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26화
이남희가 말했다.
“여보, 방송국 사람들이 아까 회의 끝나고 들른다고 했잖아.”
김춘배가 피곤한 표정으로 나와 문을 열었다.
“어서 오십시오.”
방문한 사람은 김산호 PD와 메인 작가, 그리고 임진혁이었다.
“잠시 이야기를 좀 해도 될까요?”
진혁을 본 김춘배는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섰다.
“예에에.”
그가 불안해 보이는 목소리로 말을 늘였다.
제작진 세 사람은 거실로 안내되어 가족 식탁에 둘러앉았다. 이남희가 깎은 복숭아를 내왔다.
“과일 좀 드세요.”
메인 작가가 이야기를 꺼냈다.
“지금 저희는 두 분을 도와드리고자 여기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주시기를 바래요.”
“오늘 불행한 사고가 있었지만….”
“빵이 제대로 익지도 않았다고 비난하는 게 어떻게 도와주는 게 되나요?”
“그래서 임진혁 쉐프님이 계신 겁니다.”
메인 작가는 부드러운 말투로 이야기하며 김춘배와 이남희를 설득했다.
“그래요.”
이남희는 마음을 조금 풀었다. 김산호 PD는 홍보 효과가 얼마나 좋을지 강력하게 말했고, 김춘배는 내내 침묵을 지켰다.
임진혁 역시 그냥 입을 다물고 듣기만 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럼 내일 오전에 다시 뵙죠.”
제작진은 촬영을 계속하겠다는 확답을 듣고 물러났다. 집에서 거리가 떨어진 주차장으로 걸어 돌아가면서 김산호 PD가 중얼거렸다.
“저 사람들, 촬영이 그다지 내키지 않는 것 같지?”
“하기 싫은 게 뻔히 보이는데 묘하게 협조하는 게, 뭔가 다른 이유가 있는 것 같아.”
“다른 이유는 무슨. 그냥 돈 때문이겠지.”
메인 작가가 손가락을 꼽으며 말했다.
“뻔하잖아. 제과제빵 장비니 인테리어니 뭐니, 가겟세 같은 걸 보면 퇴직금을 전부 쏟아부은 게 분명한데.”
“흐음….”
임진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부부가 집안에서 다투는 소리를 들었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일행 중 뒤쪽에서 여자가 헐레벌떡 달려오는 것을 제일 먼저 발견해 알려준 것은 그였다.
“저기 이남희 씨가 오는군요.”
진혁이 뒤돌아보며 여사장이 달려오는 방향을 가리키자 김산호와 메인 작가는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혹시 임 쉐프님하고 이야기를 좀 더 할 수가 있을까요?”
“저하고요?”
진혁이 미간을 좁혔다. 김산호 PD가 말했다.
“임 쉐프님, 괜찮으십니까?”
메인 작가가 살짝 윙크하며 진혁을 바라보았다. 진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라면 괜찮습니다.”
두 사람이 자리를 비키자, 이남희는 한참 동안 가게 형편이 어떠니 하고 의미 없는 말을 계속했다. 진혁은 전혀 귀담아듣지 않았다. 아무리 두드려도 대답이 없는 벽과 이야기하는 것과 같아 남희는 점점 더 지쳐갔다.
마침내 그녀가 본심을 털어놓았다.
“조금만 더 잘 될 수 있게, 저를 좀 가르쳐 주세요. 딸의 병원비가 필요해요.”
진혁이 어깨를 으쓱했다.
“오늘도 말씀드렸습니다만.”
“계약하셨잖아요, 저희 가게가 잘 되게 하기로.”
그가 눈을 가늘게 떴다.
“노력하실 수 있는 방향을 알려 드리기로 했지요. 오늘 벌써 몇 가지 조언을 드렸습니다만, 기억나시는 게 있습니까?”
진혁이 손가락을 꼽았다.
“아무런 비법도 알려 주지 않았잖아요.”
여자가 간절한 눈빛으로 임진혁을 응시했다. 그는 흔들리지 않았다.
“오븐 문을 자주 열지 말라고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그건 기본 중의 기본이잖아요. 임진혁 쉐프님이 프랑스에서 한 빵 대회에서 이겼다고 들었어요. 레시피도 무료로 공개하셨다면서요. 저희한테도 우리한테 그런 거 하나만 알려 주면 잘될 수 있어요, 제발요.”
그것들은 전부 거래였고, 적당한 대가를 얻었다.
돈을 얻지 않아도 그 외의 다른 것들을 충분히 얻어냈었다.
“지금 제가 개발해 판매 중인 레시피는 개당 1억 이상의 가치를 갖고 있습니다. 인센티브까지 합치면 그 이상의 돈을 벌어들이고 있지요.”
진혁은 어머니가 부탁한 대로 친절하게 현실을 알려주었다.
이남희는 절망에 빠진 것 같은 얼굴로 진혁을 올려다보았다.
-바스락
아내가 한참 동안 들어오지 않자, 뒤늦게 남편이 나오는 것이 보였다. 피곤해 보이던 중년 남자는 걸어오는 와중에 임진혁의 눈치를 보면서도 은근슬쩍 아내 앞에 섰다.
더 이상 진혁을 무서워하지 않는 게 아니었다.
그만큼 아내를 아끼는 것이다.
‘생각만큼 쓰레기는 아니군.’
임진혁은 머릿속에서 사내를 ‘삼류 무인도 못 될 쓰레기’에서 ‘가족을 위해 근성 있게 훈련하면 삼류 무인은 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쓰레기’로 상향 분류했다.
“1억은 없지만, 최대한 돈을 드릴게요.”
진혁은 피식 웃어버릴 뻔했다.
최강의 무공 비급을 찾아 떠도는 이들 생각이 났다. 기본 실력도 없는 주제에 비급만 갖게 되면 제일 강해질 것이라며 헛된 믿음을 가진 놈들이다.
자기한테 무슨 문제가 있는지도 전혀 모르고, 스스로를 돌아볼 생각은 하지 못한다. 실패의 원인은 외부적인 요인에서만 찾을 뿐이다. 그리고 끝내 파각(破却)하지 못한 새가 알 속에서 죽어버리듯 아무것도 모른 채 자신만의 세계 속에서 생을 마친다.
그런 놈들도 비급을 돈으로 살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진혁이 입을 열었다.
“지금 좋은 레시피가 없어서 이 상황에 처해 있는 것 같습니까.”
이남희는 당연하다는 듯이 열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그게 문제지요. 학원에서 가르쳐준 대로 팔고 있으니까요. 다들 진짜 비법은 가르쳐 주지를 않고.”
당연하게도 그런 종류의 비법이란 아무에게나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다. 진혁은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자영업을 이제 갓 시작해서 서툰 두 사람을 보니 어머니와 아버지가 생각났다.
부모님은 이제 사업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올랐고 아들인 자신이 돈을 보태 이곳으로 휴가를 왔다. 사업 초기에 얼마나 힘들었는지 여러 번 이야기한 적이 있다.
‘늦은 나이에 새로운 일을 시작하면 원래 힘들지. 거기에 병원비 부담까지 있으면 정신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망하는 건 순식간이야.’
어머니가 ‘친절하게 대해 달라’고 했던 말이 새삼스럽게 다시 떠올랐다.
진혁이 말했다.
“레시피를 함부로 알려주지 않는 이유는 당연히 아실 겁니다. 함부로 알려주었다가 여기저기 유출이 되면 곤란하니까 그렇죠.”
“레시피를 알려준다면 당연히 아무 데도 알리지 않을 거예요! 과일 타르트인가요?”
이남희가 희망에 차서 눈을 반짝였다. 반면에 김춘배는 어벙한 얼굴로 그저 듣고만 있었다.
진혁은 촬영 일정을 생각하며 말했다.
“사흘간 제가 말씀드리는 대로 행동하신다면, 나흘째 되는 날에 레시피 개발을 도와 드리죠.”
“뭘 시키려고요? 지금도 하라는 대로 다 하고 있잖아요.”
진혁이 서늘하게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
이남희가 생각에 잠기자 진혁이 설명을 덧붙였다.
“제가 뭘 말하든 그대로 하셔야 합니다.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 알려 주지도 않아도요. 한번 말한 것은 두 번 말하지 않습니다.”
이남희와 김춘배가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러면 정말로 우리 가게만의 새 레시피 개발을 도와주시는 건가요?”
그녀가 양손을 붙잡고 말했다.
“사장님도요?”
김춘배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가게를 오픈하고 나서, 친척들 외에는 아무도 오지를 않습니다. 이미 돈은 돈대로 계속 나가고 있는데 말입니다……. 제발 도와주십시오.”
그는 숫제 무릎을 꿇을 기세로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이남희가 함께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뭐든지 할게요, 제발요.”
“그럼 각서부터 씁시다. 그리고 내일 새벽에 달리기부터 시작하죠.”
“예에에?”
◈ ◈ ◈
다음날, 이른 시간부터 타르트 가게 앞은 분주했다. 아직 해도 뜨지 않은 시간부터 촬영팀이 옹기종기 모여 짐을 날랐다. 카메라 감독은 어두컴컴한 가게 앞에서 카메라와 조명들을 설치했다.
김산호는 작가 팀과 함께 최종 점검을 했다.
“좋아. 어제는 좀 방향이 다르게 나왔지만, 오늘은 괜찮게 나올 거라고.”
촬영 장비를 세팅하고 회의를 마치는 동안 동이 텄다. 새까만 하늘과 바다 사이로 빛의 띠가 점점이 퍼지다가, 마침내 백열하는 태양이 수면 위로 눈부신 몸을 드러냈다.
“바닷가에서 보는 일출이라니, 대단히 멋진데요.”
일출 시각에 맞춰 촬영을 하고 있던 카메라맨이 흐뭇해했다. 제작진 모두 해가 뜨는 모습에 시선을 빼앗겨 있는 동안, 멀리서부터 타닥타닥하는 소리가 자그마하게 들려왔다. 그 소리는 점차 커졌다.
“이 시간에 뭐야?”
김산호가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눈썹에 대고 눈을 가늘게 떴다. 그는 자갈이 깔린 해변을 달리는 세 명의 인영을 보고 신기해했다.
“이 시간에 달리기하는 사람이 다 있네.”
“해변에서 조깅이라니 로맨틱한데요?”
하지만 그 세 사람이 가까워져 오면서 누군지 알 수 있게 되자, 제작진들은 깜짝 놀랐다. 김산호 PD는 눈을 크게 뜨고 자신이 제대로 봤는지 다시 한 번 살폈다.
“아니, 저 세 사람이 왜 이 시간에 달리고 있는 거야?!”
김산호 PD가 경악했다.
“안녕하십니까.”
“임진혁 쉐프!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당연히 페이스트리 쉐프 두 사람은 숙소에서 자고 있는 줄 알았다. 제작진이 미리 와서 세팅하는 동안 출연진들은 조금 더 휴식을 취하고, 메이크업과 헤어 세팅을 하게 되어 있다.
김산호 PD는 이 상황이 어떻게 된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어 눈알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반면에 진혁은 태연하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셋이 같이 조깅을 했습니다.”
“조깅요?!”
진혁은 멀쩡했으나, 부부 두 사람은 매우 지쳐 있었다. 이남희는 허리를 숙인 채 양 무릎을 잡고서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김춘배는 숫제 벤치 위에 그대로 누워 헉헉거리고 있었다.
“이렇게 힘들어하시는데 촬영을 어떻게 합니까. 자기 체력 관리는 알아서 하셔야죠.”
“저거 다 엄살이에요. 십 분 정도면 금방 회복하실 겁니다.”
진혁은 사장 부부의 어깨를 톡 톡 두드려 주었다.
극히 소량의 진기만을 불어 넣어주었는데도 두 사람 모두 기운이 도는지 벌떡 일어났다.
진혁이 차분히 말했다.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 깃드는 법입니다. 지금 두 분 다 기가 아주 허하고 몸이 좋지 않아, 자영업을 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체력이 준비되어 있지 않습니다.”
카메라 감독은 말없이 이 모든 광경을 촬영하고 있었다. 김산호 PD는 이마를 짚었다.
“그래요, 뭐. 두 분이 괜찮으시다고 하면…, 아니 친하게 지내는 건 좋은데….”
오늘의 촬영 방향 역시 완전히 바뀌어버려야 할지도 모른다. 김산호가 한숨처럼 말했다.
“다음부터는 이런 일이 있으면 저희한테 말을 해 주시죠. 같이 촬영을 해야 했는데.”
같이 조깅을 한다면 어제 만나서 의논을 했을 텐데, PD는 들은 것이 없었다.
이남희가 궁금해하며 물었다.
“이런 아줌마가 뛰는 걸 촬영해서 뭐하려고요?”
“두 분이 얼마나 열심히 사는지 시청자분들이 보면 좋죠.”
숨을 좀 가다듬은 김춘배가 꾸벅꾸벅 인사를 했다.
“어제는 늦어서 죄송합니다.”
“아, 예예. 괜찮습니다.”
오늘의 주인공인 타르트 가게 부부가 땀을 씻으러 가게 안쪽으로 들어가자, 김산호가 뒷머리를 긁적였다.
“저 두 사람, 어제하고 태도가 많이 다른데?”
“엄청 깍듯한데요.”
메인 작가와 피디 두 사람이 의아해하자 임진혁이 덧붙였다.
“어제 죄송했다고 사과하고 싶다고 하시더라고요.”
“아니, 사람은 그렇게 쉽게 바뀌지 않는다고. 진혁 쉐프,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