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27화
“저하고 한 약속을 지키겠다고 강력하게 의지를 보이시더군요.”
진혁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세뇌를 한 것도 아니고, 섭혼술을 걸어 조종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암시를 조금 걸었을 뿐인데, 의지력이 워낙 부족한 나머지 마치 세뇌시킨 것처럼 말을 잘 듣는다.
거꾸로 물구나무서기를 하라고 하면, 안되는 능력껏 하다가 바닥에 머리를 처박아도 다시 도전하는 수준이다.
‘이 두 사람, 생각보다 더 나약해.’
그는 혀를 찼다.
무림인에게 마안(魔眼)을 이용해 섭혼술을 사용하려고 하는 경우, 상대방이 정순한 내공을 갖고 있을 때는 잘 통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일월신교의 섭혼술은 정파 무림인을 대상으로 꾸준히 발전해 왔다.
진혁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심안을 이용해 완전히 상대의 이지(理智)를 제압해 세뇌까지 할 수 있도록 기술을 갈고 닦았다.
그래서 민간인이 이러한 약한 암시에 저 정도로 반응할 줄 몰랐다.
MC 지재언이 오늘의 목표를 언급했다.
“오늘은 어제 실패하셨던 과일 타르트를 다시 구워주시기로 하셨습니다. 그리고 난 후에 인테리어나 메뉴, 영업 방식 등에 관련해 더 보완할 수 있는 부분을 전체적으로 함께 들여다볼 텐데요.”
MC가 말하는데, 사장 부부 두 사람은 지재언의 어깨너머에 서 있는 진혁을 힐끔힐끔 바라보며 눈치를 보았다. 진혁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두 사람이 순종적으로 대답했다.
“예.”
지재언은 눈을 크게 떴다. 어제와는 명백히 다른 대답이었다. 주영모가 물었다.
“인테리어 면에서는 완벽하기 때문에 더 이상 나아질 부분이 없다, 영업 방식이나 메뉴 역시 고칠 생각이 없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다시 한 번 두 사람이 눈알을 굴리며 진혁을 바라보았다. 진혁은 아주 조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예.”
“어제 말씀드렸던 것들은 기억하고 계시죠? 그대로 하시면 됩니다.”
“예.”
지재언과 주영모가 무슨 이야기를 해도, 이남희와 김춘배는 눈을 껌뻑껌뻑하며 계속 긍정적인 대답을 했다.
“예!”
군인처럼 일사불란하게 대답하는 모습을 뒤로 하며, 제작진은 모니터링을 위해 가게를 나섰다.
상황실로 걸어가던 중 김산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두 분 말이야. 묘하게 캐릭터가 바뀐 것 같은데?”
가게에 설치된 카메라를 통해 전송되는 영상을 들여다보며 지재언이 감탄했다.
“이야, 진짜 열심히 하시네요. 어저께 충격적인 사건이 많아서 오늘은 열심히 해야겠다고 생각하셨나 봅니다.”
“그러게 말이야. 어제는 이래서 안 되고 저래서 안 되고 뭔가 말이 많았잖아. 하룻밤 만에 저렇게 사람이 바뀐 모습을 보여주니까 뭔가 우리도 보람차다.”
진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지켜보았다.
먼저 두 사람 모두 손을 씻는 것부터 시작했다.
“그래! 저렇게 해야지.”
주영모는 기본적인 위생을 지키는 모습을 보면서 기뻐했다.
“아니, 우리 주영모 쉐프님이 엄청나게 좋아하시네요.”
“어제는 문제가 있었으니까 안 먹었는데, 오늘은 꼭 먹어야 되잖아. 손을 제대로 씻으니까 얼마나 좋냐고.”
카메라 아래에서, 김춘배는 머뭇거림 없이 반죽을 했다. 붙여놓은 레시피를 쳐다보지 않고 암기해서 하는 것만으로도 속도가 훨씬 빨라졌다.
이남희는 오븐 문을 열어보지 않고 타이머를 세팅해서 타르트를 제대로 구웠다.
굽고 나서 타르트지가 식기 전에 성급히 이것저것 토핑을 올리는 일 없이, 식을 시간을 충분히 주었다.
“어제보다 훨씬 낫네!”
주영모는 저절로 입꼬리를 올리며 어깨춤을 덩실덩실 추었다.
“기본대로만 해도 절반은 가잖아. 그래, 그래. 잘하고 있어.”
그는 뒤를 돌아보며 진혁에게 말했다.
“진혁 쉐프가 아주 제대로 가르쳤네. 하루 만에 이렇게 변하면 더 할 것도 없겠는데?”
화면 너머의 이남희는 타르트 크러스트 위에 커스터드 크림을 올렸다. 그리고 나서는 냉장고에서 설탕에 절인 블루베리를 꺼냈다. 어제처럼 과도하게 쌓지 않고, 적당히 도톰하게 올리는 정도로 마무리했다.
주영모는 숫제 눈물을 쏟을 것처럼 감격해 있었다.
“거의 다 되어가는구만. 이제 슬슬 일어날까?”
가게로 돌아가는 길에는 아예 어깨춤이라도 출 기세였다.
“주영모 쉐프님, 이 프로그램에 나오는 출연자 여러분들에게 있어서 제일 중요한 점은 어떤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지재언이 걸어가면서 물었다.
“솔직히 말해서 실력보다는 근성이 중요하지. 못한다는 지적을 받았을 때 그걸 인정하고 받아들이면서 바뀌려는 그 마음가짐이 중요해. 그런데 지금 김 씨랑 이 씨, 두 분은 지금 하루 만에 변하려고 노력하고 있잖아. 이런 모습을 보니까 아주 좋아요. 거제도까지 내려온 보람이 있어.”
임진혁은 뒷머리를 긁적였다.
‘이거 암시 풀면 바로 원래대로 돌아갈 텐데.’
그들은 특별히 변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근성이 대단한 것도 아니다.
그저 지금은 진혁의 암시에 걸려, 임진혁이 말하는 대로 고민 없이 수행하고 있을 뿐이다.
‘평생 암시를 걸어 놔야 하나?’
현재 암시를 걸어 놓은 기간은 고작 일주일.
제작진이 촬영을 위해 체류하는 동안만이다.
부부가 무엇 때문에 바뀌었는지 모르는 지재언과 주영모 두 사람은 기분 좋게 대화를 나누며 걸었다.
“어제 맛을 봤어야 비포 애프터를 비교할 텐데 말이야.”
“그건 제가 할 수 있죠. 어제 한 몸 희생해서 맛을 봤으니까.”
“하하! 그럼 제대로 비교해 달라고.”
마침내 타르트 가게에 도착하자, 이남희가 블루베리 타르트를 가지고 나왔다.
“오늘은 블루베리 타르트만 가지고 나오셨네요?”
“하나만 제대로 하라고 하셔서 그렇게 했어요.”
갈색으로 보기 좋게 익은 크러스트는 올록볼록한 왕관 모양이었다. 가운데에 소담히 담긴 진한 남색 블루베리는 조명을 받아 번들번들하게 빛났다.
어제와 달리 이남희 사장은 진혁이 지시한 대로 못생기거나 찌그러진 블루베리는 전부 골라내어 따로 버렸다. 그래서 모든 블루베리는 세공된 보석처럼 완벽하게 탱글탱글하고 동그랬다. 진주목걸이처럼 주렁주렁 겹쳐 쌓인 블루베리 사이사이에 언뜻 노르스름한 커스터드 크림이 비쳐 보였다. 향긋한 설탕 향기가 진했다.
“그럼 블루베리 타르트를 시식해 보겠습니다.”
주영모는 타르트를 살펴보더니 반 갈라보았다.
“잘 익었군.”
사실은 지나치게 익힌 감이 없지 않다. 하지만 어제보다는 나았다. 그는 신중하게 커스터드 크림 일부를 포크 위에 올려 냄새를 맡았다.
주영모가 뜸을 들이는 동안 지재언은 망설이지 않고 타르트를 그대로 입으로 가져갔다.
“어제보다 훨씬 단단한데요? 딱딱한 과자 위에 크림 올려놓은 느낌인데.”
입술에 묻은 커스터드 크림을 혀로 핥으며 지재언이 웃었다. 타르트를 맛본 주영모가 말했다.
“이거, 오늘은 크러스트가 오버 쿡 됐어. 덜 익은 것보다는 낫지만 바삭바삭한 게 좋지. 직관적으로 오븐의 온도를 알 수 없으면 오븐 온도계를 쓰는 게 좋겠는데.”
타르트 한 조각을 전부 먹어치운 지재원이 질문을 꺼냈다.
“그런데 임진혁 쉐프님은 맛보지 않으세요?”
진혁은 타르트 접시를 코 근처에 갖다 대지도 않고, 그저 내려다보았을 뿐이다.
“블루베리보다 설탕 향기가 더 진합니다. 설탕 향이 나쁜 건 아니지만 블루베리 향이 좀 더 좋겠습니다. 신선한 유기농 블루베리를 사용한다고 어필한다면 더 그렇겠죠.”
부부는 고개를 숙이고 정중하게 물었다.
“어떻게 하면 됩니까?”
“블루베리를 설탕에 절여서 쓰거나 설탕 시럽을 바르는 것보다 블루베리 브랜디 글레이즈를 만들어 바르는 게 낫겠습니다.”
“그게 뭐예요?”
블루베리를 갈아서 퓨레를 만든 후 브랜디와 설탕을 함께 섞어 만드는 소스다. 진혁은 레시피를 알려주었다.
“그리고 커스터드 크림도 다른 레시피를 알려드리겠습니다. 노른자를 두 개 더 써보죠.”
진혁은 새로운 커스터드 크림의 레시피까지 꼼꼼히 알려주었다.
“하루 동안 노력해 발전한 모습을 보여줘서 고맙네.”
주영모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어제 임진혁 쉐프가 조언한 것들은 빼놓지 않고 다 고쳤어. 그러기가 쉽지 않은데 말이야. 아직 완벽하지는 않지만, 이대로 계속 가면 어떻게든 될 것 같아. 정말 다행일세.”
“레시피에 대한 조언은 오늘은 이 정도면 될 것 같습니다. 한입에 너무 많이 먹으려고 하면 체하죠.”
메인 PD가 시계를 확인했다.
“인테리어에 몇천만 원 들였다고 간판 다는 건 절대 싫다고 하셨었는데. 지금도 그 생각은 바뀌지 않으셨습니까?”
“아뇨, 바꿀 생각이 있습니다.”
이남희가 대답했다.
“그럼 간판업자를 부르죠! 견적을 내봅시다.”
“뭘 할지 모르는데 어떻게 견적을 내.”
“그럼 일단 간판업자를 알아보기 전에 잠시 새 간판에 대한 회의를 하면 좋겠는데요. 어떻습니까?”
사장 부부를 포함한 출연자들 모두가 상황실로 자리를 옮겨, 둥근 테이블에 모여앉았다.
“지금 가게 이름은 그냥 ‘ㅅ(시옷)’이잖아요. 간판에도 그거 하나 달랑 쓰여 있고. 대체 무슨 의도로 만든 이름입니까?”
김춘배가 대답했다.
“타르트 모양요. 봉긋 솟았다, 먹음직스럽다는 느낌을 주고 싶었습니다.”
“뜻은 나쁘지 않네요. 귀엽고, 사랑스럽고.”
“그래도 지금 간판은 문제가 커요. 하얀 간판에 시옷이 있으면 뭐합니까, 읽을 수도 없고. 무엇을 파는지에 대한 소개도 없고.”
“난 산악용품점인 줄 알았어.”
“최소한 이게 무슨 가게인지는 알 수 있어야지 않겠습니까.”
주영모는 가게 주인의 의견을 고려할 수 있으며 현실적인 대안을 내놓았다.
“어제 가게 이름을 바꾸는 건 싫다고 했는데, 그럼 지금 이름 그대로 타르트를 붙이는 건 어떤가. ‘시옷 타르트’, 이런 식으로. 전화번호를 추가해서 새 간판을 만드는 거지.”
“시옷 타르트, 솟 타르트. 뭔가 좀 욕하는 거 같지 않아요? 세게 말하면 씨옷, 쏫이 되니까.”
이남희와 김춘배가 입을 모아 대답했다.
“가게 이름을 바꿔도 괜찮습니다.”
두 사람은 임진혁을 바라보며 말했다.
가게 이름은 바꾸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던 부부가 순순히 이름을 바꾼다고 하자, 토론하는데 시간이 더 걸렸다.
“그럼 브레인스토밍을 좀 해봅시다.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관심 없이 턱을 괴고서 듣고 있던 진혁이 말했다.
“여기는 거제도니까…, 흠. 거제 타르트가 어떨까요.”
김춘배가 진중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주 좋은 생각입니다.”
주영모가 미간을 찌푸렸다.
“음, 특색이 없어. 차라리 자기 이름을 내걸고 하는 게 좋지 않을까 싶은데. 사장님 성함이 김춘배셨으니까. 춘배 베이커리? 춘배 빵집? 춘배 타르트?”
김춘배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임진혁을 쳐다보았다. 진혁이 아닌 지재언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차라리 김남이녀가 낫겠는데요.”
진혁은 ‘거제’라는 지역 이름이 더 낫다고 생각했지만, 주영모의 제안대로 사장의 이름을 붙여서 다른 의견을 내 보았다.
“춘배당이나 남희당은 어떻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