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28화
“태극당도 아니고, 지금 시대에 누가 가게 이름에 당(當)을 붙입니까.”
“무슨 정치 당파 같잖아. 한국당이니 뭐니.”
주영모와 지재언이 반대했다. 반면에 사장 부부는 진혁의 의견에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이름입니다.”
“그렇게 해도 좋겠어요.”
지재언이 격렬하게 반대했다.
“아니, 안 좋다구요. 그 이름으로 바꾸느니 차라리 시옷이 낫겠다고! 타르트 가게라는 걸 여전히 알 수 없잖습니까.”
“나는 자기 이름과 얼굴을 붙이는 것에 찬성한다네. 그리고 일반 베이커리가 아니라 타르트 전문점이니까, 춘배 타르트나 남희 타르트가 좋겠어.”
제작진 두 사람의 반대를 마주한 임진혁이 생각에 잠겼다.
“음…, 그렇다면 춘남 타르트나 남춘 타르트가 어떻습니까? 두 분이 같이 하시니까요.”
“아주 좋습니다.”
사장 부부는 진혁이 어떤 이야기를 하더라도 계속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번에는 주영모 역시 끄덕였다.
“남춘이라. 남쪽에 봄이 온다고 생각하면 나름의 뜻도 있고, 뭘 파는 가게인지도 알 수 있으니까 아까보다 훨씬 낫네.”
“두 분 이름을 한 글자씩 땄을 때 다른 단어가 되니까 괜찮네요.”
“좋습니다.”
사장 부부가 같은 말을 반복하는 앵무새처럼 찬성하고 난 다음에야 다음 단계로 이야기가 진행되었다.
“지금은 하얀색에 상아색 시옷 글자만 하나 있는 모양인데요. 새로운 간판은 가시성 있고 기억에 남는 모양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지재언이 슥슥 종이에 스케치를 해갔다.
“간판에 사진 같은 걸 넣기도 하잖습니까. 그런데 두 분은 단순한 걸 좋아하셨으니, 사진보다는 글자만 하실 거죠?”
“하얀 바탕에 검은 글씨도 괜찮아. 그런데 흰색은 때가 타니까 장기적으로 보면 어느 정도 색깔이 있는 바탕색을 하는 편이 낫지. 특수 코팅한 흰색을 쓰면 때가 좀 덜 타긴 하지만 그래도 다른 색보다는 더 쉽게 더러워져. 이런 바닷가면 더 빨리 티가 날 거고.”
“검은색 바탕에 붉은색으로 글씨를 넣으면 좋지 않겠습니까?”
진혁의 의견은 묵살당했다.
“중국집이야? 아니, 요새는 중국집도 그런 간판은 안 해. 대체 <해와 달> 간판은 누가 고른 거야?”
“동업하는 바리스타님이요.”
“그래, 진혁 쉐프님은 간판 고르지 말자.”
“천재는 다른 건 잘 모른다더니, 임 쉐프님이 그런 천재 계열이라서 그런가 봐요.”
메인 PD와 메인 작가까지, 다른 제작진들이 난입해서 이것저것 색깔을 이야기했다. 그 어느 것도 검은색과 붉은색보다는 나을 것이라고 몇 번이고 거듭해서 말하는 통에, 진혁은 한쪽 눈썹을 추켜올렸다.
‘아니, 검은색과 붉은색이 어디가 어때서?’
춘배당이니 남희당이니 하는 이름이 무시당한 건 상관없다.
하지만 그는 검은색과 붉은색을 좋아했다.
지금이야 화학 염료를 써서 검은색이나 붉은색 옷을 구하기는 아주 쉽다. 하지만 옛날에는 둘 다 귀한 이들만이 쓸 수 있는 색깔이었다.
희귀한 흑목(黑木)을 벌목해 말리고 가루로 내어 천에 물을 들여야 검은색이 나올까 말까 한다. 한두 번으로는 부족하다. 흐리멍덩한 회색이 칠흑처럼 짙은 검은색이 되려면 열 번 이상 다시 물을 들여야 한다. 얼룩덜룩하지 않고 깔끔하게 제 빛깔을 내려면 숙련된 염색 장인이 밤을 새워서 꼼꼼히 일일이 수작업을 해야 하기에, 검은 비단은 귀하디귀했다.
붉은색을 내는 적홍화는 흑목보다는 조금 덜 귀한 재료였다. 하지만 적홍화는 이름과는 달리 적색보다는 노란색이 더 강했기 때문에, 그대로 염색하면 붉은색이 감도는 노란색이 될 뿐이다. 그래서 적홍화 씨앗을 차가운 물에 적셔서 노란 물을 빼고 난 후에야, 붉은 물을 들일 수 있다.
일월신교의 깃발이 바로 그 색깔을 썼다.
붉은색 바탕에 금실로 태양을 수놓은 일기(日旗)는 교주와 교주 직속의 수하를, 그리고 검은 바탕에 은실로 달을 수놓은 월기(月旗)는 소교주와 그 부하들을 뜻한다. 진혁은 아주 잠시 월기를 쓰다가 오랜 세월 동안 일기를 썼고, 선명한 붉은 색에 둘러싸여 지냈다.
그래서 자연 염료로는 내기 어려운 선명하고 진한 붉은 티셔츠 역시 마음에 들었다.
‘모처럼 좋은 색깔을 추천해 주었는데 말이지.’
암시에 걸려 나중에 후회할 결정을 내리기 전에, 누구라도 좋아할 만한 멋지고 훌륭한 색깔을 권유했는데 거절당했다.
‘내가 말하면 내 의견을 듣지만, 그 다음에 다른 사람들이 말하면 그 말을 듣고 있군.’
암시에 걸린 인간 2명은 진혁이 하는 말이 아니라 제작진이 하는 이야기에도 끄덕거리며 동의하고 있었다.
진혁은 그들이 프로그램 제작진이 아닌 다른 사람들의 말에도 무조건 동의하고 있는지 관찰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이런 디자인이면 이틀 내로 해드릴 수 있습니다.”
간판 제작자가 와서 대략적인 일정 조정까지 하고 나서 그날 촬영은 끝났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김산호 PD가 흥겹게 말했다.
“오늘 오후에는 진혁 쉐프가 알려준 대로 소스 만드시고, 내일 또 보자구요.”
“내일 뵙겠습니다.”
연습하는 모습을 촬영할 수 있도록 카메라맨 한 명과 보조 PD 한 명은 남기로 했다.
제작진들이 촬영용 밴을 타고 숙소로 돌아가는데, 진혁이 손을 들었다.
“오늘 촬영 다 끝났으면 저는 다른 데에 좀 가보겠습니다.”
“아, 부모님이 서울에서 내려오셨다고 했죠?”
“예.”
김산호 PD가 메인 작가에게 물었다.
“작가님, 내일 대본은 언제 나와요?”
“너무 밤늦게 들어오시는 것만 아니면 될 것 같은데요? 내일은 소스 시식이랑 신메뉴 언급하고, 그리고 음식 주문 방식이랑 광고 이야기를 주로 할 거예요.”
“그건 주영모 쉐프님 파트니까 적긴 적네요. 그럼 10시까지 오실 수 있나?”
“알겠습니다.”
“거, 부모님이 어디 계시는데? 내가 차를 불러줄게.”
“괜찮은데요.”
“아니, 아니. 이런 건 원래 사양하는 게 아니야.”
진혁이 거절하는데도 불구하고 주영모는 전화를 걸어 택시를 불러주었다.
결국 진혁이 택시 타는 것까지 확인하고 나서 제작진들은 자리를 떴다.
그는 아버지에게 문자를 보냈다.
[어디 계세요?]
아버지는 대답을 하지 않았지만, 어머니가 전화를 받았다. 진혁은 부모님의 위치를 확인하고 택시 기사에게 말했다.
“낚시 공원으로 가주세요.”
택시는 힘겹게 언덕길을 올라가기 시작했다. 걷는 것보다 더 느린 답답한 속도였다.
거리가 멀지는 않은 데 생각보다 오래 걸린다. 진혁은 중간에서 내릴까 잠시 고민하는데, 택시 기사가 대답했다.
“답답하지예? 지금이 조선소가 퇴근할 시간이라 그려. 저 사람들 나가고 나면 이쪽 방면은 금방 뚫려요.”
회색 건물에서 위아래가 붙은 연갈색 작업복을 입은 수십 명이 흩어져 나왔다. 그들은 쪼르륵 늘어서 있는 오토바이나 스쿠터, 그리고 자전거에 몸을 싣고 각자의 집을 향해 달렸다.
“그렇군요.”
“여기 골목만 나가면 금방잉께, 조금만 기다리슈.”
진혁은 입을 다물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산 위에 떠 있는 고가 도로를 지나 해안가를 달린다. 오른쪽에는 오래된 간판을 내건 횟집과 펜션, 그리고 세입자를 구하는 원룸 건물들이 띄엄띄엄 보였다.
왼쪽에는 바다가 화악 펼쳐져 있는데, 낡고 녹슨 배들이 줄줄이 밧줄에 매여 동실동실 떠 있었다. 잔잔한 파도 위에는 이끼 낀 스티로폼과 빈 플라스틱 통에 매인 뗏목들이 둥실 하니 올라와 있었는데,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진혁의 시선이 동동 떠 있는 뗏목들에 머물자, 묻지 않았는데도 기사가 대답했다.
“저거이 뭐냐믄, 조개니 뭐니 잡아서 저 위에서 작업해서 올라가는 거여.”
집 세 채는 너끈히 들어갈 만큼 커다란 뗏목도 보였다. 노랗고 파랗게 알록달록하게 칠한 펜션을 지나 조금 더 가자, 벤치가 줄줄이 늘어선 공원이 있었다.
바다를 향해 쭈욱 길게 뻗은 다리가 보이는 지점에 도착해서 택시가 멈추었다.
진혁은 돈을 내고 뒷좌석에서 내렸다.
‘그냥 걸어와도 됐는데.’
퇴근길에 북적거리는 동네라 사람 시선이 많다고 해도,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할 정도의 속도로 빠르게 움직이면 되니 별로 문제는 되지 않는다.
녹슬어 삐걱거리는 <낚시 공원>이란 팻말을 지나, 진혁은 발걸음을 천천히 옮겼다.
갈매기가 끼루룩 울며 양 날개를 펼치고 활공했다. 어깨에 짊어진 짐 없이 비상하며 창공을 노니는 갈매기는 한없이 자유롭고 가벼워 보였다.
한때는 진혁도 저렇게 홀로 자유로운 삶을 꿈꾼 적이 있었다.
‘암천대, 그리고 교도들, 지금은 가족들.’
그는 문득 지금 자신이 책임져야 하는 이가 몇 명인지 세어 보았다.
“부모님과 진희, 일봉이와 진영이 형…, 가영 씨하고….”
그가 자신만의 상념에 잠겨 있는데, 저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진혁아! 여기야, 여기!”
어머니가 폴짝폴짝 뛰면서 양팔을 흔들고 계셨다.
“지금 가요!”
진혁이 양팔을 벌려 보이며 이해했다는 몸짓을 했다. 몇백 미터 너머에서도 어머니가 만면에 미소를 띤 것을 알 수 있었다.
“진혁이 왔니?”
낚싯대를 드리우고 난간에 등을 기대고서 수면에서 눈을 떼고 있던 아버지도 입꼬리를 추켜올렸다.
“아버지, 왜 등을 돌리고 낚시를 하고 계시는 겁니까?”
임운정이 머쓱해 하며 콧잔등을 만지작거렸다.
“별 건 아니고.”
어머니가 큰 목소리로 외쳤다.
“왔다, 왔어!”
아버지가 늘어뜨리고 있던 낚싯대 끝부분이 거칠게 요동쳤다. 마디 굵은 거친 손이 분주하게 릴을 감았다. 투명한 낚싯줄이 바닷물에 젖어 햇빛에 비치며 은빛으로 빛났다.
“다 잡았다!”
낚싯줄로 연결된 수면 아래 발버둥 치는 묵직한 생명의 무게가 느껴진다.
수면 밑에 검은 그림자가 한순간 언뜻 비쳐 보였다.
아버지는 릴을 마저 감으며 낚싯대를 허공으로 추켜올렸다.
“어머!”
어머니가 낚싯바늘을 물고 있는 생물을 보고 탄성을 질렀다.
“웬일이야, 문어를 잡았네요.”
주먹만 한 문어는 꾸물꾸물 바닥에 달라붙더니 어딘가로 기어가려고 열심히 다리를 움직였다. 진혁은 문어의 뒷머리를 탁 쳤다.
“지금 때려죽인 거니?”
“아니요, 잠깐 기절한 겁니다. 아이스박스에 넣어 놓을까요?”
아버지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검지와 엄지손가락으로 낚싯줄을 잡아당겼다.
“기다려봐, 바늘부터 빼고.”
“여보, 여보. 이거 들고 있어 봐요. 내가 사진 찍어서 진희한테 보내 줄게.”
“그으래? 그럼 진혁이도 같이 찍어 줘.”
어머니가 스마트폰 카메라를 들이대며 웃었다.
“하나, 둘, 진혁아! 너도 좀 웃어 봐.”
진혁이 어색하게 입꼬리를 추켜올리자 어머니가 활짝 웃었다. 그 미소를 마주 보니 진혁 역시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벙실벙실 웃고 있는 부자를 보며 장은효가 촬영 버튼을 눌렀다.
“그래, 이제 좀 낫네.”
찰칵, 찰칵, 찰칵.
사진을 다 찍고 아이스박스에 문어를 넣고 나자, 옆에 있던 중년 남자가 기웃거리며 물었다.
“문어가 다 올라오네?”
그 일행으로 보이는, 등산복을 입은 아주머니 역시 궁금했는지 힐끔힐끔하더니 물었다.
“아니, 거기는 뭘 미끼로 썼길래 문어가 다 올라오나요?”
“그냥 크릴 새우를 썼습니다.”
“왜, 문어는 문어 미끼가 따로 있잖아. 그 스테인리스로 된 물고기 같은 거.”
“에기를 안 썼는데도 문어가 올라오네요. 신기하네.”
등산복을 입은 아주머니는 자신의 아이스박스 뚜껑을 열어, 안에 잔뜩 쌓인 물고기들을 보여주었다.
얼음 위에 놓인 고기들은 잡힌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저마다 꼬리를 펄떡거리는 것으로 보아 아직 살아있는 것이 분명했다.
“오늘 꽤 잘 낚았다구요. 참돔이랑 줄돔도 낚았는데, 문어는 보지도 못했어요.”
“우와, 오늘 조과가 좋으신데요?”
“대단하시네.”
“너무 많이 잡았지, 뭐. 우리 부부 둘밖에 없는데 이렇게 많이 잡아도 먹을 수도 없어요.”
아주머니가 씩 웃으며 제안했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이잖아요? 우리 요 앞 식당에서 이거 회 쳐 달라 할 건데. 세 분도 같이 가셔서 드시면 어때요? 둘이서 먹으면 너무 많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