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32화
“정 씨 아닙니까? 카메라는 그냥 켜놓고 들어가면 되니까요.”
진혁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 다른 제작진들이 와하하 하고 웃었다.
막내 카메라맨 정호현이 정색하며 물었다.
“임진혁 쉐프님, 추리소설을 너무 많이 보신 거 아니요?”
메인 작가가 웃으며 말했다.
“그거 주영모 쉐프님도 말씀하셨어요. 쉐프님들이 다들 추리 드라마를 좋아하시나 봐요.”
“그래도 호현이일 수가 없는 게, 카메라맨이 놀면서 그냥 카메라를 보고만 있는 게 아니라서 그렇슴다. 보면 얘가 지금 카메라 3개를 범인이 잘 보이는 쪽으로 향하면서 줌인을 하고 있어요. 이 타이밍에 신고도 했고.”
카메라 감독이 설명해주었다.
“그렇군요. 정호현 씨, 실례했습니다.”
진혁은 납득했다.
“아, 아니에요. 다들 무슨 범인은 가장 범인일 것 같지 않은 사람이니 뭐니 하면서 얘길 하는데, 아니라는 증거가 있어서 다행이지. 허, 참.”
정호현이 농담을 섞어 투덜거렸다.
“제가 여기 카메라맨으로 들어오려고 몇 번이나 입사 시험을 쳤다가 떨어졌는데 말이에요. 고작 오백만 원 때문에 그걸 포기하겠냐구요.”
진혁은 정호현의 이야기는 듣지도 않았다. 그는 화이트보드에 적혀 있는 것들을 보며 여기에 있는 사람들을 둘러 보았다.
“정호현 씨 말고 다른 분들도 다 제외되었잖아요?”
“그렇긴 하죠. 주영모 쉐프님은 박하연 피디님한테 고기 굽는 법을 알려 주시느라 계속 마당에 있으셨대요.”
하연이 웃으며 말했다.
“덕분에 바비큐로 고기 굽는 법은 확실하게 알았어요. 중간에 자꾸 뒤집으면 안 된다고, 고기 옆을 떠나지를 못하게 하셨거든요.”
“작가님 팀은 세 분이 같이 거실에서 대본 리뷰했다고 하고.”
메인 작가가 거들었다.
“거실에서 주영모 쉐프님이랑 박하연 피디님이 다 보이거든요. 마당에서도 이쪽이 보이고.”
진혁이 물었다.
“임종태 PD님은요?”
“하연 씨가 고기 굽는 거 배우느라 자리를 뜨질 못하니까, 저랑 김산호 PD님이 같이 소주 사러 갔다 왔습니다.”
“법인카드로 계산해서 시간 다 찍혀있는 영수증도 있어.”
김산호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영수증을 보여주었다.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메인 카메라 감독이 말했다.
“우리는 왔다 갔다 하면서 고기 얻어먹었지.”
박하연이 맞장구쳤다.
“맞아요. 고기 굽자마자 계속 없어져서 제가 먹으려니까 한참 걸렸다구요.”
진혁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마당에서 감독님이랑 다른 카메라맨님들은 다 보이지 않습니까?”
“거실에서는 안 보이는데, 하연 PD님이 보는 동안 자리 비운 사람들은 없었대요. 심지어 이 사람들이 화장실도 안 갔어.”
진혁이 눈을 가늘게 떴다.
“제작진 여러분이 서로를 계속 보고 있는 건 아니잖습니까? 그러니까 잠깐 한눈판 사이에 누군가 화장실을 다녀올 수도 있고.”
메인 카메라 감독이 대답했다.
“그럴 수가 없는 게, 그 파티 장면을 전부 촬영하고 있었거든. 혹시 쓸까 싶어서.”
“아, 그래서 왔다 갔다 하셨다고 했구나.”
“촬영팀 중간에 딴짓하는 사람이 있었으면 바로 눈에 띄었을 거고. 작가님들이 나가려면 무조건 마당 쪽 문이나 그 옆의 정문을 통해서 나와야 되는데 그것도 불가능했으니까.”
“뭐, 제작진들 알리바이는 완벽한데요?”
메인 작가가 씩 웃었다. 그가 머쓱하게 말했다.
“그런데 사실 이렇게 탐정물로 갈 거면 우리 말고 마을 사람들을 조사해야 하거든요.”
김산호 PD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우리가 그렇게까지 하긴 좀 그래서 그게 문제야. 시사물도 아니고, 범죄 재현 프로그램도 아니고.”
“맞아. 그냥 재미로 하는 거지.”
주영모가 농담을 섞어서 말했다.
“사실 우리 중에는 동기가 있는 사람이 없잖아.”
박하연이 말했다.
“작가님, 피디님. 마을 사람들한테 물어보고 촬영에 동의한다면 괜찮지 않을까요?”
메인 작가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범인이 잡히면 괜찮은데 안 잡히면 별로야. 기만 있고 승전결이 없잖아요. 괜히 촬영 시간만 뺏기지.”
“그리고 우리가 찍어야 하는 사람들은 증인들이 아니라 용의자들인데, 그 사람들이 찍히고 싶어 하겠냐고. 의심받는다는 걸
“하긴 그건 그렇네요. 기분 나쁘겠다.”
“아니라고 밝혀지고 끝나면 괜찮은데, 끝내 누구도 범인인지 몰랐다~~이렇게 종결되면 안 되니까 말이에요.”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범인이 누군지 알게 된다면 그 시점에서 짧게 콘텐츠로 넣을 수는 있겠군요.”
“그렇죠. 프로그램 목적은 사실 제과제빵으로 가게를 살린다, 이거잖아요. 망해가는 타르트 가게가 잘 나갈 수 있게 도와주는 게 목적인데 거기서 엇나가면 곤란하죠.”
진혁은 턱을 괴고 있다가, 재미있는 아이디어를 하나 떠올렸다.
“…이렇게 하죠. 그럼 타르트 가게하고도 연관이 있고, 영상으로도 충분히 괜찮을 것 같은데요?”
김산호 PD가 손뼉을 쳤다.
“오. 진짜 괜찮은데.”
“사장님 부부가 허락해주실까요?”
“당연히 좋아하시겠지! 가게가 더 노출될 거 아니에요.”
제작진들이 각각 이야기하는 사이에 주영모가 입을 열었다.
“자네, 젊어서 그런지 정말로 독특한 아이디어를 잘 낸단 말이야? 정말 괜찮구만.”
◈ ◈ ◈
제작진들이 떠난 직후, 두 부부는 서로 얼굴을 마주 보았다. 이남희가 입을 열려고 했다가 머뭇거렸다. 김춘배는 입을 열어 천천히 말했다.
“기분이 이상해. 어쩐지 며칠간 꿈을 꾸고 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자신이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 명확하게 표현할 수 없었던 이남희가 그 표현에 열렬히 공감했다.
“당신도 그래? 나도 그래….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이 기분이 대단히 좋았는데 말이야. 무슨 일을 해도 잘 될 것 같고. 도둑질을 당했는데 별로 불안하지도 않았어. 스무 살 때 당신하고 결혼할 때 이후로 이런 느낌이 든 적이 없었는데.”
감정보다는 현실적인 면을 중시하던 아내는 은퇴해서 가게를 한다는 계획을 계속해서 반대했었다. 김춘배는 한정된 자금을 운용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알고 있었기에 어렵게 아내를 설득했다. 새로운 현금 수입이 들어오는 뭔가를 하지 않는 한, 두 사람은 몇 년 안으로 돈이 다 떨어질 것이라고 몇 번이고 반복해 설명한 끝에 간신히 이해시킬 수 있었다.
원래 치킨집을 하려고 했는데 아내가 예쁜 카페들을 몇 군데 가 보더니 제과제빵을 하자고 했다. 제과제빵 학원을 다니고 새로운 것을 배우면서 즐거워하던 아내는 막상 가게를 열고 적자가 계속 나자 비관적으로 변했다. 퉁명스럽고 불퉁하게 변한 아내는 여기저기 물어보더니, 텔레비전 출연이라는 엉뚱한 아이디어를 찾아왔다.
처음으로 서류를 제출한 프로그램에서 운 좋게도 촬영 대상으로 선정되자, 이남희는 크게 기뻐했다.
하지만 그것도 한순간이었다. 첫날 김춘배가 소변을 지려버리고 남희는 엉망진창으로 타르트를 구워내는 모습이 찍히고 나서, 그녀는 모든 걸 다 그만두고 싶어 했다.
그리고 그 무서운 청년과 이야기한 후에 둘 다 생각이 바뀌었다.
‘갑자기 다 잘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 처음에 계획을 세웠을 때처럼 말이야.’
오랜만에 아내가 솔직히 속마음을 고백하는 모습을 보자, 김춘배는 딱딱하게 굳어있던 마음 한구석이 부드럽게 사르르 녹는 것을 느꼈다.
‘꿈이란 게 없이 현실적으로만 살던 사람이, 내 꿈을 따라가 주는 것만 해도 얼마나 고마운 일이야.’
춘배는 아내의 두 손을 꼬옥 잡았다.
“아마 우리가 텔레비전에 나와서 들떠서 그런가 봐.”
“그런가? 아직 방영되려면 멀었는데 말이지! TV 출연을 하면 사람이 바뀐다던데.”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이남희는 무언가 생각하는 듯 멍하니 앉아 있었다. 천장을 보자 전혀 의식하지 않고 있었던 카메라가 눈에 보였다.
생각해보니 지금도 촬영 중이다. 남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여보, 멍하니 보고 있으면 뭘 해? 당장 일부터 하자.”
“그러게, 방금 연습한다고 각서도 썼는데 말이야.”
김춘배는 각서를 벽에 붙였다. 이남희는 각서 이야기를 하니 문득 떠올라, 당장 계좌부터 확인해 보았다.
“진짜로 오백만 원을 보내 줬어!”
그녀는 눈알을 데굴데굴 굴렸다.
“그렇게 어려 보이는 청년이 아무 사이도 아닌데 이렇게 큰돈을 덥석 빌려주다니! 혹시 그건가?”
이남희는 가게 한쪽에 걸려 있는 가족사진을 가리켰다. 부부와 두 딸의 사진이었다.
김춘배가 대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거라니?”
“다른 속셈이 있는 게 틀림없어. 우리한테 은혜를 입혀 놓으려고 한다고. 딸들을 소개시켜 달라고 하려고 그러나?”
이란성 쌍둥이인 두 딸은 어머니보다 아버지를 더 닮았다. 고슴도치같이 자녀를 아끼는 이남희와 달리 김춘배는 분별이 있었다.
그가 카메라에 들리지 않게끔 조심스럽게 말했다.
“여보, 우리 딸들은 안 이뻐.”
“말도 안 되는 소리! 우리 딸들이 세상에서 제일 예뻐. 거기에 착하기까지 하다고.”
“그 주영모 쉐프라는 사람도 그랬잖아. 원체 선량한 청년이라고.”
이남희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말도 안 돼! 세상에 착해서 돈을 그냥 주는 사람이란 건 존재하지 않아. 분명히 다른 속셈이 있는 거라고.”
“우리 잘되라고 그런 걸 수도 있잖아, 여보.”
“그러니까 그럴 이유가 없다니까.”
김춘배가 싱긋 웃었다.
“그럼 그 이유를 우리가 만들어 주면 되지. 지금 타르트를 최소한 백 개 이상 구우라고 했어.”
남희가 이마를 짚었다.
“재룟값이 얼만데 백 개나 구워.”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안녕하십니까? 배달왔습니다.”
“예? 저희는 주문을 한 적이 없는데요…….”
하얀 스티로폼 박스가 수북이 가게 앞에 쌓였다. 타르트를 백 개도 넘게 만들 수 있을 정도로 넉넉한 양의 과일이었다.
“그린워터 팜의 블루베리와 딸기요. 김춘배 님 아닙니까?”
“맞는데요.”
“주문자는 임진혁 님입니다.”
김춘배가 말했다.
“일단 받아두자, 여보.”
배달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곧이어 밀가루와 달걀 등, 다른 재료들까지 실려 왔다. 가게 앞에 산더미같이 쌓인 재료를 나르며 김춘배의 주름진 얼굴이 불그스름하게 물들었다. 그는 감격해 말했다.
“이건 타르트 백 개를 만들고도 남겠는데?!”
남희가 미심쩍어하며 말했다.
“백 개를 누가 먹어. 만들어도 다 버리게 될 거 아냐.”
“일단 우리는 열심히 만드는 것부터 해보면 되지. 백 개씩 만들면 분명히 실력이 늘 거야. 레시피도 있고 말이야.”
이남희가 고개를 저었다.
“전화해서 확인해 보고 나서 만들자. 뭔가 실수일 수도 있어.”
그녀가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이거 우리한테 다 돈 내라고 하면 어떡해?”
그때 김춘배의 핸드폰 벨 소리가 울렸다. 특징적인 트로트 노랫소리가 구성지게 울려 퍼지자 그가 말했다.
“이거 김산호 PD님인데?”
무거운 상자를 나르고 있던 춘배가 큰소리로 외쳤다.
“여보, 당신이 받아서 궁금한 거 다 물어봐.”
이남희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전화를 받았다.
“예, 여보세요. 네. 네?”
그녀는 눈을 크게 떴다.
“도난 사건 현장을 케이크로 만드신다구요? 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