발은 그 자리에 멈추었지만, 심장은 멈추지 않았다. 귓방망이를 때리는 것처럼 거센 심장 소리가 전신을 울렸다.
바닥만 보던 춘배의 시선이 우측을 향했다.
오른쪽 길 위에는 단골 횟집과 야외용 벤치가 보였는데, 당장이라도 가서 드러눕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저, 저기 가서 눕고 싶다.”
아내도 비슷한 마음인지, 가슴을 쓸어내리며 바닥을 계속 곁눈질했다.
진혁이 피식 웃었다. 그는 가방에서 얼음물을 꺼내 뚜껑을 열어 내밀었다.
“물 좀 드릴까요.”
“고, 고맙….”
김춘배는 말을 잇지 못하고 그대로 물을 들이켰다. 물병 바깥쪽에 촉촉하게 맺힌 물방울까지 핥을 기세였다.
“키야아.”
“후우우.”
이남희 역시 사막을 헤매던 여행자처럼 벌컥벌컥 물을 마셨다.
전에는 이렇게 상쾌해 본 적이 없다.
“여기보다 조금 더 가야 하는데, 오늘은 조금 속도가 늦습니다. 내일은 저기까지 힘내보죠.”
진혁이 굽이굽이 이어지는 골목 저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남희가 숨차하며 물었다.
“아니 진혁 쉐프님은, 허억, 힘들지도, 허억, 않수?”
“이 정도야 완전 군장하고 행군하는 것에 비교하면 별 것 아닙니다.”
“제대, 허억, 를, 언제 했길래.”
진혁은 대답하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
“자, 그럼 다시 가게로 돌아가겠습니다.”
◈ ◈ ◈
돌아가는 길은 오는 길보다 두 배 이상 시간이 걸렸다. 분명히 가는 데 30분, 오는 데 30분 달리기로 했는데 돌아오는 길에는 한 시간 가까이 걸린 것이다.
‘진기 없이 운동하는 법도 배워야지.’
가는 길에는 진혁이 틈틈이 두들겨 주며 진기를 주입해 주었지만 오는 길에는 그렇게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두 부부가 너무나도 힘들어하자 메인 작가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저 두 사람, 컨디션이 안 좋은데 타르트 이백 개를 만들 수 있겠어요? 축제에서 판매까지 해야 하는데.”
진혁이 장담했다.
“지금 상태가 제일 좋습니다.”
“예?”
“근육이 피로해서 쓸데없는 동작을 할 수 없게 되거든요. 타르트 재료를 담고 반죽하고 오븐에 넣는 동작 모두,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할 수 있게 될 겁니다. 오늘의 움직임을 기억하면 이후에도 제일 효율적인 동선으로 타르트를 구울 수 있습니다.”
김산호 PD가 검지로 턱을 문지르며 말했다.
“제과제빵이 아니라 무술 수련받는 것 같은데? 왜 그 무협 드라마 있잖아. 중국에서 런칭해서 엄청 잘 팔리고 있는 거.”
“아. <천마>요. 그거 엄청 재밌잖아요. 50화가 넘는데 진짜 매화마다 시선을 뗄 수가 없다니까요.”
낯익은 단어에 진혁이 미간을 좁혔다.
“‘천마’라고요?”
“진혁 쉐프도 한번 봐요. 요즘 우리 방송국에서 수입해서 방영하거든.”
“사람들이 배우 좋다고 난리에요. 왜 더빙이냐고, 자막으로 해서 실제 목소리 들어야 한다고 하잖아.”
“무술 연출을 정말로 잘해서 전투씬도 박력 있게 뽑았고 말이지.”
“어디서 볼 수 있습니까?”
“본방 따라가시려면 금요일 밤 10시고. 지난 회 따라잡아서 보시려면 다시 보기 앱 깔아서 하면 되는데요.”
진혁이 스마트폰에 앱 프로그램을 설치하고 나자, 보조 PD인 박하연이 원하는 드라마를 찾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진혁 쉐프님이 텔레비전 드라마에 관심 보이는 건 처음 봐요.”
“그러게.”
메인 작가가 웃으며 물었다.
“무협 좋아하세요?”
진혁은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글쎄요.”
그에게 있어 무협(武俠)이란 다른 이들이 생각하는 것과 무게부터 달랐다.
군대 가기 전에는 종종 무협 소설을 읽기도 했으나 제대한 이후에는 단 한 권도 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손으로 죽여야 했던 살수대의 동기들을 잊지 않았다.
협이란 허명을 좇으며 죽은 정파의 애송이를 알았고, 일월신교의 광영을 위해 목숨을 던진 수많은 교도들을 기억했다.
현실은 소설보다 잔혹하며, 소설은 그 일부를 극히 부족하게 담아냈을 뿐이다.
그러한 실제 경험과 유사한 이야기들을 보고 즐기거나 웃고 떠들 마음이 들지 않는 것은 어찌 보면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굳이 찾아서 볼 이유가 없다.
하지만 이 드라마에는 흥미가 생겼다.
‘지치면 최소한의 동작으로 움직일 수 있다는 이유로 일단 달려서 지치게 한 다음에 수련 시작하는 거, 내가 시킨 거잖아.’
사실은 삼류 무협지에서 보았던 거였다.
재능이 넘치는 혈도객을 따라잡지 못해 고뇌하던 광안마 놈을 굴리면서 일단 지치도록 달린 후에 검을 들라고 시켰다.
놀랍게도 어떤 놈들은 그렇게 배우면 어느 정도 실력이 늘었다. 그래서 나중에는 일월신교 전체에 그 가르침을 퍼트렸다.
‘나처럼 똑같이 삼류 소설을 읽은 놈이 그런 드라마를 찍었을 수도 있고.’
그는 만의 하나인 가능성을 점쳤다.
오랜만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어쩌면 그놈들 중의 하나가 현대에 있을지도 모른다.
잠시 신강의 위구르 자치구에 들렀을 때, 문양이 새겨진 빵을 발견했던 때와는 다르다.
그들이 과거에 있었던 흔적을 발견했을 때에는 기뻤으나, 누군가 현재에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은 완전히 다른 문제인 것이다.
‘일단 드라마를 봐야겠군.’
옷을 갈아입고 나온 김춘배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나왔다.
“미, 미안합니다.”
“많이 기다리지는 않았어요?”
“괜찮습니다.”
두 사람은 비틀거리며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진혁은 김춘배가 반죽하는 것을 눈여겨보았다.
‘….’
악에 받쳐서 반죽을 주물러대는 것을 보니 아직 멀었다. 최소한의 힘을 사용해서 반죽을 만들어야 하는데, 젖먹이가 젖을 빨기 위해 용쓰는 것처럼 안간힘을 쓰느라 엉뚱한 근육을 쓰고 있다.
진혁은 한숨을 쉬었다.
‘광안마 너는 재능이 없는 놈이 아니었구나.’
생각해 보면 그 녀석도 몸을 쓰는 데 둔하다뿐이지, 천안투마공을 개발할 정도로 머리가 좋았다.
다시 생각해보면 육체적인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도 천고의 기재라 불리던 혈도객과 비교해서 상대적으로 그렇게 보였던 것 뿐이다.
“반죽하는 동작 자체를 아예 따로 가르쳐야겠습니다.”
진혁이 중얼거리고 걸어갔다.
그 뒤에서 김산호 PD가 눈을 둥그렇게 떴다. 이종태 PD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럼 달리기만 가르치고 반죽하는 건 가르치지 않을 셈이었단 말이야?”
“설마요.”
박하연이 말했다.
“좀 더 잘할 거라고 기대하고 계셨던 거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