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20화
백진영이 리모컨을 들어 DVD를 켰다.
“오늘은 2화를 바로 볼 거야?”
“음.”
“아니면 제목 보고 끌리는 에피소드를 봐도 되지. 이걸 처음부터 끝까지 다 볼 생각이면 2화를 보고.”
진혁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몇 편 더 보긴 해야 할 것 같으니까 일단 2화부터.”
“오케이.”
2화에 등장한 가게는 간판부터 낡아 있었다. 고드릭 램지는 더럽고 글자가 떨어진 간판을 보면서 눈썹을 추켜올렸다.
『간판은 가게의 얼굴입니다. 면도하지 않은 웨이터 같은 일이군요. 이건 해결하는 게 어렵지 않아요. 면도를 하면 됩니다.』
하지만 그는 식재료 보관함의 위생 상태를 보고서는 화를 냈다.
『이 양파는 썩었어! 이미 끝나버렸다고! 지옥에 있어야 할 양파란 말이지!』
문제가 있는 식재료는 양파만이 아니었다. 지나치게 익어버린 바나나는 껍질이 까맣게 물러져 있어 파리가 날아다녔다. 위생 상태만이 문제인 것은 아니었다.
주방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손발이 맞지 않고 동선이 꼬여 계속해서 부딪혔고, 오븐은 한 번 켤 때마다 여러 차례 발로 걷어차야 작동했다.
헤드 쉐프가 자랑스럽게 내놓은 블루베리 치즈 타르트를 맛본 고드릭 램지가 차갑게 말했다.
『이 재료로 만든 이 타르트에 이 가격을 받는다는 건 돈에 대한 모독입니다.』
헤드 쉐프는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며 화를 냈다.
『당신이 유명하고 영향력 있는 쉐프면 다야! 왜 남의 타르트를 무시하는 거야. 이 맛도 모르는 무식쟁이 같으니라고!』
고드릭 램지 역시 마주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고, 헤드 쉐프는 납득할 수 없다며 가게를 뛰쳐나갔다.
매니저와 수쉐프는 고드릭이 제안하는 레시피 개선 방안을 필기했다. 가게 주인은 오븐 수리공을 부르는 데 동의했고, 도착한 오븐 수리공은 1,000달러 이상의 수리비가 든다고 말했다.
『내가 그런 돈이 어디 있다고?!』
가게 주인이 절망적인 표정으로 무릎을 꿇으며 절규했다. 그러면서 2편이 끝났다.
진혁이 팔짱을 끼고서 말했다.
“너무 많이 잘못되어 있어서 어디서부터 어떻게 지적해야 할지 모르겠다.”
“음, 위생 상태?”
“일단 저런 자리에서 뛰쳐나가는 헤드 쉐프의 인성부터 문젠데. 가게 환경도 그렇지만 사람들이 제대로 일을 안 하고 있어.”
백진영이 손을 내저었다.
“야, 야. 그걸 어떻게 일주일 만에 바꾸냐? 환경은 돈을 들이면 개선할 수 있지만, 사람은 짧은 시간 동안 고칠 수가 없잖아.”
“적절한 당근과 채찍이 있으면 인간은 72시간 안에도 바뀔 수 있어.”
진혁은 옛 경험을 떠올리며 말했다.
사흘쯤 쌀 한 톨, 물 한 방울 주지 않고 굶기다가 물 한 잔을 앞에서 보여주며 물어보면 이것저것 술술 이야기한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제대로 고문하면 정보를 토해내는 것이다.
“그래도 나는 일주일은 너무 짧다는 쪽이야. 사실 제대로 바뀌게 하려면 적어도 한 달, 최소한 일 년은 지켜봐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피드백을 받았다고 들었어. 한 가게당 2주, 그리고 한 달 후에 체크한다고 하더라.”
“잘 되면 좋을 텐데 말이지.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속담도 있긴 하지만, 뭐, 누군가 2주 만에 바뀔 수도 있으려나?”
백진영은 칼로 사과를 깎으며 말했다. 붉은색 껍질이 얇게 벗겨지며 한쪽에 둥글게 쌓인다. 끊김 없이 부드럽게 깎이는 사과를 구경하며 진혁이 말했다.
“그럴 수도.”
“하긴, 나도 널 만나서 순식간에 바뀌었으니까. 네가 있으면 다 잘 될 거야.”
진영이 해맑게 웃었다.
“진짜 뇌에 번개가 치는 맛이었다니까. 빵이 너무 맛있어서, 내 커피가 더 맛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그 프로그램에 나오는 사람들에게 네 빵을 강제로 먹이면 다들 각성해서 변신할 거야.”
“….”
백진영이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며 말했다.
“아니면 나 같은 건 제빵사도 아니라며 좌절해서 아예 일을 그만둬버릴 수도 있겠지.”
“설마.”
“그나저나 저 사람, 저렇게 미국 전역에 방송되는 TV 프로그램에서 뛰쳐나가서, 이후에 페이스트리 쉐프로 일할 수 있었는지 모르겠어. 완전히 자기 앞길을 묻어버린 거잖아.”
“다음 편에서 등장하지 않아?”
“스포일러는 안 할 거야! 직접 보자고.”
백진영은 사과를 집어 들었다. 진혁 역시 포크에 사과를 찍어 입으로 가져갔다. 아삭하게 씹히는 과육은 새콤하고 뒷맛이 달았다.
“맛있다.”
“내가 잘 깎아서 그래. 아 참, 지금 가르치는 학생들은 어때? 잘 따라와?”
“학원에서 가르치는 셋은 아직 어설퍼서 수련이 많이 필요해. 가게에서 수련받는 둘은 한 두어 달만 더 있으면 될 거야.”
“크크. 내 말대로 하길 잘했지?”
“응. 형 말대로 핵심 레시피 열 개만 제대로 학습하는 게 목표야. 목적을 확실히 해서 단기간에 특정 기술을 습득하는 걸 중점으로 하니까 실력이 빨리 늘더라고.”
“내가 가르치는 바리스타 애들도 확실히 스승님이 추천할만한 애들이야. 그런데 가끔 둘을 섞고 싶을 때가 있어.”
백진영이 지금 교육시키고 있는 두 명의 학생들에 대해서 이야기하자 진혁이 물었다.
“둘을 섞다니?”
“한 명은 재능이 넘치고 노력은 덜 하는데, 다른 애는 성실하고 재능은 부족한 편이야.”
“노력을 덜 하는 애는 필요 없지 않나.”
“상대적으로 덜 한다는 거지, 아예 안 하는 건 아니니까. 뭐라고 해야 하지, 노력을 하긴 하는데 좀 방향이 잘못된 느낌?”
“열심히 하는 바보가 더 나쁘지.”
멍청하고 무능한 부하는 일을 아예 안 하니까 그대로 죽여 버리면 되는데, 무능한 주제에 성실해서 일을 아예 꼬여 버리게 하는 놈은 죽이고 나서도 뒤처리가 짜증 난다. 옛 생각을 하면서 대답하는 진혁을 보며 백진영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 아니야. 그래, 이렇게 말하면 되겠다.”
그가 손뼉을 치며 말했다.
“딱 너 같은 녀석이야. 재능이 넘치고 성실한데 묘한 데 꽂혀 있거든.”
진혁이 키득 웃었다.
“나 같은 사람은 다시 없을걸.”
“그래, 그래. 너보다는 한참 부족하지만 말이야. 나도 너처럼 진작 다른 바리스타를 고용해서 레시피를 공유하는 건데 말이지.”
현재 2명의 제자에게 진혁의 레시피를 가르치는 일은 각각 유키코와 유일봉이 각각 맡아서 하고 있다. 진혁은 2주에 한 번 성과를 확인하고 있을 뿐이었다.
“H & J 강남 지점의 바리스타님한테 맡겨도 되잖아?”
“너 아직도 찬희 씨 이름 못 외웠냐?”
“이젠 나는 거기랑은 직접적인 관계가 없으니까.”
“은근히 선 긋는 게 확실하다니깐. 여하튼 찬희 씨도 맛있는 커피를 만들긴 하는데 나랑 취향이 조금 다른 부분이 있어. <해와 달>과 는 별개의 가게니까 개성이 달라지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해서 추천했지만 말이야.”
백진영이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직영점이라면 역시 일정한 맛을 유지하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해서. 지점마다 개성적이고 특색있는 레시피가 한두 개씩 있는 건 괜찮지만, 아메리카노와 플랫화이트 정도는 확실히 내 맛을 내줘야 한다고.”
“네에, 네에. 엄격하십니다, 백 사장님.”
“임 사장은 왜 또 그러나!”
농담을 섞어 티격태격하면서도 즐겁다.
‘이것이 희(嬉)인가?’
진혁은 자신의 감정을 면밀히 관조(觀照)했다.
퇴근 후에는 당연히 잔업과 운기조식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왔다. 그 외에 했던 행동이라고는 기껏해야 대회 참가용 연습이나, 간간이 있었던 회식이 전부다.
촬영 전 대비를 위해서 지인의 집에 방문했다.
이런 식으로 대화를 나누며 음식을 나누어 먹고 영상을 보는 것, 즉 자발적으로 누군가를 찾아가 관계를 향유하는 것은 거의 처음이라고 할 수 있다.
부모님이 계신 집에서 진희와 함께 이것저것 보면서 분석했던 적도 있지만, 그것과는 미묘하게 다르다.
“이게 친구의 집에 와서 논다는 건가?”
진혁이 생각하던 것을 입 밖에 내자, 백진영이 뒤를 돌아보았다.
“야, 이건 노는 게 아니지! 지금 촬영을 대비해서 사건별로 분석하면서 옛날 DVD를 보고 있잖아. 노는 건 게임기로 같이 격투 게임을 한다거나, 술을 마시는 거지.”
진영은 나름대로 노는 것에 대한 확고한 기준이 있었다.
“그래?”
“엉. 이렇게 온 김에 아이언 파이터 6 게임 한 판만 같이 해 보자. 내가 이번에 최신 플레이 박스 3을 샀단 말이야. 슬림 버전이라고, 완전 신품을 중고로 싸게 업어왔지. 맨날 AI 상대로 전투하는 것도 질린다고.”
“신품인데 어떻게 중고야?”
“박스 미개봉인 채 사용하지 않고 파는 사람들이 있거든.”
“희한한 일을 하는군.”
백진영이 졸라대는 통에 진혁은 한 판만 같이 해 보기로 했다.
“앗싸!”
신난 진영이 거실에 있는 TV에 게임기를 연결하고 켰다. 선명한 그래픽 화면이 떠오르며 경쾌한 비트의 음악이 활기차게 흘러나왔다. 짧은 로딩이 끝나고 캐릭터 선택 화면으로 넘어왔다.
진혁은 백진영이 준 조작용 게임 패드를 손에 쥐고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어떻게 하더라?’
옛날에는 그 역시 친구들과 몰려다니며 PC방이니 오락실이니 여기저기 갔던 것 같다. 하지만 오락실의 조이스틱과 달리, 올록볼록한 십자 모양 버튼부터 갖가지 종류의 버튼들이 올라가 있는 게임패드는 작고 말랑하며 부드러웠다.
그는 미약한 힘으로 조심스럽게 버튼을 눌러보았다.
-말랑
‘이 정도면 되나?’
“자, 이걸 누르면 게임이 시작해. 캐릭터는 뭐로 해볼래?”
“이것.”
그는 눈을 가늘게 찢으며 웃고 있는 남자 캐릭터를 골랐다. 입가에 흉터가 있는 것이 옛 부하들을 떠올리게 해서 정겨운 얼굴이었다.
“세르게이 이바노비치? 잘 골랐네. 초보자가 하기에 좋아.”
그렇게 말하는 백진영은 은발 머리카락의 격투계 캐릭터를 골랐다.
『라운드- 원!!!』
임진혁은 눈에 보이지 않는 속도로 빠르게 이것저것 버튼을 눌러 보았으나, 게임 패드의 반응 속도는 진혁이 누르는 속도보다 느렸다.
『3 히트 콤보! 데미지 39!』
세르게이는 허공에 뛰어올라 두들겨 맞았다가, 다시 떠오르며 맞았다가, 빙글빙글 돌면서 맞다가, 그대로 누워버렸다.
『케이-오!!』
“….”
순식간에 게임이 끝나버렸다.
백진영이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말했다.
“나는 리가 좋아. 계속 이 캐릭터로 했거든.”
그것은 진혁이 백수십 년 만에 처음 겪는 패배였다.
알 수 없는 감정이 근질근질하게 온몸을 휘감았다.
“…한 번 더.”
“재미있어? 한 번 더 할래?”
백진영이 신나서 말했다. 그는 집에 친구를 데려오는 것이 처음이었고, 친구와 함께 격투게임을 하는 것도 처음이었다.
『라운드- 투!!』
진혁은 백진영이 하는 동작을 모방해 보았으나, 캐릭터마다 기술이 다르기에 결과는 좋지 않았다.
세르게이는 줄창 맞는 통에 아무 행동도 하지 못했고, 또 맞았고, 다시 맞았다.
『케이-오!!』
진혁은 자신의 감정이 기운처럼 뿜어져 나오지 않도록 자제했다.
전자오락에서 졌다면 전자오락으로 이겨줘야 한다.
주먹질로 백진영을 이긴다고 해도 그건 진정한 승리가 아니다.
백진영은 지극히 평범한 일반인이고 그의 친우다.
그는 계속해서 세 가지를 되새겼다.
5판 3선승제였기 때문에 한 판이 더 남았다.
『라운드- 쓰리!!』
검은색 양복 정장을 갖춰 입은 은발의 남자는 몸체를 낮추며 다가가더니 먼저 주먹부터 날렸다. 빠르게 두 번의 잽을 날린 후에는 오른발 킥으로 상대를 허공에 띄운다.
『10 히트 콤보! 96 데미지!』
그는 무려 96 데미지가 나오는 확정 콤보를 만드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케이-오!!』
5분 사이에 3번이나 패배해버렸다.
임진혁은 저도 모르게 게임 패드를 움켜쥐었다.
일렁이는 감정이 분노인지 어떤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뽀각.