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21화
“아차.”
“무, 무슨 일이야?!”
버튼을 가운데에 두고 깔끔하게 두 개로 부서진 게임 패드를 보고 백진영이 기겁했다.
“너 어디 다치진 않았어?!”
항상 다루던 물건들만 다루었기에 좀체 하지 않던 실수다. 이 정도로 약한 줄은 몰랐다. 그가 정말로 분노했다면 게임 패드는커녕 이 오피스텔이 바닥까지 파열해 건물이 무너졌을 것이다. 감정을 제어하지 못한 것은 아니다.
조그맣고 말랑한 것이 부서지니 기분이 이상했다.
“어, 어.”
“다치지 않아서 그나마 다행이다.”
진영은 놀라서 임진혁의 손을 살펴보았다. 붉어진 곳 하나 없고 조각이 튀거나 하지도 않았다. 다친 데가 없는 것을 확인한 백진영이 뒤늦은 분노를 토해냈다.
“어제 배송돼서 오늘 뜯은 건데! 게임 하다가 부서졌으면 어쩔 뻔했어. 내일 당장 A/S 센터에 연락해서 따질 거야!”
백진영은 당연히 게임기 따위보다 진혁을 우선했다. 진혁은 미약한 죄책감을 느꼈다.
“내가 망가뜨린 거니까 내가 다시 사 줄게.”
“무슨 소리야! 넌 피해자야. 괜히 내가 하자고 해서 너까지 다칠 뻔했잖아.”
빠른 비트의 배경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백진영이 진지하게 말했다.
“페이스트리 쉐프한테는 손이 제일 중요한데 말이야.”
“…일단은 고마워.”
진혁은 여러 차례 백진영을 설득했으나, 결국 게임기를 새로 사주는 데 실패했다.
“됐고, 다음에 새로 사면 나랑 게임 한 판 하지.”
진혁은 미간을 찌푸렸다.
“….”
“지기만 하니까 재미가 없는 거야. 네가 지금 콤보랑 기술 같은 걸 몰라서 그러는데, 조금만 보면 금방 실력이 늘 거라고. 넌 손재주가 좋으니까.”
백진영이 신나서 말을 이었다. 그는 세르게이를 플레이하는 사람들이 콤보에 대해서 공유한 영상 링크를 이것저것 보내주기까지 했다.
진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캐릭터별로 콤보가 다르다는 거지? 알았어.”
“오락실에서 해도 재미있어. 오락실 버전은 조이스틱이랑 버튼이 달라서 익숙해지는 데 조금 시간이 걸릴 수도 있는데, 낯선 사람들이랑 같이 게임하다 보면 또 그게 신난다니까. 나도 보통은 오락실에서 해.”
임진혁은 백진영이 하루 종일 카페에서 일하고 퇴근하면 지쳐서 쓰러져 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의아해하며 물었다.
“언제?”
“…고등학생 때.”
“나도 그때는 꽤 했던 것 같은데.”
“그래? 그럼 다음에 같이 가자!”
얼떨결에 오락실에 갈 약속까지 잡았다. 진혁이 뒷머리를 긁적였다.
“이 빚은 다음에 꼭 갚을게.”
“빚 같은 소리! 네가 게임하다가 다칠 뻔했는데 이게 어떻게 네 잘못이야. 게임기 내구도를 저따위로 만든 회사 잘못이지.”
못내 사과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진혁은 집으로 돌아왔다.
◈ ◈ ◈
<해와 달>의 오픈 키친에서 빵을 만들고, 아카데미에서 학생들을 가르친다. 또한 일봉이와 유키코가 가르치는 학생을 불러 진도를 점검하기도 했다.
막상 임진혁과 백진영 둘 다 바빠서 오락실에 갈 시간은 없었지만,
그러는 사이에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 벌써 1달이 지났다.
촬영 날이 다가왔다. 임진혁은 스튜디오가 아닌 현장 촬영을 신기해하며 두리번거렸다.
‘여기도 조명 설치는 전부 하는군.’
촬영 현장은 놀랍게도 수도권 근교가 아니었다. 거제도 앞바다. 바닷가 횟집 사이에 끼어 있는 타르트 가게가 대상이었다.
주영모는 타르트 가게를 찾지 못하고 두리번거렸다.
“이 근처인가?”
횟집과 횟집 사이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상아색 건물이 있었다. 환하게 탁 트인 전면 유리창 너머에는 바처럼 스툴이 두어 개 놓여 있을 뿐이다. 아직 입주하지 않은 인테리어 사무실처럼 보이는 그 공간에, 진열된 빵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저기입니다.”
주영모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
“간판에 시옷 하나 달랑 있는 저기 말이요?”
“예.”
가까이 다가가자 가게 전면이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였다.
카운터 앞에는 빵이 아무것도 없는 작은 진열장이 보였다. 기껏해야 빵이 여섯 개쯤 올라올 법한 1단짜리 유리장은 투명하게 들여다보였다. 타르트는커녕 모닝롤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완전히 가린 부엌 안쪽에는 사람이 없었다.
카메라맨들이 조명을 설치하고 작업하는 동안, 메인 PD는 가게 주인에게 전화하겠다고 했다.
“저희가 온다는 걸 알고 있는데, 문 열어놓는 동안 잠시 자리 비우셨나 봅니다.”
그동안 주영모는 혼자 주문처럼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나는 여기에 도와주러 온 것이다…, 도와주러 온 것이다. 야단치러 온 것이 아니다….”
‘어떤 뇌 없는 새끼가 타르트를 이런 데서 팔아. 이렇게 돈이 남으면 불우이웃 돕기에나 기부하지, 왜 이런 데에 낭비를 해?’
주영모는 진심으로 하고 싶은 말을 목구멍 아래로 삼켰다. 벌써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다. 그는 시작부터 잘못되게 편집될만한 무언가를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그는 김산호 PD를 힐끔 바라보았다.
“이 가게 섭외는 보통 피디님이 알아서 하나?”
“신청한 가게들 중에서 저희가 찾아가 보고 최종 결정을 내립니다.”
“다음부터는 나도 같이 선정할 수 있었으면 좋겠네.”
이를 갈면서 말하는 주영모에게 김산호 PD가 굽신거리며 말했다.
“일정이 너무 촉박하지 않으면 가능한 한 그렇게 하겠습니다.”
‘지금 이미 일정이 바쁘니까 그렇게 하기 어렵다는 이야기군.’
MC 지재언이 두리번거렸다.
“사장님이 여기 오고 계신다고 하셨는데 말입니다. 보이질 않네요.”
바닷가 쪽에서 양복 입은 남자가 한 명, 이쪽을 흘깃흘깃 보면서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임진혁이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기 저 분 아닙니까?”
진혁은 뛰어난 시력으로 분명히 목적을 가지고 이쪽을 흘끔거리는 남자를 구분해 냈다.
“아! 저기 계신 가봅니다.”
주영모는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여기는 촬영하는 도중에도 이쪽에 유동 인구가 전혀 없네, 없어. 아무리 이른 아침이라고 해도 인기 있는 해변가면 사람들이 새벽부터 나와 있어야 하는데 말이지. 여름 아니야, 여름?”
“이 근처에 좀 흉흉한 일이 있어서 그런가 봐요.”
“아, 그 초등학생 살인 사건이 일어났던 장소가 이 근처입니까?”
“여름 피서객들이 그것 때문에 안 올 리는 없는데.”
“근처에 다른 해수욕장도 있는데 그쪽도 사람이 반쯤 빠졌다고 하더라구요.”
촬영 보조들이 수군거리는 말을 듣고서 주영모가 물었다.
“지금 불행한 사건 때문에 이 주변 상권이 일시적으로 악화되서 여기를 촬영지로 선정한 건가?”
김산호가 소곤거렸다.
“그것도 그렇고요. 여기가 그림이 예쁘게 나와요. 바다도 예쁘고, 가게도 예쁘고.”
주영모가 작은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예쁘면 뭘 해! 백 명이 와도 여기가 타르트 가게라는 걸 알지를 못하겠구만!”
“그것도 주영모 쉐프님과 임진혁 쉐프님이 도와주셔야 할 문제 중의 하나겠죠?”
“어디 한 번 보자고.”
◈ ◈ ◈
“여기까지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은행을 다니다가 은퇴하고 고향에 내려와 빵집을 시작했다는 50대 사장이다. 그는 이 더운 날씨에 넥타이까지 하고 완벽한 정장을 갖춰 입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주영모가 물었다.
“제빵사님은 따로 계십니까?”
“아, 저와 아내가 같이 합니다.”
‘조리복을 입지 않고 있잖아?’
진혁이 생각하고 있던 것을 주영모가 먼저 지적했다.
“그런데 양복을 입고 계시군요.”
“텔레비전에 나온다고 해서 오랜만에 양복을 입었습니다, 하하하.”
주영모가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무언가 말하려고 하다가 입을 다물었다.
임진혁은 호기심에 가득 차 고개를 갸웃거리며 남자를 쳐다보았다.
‘이 자는 지금 자신이 하는 언동이 전부 녹화되어 방송되고 있다는 사실을 잊은 건가?’
지적하고 싶은 사항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서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지 알 수가 없다.
‘어제 그 프로그램에서는 최소한 먹을 것이 있어서 그걸 먹고 나서 개선할 방법을 알려 줬는데 말이지.’
아무것도 없으면 조언을 해줄 수가 없다.
“지금 나와 있는 빵이 하나도 없는데요.”
“같은 업계에 있어서 잘 아시겠지만, 아시다시피 타르트는 원가가 비싸지 않습니까? 그래서 100% 예약제로만 받고 있습니다.”
MC 지재언이 끼어들었다.
“아하, 그러면 저희가 예약을 미리 했어야 하는군요! 대표 메뉴는 뭡니까.”
메뉴판조차 없는 가게다. 사장이 자랑스럽게 말했다.
“블루베리 타르트와 딸기 타르트, 그리고 사과 타르트입니다.”
“주영모 쉐프님, 어떻게 할까요?”
“세 종류 모두 하나씩. 얼마나 걸립니까?”
“3~4시간 정도 걸립니다.”
일반적인 홈메이드 블루베리 타르트를 평범한 주부가 만든다고 해도 걸리는 시간은 2시간 반이 채 되지 않아야 한다. 주영모와 임진혁이 눈빛을 교환했다.
“주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선불입니다.”
주영모가 답답한 듯이 지갑을 꺼냈다.
“얼만데?”
임진혁은 그저 지켜보고 있었다. 촬영 보조들이 뒤쪽에서 입을 가리고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보통 이런 상황에서 돈을 받나?’
‘허허.’
“한 조각당 8천 원, 한 판에 6만 원입니다. 세 판에 18만 원입니다.”
“하!”
주영모의 눈가가 떨리는 것이 보였다. 그는 5만 원짜리 네 장을 꺼내서 집어던지듯이 건넸다.
“여기요.”
“어…, 그런데 제가 거스름돈이 없는데요.”
“….”
지재언이 입을 벌리고 눈을 껌뻑였다. 주영모가 말했다.
“일단 파이부터 만들어보시게.”
“부인이 금방 올 겁니다. 같이 해야 하거든요. 제가 혼자서 할 수 없는 공정이 있어서요.”
‘파이를 혼자서는 못 굽는다고?’
임진혁은 어리석고 하찮은 인간을 흘깃 바라보았다.
한심해서 더 말을 덧붙일 것도 없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가게를 하려고 한 걸까?’
궁금한 것이 아니라 어이가 없다.
모기 한 마리가 앵앵거리며 빙글빙글 도는 것을 관찰하듯이 진혁은 지그시 사내를 바라보았다.
“커흑, 흑!”
사장은 갑자기 무릎을 꿇었다.
마침 주영모가 일그러진 표정으로 입을 열려던 참이었다.
무릎 꿇은 사내가 입고 있는 검은색 정장 바지 중앙 부분이 젖어 들었다. 코끝이 간지러운 암모니아 냄새가 풍기며, 검은색 바지 색깔이 좀 더 짙어진다.
무슨 일이 발생했는지 너무나도 뻔하다.
진혁은 눈을 깜빡였다.
‘딱히 살기를 뿌린 것도 아닌데.’
그저 한심하다고 생각하며 바라보았을 뿐이다. 진혁은 자신이 풍기는 기세를 조절할 수 없게 된 건가, 잠시 자신의 내면을 관조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한편 MC와 주영모는 야단법석이 났다.
“사장님 어디 아픈 건가?”
“아이고, 갑자기 무슨 일이십니까?”
“부인은 어디래?”
앞치마를 두른 부인이 도착한 것은 10분 후였다. 연락을 받은 아내는 조리복까지 챙겨 왔다. 남자는 아내의 부축을 받아 가게 뒤에 있는 집으로 돌아갔다. 집에서 샤워하고 평범한 티셔츠와 면바지로 갈아입고 온 남자는 간신히 제정신을 차려 중얼거렸다.
“갑자기 귀신이 나타난 것 같습니다. 등골이 오싹하면서 갑자기 소름이 쫙 끼치는 것이….”
남자는 그 공포의 원인이 진혁이라는 것조차 눈치채지 못한 것 같이 보였다.
‘제대로 살기가 새어나갔다면 심장마비로 급사했을지도 모르는데 말이야. 이전의 게임 패드도 그렇고, 내 자제력에 문제가 생겼나.’
“원래 신기가 있으셨나?”
“우리가 납량특집 촬영을 하러 온 것도 아니고 왜 귀신 이야기가 나오는 거지.”
촬영진들이 서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진혁은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이거 조금쯤은 신경 써줘야겠네.’
동공이 커지며 소변을 지리는 장면은 카메라에 아주 깨끗하게 촬영되고 말았다. 김산호 PD가 말하는 것을 보아 분명히 편집되지 않고 방영될 것 같다.
“그럼 오늘은 촬영을 하지 않고 쉬시는 것이 좋겠습니까?”
“아뇨, 아뇨! 돈도 내셨는데 타르트 맛은 보셔야죠.”
앞치마를 두른 50대 부인이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서울서 여기까지 오셨는데 그냥 가시게 할 수는 없어요.”
“그으래….”
안색이 창백해진 사장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맛있는 타르트를 맛보게 해드리겠습니다.”
사장 부부가 주방에서 타르트를 만드는 동안, 카메라맨이 안쪽에서 그 모습을 촬영했다.
미리 빌린 인근의 사무실로 이동한 일행들은 타르트를 만드는 광경을 화면을 통해 지켜보았다.
주영모가 탄식했다.
“저놈 손 안 씻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