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님의 베이커리-323화 (323/656)

제 323화

여사장이 민망해하며 칼을 다시 들었다.

“네에, 네에. 제가 하지요.”

그녀가 타르트를 가르자, 가운데에 봉곳이 솟아 있던 블루베리 산이 그대로 무너졌다. 진보랏빛 구슬이 떼구르르 굴러 테이블보 위에 알알이 뿌려지고 엉클어지며 일부는 바닥에 떨어져 그대로 엉클어졌다.

“아이쿠!”

“읏차!”

주영모의 새하얀 바지와 백구두에 보랏빛 얼룩이 튀었다. 지재언 역시 검은색 구두와 흰 양말 사이에 블루베리가 뭉개지며 물이 들었다.

하지만 진혁은 팔짱을 끼고서 뒤로 한 걸음 물러났을 뿐인데, 묘하게도 블루베리들이 그만을 피해갔다.

“아니, 요놈의 블루베리들이 진혁 쉐프만을 피해 가네.”

“지금 직접 피한 겁니까?”

“운이 좋았죠.”

기막으로 튕겨내면 지나치게 눈에 띄므로 아주 살짝 방향을 바꾸기만 했다.

여사장이 한 조각씩 자를 때마다 위쪽에 남아있던 블루베리들이 굴러가고 무너지며 뭉개졌다. 블루베리가 흩어져 조금만 남아 있는 타르트는 마치 음식물 쓰레기처럼 보였다. 그녀가 쩔쩔매며 말했다.

“이거, 한 조각씩 드셔 보시어요.”

주영모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타르트가 담긴 접시를 받았다. 그는 먼저 타르트를 반으로 갈라 단면을 살폈다.

MC 지재언은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며 자신 몫의 타르트를 포크로 찍어 입으러 가져갔다.

여사장이 마지막으로 진혁의 앞에 타르트 접시를 놓았다.

진혁이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맛보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예?! 그게 무슨 소리예요!?”

“이거 타르트 시트가 덜 익었습니다.”

이제 타르트를 막 입에 집어넣었던 주영모는 휴지에 타르트를 퉤퉤 뱉어냈다.

“꿀꺽.”

영문을 모르고 놀라 삼켜버린 지재언은 입을 다문 채 눈을 크게 떴다.

“이거 먹어도 되는 겁니까?”

“뭐, 죽지는 않을 겁니다.”

입가를 휴지로 닦아낸 주영모가 떨떠름하게 물었다.

“임진혁 쉐프, 맛도 보지 않은 타르트가 덜 익은 줄은 어떻게 알았나?”

“보면 알 수 있지 않습니까?”

“뭐?”

“그게 안 보여요?”

진혁이 의아하게 묻자, 다른 사람들이 조용해졌다.

“맛을 보고도 긴가민가했는데 어떻게….”

“타르트를 구울 때 오븐 문을 계속해서 열었다가 닫았다가 했지요? 서른세 번 동안.”

“….”

“그러면 오븐 온도가 충분히 올라가지 않아서 제대로 익지 않습니다.”

블루베리 타르트와 스트로베리 타르트, 애플 타르트 역시 같은 오븐에서 구웠다. 다른 타르트를 가지고 오던 여사장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 그럼….”

진혁이 차갑게 말했다.

“당장 냄새만 맡아도 밀가루 향이 확 풍기는데 말입니다. 몰캉몰캉하고 촉촉한 것이, 보기만 해도 안 익은 게 확실한데 이걸 구분하지 못하고 손님에게 내놓으면 어떡합니까. 이건 아예 발효부터 제대로 안 된 겁니다.”

주영모가 덧붙였다.

“덜 익은 반죽은 살모넬라균이나 다른 박테리아가 번식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먹지 않는 걸 추천하긴 합니다. 지재언 MC, 그만 먹지.”

“아, 이거. 하하하.”

메인 작가가 신음을 흘렸다.

분명히 대본을 다시 짰다.

타르트를 맛본 다음에 맛에 대한 평가를 하고, 다 함께 머리를 맞대고 의논한 후 타르트에 대한 솔루션을 내놓는다. 동시에 가게에 대한 전반적인 평가를 거쳐 거듭나도록 돕는다.

하지만 지금 ‘맛’조차 볼 수 없을 정도로 완성도가 낮은 타르트를 내놓은 것이다.

“다른 타르트들 역시 맛볼 필요가 없으니 다시 가지고 들어가시죠.”

담담하게 이야기하는 임진혁 앞에서 사장 부부 모두 어찌할 바를 모르고 눈치를 보았다. 둘 다 기가 죽어 있는데 지재언이 황급히 말했다.

“그럼 회의를 거친 후 솔루션을 내놓겠습니다.”

◈          ◈          ◈

짧은 회의가 끝났다. 촬영진과 출연자들은 자유시간을 얻어 뿔뿔이 흩어졌다.

“결론이 이미 정해져 있는 회의였어.”

중얼거리는 주영모에게 진혁이 말했다.

“그냥 제과제빵의 기본을 가르친다, 이건데. 굳이 우리가 아니라 누가 와도 가르칠 수 있는 것 같습니다만.”

“가게 전체적인 것도 손을 봐야 하는데, 일단 내일 하루는 제과에 초점을 두자고.”

“어떻게 조금만 더 부드럽게 이야기해주실 수는 없을까요, 임진혁 쉐프님?”

“부드럽게 이야기하다가 손님들 다 식중독으로 죽겠습니다.”

“허허, 얘기할 건 해야지.”

주영모가 임진혁의 역성을 들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진혁 쉐프, 오후에는 뭐 하는가?”

“일정이 있습니다.”

“뭐? 여기에?”

“부모님이 내려오시거든요. 원래 밤에 잠깐 뵙기로 했는데 오후에 여유 시간이 생겨서, 저도 따라가기로 했습니다.”

“허허, 참.”

배낚시를 좋아하는데 제대로 해본 적은 없다던 아버지다.

진혁이 거제도에 촬영차 내려간다는 이야기를 듣고 지금이 전갱이 철이라며 같이 오고 싶어 하셨다.

“결혼하고 처음으로 가는 여름 휴가라고 부모님 두 분 다 아주 즐거워하고 계세요. 동네 빵집이 문을 닫으면 안 된다고 고집부리시던 아버지께서도, 믿을만한 직원이 있으니 맡기고 떠날 수 있다고 어렵게 마음을 먹고 출발하셨죠.”

“여름 휴가라면 갈 곳이 여기저기 많은데 왜 하필 거제도로 오셨대?”

“아버지께서 배낚시에 대한 로망이 있으시대요. 마침 물때도 좋고 바람과 날씨도 최고라고 하시면서 졸라서 어머니가 양보하셨어요.”

유럽에 가보고 싶어 하던 어머니는 못 이기는 척 아버지에게 져 주었다.

“촬영 스케줄이 일주일 내내 있는데. 끝나자마자 부모님을 모시러 가면 피곤하지 않겠어?”

“이 정도로는 멀쩡합니다. 그럼 저는 먼저 가보겠습니다.”

“그래, 조심해서 다녀오고, 내일은 새벽부터 촬영이니 너무 늦지 말고.”

◈          ◈          ◈

숙소 밖으로 나온 진혁은 거제도 전체에 기감을 퍼트렸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서다. 두 사람은 예약한 숙소 근처인 섬 한가운데 쪽에 있지 않았다.

“낚싯배를 타러 가셨나?”

서남쪽, 바다 근처에 있었다. 지도를 대충 훑어보니 장승포항 근처였다.

숙소로부터 대략 20km 정도 된다. 위치를 확인한 진혁은 가볍게 걷기 시작했다.

“이쪽이군.”

빌딩이나 건물을 피해 산 쪽을 선택했다. 중부 지방의 산맥에 비해 훨씬 낮아 올록볼록 귀여운 언덕을 두어 개 넘어가자 곧 바다가 훤히 보였다.

-부르르르

아버지에게서 연락이 왔다.

“아버지, 어디쯤입니까? 오늘 일이 빨리 끝났습니다.”

“그래? 그럼 너도 이쪽으로 올래?”

“그렇지 않아도 가려던 참이었습니다.”

옆에서 어머니가 반가워했다.

“잘됐다! 네가 나 대신 낚시를 하면 되겠다. 이이가 벌써 낚싯대를 2개나 빌렸어.”

“그냥 걸어만 두세요, 도와 드릴게요. 어머니.”

바로 뒤에서 불쑥 나타나 말을 거는 아들을 보고 장은효가 깜짝 놀랐다.

“아이쿠! 빨리 왔네. 여기에 있는 줄 어떻게 알았어?”

임진혁이 적당히 대답했다.

“진희가 낚싯배 예약해 줬잖아요, 위치랑 다 알려 줬죠.”

진희가 주소를 알려준 것은 사실이지만 그 지도를 참고하지는 않았다.

키 작은 남자가 어슬렁어슬렁 걸어왔다. 야구 모자를 눌러쓴 선장은 검게 탄 얼굴이 주름으로 쭈글쭈글했다. 그가 사투리를 섞어 말했다.

“그기 아들이여? 아~~~주 신수가 훤하구먼. 아들도 탈 겨? 자리는 있어!”

“진혁이 너는 일하고 왔는데 가서 쉬어야 하지 않겠니? 너무 피곤하지 않을까 몰라.”

“오늘 밤에 또 일은 없구?”

부모가 걱정하는데 진혁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같이 타죠. 얼마 드리면 됩니까?”

“돈이야 똑같지 뭐! 내려서 줘. 내려서. 저기 가서 승선자 명부만 쓰고 어여 와.”

진혁은 배 앞에 있던 조그마한 컨테이너 사무실로 들어갔다. 온갖 낚시용품을 주렁주렁 늘어놓은 벽 옆에 서 있던 낚시용품 가게 주인이 검은색 표지의 허름한 명부를 내밀었다.

“여기 이름하고 전화번호를 적으슈.”

승선 명부에 이름과 주소를 적자 가게 주인이 덧붙였다.

“자기 전화번호 말고 비상연락처요.”

진혁은 고민 없이 임진희의 전화번호를 적었다. 옆에 서 있던 낚시용품 가게 주인이 줄을 칭칭 감은 검은색 나무 낚싯대 하나와 몇 가지 물건을 내밀었다.

“이건 뭡니까?”

낚시에 대해서는 문외한인 진혁이 반문했다.

“이거이 낚시용 채비요, 채비. 봉돌하고, 바늘 채비지. 원래는 선상대를 써야 하는데, 루어대를 써도 상관없어. 지금 선상대는 다 나갔으니까, 루어대 대여비랑 다 해서 사만 원이요. 선비는 현금만 받구 채비는 카드도 받소. 짐 배가 출항을 해야 허니 이따 와서 내구랴.”

“지금 드리겠습니다.”

그는 대충 주머니를 뒤져 나온 현금을 쥐여주고 바로 배로 향했다.

어머니는 배 앞에서 건너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었다.

“어머, 어머. 이 배가 기우뚱거리네.”

뱃머리에 타이어가 달려 있는 조그마한 배는 약한 파도에 계속해서 흔들리고 있다. 타이어와 육지 사이에는 10cm 정도의 거리가 있었다. 미리 내린 아버지는 배로 올라오지 못하는 아내를 보며 격려했다.

“할 수 있어, 여보.”

선장이 발걸음을 서둘렀다. 그는 어머니 곁으로 지나가 배 위에 펄쩍 뛰어올라 크게 소리쳤다.

“후딱후딱 타시요! 타고 난 다음엔 일루 와서 구명정의 하나씩 입으시고.”

“어머니, 제가 먼저 내려갈게요.”

진혁은 가볍게 배 위로 내려앉아, 양팔을 벌렸다. 배는 여전히 흔들렸지만, 진혁은 흔들리지 않았다. 든든한 아들을 내려다보며 장은효가 침을 꿀꺽 삼켰다.

“그, 그럼 내려간다.”

하지만 그녀는 발을 떼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바다는 출렁거리고 파도는 끝없이 다가와 하얀 거품을 일으켰다가 다시 잦아든다.

‘발을 헛디뎌서 여기서 물에 빠지면 어떡하지?’

근거 없는 두려움이 뭉클뭉클 솟아났다.

‘내가 왜 배낚시를 따라온다고 했지?’

순간적인 두려움에 발이 굳어버렸다. 내려가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그녀에게 아들이 말했다.

“괜찮아요, 어머니.”

차분하고 듬직한 목소리였다. 올려다보는 고동색 눈동자 한 쌍은 더 이상 어린아이의 것이 아니다. 믿음직스러운 아들을 바라보며 장은효는 배 위로 뛰어내렸다.

“으앗!”

그녀는 한순간 발을 헛디뎠다. 하지만 단단한 팔이 장은효를 붙잡았다.

“어머니, 괜찮으세요?”

사뿐히 안아 내려놓으며 임진혁이 물었다.

“으응, 괜찮지.”

막상 배 위에 올라서니 배는 그리 흔들리지 않았다. 장은효가 안심한 표정으로 아들을 올려다보았다.

“고맙다, 아들아.”

“별거 아닌데요.”

“여보! 나도 있다고. 여기에 있어.”

옆에서 아내를 받으려고 팔을 벌리고 있었으나, 아들이 더 빨라 실패한 임운정이 중얼거렸다.

장은효가 남편을 보고 피식 웃었다.

“아들 본 좀 받아봐요, 여보.”

임운정은 미리 챙겨온 주황색 구명조끼를 내밀었다. 어깨 부분에 야광 반사 패치가 붙어 있는 자동팽창식 구명조끼였다.

“여기 구명조끼부터 입자고.”

선장이 외쳤다.

“출발합니더이.”

털털털털털털, 모터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자그마한 배는 파도를 헤치며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          ◈          ◈

‘배가 작긴 작은데.’

모처럼 아들이 낚싯배를 태워준다는데 돈을 낭비하게 할 순 없다고, 아버지가 고르고 골라 연락한 저렴한 배다.

진혁은 흘끔 배 후미를 바라보았다.

화장실이라고 설치해 놓은 조그마한 뒷간에는 배수 시설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다리 사이에 놓일만한 공간에 쇠판을 잘라내어, 오물이 바다에 바로 떨어지게 설치해 놓았다.

‘다음에는 좀 더 큰 배를 타시도록 하는 게 좋겠어.’

배에 대해서는 잘 모르기에 아버지가 알아서 하시도록 전적으로 위임했더니 이렇게 되었다.

작은 배는 하얀 포말을 뿜으며 넓은 바다로 전진했다.

테트라포드를 수없이 쌓아 만든 방파제를 지나고, 빨간 등대도 지났다. 챙 넓은 모자를 쓴 어머니가 한쪽 손으로 햇빛을 가리며 설레했다.

“이렇게 배를 타는 건 처녀 적 이후에 처음이야. 진혁이 덕분에 배도 타 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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