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31화
파출소 순경이 조서 작성을 마치고 김춘배와 이남희에게 물었다.
“이번에 인테리어 잔금 때문에 현금 인출한 거는 누구누구가 알고 있었습니꺼?”
“현금을 인출한 농협 지점요. 현금 오백만 원이 없다고 다른 데서 갖고 오느라 하루가 더 걸렸습니다.”
“간판 가게 사장 김씨가 어제 수금을 하러 오기로 했다가 오늘이 되었으니까 김 씨도 알고 있었고.”
“간판 제작하는 일정이 그래서 하루가 미뤄졌네요.”
“그러면 저기 서울에서 온 촬영팀도 다 알고 있었겠네예?”
“예.”
“그밖에 다른 분들은요?”
“지금은 생각이 안 나요.”
순경이 자리를 떴다.
부모님과 함께 낚시에서 만났던 부부 둘이서 이야기를 나누던 중이었다.
진혁은 그 이야기를 얼핏 들었다.
“형부야 그렇지만 언니는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닌데.”
“그래요?”
“언니 의견이 확고하고 낄 때 못 낄 때 전부 껴서 자기 하고 싶은 말 다 하는 사람인데, 이번에 돈을 도둑맞은 사건이 너무 충격적이었나 봐요.”
아주머니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이상하다는 듯이 말했다.
“언니 성격에 원래 누가 돈 내놓으라고 할 때 내놓을 사람이 아닌데.”
“칼을 들고 협박하니 그럴 수도 있지.”
아주머니와 아저씨가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있으니 진혁은 더 한숨이 나왔다.
‘일주일만 있다가 바로 풀어줄 생각이었는데.’
그는 이남희와 김춘배 부부를 향해 걸어갔다.
그는 두 사람과 정면으로 눈을 마주쳤다.
“반갑습니다.”
“…!”
멍청한 눈동자에 생기가 돌아왔다.
‘일단 암시를 풀고 나서 진행해야겠어.’
두 사람이 연습을 게을리하건 말건, 더 이상 사건에 휘말리지 않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러다가 보이스 피싱이라도 당하면 또 번거롭게 될 테니 말이다.
진혁이 제안했다.
“당장 내일 간판회사 사장님한테 드릴 돈이 없어서 곤란하시지 않습니까?”
“아니, 왜 이렇게 어지럽지.”
“뭔가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나?”
두 사람이 정신을 못 차리는 사이에 임진혁은 강하게 밀어붙였다.
“두 분 형편이 어려워 보이고 저희도 촬영을 진행해야 합니다. 오백만 원을 빌려드릴 테니, 대신 최선을 다해 협조해 주십시오.”
그는 이 ‘협조’에는 아침 일찍 일어나 체력 단련을 하는 것부터, 두 사람이 소화해야 하는 연습량까지 전부 포함되어 있다고 설명했다.
“아니, 생면부지로 만났는데 그런 큰돈을 느닷없이 빌려주시면.”
김춘배가 얼떨떨하게 말했다. 이어서 이남희가 잽싸게 물었다.
“이자는 없어요?”
“예.”
“그럼 빌려줘요. 아유, 젊은 청년이 아주 고맙네.”
“서류에 서명하시고, 만일 제가 말씀드린 커리큘럼을 소화하지 못하셨을 때는 돈을 바로 갚으셔야 합니다.”
“아무렴, 우리가 그 정도도 못할까 봐? 당연히 할 수 있지.”
이남희는 당당하게 우겼다. 진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A4 용지 있으면 한 장 주십시오. 여기 각서 겸 차용증을 적게요.”
이남희가 글씨를 쓰는 동안 진혁은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암시가 없었다면 김춘배 부부는 강도가 들어왔을 때 좀 더 제대로 대응했을 것이다.
최소한 지금처럼 멍청하게 네 네 하면서 돈을 내주지는 않았을 터다.
카메라맨이 지켜보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 숨겨둔 돈을 찾는 척하며 경찰이 올 때까지 최대한 시간을 끌 수 있었을 수도 있다.
뒤늦게 제작진 중 두 사람이 이쪽으로 걸어왔다.
“이거, 사장님 부부가 촬영을 계속 하고 싶어 하실지 모르겠네요. 당장 돈 때문에 곤란하신 거 아닌지.”
“돈 때문에 문제가 있으면 오히려 계속 하셔야지. 근데 멘탈이 깨졌을까 봐 걱정이야.”
김산호 PD의 말에 진혁이 대신 대답했다.
“제가 임시로 돈을 빌려 드리기로 했습니다. 대신 더 적극적으로 레시피를 연습해 주시기로 했어요.”
주영모가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아니, 우리 진혁 쉐프가 거기까지 할 필요는 없잖아. 아무리 착해도 그렇지, 돈은 함부로 빌려주는 게 아니야.”
“차용증을 썼으니 괜찮습니다.”
“허, 사람이 너무 착해서 말이지.”
보조 PD인 박하연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그렇게 개인 돈으로 하지 않으셔도 되는데 말이에요. 못 받으면 어떡해요.”
“그럴 일은 없습니다.”
진혁은 이 상황이 누구의 책임인지 아주 잘 알고 있었고, 돈을 받아낼 자신도 있었다.
‘이런 상도덕 없는 도둑놈 같으니. 딱 봐도 모자란 사람들을 골라서 갈취를 해?’
그는 당당하게 도둑을 탓했다.
사마외도의 세력권에 있는 무림인이라면 그 누구라도 암시에 걸려 있는 사람에게서 물건을 훔쳐 가지 않았을 것이다.
정파인이라면 암시를 풀어주려고 했을 것이고, 사파인이라면 누가 암시를 걸었을지 두려워하며 그 자리를 떠났을 것이다.
하지만 이 시대에 강호의 도리는 존재하지 않고 도의(道意)는 땅에 떨어져 있다.
‘도둑이 도리를 모른다면 직접 가르쳐 줄 수밖에 없지.’
◈ ◈ ◈
제작진은 다시 상황실에서 회의를 하였다.
“일단 진행은 하신다고 하긴 하는데, 이대로 진행해도 될지 모르겠어요. 지금 엄청 화가 나셔서 그런지, 아주머니 성격이 또 불같아지셨더라고요.”
“눈앞에서 오백을 도둑맞았는데 그럴 수도 있지. 일단 촬영은 내일부터 재개하기로 했습니다.”
“앞으로 방향은요. 저 도둑 사건은 카메라에 내보낼 거예요?”
“사실 시청률에는 좋지. 현장에서 도난 현장이 찍힌 거니까.”
바쁘게 회의하는 가운데 진혁이 말했다.
“전 잠시 화장실 좀 다녀오겠습니다.”
진혁은 그 자리를 떠나, 아까 눈여겨봐둔 순경을 쫓았다.
날렵한 그림자가 골목과 골목, 건물과 창고의 지붕 위, 그리고 언덕을 뛰어넘었다.
일반인을 따라잡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순경은 20여 분 전에 출발했으나 진혁이 그를 따라잡는 데에는 1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 ◈ ◈
순경이 돌아가는 길에 파출소에 들어가기 직전, CCTV가 없는 구역에 도달했을 때였다.
주택 사이의 비좁은 골목길에서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젊은 순경이 뒤를 돌아보았다.
“?”
“내 눈을 봐.”
가로등이 불을 환히 밝힌 저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경에게는 골목길의 불이 전부 꺼진 것처럼 보였다.
눈앞의 어둠 속에서도 더 깊은 어둠이 서 있었다.
그림자 없이 칠흑처럼 검어, 언뜻 보면 사람처럼 보이기도 하는 어둠이 지옥에서 올라온 것 같은 목소리로 명령했다.
“아까 조사한 것과 사람들의 신상 명세.”
그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그대로 죽어버릴지도 모른다.
바늘이 뇌를 헤집는 것처럼 머리가 몽롱하며 전신이 떨려왔다.
가위에 눌린 것처럼 몸을 움직일 수가 없다.
순경이 부들부들 떨면서 입술을 달싹이는 동안, 그 어둠은 움직이지 않았다.
무언가 하나라도 실수하면 그대로 잡아먹혀 버릴지도 모른다.
“담당자는 한 명뿐이고 내일 출근한다라. 간판 가게 김 사장은?”
“으, 은제나 읍내에 있는 가게에 있서예.”
진혁은 농협 담당자와 간판업자 김 사장이 어디에 있을지 정보를 얻었다.
그들을 찾아갈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는 마지막으로 한 가지를 더 물어보았다.
“지금 경찰은 범인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나?”
“……말 많고 까탈스러운 서울 아지매로 소문난 이남희 씨가 돈을 너무 순순히 내 줘 가지고예. 마침 카메라가 촬영하는 타이밍에 일부러 도둑을 시켜서 돈을 빼앗기는 척 한 게 아닌가 싶슴더. 도난보험도 가입했기 땜시, 돈도 다 돌려받는다고 하더라고예.”
진혁은 미간을 좁혔다.
‘이 이남희 씨는 성격이 얼마나 더럽길래 사람들이 다 암시 때문에 의심을 해?’
진혁이 혼자 투덜거렸다.
그는 시옷타르트 사장 부부의 결백을 확신하고 있었다.
‘어차피 암시를 걸어놓은 동안에는 체력 단련과 제과제빵 훈련, 영양이 풍부한 세 끼의 식사, 수면과 용변밖에 못한다고. 음모를 꾸밀 정도로 정신이 팽팽 돌지 않아.’
그가 제대로 해결하지 않으면, 자작극으로 결론이 나 버릴 수도 있다.
전부 다 도둑놈 새끼 잘못인데 엉뚱하게 주인 부부가 손해를 입는 것이다.
‘경찰이 자작극으로 수사를 마치기 전에 빨리 처리해야겠네.’
가벼운 섭혼술의 결과 순경에게서 알아낸 사실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래도 동네가 좁아서 찾아가는데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겠어.’
진혁은 무능한 순경을 보면서 한숨을 쉬었다.
무림 세계는 비정했지만 부하들은 유능하고 착실했다.
부하에게 한 마디만 하면 알아서 범인 후보들을 잡아온 다음에 적절한 고문으로 자백을 토해낼 것이다.
가끔은 지나치게 고문을 잘한 나머지, 범인 후보 다섯 명 전부가 자신이 범인이라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체적으로는 쉽고 빠르게 좋은 결과가 나왔다.
그래서 뛰어난 고문자인 광안마는 미리 현장에서 범인만 알 수 있는 세부 사항을 확인해두었다.
서로 자기가 범인이라며 빨리 죽여 달라고 우기는 녀석들 사이에서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놈을 골라내면 진짜 범인이 누군지는 금방 알 수 있다.
‘부하라고는 원, 고양이 한 마리밖에 없으니.’
그나마도 자기가 듣고 싶은 말만 듣는 고양이다.
“!”
저쪽에서 작은 기척이 느껴졌다.
인간이 아닌 고양이였다.
고등어 무늬의 고양이가 멀리서 이쪽을 살피다가 별다른 일이 없어 보이자 훌쩍 도망갔다.
‘항구라서 그런지 이 동네에는 고양이가 많단 말이지.’
순경을 돌려보내고 진혁은 다시 상황실로 빠르게 돌아왔다.
“진혁 쉐프, 왔어?”
“예.”
“화장실 깨끗해?”
진혁은 빠르게 기감을 펼쳤다.
그가 방문하지 않은 화장실은 그럭저럭 멀쩡해 보였다.
그는 사실대로 대답했다.
“그저 그래요.”
메인 PD가 기다렸다는 듯이 물었다.
“진혁 쉐프는 아까 어디에 있었어?”
진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까 언제요?”
“강도당하는 동안에 제작진들이 어디에서 뭐 하고 있었는지 알리바이 노트를 짜고 있거든.”
메인 작가가 미소를 지으며 설명했다.
“저희 중에 범인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아마 이 지역에 연고가 있는 사람이지 않을까 싶어요.”
“그래도 이것도 콘텐츠가 될까 싶어서 시간대별로 조사 중이야.”
김산호 PD가 화이트보드에 쓴 표를 보여주었다.
그 표를 본 진혁이 눈을 크게 떴다.
‘이건 나한테도 도움이 되겠는데.’
순경은 이남희와 김춘배 부부의 자작극이라고 추측해서, 그 두 부부를 첫 번째 용의자로 두었다.
하지만 진혁은 두 부부가 강도에게 순종적으로 대응한 이유를 이미 알고 있었기에 그 가능성은 뒤로 제쳤다.
‘오히려 카메라가 어디에 설치되었는지 위치를 알고 있으니까, 모자와 마스크로 얼굴을 완벽하게 가릴 수 있는 각도를 알 수도 있지.’
촬영팀이 부부가 묘하게 순종적이었다는 이야기를 나눌 때 그 자리에 누가 있었는지 그는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손쉽게 돈을 가져갈 수 있는 만만한 먹잇감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어.’
진혁은 아무도 믿지 않았다.
그가 알고 있는 가장 잔인한 이들은 선량한 일반인처럼 가장해 사회에 섞여 있는 정파 놈들이었다.
제작진 모두 이 사장 부부가 순순히 오백만 원을 줄 것이며, 그 상황이 카메라로 녹화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그중에 용돈을 벌려는 쓰레기가 한두 명쯤 섞여 있을지도 모른다.
꼭 범인이 거제도 출신의 면식범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진혁 쉐프님?”
“그 시간에 저야 부모님하고 같이 있었죠.”
보조 PD가 장난스럽게 물었다.
“부모님과 진혁 쉐프 셋만요?”
“이남희 씨의 여동생 부부하고, 막썰어횟집 주방장님하고. 막썰어횟집 CCTV까지 하면 제 알리바이는 확실한데요.”
“와, 정 씨 못지않은 철통 알리바이네.”
“정 씨라니요?”
주영모 쉐프가 말했다.
“카메라맨 막내 정 씨 말이야. 카메라 화면 들여다보다가 경찰에 신고했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